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 08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36그 뒤에 왕은 사람을 보내어서, 시므이를 불러다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예루살렘에다가 당신이 살 집을 짓고, 거기에서만 살도록 하시오. 다른 어느 곳으로든지, 한 발짝도 나가서는 안 되오.

37바깥으로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당신은 반드시 죽을 것이오. 당신이 죽는 것은 바로 당신 죄 때문임을 명심하시오."

38그러자 시므이는 "임금님께서 하신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임금님의 종은 그대로 이행할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하고,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거기에서 지냈다.

39그로부터 거의 세 해가 지났을 무렵에, 시므이의 종들 가운데서 두 사람이 가드 왕 마아가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도망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시므이에게, 그 종들이 가드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40그래서 시므이는 나귀에 안장을 얹고, 자기의 종들을 찾아 오려고 가드에 있는 아기스에게로 갔다. 시므이가 직접 내려가, 가드에서 자기 종들을 데리고 왔다.

41시므이가 이와 같이, 예루살렘에서 가드로 내려갔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솔로몬에게 전해지니,

42왕은 사람을 보내어서, 시므이를 불러다 놓고 문책하였다. "내가 당신에게, 주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고, 당신에게 경고하기를, 당신이 바깥으로 나가서 어느 곳이든지 가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당신도 나에게 좋다고 하였고, 내 말에 순종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43그런데 어찌하여, 주님께 맹세한 것과, 내가 당신에게 명령한 것을, 당신은 지키지 않았소?"

44왕은 계속하여 시므이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당신이 나의 아버지 다윗 왕에게 저지른 그 모든 일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이 저지른 일을 당신에게 갚으실 것이오.

45그러나 나 솔로몬 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보좌는 주님 앞에서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오."

46왕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령하니, 그가 바깥으로 나가서, 시므이를 쳐죽였다. 솔로몬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예루살렘에서만 거한다면 생명을 살려주는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내립니다(36-38절). 그러나 3년 후 시므이는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예루살렘 밖을 나갑니다(3940절). 그가 약속을 어기자 솔로몬은 다윗 왕에게 했던 시므이의 행동을 언급하면서 처벌합니다(41-46절).

 

솔로몬은 아비아달과 요압에 이어서 시므이를 처벌함으로써 왕권을 견고하게 세워나갑니다. 솔로몬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서 견고하게 세우려 합니다. 솔로몬이 왕권을 확립하며, 나라를 세워가는 과정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다윗 왕의 유언을 뒤를 이은 솔로몬이 자신의 지혜대로 이행하고 있다. 

제사장 아비아달은 귀향을 보내고, 요압은 제단 뿔 앞에서 살해한다. 

시므이는 압살롬의 반란 때, 다윗을 저주하며 욕했던 인물이다. 

비록 그가 다윗의 귀환 때, 용서를 구했을지는 몰라도 그의 저주에 대한 기억은 다윗 말년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유언에까지 남겼던 것이다.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님으로 갈 때에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으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왕상 2:8-9) 

 

다윗의 마지막 유언을 받들었던 솔로몬은 시므이와 약속을 한다. 

‘예루살렘에서 떠나지 말라. 만약에 떠나게 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엄중한 왕의 명령이 내려진다. 

 

삼 년 동안 시므이는 왕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게 된다. 

그러나 그의 종들이 아기스로 도망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 사달이 난다. 

도망친 종들을 데려온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시므이는 그 일을 해 내고 만다. 

사실 시므이는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도망친 노예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무력과 재력을 겸비해야 했다. 

시므이의 집안은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력한 집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솔로몬은 시므이의 약점을 잡고 그를 죽이게 된다. 

원래 가야할 길이었다. 정해진 일이었다. 솔로몬은 시므이를 그냥 편안하게 죽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솔로몬은 이 모든 일이 다윗 왕조의 영원한 통치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45그러나 나 솔로몬 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보좌는 주님 앞에서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오."

 

솔로몬 자신의 왕권 강화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고 생각했다. 

그 일을 위해 반대파들은 완전히 숙청하게 된 것이다. 

숙청의 정당성은 하나님 언약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도출했다. 

그렇게 솔로몬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성경의 저자는 미묘한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솔로몬의 왕권 강화를 인정하는 눈치다. 

