2024년 03월 14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0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 하였습니다.

11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4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석

11절. 하박국 2:4은 그 자체가 창세기 15:6을 분명하게 암시하는 구절이다. 두 구절 모두 의로움과 믿음/신실함에 대한 핵심 히브리어 어근을 사용하고 있다. 선지자 하박국은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자 했던 것을 포함하여 그의 ‘신실한’ 인생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았을 수도 있으나, 그 생애는 초기의 믿음의 행위에서 비롯된 역사로 파악해야만 한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이 깨달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율법의 준행이 아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 그분을 믿고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것에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율법 준수라면 자신만큼 탁월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율법 준수의 엘리트였던 자신도 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오직 예수님을 하나님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수용할 때, 비로소 성령님을 받게 된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 속에 거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이끄신다. 

그러니 율법 규정의 준수를 위해 율법을 외우고 그 규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자유와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와 도움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자유와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 순서를 잊어버리고, 반대로 살기 시작하면, 길을 잃는다. 

할례를 받고, 안식일 규정을 지키고, 정기적 제사와 절기를 지킨다고 해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으며, 속으로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이 와도 못 알아볼 수 있다. 

할례를 받는 이유, 안식일과 절기와 제사를 지키는 이유, 그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못 알아보는 경우가 생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죽였던 유대 율법학자, 바리새인, 대제사장, 사두개인들이 바로 그 경우였다. 

그래서 이제 완전히 새로운 복음이 선포되었다. 

아니 원래부터 있었던 구원, 구출, 자유의 복음의 본질이 밝혀졌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구원, 구출,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 외에는 길이 없다. 

인간의 사상이나 제도나 정책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이것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시대의 조류에 따라 나왔던 숱한 신학적 진술 그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관점을 넓혀 준 것은 사실이지만,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구출시켜 삼위 하나님과 연합하여 지속적으로 의로움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도록 이끄는 데는 다들 한계가 있다. 

오직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만이 구출되어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이것을 되돌리려고 하니, 바울이 펄쩍 놀라는 것이다. 

꾸짖는 것이다.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로 회귀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들까지 노예화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는 길에 거대한 허들을 놓는 행위에는 기겁할 수 밖에 없었다. 

 

믿음의 길을 오늘도 걷는다. 

좌나 우나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아 첫걸음을 떼 듯, 앞으로 나아간다. 

바르게 걸어야 빠르게 뛸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처음부터 바르게 걸어나가고 싶다. 

성령님이 이끄시는 그 길을 경험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주님,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믿음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치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오직 예수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오직 예수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는 일을 잘 돕게 하소서. 

다른 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생명과 자유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영원한 진리를 붙들게 하소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법, 설득하는 방법은 상황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결국 꼭 건너야 하는 다리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따르도록 인도하소서. 

많은 지식이 당신과의 인격적 만남을 대체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The righteous shall live by faith.”

 

How long did it take to reach this realization! Even for the Gentiles, the decisive moment of receiving the Holy Spirit was not through adherence to the law. It lies in trusting Jesus, making the decision to believe in Him and follow Him. Paul came to realize this truth so clearly. How many outstanding individuals could there be if righteousness came through obedience to the law? Even he, who was an elite in law observance, could not attain salvation. Only when we accept Jesus as God and Lord, and embrace His teachings, do we receive the Holy Spirit. The Holy Spirit is the Spirit of Jesus. The Holy Spirit reminds us of Jesus' life, ministry, and teachings, dwells within us, and leads us to be more like Jesus. Therefore, it is not through memorizing and striving to keep the regulations of the law in order to attain freedom and salvation, but through following Jesus and becoming more like Him with the guidance and help of the Holy Spirit. If we forget this order and live in reverse, we lose our way.

