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2. 18. 

 

0. 들어가며 

앞으로 4주간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순절도 시작되었는데요. 2월 14일에 교회력에서는 재의 수요일이라 해서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미사와 예배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동안 요한복음 14-16장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에 대해 다루려고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무작정 참회하고 무작정 슬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현재적인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사순절에 더 어울리는 설교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리즈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혹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가 함께 회개하면서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원리

- 사랑의 원리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을 것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포하시고 그 나라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시고 가르치시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습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며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통치의 기본 원리를 명령이라는 형태로 제시하셨는데요. 요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13:34-35) 

맞습니다. 마치 헌법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주 중요한 원리인 나라입니다. 

 

2) 명령 vs 방법

그런데 이런 명령만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명령만 있으면 가정이 운영이 되겠습니까? 평창 올림픽은 평화 올림픽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원리만 있으면 실제로 그것이 이뤄지겠습니까? 원리를 천명하고 당위를 제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입니다. 원리, 당위, 명령 등은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을 그려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신과 목적과 의미를 표현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평창 올림픽이 평화 올림픽이 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협력해야 합니다. 미국과 일본도 협조해야 합니다. 중국과 러시아도 동조해야 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서로 적대행위를 잠시 멈추고 대화 모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 올림릭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방법이 중요합니다.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사항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방식,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구현되는지를 알려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나 누가복음의 평지설교나 마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등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을 드러내 줍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그 명령과 원리를 실천해낼 수 있을까요? 저는 요한복음 14-16장이 그 방법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그래서 몇번에 걸쳐 이 본문을 묵상해 보시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어떤 방법들을 제시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 네가지 방법

14-16장까지 여러번 묵상하고 생각해보면, 크게 4가지 방법론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성령님의 도우심. 이 네가지를 앞으로 4주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바른 신학입니다. 

 

함께 본문을 읽어볼까요? 

잘 읽으셨습니다. 

바른 신학을 이루는 핵심 구절은 14장 6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그냥 앞뒤 문맥을 빼고 읽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구절이건 전후 문맥을 떼어 내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로 허공을 떠돌게 됩니다. 철저히 문맥 속에서 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1. 근심에 쌓인 이유

1절에 보니 예수님이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근심을 파악하고 계십니다. 왜 제자들은 근심하고 있을까요? 

 

1) 이 안에 배반자가 있다(13:21) 

첫째로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배반자가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음이 괴로우셔서, 환히 드러내어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요 13:21)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는 순간에 12명의 제자들을 보고 하신 말씀 치고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13:28)고 요한은 적고 있습니다. 

 

2) 나는 너희를 떠날 것이다(13:33) 

둘째로 더욱 더 큰 충격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날 것이라는 선언에 있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요13:33)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3년가까이 동행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 지도자들을 굴복시킨 뒤에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로마를 점령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할 일은 다윗처럼 이스라엘를 통일하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독립시켜서 전 세계에 가장 위대한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 믿었고 따라서 예수님이 곧 그와 같은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에 차있었습니다. 그런데 떠난다니요!! 제자들은 수군거렸을 겁니다. 

 

3) 수제자 베드로도 나를 부인할 것이다(13:38)

근심하게 된 세번째 이유는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할 거라는 예수님의 예언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13:38)

제자들 중에 가장 인정받고 있었던 수제자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란 말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라면 근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 근심에 둘러쌓일 만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걱정스럽게 근심되게 만드는 말들을 원투 어퍼컷을 날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 상황에서 새계명이라고 제시하시는 것 자체가 매우 모순적입니다. 가장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새 계명을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창 올림픽 개막식이나 폐회식에서 그런 선포를 하시면 분위기가 맞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새계명을 선언하십니다. 정말 예수님은 엉뚱한 구석이 많습니다. 제가 제자라고 해도 마음에 근심이 쌓일 만합니다. 

