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7일 월요일

딘 플레밍, <요한계시록, 오늘을 위한 미래>

http://www.ivp.co.kr/books/book_detail.html?book=s01&idx=1718

 

요한계시록, 오늘을 위한 미래

창조 세계를 완성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절정

www.ivp.co.kr

 

오늘의 문단

 

“이 책에서 보여 주려는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대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죽임당한 어린양의 선교 (mission, 사명)를 통해 사람을 포함한 전체 창조 세계를 구속하고 회복한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계시한다. 동시에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빚어내고 준비시켜 그들의 입술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다가올 새 창조 세계를 지금 미리 맛보게 하는 존재로 살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참여하게 하고자 한다” p.22

 

 

서론에서 책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은 언제나 도움이 된다. 

딘 플레밍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큰 그림 혹은 렌즈를 통해 요한계시록을 읽는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시나리오나 그림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란다. 

대신 죽임당한 어린양의 선교를 통해 사람과 창조 세계 전체를 구속하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한다. 

저자는 예수님이라는 단어보다 죽임당한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예수님을 표현하는 그림언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묵묵히 죽임당한 분으로 그려진다. 

승리자 그리스도 이전에 죽임당한 어린양이 우선적으로 나타난다.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고 죽임당한 그분의 피가, 그분의 순종이, 그분의 신실하심이 결국 인류과 창조 세계를 구원하고 회복한다. 

십자가 없이 회복은 없다. 

자기 희생이 회복을 낳는다. 

회복의 시작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였지만, 그 화룡점정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으며, 그 뒤로 온 우주의 새로운 빛이 찾아 들었다. 

하나님의 계획이 드디어 성취되었다. 

요한은 십자가를 직접 보았으며 예수님의 피흘림을 가장 가까이 본 사람 중에 하나다. 

그의 환상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과 오버랩된다. 

승리는 십자가에서 이뤄진 것이다. 

플레밍은 신학적 역사적 사건이 요한 계시록의 중심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히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적용되길 바라는 책이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요한의 환상과 계시와 그림을 통해 빚어지고 준비된다. 

현실 공동체가 계시에 의해 구성되고 훈련되고 구비된다. 

입술과 삶, 증언과 실천을 통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고 즐기고 맛본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경험된다. 

설교만이 아니라 구제와 선교를 통해 체험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이 땅에서 실현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이 현실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어린양의 선교의 동참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삼위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더욱 활기차게 추진된다. 

 

2021 08 18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1 일이 있은 뒤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있는 무리가 내는 우렁찬 음성과 같은 소리가 이렇게 울려왔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력은 우리 하나님의 것이다.

2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음행으로 세상을 망친 창녀를 심판하셨다. 자기 종들이 흘린 피의 원한을 여자에게 갚으셨다."

3 그들이 다시금 "할렐루야, 여자에게서 나는 연기가 영원히 올라가는구나" 하고 외치니,

4 스물네 장로와 생물이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아멘, 할렐루야" 하고 말하였습니다.

5 그 때에 보좌로부터 음성이 울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아, 작은 자들과 자들아,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6 나는 무리의 음성과 같기도 하고, 물소리와 같기도 하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같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께서 왕권을 잡으셨다.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8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9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여라."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 말씀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다."

10 그 때에 내가 그에게 경배드리려고, 그의 앞에 엎드렸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말아라, 나도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동료들 가운데 하나요, 너와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다.”

 

주석
7절: 하나님의 통치의 시작은, 어린 양과 나중에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되는(21:2,9) 그분의 “신부”의 미래의 결혼으로 상징된다(IVP 성경비평주석).

 

바빌론에 대한 심판 이후, 하나님의 통치가 선포됩니다(1, 6절). 하나님의 심판은 순교자들의 외침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이 다시 확인됩니다(2절).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5절). 이제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시작될 것입니다(7절). 신부의 준비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바빌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준비됩니다. 이제 어린양 예수와 그의 신부와의 혼인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짐승의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인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혼인잔치에 신부로 준비되었습니다. 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9절).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린양을 따르며,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

어린 양의 눈물

그동안 심판의 메세지가 여러모로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빨리 다른 본문으로 바뀌길 은근히 때로 대놓고 바랬다. 

하나님의 진노를 보는 것도 꺼려지고, 진노를 부르는 인간들의 반역과 반역을 부추기는 창녀 바벨론/로마/세상권세가 싫었다. 

복음서의 예수님이 그리웠다.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은 여리고 부드러운 속성의 이름과는 달리 세상을 심판의 도가니로 몰아간다. 