왕권 강화의 노력을 칭찬하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깊이 살펴보면, 과연 솔로몬의 지혜가 진정한 지혜인지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다윗은 솔로몬을 지혜의 사람으로 보고 있다. 

자기 지혜로 사건을 해결할 사람으로 보고 있다. 

어느새 선지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나단 선지자는 권력 장악과 점진적인 숙청 과정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아도니야를 죽이고, 아비아달을 귀향 보내고, 요압을 죽이고, 시므이를 죽이는 일련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개입은 어디에 있는가? 

솔로몬이 왕의 유언을 실행하는 것은 알겠는데, 과연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다윗의 보좌는 주님 앞에서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라는 솔로몬의 확신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다. 

그 언약은 미래에 달성될 것이다. 영원토록 견고해질 다윗의 왕권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된다. 

인간 왕으로서는 저 약속을 달성할 수 없다. 

솔로몬이 아무리 왕권을 강화해도, 그의 인간적인 노력은 그 스스로를 교만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가 다윗 왕궁의 미래를 걱정해서 최대한 강력한 왕권과 부국 양병을 실천한다고 해도, 결국 후대의 왕들에 의해 나라가 두 조각이 나고,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만다. 

스스로 지혜있다 생각한 사람의 결말이다. 

결코 교만한 자의 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수 없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므로, 겸손하게 그분의 뜻과 명령에 순종할 뿐이다.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현실적으로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에 십분 동의한다. 

다윗 왕이 겪었던 수많은 수모를 직간접적으로 함께 겪었던 장본인(아들)으로서 다윗 왕보다 더욱 결단력 있고 지혜롭게 통치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시는 왕이 수모를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랬을 것이다. 

제대로된 왕국을 건설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부 성공했다. 

그러나 한 때 뿐이었다. 

곧 지나간다. 

이것이 인간의 조직이요. 인간의 성과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권력은 십 년을 못가고 활짝 핀 꽃도 열흘을 가지 못한다. 

 

지금의 모든 노력이 영원에 이르리라는 것은 헛된 망상이다. 

그저 부르신 그 분의 뜻에 따라 발 맞춰 가면 되는 일이다. 

지혜있다하는 자들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 노력을 ‘의미없다, 불필요하다’ 등으로 무시하려는 말이 아니다. 

발버둥의 끝을 보장받는다 생각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한다. 

아니 성과가 있어 업적이 쌓인다고 한들, 그것이 백년 천년 가는 일이 아니다. 

영원에 기대어 이상을 꿈꾸는 것은 과도한 욕심이다. 

한 가지만 뺴고 말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이상은 열외다. 

그것만이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과도한 욕망으로 영혼과 정서를 망가뜨리지 말자. 

그저 부르심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 시키신 그 만큼, 충성스럽게 일하다 가면 된다. 

혹시 아나, 나의 노력의 일부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흡수되어 그 나라에서도 명예롭게 빛날지… 

그건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일이다. 

 


인간의 모든 노력을 아시는 하나님, 

사람의 욕망과 그 욕망의 결과도 오랫동안 보아오신 하나님,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하게 해 주세요. 

몇 가지 아이디어로 마치 영원한 업적을 이룰 것처럼 과몰입하는 저를 봅니다. 

겸손하게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감당하게 해 주세요. 

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게 해 주시되, 

과도한 기대와 열정으로 폭주하지 않게 해 주세요. 

겸손히 주님과 보조를 맞추고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영원한 지혜에 튜닝하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오늘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저의 후원자, 교회 청년들, 아벱 동역자들, 특히 신입간사들에게 주님의 돌보심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아픈 자들을 위로하시고, 오늘 그들의 마음에 찾아가셔서 위로와 평안을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8. 3. 4. 

 

0. 들어가며 

- 최근 나의 절실한 기도제목은? 

- 예수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성령의 도우심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세번째로 오늘은 뜻에 맞는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1. 예수님의 꼼수? 

-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4절) 

14장 14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기도하면서 이 구절을 외우고 또 외우고 읊조리고 또 읊조립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순간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하잖아~~’ 그렇게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급속도로 팽창했던 60-70년대의 신앙은 오중복음 삼중축복으로 대표되기도 하는데요. 물질과 건강의 축복이 간절했던 그 당시 서민들의 정서를 정확히 찔렀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구절도 큰 유행이었죠.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니 정말 신나는 일 아닙니까!!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보다 더 쉬운 일이죠.

