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15 목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9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20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25그러나 완전한 율법 자유를 주는 율법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26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먼저 듣고, 말하는 것에 신중하며, 감정을 다스리라고 말합니다. 분노에 휩싸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19-20). 그리고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악함을 벗어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에 기울이며,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21-22).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자들은 듣고 잊어버리는 자들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23-25).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주변의 이웃들을 돌보며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26-27). 이처럼 듣는다는 것은 삶이 동반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울여 들음으로 우리 삶에 나타나야할 모습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

시험을 견뎌내는 참된 경건

 

1. 분노

말씀을 읽을 항상 생각해야 것은 전체의 흐름이다. 

야고보는 편지를 거지 명언집을 것이 아니다. 

맥락과 컨텍스트가 존재한다. 

갑자기 분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을 같다. 

잠시 전문맥을 살펴보면, 주로 시험에 인내하며 견딜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시련과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며, 혹은 자신의 욕심에 끌려 죄에 빠지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지혜를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현재의 고난과 시험을 묵묵히 인내하고 견뎌내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분노에 대한 것이다. 

야고보의 그림은 일단 고난과 핍박으로 고통당하는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인내하며 믿음을 굳게 지키라는 권면이다. 그림의 완성에 필요한 요소가 오늘 본문에 등장한다. 

 

첫째가 바로 분노 조절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온유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분노에 쉽게 휩싸인다.

자신이 얼마나 쉽게 화내고 분노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린다. 

현대 사회는 말을 빨리하고 말로 상대를 압도하기를 요구한다. 

말을 효과적으로 하여 목표한 바를 이루라고 요청하고 있다. 

말을 빨리하는 방법 중에 유용한 방법은 심장과 혀의 속도를 높이는 것인데, 이는 마음의 급함이 요청된다. 

마음에 급박함이 있어야 말을 빨리 있다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분노야말로 심장 박동수를 늘리고 긴장도를 높이고 말을 빨리 있게 만든다. 

그러니 분노하는 사람을 쉽게 이기지 못한다. 분노가 때로 논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노가 논리의 중간 과정을 생략하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분노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든다. 자신의 화두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분노가 하는 일이다. 

현대인의 기본 정서가 분노라는 말은 그래서 일리가 있다. 

 

야고보는 시험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분노하게 되는지 알고 있는 싶다. 

그리고 분노가 아주 자주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뜻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점도 알고 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수많은 회의와 논의가 진행된다. 현대적 의미의 회의, 논의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나누고 보고받고 대화해 나간다. 

그러다보면 아주 자연스레 분노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분노의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자신들이 받는 부당하고 불의한 핍박에 분노한다. 

함께 사역하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한다. 

그러한 분노가 공동체를 위협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이런 흐름을 보았던 것이다. 야고보는 지도자였다. 

 

시련과 시험을 이기는 것은 분노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2. 말씀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말씀에 집중하기 어렵다. 

구약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가지 말씀을 가지고 강론하는 사도들의 말씀 

어떤 것이든 분노하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튕겨져 나온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행하는 것보다 떠드는 것을 좋아한다. 

구약에 드러난 하나님의 ,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 그리고 자료들을 보면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도들의 설교들, 말씀들을 듣는 것이 우선이다. 말을 우선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공동체의 지도자로 교회의 대소사를 처리하다보니,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얼마나 대단하지 그는 알게 되었다. 

복음은 죄인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복음만으로 공동체가 운영되지는 않는다. 복음으로 시작해서 반복음으로 끝나는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가!! 복음으로 시작해서 더복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산상수훈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체화시킨 생활 윤리가 필요한 것이다. 야고보는 이를 알았다. 중심에는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과 행함의 실천이 있었다. 

 

때로 분노하는 사람들은 실천보다 말이 앞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빠르며, 혀를 제어하지 못하고 생각과 혀의 싱크로율이 상당했다. 

생각하는 모든 내용을 혀로 말하는 것은 때로 공동체를 해한다. 

따라서 분노가 아니라 말씀의 실천이라고 야고보는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그래서 개인윤리로만 아니라, 공동체 운영의 원리로 보는 것이 낫다. 

 

3. 완전한 율법, 자유를 주는 율법

구절이 항상 눈에 띈다. 율법이 자유를 준다는 개념은 바울 서신에 깊이 경도되어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상한 조합으로 비춰진다. 

말씀의 실천을 강조하는 야보고는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상당히 율법적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교회와 교인이 당하는 시험을 견디기 위해서는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주는 율법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관점과 자유를 선사한다. 

그렇다고 십계명과 산상수훈이 폐기되는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의 가운데 십계명과 산상수훈은 개인과 공동체의 윤리적 삶에 자유를 허락한다. 

 

자유는 자기 맘대로, 분노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고 풍요롭게 하고 유지하게 만드는 자유다. 

자유가 있어야 우리는 끝까지 우리가 있다. 

자유가 있어야 나는 끝까지 공동체 안에서의 나를 유지할 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없는 나가 과연 자유하다 있는가!! 그건 근대주의적 파편화된 자아 자유 개념이다. 

역사의 어느 순간에 그런 파편화된 자유 개념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개인을 짓누르는 사회 공동체가 고아와 과부를 무시하고 인권을 짓밟고 개인을 유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편 역사는 말한다. 개인과 공동체가 따로 떨어질 없음을 말이다. 

공동체가 없는 개인은 결코 자유할 없다. 

특히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개인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완전한 율법은 정말 자유를 주는 율법이라고 말할 있다. 

 

말씀의 실천, 율법의 실천은 자유를 가져다 준다. 

공동체에도 개인에게도 자유가 살아난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개인적이기도 하고 공동체적이기도 하다. 

참된 경건은 율법의 실천이라고 야고보는 봤다. 

분노를 조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에 집중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다. 

그것이 나와 공동체를 자유 안에서 살리는 길이다. 

기독교 지도자는 이것을 꿈꾼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개인 윤리를 말하듯 보이지만(혀를 제어하고 분노를 억제하라 ) 그것은 사실 공동체의 상생을 추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공동체를 유지하기 원하시는 예수님, 

참된 경건으로 나와 공동체를 더욱 자유롭게 살려 주세요. 

분노를 조절하고, 혀를 제어하고, 말씀을 실천할 있는 힘을 공급해 주세요. 

모든 것이 힘으로 없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율법의 실천은 인간의 힘으로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모든 순간에 성령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듣는 것을 잘하여 경청과 공감, 그리고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일에 항상 신경쓰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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