어린 아이를 안고 축복하시는 예수님, 제자들에게 찬찬히 설명해주시는 예수님, 병든자를 치유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묵상하고 싶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정의롭고 엄격한 심판의 그림만을 보여주는 같았다. 

그속의 어린 양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어린 양의 눈물이 느껴진다. 

심판과 진노의 순간에는 어린 양은 눈물을 흘리신다. 

분명음행으로 세상을 망친 창녀”(2) 대해서는 엄중하고 엄격하게 심판하신다. 

그러나 와중에도 어린 양은 슬퍼하신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의 종들이 피를 흘렸다(2).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처형당했다. 수많은 로마 시민들의 경멸의 함성과 피에 흥분한 환호 속에 목숨을 잃었다. 

로마의 모래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피의 울분이 묻어 있다.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세상에서는 노예였으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는 어엿한 성도요 때론 지도자였다. 

그들이 받은 수모는 이루 말할 없다. 

벗으라면 벗고, 기라면 기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주인의 노리개감이었다

모든 노예가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결국 주인의 뜻에 따라야하는 것이 노예의 숙명이었다. 

로마는 그런 곳이었다. 

로마의 많은 신들은 피를 부르는 글래디에이터들의 칼과 창에 흥분하는 신들이었다. 

피로 신들을 위로한다. 

피로 신들의 가호를 받는다. 

피로 신들의 축복을 받는다. 

무슨 피인가사람들의 피이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니 어린 양은 눈물이 흐른다.

반역과 음행의 결과는 공의로운 심판이다. 

 

 

아프가니스탄에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길 

탈레반의 이슬람식 공포정치가 눈앞에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인권이 바닥으로 치달을 것이다. 

20년의 친미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데에 실패했다. 

다시 여성들의 피가 땅을 적신다. 

미군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은 숙청당한다. 

부패한 정권, 자유를 위해 싸울 의지가 부족한 정부군, 자립의 의지가 부족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시민들그리고 미국의 군사제일주의 정책. 

이런 것들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억지는 억지를 낳는다. 

진정한 변화는 폭력과 강제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여러 제국들의 폭력이 그들을 더욱 폭악한 공포정치를 하게 만들었다. 

땅에 사는 약자들을 살려주시길 기도할 뿐이다. 

땅의 지도자들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돌아오길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땅에 임하길 기도한다. 

 

1 이 일이 있은 뒤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있는 큰 무리가 내는 우렁찬 음성과 같은 소리가 이렇게 울려왔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력은 우리 하나님의 것이다.
6 또 나는 큰 무리의 음성과 같기도 하고, 큰 물소리와 같기도 하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같기도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께서 왕권을 잡으셨다.

 

왕권, 권력은 우리 주님의 것이다. 

개인과 단체가 누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시다. 

요한의 환상이 아프가니스탄에 실현되길 원한다. 

그리고 우리 한국 땅에도 드러나길 원한다. 

 

한국의 세속주의

과거에는 도덕주의에 대한 경계가 필요했다. 

딱딱한 군대 문화 속에 살아왔던 한국 사람들, 엄격한 권위주의 문화 속에 지냈던 사람들에게 도덕주의가 뇌리에 박혀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도덕주의라기보다는 보여주기식, 윗사람에게 맞춰주기식 원리주의라고 말하는 것이 좀더 정확할 같다. 

따라서 너무 쉽게 원리, 원칙, 규칙, 규정에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교회에서 이런 성향이 발현되면 소위 율법주의가 되는 것인데, 세상의 언어로 말하면 위선적 도덕주의라고 말할 있겠다. 

따라서 거짓된 도덕주의에 대해 경계하고 정직한 자아 발견을 중심 메시지로 삼는 설교가 많았다. 

그런데 최근의 한국 문화와 상황을 살펴보면, 거짓된 도덕주의에 대한 경계보다는 자유분방한 세속주의 쾌락주의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솔직한 문화가 대세다. 문제는 솔직함에 있지 않다. 쾌락을 추구하는 , 자신의 욕망을 최우선하는 , 공동체적 규정과 규칙에 앞서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에 너무 솔직하다는 이런 종류의 솔직함이 선을 넘을 때가 점점 많아지는 같다. 

절제와 자기 부인의 메시지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하나님보다 자기가 훨씬 우선인 보인다. 