 

- 정직한 사람은 안다.  

그런데 조금만 정직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 뒤에 갖다 붙인다고 해서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도 중환자실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매일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혹시 예수님의 꼼수?

그럼 오늘 성경 말씀은 포교활동, 전도활동에 유용하게 사용하라고 전해주신 예수님의 마켓팅 전략인가요? 예수님의 꼼수인가요? 그럴듯하게 말해놓고 실제는 그렇지 않는 다단계 같은 영업 전략인가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이건 구라구만. 에이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네. 초대교회에는 가능했겠지...’ 등등 여러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2. 빌립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문맥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이해는 마음에 와닿는 한구절 한구절 외우는 걸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런 성경 암송은 외우지 않는만 못합니다. 성경의 바른 이해를 방해합니다. 전후문맥을 꼼꼼히 따져야 합니다. 

 

14장을 쭉 훑어보면 일단 경험주의자 제자 도마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 물었고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죠. 목적이자 방법이 예수님이라고 그게 바른신학이라고 말씀을 나눴었죠. 이번엔 빌립입니다. 

 

1) 아버지를 보여주소서(8절)  

예수님이 ‘너희는 아버지를 이미 보았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성적이었던 빌립은 어안이 벙벙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사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한다는 예수님의 예언에 멘붕상태입니다. 베드로가 한쪽 구석에 앉아 멍때리고 있을 때, 다른 제자들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8절) 원래 요한의 제자였던 빌립은 영적인 갈망이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2) 내가 곧 아버지다(9-11절) 

그때, 약간 책망하듯이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랫동안 함께 있었는데 내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있다. 정 못 믿겠으면 내가 하는 일을 보면 알지 않겠니?’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제자들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인격이 수천년동안 이스라엘이 섬겨왔던 만군의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갑자기 여러분에게 다가가서 재림예수다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은 쉬운 결단은 아닙니다. 증인도 있고 증거도 있긴 하지만 증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 우리에게 말씀을 거십니다. ‘2000년전 역사속에 존재했던 한 인물인 예수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 믿음이 가장 먼저 필요합니다.  

 

3. “내 이름으로”(13절) 

여러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주겠다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내 이름으로’ 입니다. 이건 주술이 아닙니다. ‘아브라카다브라’ ‘수리수리마수리’ 같은 주술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문맥에서 ‘이름’은 곧 그의 영광을 구하고 정확하게 그를 위해 말하는 사람들, 정말로 그의 인증을 받은 대리인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교 마술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영적 세력을 조작하려고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성경배경주석, p. 346) 

 

1) 바른 믿음(10-11절) 

첫째, in the name of Jesus는 바른 믿음을 의미합니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른 믿음입니다. 12절 시작부분에 이렇게 이야기하시죠. ‘나를 믿는 사람은....’ 맞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속에 실존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말이 아닌 거 아시겠죠. 그정도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 역사적 실존 인물이 유대교 경전인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른 믿음이죠. 이 믿음에 도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분을 좋은 윤리적 가르침을 전하는 인류의 대스승이나 성인급으로 받아들이는 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유일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in the name of Jesus는 이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2) 예수님의 대사(12절) 

둘째, 12절을 잘 읽어볼까요. 예수님보다 더 큰 일들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병고침과 귀신이 쫓기는 현상이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일어납니다. 전 세계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됩니다. 이 제자들은 단순히 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사들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한 특사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세계 곳곳으로 증폭시키는 일을 하는 대사들입니다. 이 정체성이 in the name of Jesus에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의미가 바로 대사, 특사라는 말입니다. 고대 근동의 용법이 그렇습니다. 

 

3) 아버지께 영광(13절) 

셋째, In the name of Jesus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13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더욱 높아집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는, 바른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의 대사들의 간구를 들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지는 겁니다. 그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목적과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그 어구를 기도끝에 주문처럼 달아서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바른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기도는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내 욕망이나 내 가족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가 아닙니다. 

 

4. 기도 구절에 관한 고찰(14-16장_고별 설교내에서)

여기서 고별 설교 내에 있는 기도에 관한 내용들을 한번 쭉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고별 설교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드렸고, 그중에 세 번째가 ‘뜻에 맞는 기도’인데 14장 13-14절 두 절에서만 나오면 너무 적은 분량이잖아요. 사실은 16장까지 계속 곳곳에서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17장은 아예 대놓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이기도 하구요. 