 

Even if one receives circumcision, observes the Sabbath regulations, and keeps regular sacrifices and festivals, it is possible to lack trust in God and worship other gods inwardly. One might not recognize God even when He comes. The reason for receiving circumcision, observing the Sabbath and festivals, the essence of it all, is to avoid not recognizing God. Those who did not acknowledge Jesus Christ, who crucified Him, were the Jewish legalists, Pharisees, chief priests, and Sadducees. Therefore, a completely new gospel has now been proclaimed. Rather, the essence of the gospel of salvation, rescue, and freedom that has always existed has been revealed. Trusting and following Jesus Christ, who is God, is the way to salvation, rescue, and freedom. There is no other way. There is no way through human ideologies, systems, or policies. Democracy, liberalism, socialism... None of these lead to salvation. Numerous theological statements that emerged with the trends of the times are not the way to salvation either. While they broaden perspectives on God, humanity, and the world, they all have their limitations in leading us to be rescued from sin, death, and the power of Satan and in enabling us to enjoy the freedom to continually choose righteousness, goodness, and beauty in union with the triune God. Only trusting Jesus and following Him is the way to be rescued and set free. Trying to reverse this, Paul was astonished. He rebuked it. He could not tolerate reverting to slavery from freedom. He could not bear to enslave not only himself but also his neighbors. Above all, he was terrified by the act of placing huge hurdles on the path to salvation for the Gentiles.

 

I walk the path of faith today. Without swaying to the left or the right, I strive to maintain balance and move forward as if taking the first step. I must walk correctly to run quickly. I want to walk correctly from the beginning on the path of faith in Jesus Christ. I want to experience the path guided by the Holy Spirit.

 

2024년 03월 13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을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말로 허사였습니까?

5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6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7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8 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주석

6-9절. 이방계 그리스도인, 아마 이스라엘의 선조나 이스라엘의 성경에 별로 친숙하지 않았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 인물에 호소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마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미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특히 할례를 바라신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인 아브라함의 순종과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가르쳤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매번 이 본문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바울은 상당히 저돌적이고 공격적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대상으로 “어리석다” 표현하고 있다. 

이는 외교적 표현이 아니다. 

편지에 쓰일 만한 표현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였다.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이후의 아라비아와 길리기아 다소에서 생활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나님의 선물이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기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다. 

많은 시간을 사람들과 함께 보냈고,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죽음도 불사했다. 

그런 그가 지금 갈라디아 지역의 성도들에게 무례한 글을 보내고 있다. 

그만큼 절박한 일이었다. 

그만큼 긴박한 일이었다. 

복음의 진리가 훼손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이유, 그곳에서 죽으신 이유, 부활하신 이유 이 모든 것이 복음 안에 담겨 있다. 

그런데 그 복음의 진리가 훼손되고 있으니, 아무리 은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울도 점잖게 말할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유대인들 모두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영, 성령님을 받게 된 것 또한 할례를 행하거나 안식일을 지켜서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은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분이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삶의 중심으로 삼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걸 되돌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바울 당시 사람들 중에는 아브라함을 예를 들면서 할례의 중요성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조차도 하나님께 인정받게 된 처음 이유는 할례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행보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조상의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걸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분명해진다.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분과 신뢰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분은 항상 성실하신 분이시며, 약속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분과의 신뢰의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이제 인간 편에서 그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나간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 시작을 소중하게 여기신다. 

마라톤처럼 힘들어서 중간에 잠시 멈출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길을 걷거나 달린다. 

그게 신뢰다. 

골인 지점이 있으며, 영광의 박수소리가 있다. 

하나님은 계속 옆에서 응원해주신다. 

그분이 만들어 놓으신 골인 지점을 향해 계속 달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에 대한 신뢰의 길이다. 

신뢰의 길, 믿음의 길이 정답이다. 

할례나 안식일 규정은 부차적이다. 

도리어 신뢰의 길, 믿음의 길을 가로 막는 경우가 생긴다. 

따라서 그 정답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옆으로 제켜나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주께서 주신 믿음의 길, 신뢰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과거로 퇴행하는 사람이 되기 않길 바랍니다. 

자유를 주시는 분과 더욱 연결되길 소망합니다.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3월 08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6 그 유명하다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아무런 제안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든지,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유명한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런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다.

7 도리어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8 그들은, 베드로에게는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신 분이, 나에게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9 그래서 기둥으로 인정받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서, 친교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사람에게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바란 것은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을 다하여 해 오던 일이었습니다.