거짓된 도덕주의 만큼이나 방임된 쾌락주의가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 

메시지 방향의 균형이 필요해 보인다.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는 외부에서 주어진 수많은 도덕과 규정을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욕구, 욕망, 열망을 알아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또한 과정에는 울타리를 넘어 욕망을 방임했을 벌어지는 자아 파괴 현상에 대해서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주와 영혼의 진정한 왕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분 안에 있을 , 우리는 참된 자아를 발견한다. 

위선적인 도적주의로는 나를 발견할 없다. 외부에서 주입된 사회화된 나일 뿐이다

그렇다고 방임된 욕구충족우선주의로 나를 발견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이웃을 파괴한다. 

나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안전한 울타리에서 나를 누구보다는 아시는 분의 가이드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우주의 왕이시요, 사랑으로 존재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이다. 

그것이 우리의 울타리요, 우리의 가이드다. 

 

그분이 왕이시다

요한은 왕으로 오시는 어린양을 본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 파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본다. 

로마의 음란한 연회와는 비교가 안되는 아름다운 즐거움을 만끽한다. 

시기, 질투, 암투, 계략, 험담, 판단, 폭력, 음행, 쾌락으로 점철된 바벨론/로마/뉴욕/강남의 연회/클럽/룸살롱이 아니다. 

사랑, 절제, 존중, 격려, 세워줌, 축복, 섬김이 가득한 하나님의 잔치이다. 

잔치를 요한은 보고 있다. 

그는 감격해서 천사에게 엎드린다. 

 

10 그 때에 내가 그에게 경배드리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말아라, 나도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네 동료들 가운데 하나요, 너와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예수의 증언은 곧 예언의 영이다.”

 

그러나 천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 이야기를 읽지 못했는가! 

천사에게 경배하는가!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에게 경배하는가! 

요한도 아직 완전하게 알지 못한다. 

우주의 신비를, 우주의 영적 존재들을

그러니 이런 실수를 했던 것이다. 

오직 경배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은, 인간도 천사도 어떤 피조물도 아니다. 

오직 어린 양과 하나님 뿐이시다

나도, 가족도, 지역사회도, 단체도, 국가도 심지어는 인류라는 추상적 포괄적 개념도 아니다. 

오직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통해 통치하시고 예수님과 성령님을 보내주신 여호와 하나님, 

그분만이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분이 왕이시다. 

아멘.

 

——

 

왕되신 하나님, 

주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찬양합니다. 

오늘 아침에 요한을 통해 보여주시는 놀라운 광경을 있는 눈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사실 저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저의 인생 전체, 심지어는 저의 생명까지도 당신의 왕적 통치에 걸었습니다. 

기대하고 고대하고 기다립니다. 

 

주님, 

여전히 포악한 무력으로 통치하는 세상 권력을 심판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여 주소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경험하게 하소서. 

어린이와 여성들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우리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주소서. 

아프가니스탄의 주의 백성들을 지켜주세요. 

 

당신이 나의 왕이십니다. 

쾌락주의, 세속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오직 주의 나라 위해 오늘도 저의 달리기를 하게 하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을 고대합니다. 

 

오늘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있는 눈을 주소서. 

당신이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느끼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8 11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1 나는 성전에서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는데, 음성이 일곱 천사들에게 이르기를 "가서,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일곱 대접을 땅에 쏟아라" 하였습니다.

2 그래서 첫째 천사가 나가서 대접을 땅에 쏟으니,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짐승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에게 아주 나쁜 종기 생겼습니다.

3 둘째 천사가 대접을 바다에 쏟으니, 바닷물이 죽은 사람의 처럼 되고,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이 죽었습니다.

4 셋째 천사가 대접을 강과 샘물에 쏟으니, 물이 되었습니다.

5 내가 들으니, 물을 주관하는 천사가 말하기를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거룩하신 주님, 이렇게 심판하셨으니,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6 그들은 성도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피를 주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7 내가 들으니, 제단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전능하신 , 주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 하는 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8 넷째 천사가 대접을 해에다 쏟았습니다. 해는 불로 사람을 태우라 허락을 받았습니다.

9 그래서 사람들은 몹시 뜨거운 열에 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재앙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였고,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10 다섯째 천사가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은 괴로움을 이겨서 자기들의 혀를 깨물었습니다.

11 그들은 아픔과 부스럼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주석
일곱 대접(1): 나팔 재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심판의 비유적 표현은 구약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애굽에 내린 심판에서 특별히 빌려온 것이다. 그것은 요한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예전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자가 항복하고 그들이 해방될 일어날 이러한 심판으로부터 보호받으리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IVP 성경배경주석).