 

=>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 

좋습니다. 근심있는 마음을 아시고 자신을 믿으라고 하시니 일단 믿어봅시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전혀 사람 속을 모른채 자기 멋대로 말하는 분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심을 시켜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분을 신뢰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2. 아파트 vs. τοπον(place, position)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뭔가 이상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이게 무슨 소리죠? 저 같으면 그들의 정서를 공감하면서 신뢰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그래 너희들 마음속에 근심이 많은 것을 내가 잘 안다. 아까전에 내가 했던 말들 때문에 더욱 그럴거야.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이미 모든 상황을 내가 잘 정리해 두었단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만 믿어’ 

이 정도가 상식적인 답변 아닐까요? 느닷없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라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의 심사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1) 아버지 집에는 방이 많다(2절) _성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 집(2:16)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 바로 성전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2:16) 라고 말씀하실 때의 아버지 집은 성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럼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톰라이트라는 유명한 신약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성전의 핵심 의미는 그곳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풀면,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성전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제자들이 있을 곳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 토폰을 마련하러 간다(2절) 

바로 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거할 곳,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거든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면서 통치히시는 하나님 나라에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다고 대답하고 있는 겁니다. 

 

- 정적인 개념 vs. 동적인 개념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있을 곳, 헬라어로 하면 토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요. 이 토폰이 단순히 장소적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할과 포지션이라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있을 곳은 제자들이 가만히 앉아있거나 서 있는 곳이 아니라 제자들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곳을 함께 의미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거주하는 집, 아파트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는 역할과 포지션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토폰은 정적인 개념만이 나이라 동적인 개념도 함께 전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존재하다 그리고 활동하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존재를 통해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새로운 역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함께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이 드러날 때, 새로운 도성, 새 예루살렘이 이 땅 가운데 펼쳐질 때, 제자들은 각각의 역할과 위치를 부여받을 겁니다. 

 

3)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3절) 

-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기

새로운 하나님 나라는 그냥 앉아서 놀고 먹고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게 될 겁니다. 온 우주를 그분과 함께 정의로운 사랑으로 통치할 겁니다. 이게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첫번째 명령의 회복이 일어나는 그림입니다. 

 

=> 미래로의 초대 

근심에 쌓여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큰 그림을 그려주십니다. 단순히 그들의 정서를 위로해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는 말은 그들을 토닥이는 심리 삼담사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는 말은 세상의 끝을 위해, 새하늘과 새땅을 위해,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예수인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믿고 신뢰하라는 겁니다. 그분은 세상의 끝을 보고 있습니다. 그 미래로 제자들을 초대하는 겁니다. 

 

이 미래를 믿으십니까? 정말 믿습니까? 

 

3. 도마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_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현실주의자, 실증주의자, 경험주의자 도마로서는 이해가 안 될 겁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아주 정직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는 그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제시하신 미래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갇혀 삽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건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마 처럼 물어야 합니다. 주님! 정말 주님이 그리시는 그림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럼 그분은 이렇게 답하실 겁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이게 바른 신학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1) 길_방법 

그분이 방법이 되십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그분의 인격과 성품과 삶과 가르침,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겁니다. 

 

2) 진리_정체성 

그분은 방법 뿐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 하나님 나라 그 자체, 진리 그 자체가 됩니다. 세상의 처음과 끝이 되십니다. 창조주가 되신 그분이 모든 진실을 알고 계십니다.

 

3) 생명_목적

더불어 그분이 바로 우리 모든 숨쉬는 것들의 목적이 되십니다. 그분이 바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없이는 우리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참 생명이 되십니다. 

 

길, 진리, 생명 이 셋중에 오늘 본문이 집중하는 건 바로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도록 만드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이게 바른 신학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능케 하는 건 그 명제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우리는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만물을 회복시키겠다는 녹색당의 정강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겠다는 어떤 노력이나 정치이데올로기도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냅니다. 

 

4.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_예수 중심의 신학

결국 바른 신학이란, 예수 중심의 신학을 의미합니다. 구약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추출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빠진 하나님 나라 설명은 껍데기입니다. 

 

1) 신학, 교제, 기도, 성령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네가지가 있다고 초두에 말씀드렸습니다.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그중에 오늘 바른 신학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2) 신학이 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 

예수 중심의 신학이 바른 신학입니다. 이게 무너지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몇가지 원리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정의, 사랑, 공평, 자비, 희년, 자연보호, 인권, 약자보호, 내부고발 등등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떠 올릴 때 가져다 쓸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개념 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낼 수 없습니다. 

 

- 예수 중심의 신학을 위한 노력

이번 한주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한 노력을 조금만 더 기울여 봅시다. 구체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분에 대한 책을 읽는 것도 좋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라는 책을 한번 살펴보세요. 아니면 성경을 깊이 연구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큐티 정도가 아니라 연구를 해 보는 겁니다. 

 

이번 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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