 

주석

6-9절. 바울은 예루살렘의 합법적 지도자들을 “거짓 형제들”과 구별하지만, 이 만남에 대한 그의 보고 방식은 그가 두 집단 모두와 독자적임을 강조한다. 그는 “거짓 형제들”에게 전혀 복종하지 않았지만, 그가 인정한 지도자들도 그의 복음 이해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기껏해야 바울은 자신이 전하던 그대로 복음을 그들 앞에 제시했고, 자신의 사역을 승인받았다(IVP 성경비평주석). 

 

6절. 유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세 명의 사도가 바울의 메시지나 사역에 어떠한 변화를 강요한 것은 없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초대 교회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교회를 세우고 지키고 있었다.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였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바로 그들이었다. 

베드로는 게바라고도 불렸다. 

독특한 것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초대교회의 유명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사도 바울의 회심과 사역에 대해 보고를 받았으며,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예언적 축복의 말씀에 따라 그들은 우선적으로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참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을 전했다. 

그리고 여러 사도들이 사마리아를 벗어나 이방 땅으로 선교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록 바울은 예수님의 12 제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회심과 신앙 고백이 분명했으며, 그의 사역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했다. 

그를 자제시킬 명분이 없었다. 

베드로에게도 욥바로 내려가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던 예수님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바울에게 어떤 다른 제안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 잘 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잘 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었고,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는 기적이 나타났고,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 선포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찬양했을 것이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어야 함을 인정했고, 그 선교의 길에 바울의 역할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리적인 어떤 제안도 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어떤 추가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 인정하고 교제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로써 바울의 권위는 충분히 확보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다 인정했다.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신도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큰 장애가 되었다. 

바울의 반대자들의 주장은 더는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자유를 위한 복음의 강력한 선포만이 남았다. 

갈라디아 교회들은 흔들릴 필요가 없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안식일 규정을 꼭 지키지 않아도 충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주님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다. 

그걸 자신들의 기준에 의해 판단하고 무할례자들을 정죄하는 유대인들은 거짓말에 속아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바울은 싸울 수 밖에 없었다. 

복음의 핵심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예수님, 하나님 나라, 자유, 회복, 용서 등등 

복음이 말하는 바 핵심적인 개념들은 포기할 수 없다.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논쟁도 불사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이 바울에게 한 가지 부탁한 것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기다. 

교회는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굶주리는 사람들,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도왔다. 

과부와 고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바울도 스스로 고백하는 바, 자신의 사역에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portion을 항상 만들어 왔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지중해 전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바울 선교의 총체성이 여기에서 보인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복음을 살아내는 것의 핵심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가능한 한 돕는 일이다. 

 

 

[오늘의 기도]

복음의 핵심을 지키기 위한 바울의 열심을 봅니다. 

당신이 가르쳐주시고 또한 직접 주신 선물들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바울의 모습에 영감을 받습니다. 

저에게 주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잘 간직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끝까지 붙들어 주님께 칭찬듣는 종이 되게 하소서. 

복음을 힘있게 선포하고, 그 선포한 복음을 살아 낼 수 있는 힘도 주옵소서. 

정치의 계절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급변하는 주변 상황에서 심지를 굳게 잡고, 주님의 복음을 붙드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03월 07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 그 다음에 십사 년이 지나서, 나는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2 내가 거기에 올라간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설명하고,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달리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달린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3 나와 함께 있는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4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 때문에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여든 자들입니다.

5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주석

1-3절. 키프로스 주민 바나바는 바울의 가르침의 진정성을 예루살렘에게 증언하는 데 관여했고, 나중에 안디옥 교회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서 디도의 등장은 바울의 가르침의 수용 가능성을 입증하는 역할을 한다. 디도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인데 예루살렘 당파는 그의 할례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복음은 자유를 준다. 

복음은 온갖 얽매는 것으로부터 구출시켜 준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의 핵심은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영적이며 또한 육적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거짓으로 속여서 자신의 영향력 아래 옭아매려고 한다. 