 

명령에 따라 천사들이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일곱 대접을 땅에 쏟기 시작합니다(1절). 처음 다섯 대접이 땅, 바다, 강, 해, 짐승의 왕좌에 쏟아지고, 애굽에서 일어난 재앙과 유사한 재앙들이 일어납니다(2-4; 8-10절). 이 재앙들이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회개하지 않습니다(9, 11절). 그리고 천사와 제단에서 나온 소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고 고백합니다(5-7절).

 

애굽에서 일어난 재앙을 떠올리게 하는 일곱 대접의 심판은, 잠시 동안 이 땅에서 권세를 휘두르던 짐승의 세력들을 꺾어 놓습니다. 하나님의 이 엄중한 심판은, 정의를 요청하던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6절).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공의롭습니다. 오늘 하루, 이 주님의 의로우심을 노래합시다.

 

——

 

대접 재앙의시작

 

드디어 대접 재앙이 쏟아부어진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사단을 따르던 자들에게 대접의 재앙이 쏟아진다. 

대접의 재앙은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10가지 재앙과 매우 유사하다. 

바다와 강물이 피로 변한다. 

해가 불타 오른다. 

어둠이 가득하다. 

재앙 속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는다. 

완악함이 극에 달한다.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인간의 도덕적 선택이 그동안 만들어왔던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마치 자연히 일어난 , 마치 하나님의 잘못인양, 마치 역사의 순리가 그러하다는 , 회피한다. 

어찌 모든 원인이 자기에게만 있거나, 혹은 외부에게만 있겠는가! 

한쪽으로만 치우친 원인 찾기는 결국 마음의 완악함만 쌓이게 만든다. 

하나님의 재앙은 그들의 반역 때문임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반역의 시작과 역사적 전환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께 반역의 죄를 저질렀다. 

하나님께서 하지말라는 바로 그것을 행했다. 

물론 번의 반역 행위가 인류에 미친 영향이 너무 지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인간을 대표하는 사람, 지도자의 반역이 인류 사회 전체에 미친 악영향이 어머어마하다. 

아담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대리통치자였다. 그래서 더욱 그랬던 같다.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그와 달랐다. 자발적으로 순종하셨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셨다. 

그것이 구원의 길을 여는 새로운 종족의 탄생을 알리는 길이었다. 

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겠다는 말이다. 

더이상 아담의 계보를 따르지 않고 예수의 계보를 따른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나도 걸어가는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드디어 하나님의 공의로운 개입이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사단을 따르던, 마음에 자기 확신으로 가득차 회개를 모르던 자들은 하나님의 재앙으로 고통 속에 죽어간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간의 자신들의 삶에 대해 확신에 차있다. 

하나님은 참으로 공의롭게 개입하신다. 

 

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에서 "그렇습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 주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 하는 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공의로운 심판에 목말라한다.   

모두들 자신이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잘못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다고 항변한다. 

진실을 밝히기가 어렵다. 

모든 증인들이 양심껏 증언하는 것이 아니다. 

속고 속이는 싸움이 계속된다. 

서로 자신들의 머리가 좋다고 여기면서 상대방을 속인다. 

그렇게 재판은 뒤틀어진다. 

검사도 변호사도 자기에게 유리한 증언과 증거만 가지고 판결을 기다린다. 

공의와 정의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실을 아신다. 마음 생각까지도 아신다. 뇌파의 흐름을 아시고, 세포간에 전달된 정보들도 아신다. 

그분만이 가장 진실하고 공의롭고 공명정대한 심판과 재판을 여실 있는 분이시다. 

그분만이 일을 내실 있다. 

우주는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준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신비로운 투성이가 바로 우주다. 

그러하기에 과학자는 신앙인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 보기 때문이다.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지혜로 가장 공의롭게 심판과 재판을 하신다. 

 

 

마음의 완악함과 싸우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고집을 피우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지 않고, 지고 싶지 않고, 더욱 유명해지고 인기가 있어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사람들의 인정에 더욱 매달리기도 한다. 

설교 편에 대해 칭찬을 듣고 싶어진다. 

설교듣는 사람들이 변화되길 소망한다. 

그들이 다가와 칭찬해주길 바란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이 곳에 내가 서게 된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의 자리에 내가 있으려고 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께 오롯이 모든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가 묻게 된다. 

나의 설교 퍼포먼스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모습이 제대로 전달되고, 그분의 메시지가 제대로 선포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리에 서면 안된다. 

마음의 고집과 싸워야 한다. 

주님께 다시 자발적으로 순종하고자 한다. 