 

1)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5:7)

잘 살펴보면 여기도 전제 조건이 있음이 보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을 뒤에 붙이는 기도가 아닙니다. 참포도나무되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즉 말씀과 행동이 공명되고 그분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이 우리 안에 계속 공명하고 있으면, 무엇을 구하든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가 전제 조건입니다. 

 

2) 열매 맺는 대사(ambassador)_제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15:16)

여기서도 단순히 모든 개인적인 욕망을 다 채워주신다는 뜻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열매맺는 대사, 특사로 택하셨습니다. 열매 맺는 대사로 택하신 건, 이를 통해 기도의 응답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문장 구조를 잘 보셔야 합니다. 열매맺는 대사로 택한 것이 먼저 입니다. 그럴때 비로소 무엇이든 받는 기도가 가능해집니다. 

 

3) 고난 속 기쁨을 위해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16:23-24)

16장은 마지막 때에 관한 장입니다. 그 날은 고난이 최고조로 달할 때입니다. 핍박과 박해가 극에 달할 겁니다. 먼저는 예수님을 사형시키는 걸로 박해가 시작됩니다. 그 뒤에는 로마 황제들이 박해가 주기적으로 지속됩니다. 그때를 위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주실 텐데,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맥락은 기쁨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게 없이는 고난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고통 속에 기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사실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4)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16:26) 

마지막으로 16장 26절에는 예수님만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아버지께 직접 간구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회복됩니다. 제사장과 제사를 통해서만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유대인에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여기면서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별 설교에서도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통속적 해석이 튼튼히 서있기는 어렵습니다. 조건이 있고, 목적이 있고, 강조점이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자판기처럼 대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동전을 넣고 기도제목을 누르면 응답의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식 기도는 위험합니다. 이교적입니다. 

 

5. 뜻에 맞는 기도란?_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은 바로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1) 바른 믿음과 바른 관계안에서 드리는 기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바른 믿음과 그분과의 바른 관계안에서 드리는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2) 그리스도의 대사의 신분으로 드리는 기도 

또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 그리스도 예수의 특사의 정체성과 자격으로 드리는 기도가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 이런 조건 하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이런 조건 하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예수님께서 응답하시기 위해 일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함께 응답의 선물을 주실 겁니다. 

 

6. 나가며_맹신을 벗고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오해를 벗어버리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말씀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가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가 정답입니다. 그분이 다 듣고 있다는 정답입니다. 그러나 우리 뜻대로 다 이뤄진다는 오답입니다. 그분의 뜻에 맞을 때 이뤄집니다. 이 분문 때문에 생긴 오해를 벗고 참으로 인격적이신 그분과의 관계로 나아갑시다. 조건에 다 맞지 않다하더라도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건 그분과의 교제에 있어 가장 기본입니다. 두려움없이 그분과의 기도로 나아갑시다. 다만 내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신다는 맹신만 없으면 됩니다. 오해를 벗어 버리고 기도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회 

1.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뤄주신다는 말씀을 오해했다면 오해했다는 고백을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혹여라도 이 말씀을 무시하거나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거나 거짓말로 치부하거나 했다면 회개하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말씀의 본뜻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도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  

 

2.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시다. 그분이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바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 예수 그리스도의 특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 참고 도서

김영봉, 사귐의 기도, IVP

김영봉, 사귐의 기도, IVP 

2021 04 16 금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당신은 거기 있든지, 발치에 앉든지 하오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6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여러분이 받드는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라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하신 분이 또한살인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사람을 대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1).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외모나 옷차림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은, 사람을 차별하며 판단하는 것입니다(2-4).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십니다(5-7).


율법은 우리에게이웃 사랑 가르치며, 일부를 어긴다 해도 율법을 범한 것이므로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합니다(8-11). 율법을 완성하시고 사랑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역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따릅니다(12-13). 요즘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외모나 경제적 형편, 정치적 성향 등으로 차별하거나 판단하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

차별 금지

 

1. 난해함 

역시 야고보서는 난해하다. 

