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 13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을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말로 허사였습니까?

5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6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7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8 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주석

6-9절. 이방계 그리스도인, 아마 이스라엘의 선조나 이스라엘의 성경에 별로 친숙하지 않았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 인물에 호소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마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미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특히 할례를 바라신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인 아브라함의 순종과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가르쳤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매번 이 본문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바울은 상당히 저돌적이고 공격적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대상으로 “어리석다” 표현하고 있다. 

이는 외교적 표현이 아니다. 

편지에 쓰일 만한 표현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였다.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이후의 아라비아와 길리기아 다소에서 생활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나님의 선물이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기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다. 

많은 시간을 사람들과 함께 보냈고,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죽음도 불사했다. 

그런 그가 지금 갈라디아 지역의 성도들에게 무례한 글을 보내고 있다. 

그만큼 절박한 일이었다. 

그만큼 긴박한 일이었다. 

복음의 진리가 훼손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이유, 그곳에서 죽으신 이유, 부활하신 이유 이 모든 것이 복음 안에 담겨 있다. 

그런데 그 복음의 진리가 훼손되고 있으니, 아무리 은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울도 점잖게 말할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유대인들 모두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영, 성령님을 받게 된 것 또한 할례를 행하거나 안식일을 지켜서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은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분이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삶의 중심으로 삼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걸 되돌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바울 당시 사람들 중에는 아브라함을 예를 들면서 할례의 중요성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조차도 하나님께 인정받게 된 처음 이유는 할례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행보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조상의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걸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분명해진다.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분과 신뢰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분은 항상 성실하신 분이시며, 약속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분과의 신뢰의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이제 인간 편에서 그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나간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 시작을 소중하게 여기신다. 

마라톤처럼 힘들어서 중간에 잠시 멈출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길을 걷거나 달린다. 

그게 신뢰다. 

골인 지점이 있으며, 영광의 박수소리가 있다. 

하나님은 계속 옆에서 응원해주신다. 

그분이 만들어 놓으신 골인 지점을 향해 계속 달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에 대한 신뢰의 길이다. 

신뢰의 길, 믿음의 길이 정답이다. 

할례나 안식일 규정은 부차적이다. 

도리어 신뢰의 길, 믿음의 길을 가로 막는 경우가 생긴다. 

따라서 그 정답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옆으로 제켜나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주께서 주신 믿음의 길, 신뢰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과거로 퇴행하는 사람이 되기 않길 바랍니다. 

자유를 주시는 분과 더욱 연결되길 소망합니다.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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