바울은 이 깨달음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적용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이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하나로 정해졌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여 따르는 길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가르치며 몸소 살아내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기본 구조를 완성하셨다. 

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신뢰하며 따르는 자에는 자유가 주어진다. 

율법의 형식적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상의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율법의 형식적 요구가 무엇인가? 

바로 할례와 제사 규정, 안식일 규정, 절기 규정 등이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회 문화적으로 구체화했던 많은 형식들이 있었는데, 이제 대부분은 예수님의 한 인격 안으로 녹아 들었다. 

더는 율법의 형식에 얽어매일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신뢰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면 된다. 

그분이 전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라고 하면 그 일을 하면 된다. 

그 일을 하면서 어찌 절기를 다 지키겠는가? 

예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 

할례는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징표였다. 

때로 하나님은 이것을 행하지 않았던 자들에게 분노를 드러내시곤 하셨다. 

하지만 이제 할례의 형식 안에 들어 있는 그 본질, 언약 백성의 징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셰례를 받고, 그분의 이름으로 성만찬을 하는 것으로 대체 되었다. 

본질적으로는 예수님과의 연합이 진정한 언약 백성의 징표다. 

더욱 실질적으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진정한 언약 백성의 증거다. 

그러니 그분과 연합되어 있다면, 그 외의 형식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이게 된다. 

여기서 자유가 불붙는다. 

사람들을 옭아매던 모든 형식과 규정으로부터 한 발 떨어지게 한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우상의 요구는 더욱 중독적이며 파괴적이다. 

우상은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헤어나오지 못하게 한다.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고,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게 하며, 악순환의 고리를 더욱 강화시킨다. 

조금이라도 우상의 요구를 어겼을 때, 그 어김이 고통스런 결과의 원인이라고 믿게 한다.

우상의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책이다. 

자신이 잘 못했으니, 부정적인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믿는다. 

부정적인 결과를 막기 위해서는 우상의 요구를 철저히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자책과 두려움에 쌓여서 우상에게 중독된다. 

복음은 이 우상의 요구를 파괴한다. 

사탄이 주는 감옥에서 탈출시킨다. 

 

초기 교회에는 성도의 탈을 쓴 사탄의 앞잡이들이 있었다. 

사탄은 계속 율법의 형식적 요구에 집중할 것을 사람들에게 주입했다. 

자책과 두려움으로 작동하는 신앙원리가 마치 진리인 양 설득했다. 

과거로의 회귀를 종용했다. 

그것이 마치 참 신앙인 것처럼 포장했다. 

바울은 참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출애굽시켰고, 출사탄시켰다. 

그런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계속 발생했다. 

그들과 논쟁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을 막아설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존재를 사랑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반박해야 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주요한 동기 중 하나다.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 외에 할례를 받거나 안식일 규정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것은 복음의 원리에 맞지 않다. 

예수님이면 충분하다. 

그분과의 연합이면 흡족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에게 요구되는 단 한 가지를 들라하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기타 다른 것은 부차적이다.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어서 그분을 신뢰하며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성만찬도 그분과의 연합을 상징하기에 시행한다. 

모든 기독교적 활동은 그분과의 연합을 상기하고 인지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일상은 그분과의 연합이 일으키는 실천이다. 

이것만큼 자유를 주는 것이 없다.

 

나는 오늘도 그분과 연합하여 살고 있는가?

아니 질문을 바꾸자. 

나는 오늘도 그분과 연합했음을 인지하며 살고 있는가? 

 

[오늘의 기도]

자유의 복음을 알려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자책과 두려움에 휩싸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꺾으시고, 

새로운 원리로 삶을 살도록 이끄셔서 감사합니다. 

당신과의 연합, 당신에 대한 신뢰, 당신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당신과의 연합이 참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끝까지 누리며 살게 하소서. 

자책하기 쉽고, 그 자책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저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저에게 주신 자유를 끝까지 지켜나가게 하소서. 

주님과의 연합 속에서 누리는 참 된 자유를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그 자유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과 연합해 있음을 더욱 확실히 느끼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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