때로 성경 저자가 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지 관점으로, 딜레마 혹은 트릴레마 없이 평이하게 이해되는 글로 적혀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바울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야고보의 글은 너무 단도직입적이다.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서 보이는 신학적 진술, 그리고 토대 위에 설계된 생활 윤리, 공동체 윤리이렇게 집을 지어가야 이해가 그나마 쉬울 텐데, 야고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시험에 인내하라, 분노하지 말고 조심하라, 그리고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지혜서 같기도 하고, 규정집 같기도 하고, 여튼 신학이 정확히 노출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고 어떤 토대에서 말하는지 흐릿해서 불편한 부분이 있다. 

 

전문맥도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자유를 주는 율법같은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적용되는 상황에서도 율법의 기능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언급이 빨리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교회의 초기 지도자 야고보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특별한 갈등과 긴장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는 둘을 통합해서 조화롭게 생각하고 있다. 

생각을 한번 따라가 보고 싶다. 

 

2. 차별

확실히 야고보서는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에 관심이 많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원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놓인 차별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야고보가 사용한 논리가 눈에 들어온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차별해야 하지 않아야 하는 번째 이유는, 야고보의 형제 자매가 우리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영광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자/빈자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하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번째 이유도 적고 있다.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세상을 다스리면서, 혹은 개입하시면서 사용했던 방식 중에 빈자를 택해 믿음의 부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부자들은 쉽게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곤 한다.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 빈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운영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많은 결정을 내려왔고, 많은 일들을 왔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보수적이고, 수호에 적극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애적이다. 

어쩔 없다. 가진 것이 많으면 그렇게 밖에 없다.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생각의 메커니즘, 행동의 방식이 고착화된다.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하게 된다. 

부자의 논리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참 어렵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 나라는 빈자들의 자리가 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생겼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고 관리하고 경영하는 권리가 생긴 것이다. 

부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권리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번째 이유도 있다. 

생각보다 치밀하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번째 이유는, 율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율법의 주요 강령은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에 동의했다. 

으뜸가는 율법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를 구별해서 다르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다.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살아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혼자 산다면 굳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그저 하나님께 시기에 맞춰 예배하고 찬양하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적, 사회적 존재이기에 율법이 필요하고, 율법은 개인과 공동체를 자유하게 한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있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해하지 않을 있는 자유까지 포괄한다. 

죄를 짓지 않을 있는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욕구대로 하면, 자유를 얻을 없다. 

욕구대로 하면, 이웃 아니라, 가족과 자기 자신조차도 해를 입는다. 

그러니 율법은 포괄적(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복음이 들어와 사람들을 용서하고 은혜가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가져다 주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복음이 죄인을 용서한다해도, 여전히 율법이 필요하다. 

복음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는가? 율법도 그렇다.

물론 억압과 부자유의 율법이 있을 있다. 그러나 자유를 주는 율법이 있다. 

대표적인 율법이 바로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같은 것이다. 

 

 

3. 의미심장한 13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사실 13절의 의미는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자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율법의 종속 개념엔 심판이 있다. 율법이 있다면 심판도 있다. 

그렇다면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도 심판이 있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도 율법이니 심판이 규정되어 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따르는 자유하게 하는 심판은 혹시자비 방점이 찍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13절이 의미심장하다. 

솔직히 야고보가 13절을 이유를 모르겠다.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했을까? 

뭔가 깊은 의미가 숨겨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오늘 의미를 깨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니, 조금 천천히 음미해 보고 싶다. 

 

 

——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신 예수님,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치료하셨던 예수님, 

당신을 닮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런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4.16 이상하게 슬픕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확한 사고의 원인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의문이 많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신원, 원한을 풀어주세요. 

 

복음이 가져다 주는 자유의 율법이 곳곳에 적용되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14 수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13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17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시련을 견디는 자들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12).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져 어려움을 당할 하나님께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도, 죄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죄를 낳고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13-15).

 

사탄은 죄의 유혹으로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가는 반면, 좋은 것을 주시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16-18).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는 달콤함 이면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는 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분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의 길을 있길 기도합시다.

 

——

욕심에서 소망으로

 

1. 입증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의 강력한 권면은 바로 시험을 견디어 내라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내부적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박해가 있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정통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바울의 변심 혹은 회심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를 기대했다. 

그러기에 영적 해방의 기치를 내건 그리스도인들의 이분법적 주장에 대해 경계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중심 가치와 정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지 로마의 황제는 아니었다. 

로마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해서 로마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이런 점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겉으로는 로마의 법을 따르는 같았지만, 속마음은 로마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외톨이가 되어 갔다. 

