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 10일 금요일

 

여는 기도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16하루는 창녀 두 사람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섰다.

17그 가운데서 한 여자가 나서서 말을 하였다. "임금님께 아룁니다. 저희 두 사람은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을 때에 저 여자도 저와 함께 있었습니다.

18그리고 제가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저 여자도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집 안에는 우리 둘만 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9그런데 저 여자가 잠을 자다가, 그만 잘못하여 자기의 아이를 깔아 뭉개었으므로, 그 아들은 그 날 밤에 죽었습니다.

20그런데 이 종이 깊이 잠든 사이에, 저 여자가 한밤중에 일어나서 아이를 바꾸었습니다. 저의 옆에 누워 있는 저의 아들을 데리고 가서 자기 품에 두고, 자기의 죽은 아들은 저의 품에 뉘어 놓았습니다.

21제가 새벽에 저의 아들에게 젖을 먹이려고 일어나서 보니, 아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아침에 제가 자세히 들여다 보았는데, 그 아이는 제가 낳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22그러자 다른 여자가 대들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아이가 자기의 아들이고, 죽은 아이는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우겼다. 먼저 말을 한 여자도 지지 않고, 살아 있는 아이가 자기 아들이고, 죽은 아이는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맞섰다. 그들은 이렇게 왕 앞에서 다투었다.

23왕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두 여자가 서로, 살아 있는 아이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하고, 죽은 아이를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다.'

24왕은 신하들에게 칼을 가져 오게 하였다. 신하들이 칼을 왕 앞으로 가져 오니,

25왕이 명령을 내렸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쪽은 이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26그러자 살아 있는 그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 올라, 왕에게 애원하였다. "제발, 임금님,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어도 좋으니,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다른 여자는 "어차피, 내 아이도 안 될 테고, 네 아이도 안 될 테니, 차라리 나누어 가지자" 하고 말하였다.

27그 때에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렸다. "살아 있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아이를 양보한 저 여자에게 주어라. 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이다."

28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왕이 재판한 판결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왕이 재판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공정하게 판단한다는 것을 알고, 왕을 두려워하였다.

 

솔로몬은 직접 재판을 합니다(16절). 두 여인이 서로 다투면서 살아있는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 주장합니다(17-22절). 솔로몬은 살아있는 아이를 반으로 나누라 명하고 두 여인의 반응을 살핍니다. 그러고는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지 판결합니다(23-27절). 왕이 재판할 때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왕을 두려워합니다(28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증명하는 재판이었습니다. 이 재판을 통해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솔로몬은 재판을 받기 힘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판을 직접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정의와 평화를 세우며 약한 자들을 돌보는데 사용할 수 있기를 간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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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성경은 말한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지혜다. 

왕의 위치를 적극 활용하는 지혜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에 사용되는 지혜다. 

재판과 판단에 유익한 지혜다. 

왕으로서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의 재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센세이션이다. 

정말 왕이 이런 재판까지 관여 했을지 의문이긴 하다. 

모든 요소가 자극적이며 관용 언론적 기능을 갖추고 있다. 

정권 홍보에 이만한 기사가 없다. 

솔로몬의 비서실은 이 기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했을 것이다. 

 

익숙한 본문이다. 

그래서 조금 다르게 본문에 접근하게 되었다. 

과연 아이를 반으로 가르라는 명령을 받은 왕의 신하와 집행관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살아있는 갓난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에 의아함과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잘 못 들은 것은 아닌가?’

‘왕이 정신이 나간 건 아닌가?’ 

등등. 

그럼에도 신하들은 가져온 칼을 들어야 했다. 

왕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엄마가 자기 아이를 포기하는데는 아마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왕이 칼로 죽여라하고 명령을 내리자마자 진짜 엄마가 소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짜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 잠깐의 시간, 

엄마도 엄마지만, 왕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집행관도 죽을 맛이다. 

놀라움 속에서 칼을 집어야 하고, 아이를 칼로 베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과연 그 무명의 집행관은 무슨 마음일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행동에 의아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아주 종종 예수님의 행동과 말이 이상하다 생각했다. 

갑자기 사마리아로 여행 경로를 잡지 않나,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몇개의 바구니에 나눠담더니 제자들 보고 무리들에게 갖다 주라고 하질 않나…

매번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시키신다. 

그 때마다 복잡한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예수님의 지혜가 그들을 항상 능가했기에, 그들은 일단 순종하고 따랐다. 

 

때로 하나님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일을 시키실 때가 있다.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예상 범위를 벗어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상을 따르는 자를 이상주의자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부르심을 따르는 부르심주의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예수님의 부르심, 성령님의 부르심을 따른다. 

이상은 관념이지만, 부르심은 일상이다. 

기독교 이상주의도 이상주의의 일종이다. 

기독교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때로 관념에 과몰입하는 우를 범한다. 

부르심주의자는 매일의 순종을 연습한다. 

자신의 꿈에 의거해 일상을 흩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거해 일상을 순종으로 채워간다. 

그때 부르심주의자는 자신이 하는 일의 결말을 예측하는 일을 잠시 접어 둔다. 

예측하지 않고 따라간다.  

결말은 주님의 그림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모자이크의 작은 조각으로서 자신과 자신의 부르심을 이해한다. 

큰 그림은 멀리서 그분이 그리시고 있다. 

언제 내 길과 다른 누군간의 길이 만날지 모른다. 

그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림의 현단계가 완성되고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 

이것이 부르심주의자들이 기뻐하는 순간이다. 

 

——

저를 하나님 나라로 불러 주신 하나님, 

주님의 지혜로 저를 사용해 주세요. 

앞 날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부르심대로 오늘에 충실하되,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만큼 앞으로 내딛게 도와주세요.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이상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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