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 07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 그 다음에 십사 년이 지나서, 나는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2 내가 거기에 올라간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설명하고,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달리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달린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3 나와 함께 있는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4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 때문에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여든 자들입니다.

5 우리는 그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주석

1-3절. 키프로스 주민 바나바는 바울의 가르침의 진정성을 예루살렘에게 증언하는 데 관여했고, 나중에 안디옥 교회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서 디도의 등장은 바울의 가르침의 수용 가능성을 입증하는 역할을 한다. 디도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인데 예루살렘 당파는 그의 할례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복음은 자유를 준다. 

복음은 온갖 얽매는 것으로부터 구출시켜 준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의 핵심은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영적이며 또한 육적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거짓으로 속여서 자신의 영향력 아래 옭아매려고 한다. 

바울은 이 깨달음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적용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이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하나로 정해졌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여 따르는 길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가르치며 몸소 살아내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기본 구조를 완성하셨다. 

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신뢰하며 따르는 자에는 자유가 주어진다. 

율법의 형식적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상의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율법의 형식적 요구가 무엇인가? 

바로 할례와 제사 규정, 안식일 규정, 절기 규정 등이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회 문화적으로 구체화했던 많은 형식들이 있었는데, 이제 대부분은 예수님의 한 인격 안으로 녹아 들었다. 

더는 율법의 형식에 얽어매일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신뢰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면 된다. 

그분이 전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라고 하면 그 일을 하면 된다. 

그 일을 하면서 어찌 절기를 다 지키겠는가? 

예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 

할례는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징표였다. 

때로 하나님은 이것을 행하지 않았던 자들에게 분노를 드러내시곤 하셨다. 

하지만 이제 할례의 형식 안에 들어 있는 그 본질, 언약 백성의 징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셰례를 받고, 그분의 이름으로 성만찬을 하는 것으로 대체 되었다. 

본질적으로는 예수님과의 연합이 진정한 언약 백성의 징표다. 

더욱 실질적으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진정한 언약 백성의 증거다. 

그러니 그분과 연합되어 있다면, 그 외의 형식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이게 된다. 

여기서 자유가 불붙는다. 

사람들을 옭아매던 모든 형식과 규정으로부터 한 발 떨어지게 한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우상의 요구는 더욱 중독적이며 파괴적이다. 

우상은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헤어나오지 못하게 한다.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고,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게 하며, 악순환의 고리를 더욱 강화시킨다. 

조금이라도 우상의 요구를 어겼을 때, 그 어김이 고통스런 결과의 원인이라고 믿게 한다.

우상의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책이다. 

자신이 잘 못했으니, 부정적인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믿는다. 

부정적인 결과를 막기 위해서는 우상의 요구를 철저히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자책과 두려움에 쌓여서 우상에게 중독된다. 

복음은 이 우상의 요구를 파괴한다. 

사탄이 주는 감옥에서 탈출시킨다. 

 

초기 교회에는 성도의 탈을 쓴 사탄의 앞잡이들이 있었다. 

사탄은 계속 율법의 형식적 요구에 집중할 것을 사람들에게 주입했다. 

자책과 두려움으로 작동하는 신앙원리가 마치 진리인 양 설득했다. 

과거로의 회귀를 종용했다. 

그것이 마치 참 신앙인 것처럼 포장했다. 

바울은 참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출애굽시켰고, 출사탄시켰다. 

그런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계속 발생했다. 

그들과 논쟁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을 막아설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존재를 사랑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반박해야 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주요한 동기 중 하나다.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 외에 할례를 받거나 안식일 규정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것은 복음의 원리에 맞지 않다. 

예수님이면 충분하다. 

그분과의 연합이면 흡족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에게 요구되는 단 한 가지를 들라하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기타 다른 것은 부차적이다.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어서 그분을 신뢰하며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성만찬도 그분과의 연합을 상징하기에 시행한다. 

모든 기독교적 활동은 그분과의 연합을 상기하고 인지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일상은 그분과의 연합이 일으키는 실천이다. 

이것만큼 자유를 주는 것이 없다.

 

나는 오늘도 그분과 연합하여 살고 있는가?

아니 질문을 바꾸자. 

나는 오늘도 그분과 연합했음을 인지하며 살고 있는가? 

 

[오늘의 기도]

자유의 복음을 알려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자책과 두려움에 휩싸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꺾으시고, 

새로운 원리로 삶을 살도록 이끄셔서 감사합니다. 

당신과의 연합, 당신에 대한 신뢰, 당신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당신과의 연합이 참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끝까지 누리며 살게 하소서. 

자책하기 쉽고, 그 자책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저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저에게 주신 자유를 끝까지 지켜나가게 하소서. 

주님과의 연합 속에서 누리는 참 된 자유를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그 자유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과 연합해 있음을 더욱 확실히 느끼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