안팎에서 고통과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 

 

야고보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고된 삶인지, 얼마나 핍절한 삶인지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면 더욱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시험을 인내하라. 시험을 견디어내라. 

그것이 그의 신앙의 참됨을 입증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있는 방법은 시험에 인내하는 것이다. 

 

시험은 자신들의 욕심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14)

시험은 집착이 만들어낸 구렁텅이가 아니다. 

시험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내외부의 고통이다. 

시험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따라서 12절의 시험과 14절의 시험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요사이는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는 방법을 잃어버리는 같다. 

점점 확신이 옅어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확신에 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항상 회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회의는 나은 신앙으로 가는 길이다. 

무턱대고 믿는 신앙은 맹신을 낳아 모두를 괴롭힌다. 하나님조차도 괴롭다. 

그러나 항상 회의한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년 내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한다면, 달리 말하면 때로 이것은 나태함의 다른 이름이다. 

나태함은 회의를 방치한다. 참된 회의자는 진리 추구의 길에 근면하다. 

하지만 나태한 사람들은 회의라는 방패로 근면을 방해한다. 

 

신앙에 대한 시험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당하는 시대다. 

내부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비난과 비판 때문에 점점 신앙의 시험에 노출된다. 

시험은 벼락치기가 불가능하다. 시험의 통과 여부는 인내다. 오래참음이다. 견디어 내는 것이다. 

당장 혼자 잘한다고 해서 교회가 욕을 안듣는 것은 아니다. 

욕을 그냥 받고 있어야 때가 있다. 욕받이가 됨을 거부하지 말자. 

 

 

2. 욕심, 참혹한 결과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런데 조직의 욕심은 참혹하다. 

개인의 욕심은 개인의 생이 끝나는 순간 멈춰진다. 

그러나 조직의 욕심은 대를 이어 비참한 결과를 만든다. 

 

미얀마 군부의 욕심은 군사, 정치, 경제를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 쓰겠다고 안달이다. 

국민들의 죽음에는 무관심이다. 

욕심이 무덤을 만든다. 무덤에 결국 자신들이 들어가게 것이다. 

 

민주화는 어쩔 없이 피를 부른다. 

기득권의 철옹성을 넘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피다. 

 

야고보는 욕심에 빠져서 참된 시험에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결국 내외부의 고통과 핍박을 이겨내기 못했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욕심은 인내를 갉아 먹는다. 

현실적합성의 욕심은 때때로 인내하며 소망해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조급함을 노출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인간의 욕심으로 당길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완성시킬 나라다. 

우리가 일은 어쩌면 인내다.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노력은 때로 욕심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나의 욕심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나를 이끌어야 한다. 

그럼 욕심과 소망의 차이는 무엇인가? 

욕심은 자생적이나 소망은 투사적이다. 다시 말해, 욕심은 자기 자신의 내부적 메커니즘에 의해 발생하고 유지되지만, 소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며 자기 삶과 동기와 생각과 감정을 비춘다. 욕심을 방치하면, 공회전하는 엔진처럼 과열된다. 뇌와 심장에 걸쳐있는 컨베이벨트의 속도가 빨라져서 다른 생각들이 들어서질 못하는 지경에 도달한다. 소망은 뇌와 심장에 걸쳐놓은 내생적 컨베이벨트를 끊고 나와 주변과 외부를 보게 한다. 

소망이 들어온 문을 쳐다본다. 나에게 없는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에 놀라움과 충격을 안고 바라본다. 

응시한다. 소망 때문에 나의 삶의 지향이 새롭게 설정된다. 

이게 욕심과 소망의 차이다. 

얼핏보면 비슷하다. 욕심도 욕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소망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연히 차이가 난다. 

차이를 분별하고,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욕심이라는 말을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자생(스스로 만든)시킨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히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 나라만큼 불편하고 어색한 것이 없다. 

그것은 나의 나라(욕심) 거스르고, 때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죄에 노예가 되고 어쩔 없이 죽음에 이른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다시 조명받지 않으면, 영상이 뇌와 심장에 투사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점점 미쳐버린다. 광인 

 

 

——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 

욕심을 꺾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시험에 당하여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의 힘은 나의 욕심이 아니라 당신과 나라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게 하소서. 

나의 뇌와 심장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소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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