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 06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8 삼 년 뒤에 나는 게바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나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는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다만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그가 전에 없애버리려고 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 하는 소문을 들을 따름이었습니다.

24 그래서 그들은 나를 두고 하나님께 줄곧 영광을 돌렸습니다.

 

주석

18-19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가진 회담을 전하는 내용에서도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결국 갔다고 인정하지만, 이런 양보마저 게바와 야고보 두 사도만 거명함으로써 그 의미가 축소된다(IVP 성경비평주석).

 

18-19절. 바울은 회심 후 어떤 사람들과도 의논하지 않고 아라비아에 가서 3년을 보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밑에서 어떤 기간 동안 가르침을 받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갈라디아서는 참 흥미로운 본문이다. 

바울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반대자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반대자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들, 그러니까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람들보다는 낮은 수준과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이 펼치는 이방인 선교에 대해 무가치하거나 혹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또한 바울이 현재 힘주어 주장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적 진술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는, 바울 개인의 사상이나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자신에게 전달하신 것이라 논박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분명하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아라비아(나바테아 왕국)에서 3년의 시간을 보냈다. 

어떤 학자들은 이곳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신학적 준비를 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선교 활동을 했다고도 한다. 

분리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 3년의 시간은 바울에게 귀중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신학을 재정립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3년간 예수님의 제자들을 따로 보지 않고 스스로 예수님 중심의 신학을 정립했다. 

그리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를 만났다. 

얼마나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바울을 본다. 

보름 즉 15일을 게바(베드로)와 지낸다. 

사실 사도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박해했던 사울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속임수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핵심 제자들을 깡그리 잡기 위한 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아마도 그 기간이 3년이나 걸렸을 것이다. 

회심했다고 주장하는 사울을 금방 만나지 않았던 당시 사도들의 결정은 정당했다. 

검증이 필요했다. 

3년이 지나서도,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 둘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외에는 만나지 못했다. 

다들 선교 활동에 바빴기도 했겠지만, 모든 사도들이 사울을 만나는 것은 위험 부담이 그만큼 컸던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의 자기 변호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바울의 신학과 선교적 활동은 사도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만난 예수님이 주신 소명이었다. 

그동안 바울이 펼쳤던 이방인의 선교는 사도들이 명령했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특권이나 책무였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물론 아무리 자신의 신학과 선교 활동의 독특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다른 사도들의 권위를 침범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그 사도들에 의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사도들에 의해 전해지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듣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기존 신학을 재점검할 수 있었다. 

바울은 물론 예수님께 직접 받은 계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백지 상태에서 받은 것은 아니란 말이다. 

 

예루살렘에서 나와 바울은 자신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향했다. 

그리고 유대 지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울이 바울로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음에 크게 기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들은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시고, 생각을 바꾸시고, 적대자가 옹호자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보았던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바울은 배신자요 변심자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바울은 잃어버린 양이었고, 새로 얻은 둘째 아들이었다. 

처음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는 놀라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바울을 통해 유대, 사마리아 지역을 넘어 지중해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그리스도 복음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찾아온 복음의 역사를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훌륭한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잃어버리기 전에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 

신앙의 자서전을 쓰자. 

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자. 

나를 변화시키시고, 이끄셨던 그분에 대해 더 많이 기록하고, 알리자. 

큰 변화가 없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 삶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정리하면 되는 일이다. 

언제가 시간을 내어 그 이야기를 적어 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의 기도]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켜 주신 예수님, 

가난한 집의 소심한 저를 하나님 나라의 일꾼 삼아 주신 예수님, 

주님의 일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것 투성이였지만, 그래도 주님께서는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계속 기억하게 하소서. 

그 선물을 끝까지 기억하도록 계속 기록하고, 공유하고, 전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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