그분의 구원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구원의 역사에 기뻐하면서 자발적으로 순종하고자 한다. 

그게 신앙인의 삶이다.   

 

 

——

주님, 마음에 여전히 남아있는 완악함이 있다면 버리게 해주세요. 

역사의 주인되시고, 인류 구원의 희망과 구체적인 실천을 행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덕분에 제가 있었습니다. 

주님 덕분에 수많은 생명이 삶을 얻었습니다. 

인류가 살아갈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반역한 인류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에 더욱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있도록 도와주세요. 

주님의 말씀을 더욱 기뻐하면 살아가도록 도와주세요. 

 

오늘도 주님께 맡깁니다. 

모든 만남에서 주님의 인도와 사랑과 평화를 느끼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손길과 흔적을 경험하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8 10 화요일

여는 기도

내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1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크고도 놀라운 다른 표징을 하나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난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지막 재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으로 끝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나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짐승 우상과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를 이긴 사람이, 하나님의 거문고를 들고 있었습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 부르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 전능하신 ,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신 주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도 참되십니다.

4 주님, 누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 앞으로 와서 경배할 입니다. 주님의 정의로운 행동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5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있는 증거의 장소인 장막 성전이 열리고,

6 성전으로부터 일곱 천사가 일곱 재난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깨끗하고 빛나는 모시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7 생물 가운데 하나가,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신 나님의 진노를 가득 채운 대접 일곱 일곱 천사에게 주었습니다.

8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에서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차게 되니, 일곱 천사의 일곱 재난이 끝나기까지는, 아무도 들어갈 없었습니다.

 

주석
3절: 이 노래는 “모세의 노래”로서, 홍해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부른 구원의 노래를 암시한다(출 15:1-18 참조). 따라서 도입부(2절)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에 상응하는 요소를 담고 있다. 곧 유리 바다는 홍해에 상응하고, 바로와 이집트인은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에 상응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이제 마지막 재난, 일곱 대접의 재앙이 시작됩니다(1절). 이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모습(1절)과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의 모습이 대비됩니다(3절). 짐승의 공격을 이겨낸 이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양합니다(3-4절). 이제 마지막 재난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온 세상에 세워질 것입니다.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모습은 출애굽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애굽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과 홍해 사건은 애굽에는 두려움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분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심판 역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마침내 이 땅의 불의를 심판하시고 그분의 정의를 회복하실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

 

선뜻 묵상을 글로 옮기기가 주저된다. 

말씀의 그림 아니라 나의 삶에 주어진 수많은 그림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말씀 자체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요한계시록이 워낙에 추상적이고 뜬금없는 그림들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욱 그런 같다. 

역사서의 경우는 그래도 납득이 되고 개연성이 있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요한계시록은 그렇지가 않다. 전혀 개연성없는 꿈과 같은 장면이 불쑥불쑥 튀어 오르기 때문이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난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받아 죄인들과 악인들에게 퍼부을 작정이다. 

일곱 천사에 대한 하나님의 특명이 떨어지고 실행되기 전에, 

사단의 세력을 이긴 자들의 노래가 들린다. 

이긴 자들은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있다. 

주님만이 홀로 영광받으실 분이시다. 모든 민족이 주님 앞으로 와서 경배할 것이다. 

그동안은 주님의 은혜에 대해 노래를 했다면, 오늘은 주님의 정의로운 행동에 대해 찬양하고 있다. 

이제 오랫동안 쌓여 있던 인간 재판의 불공정함이 철퇴를 맞는 날이다. 

사단과 그의 졸개들, 그리고 수많은 인간 팔로워들은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에 넘겨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반역을 결국에 정의롭게 판단하신다.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내려진다.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고 기회를 주셨지만, 결국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쏟아진다. 

수많은 재앙이 그들에게 닥친다. 

수많은 죽음이 그들 앞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요한계시록의 그림을 싫어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려한다. 

괜히 분명하지도 않는 해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겁주는 같기도 하고, 

그걸 빌미로 종교사업한다는 외부의 비난에 직면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제일 편하고 좋은 이야기들로 채우려는 욕망에 굴복한다. 

가르치는 자들이 범하는 어리석음 하나다. 

성경 전체에서 다루는 모든 주제를 가능하면 모두 다루어야 한다. 

신앙 인격의 형성은 성경의 모든 주제를 자기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여러번의 믹싱과정을 통해 내적으로 통합할 점점 온전함으로 나아간다. 

한가지 주제만으로 신앙 인격이 성장하지는 않는다. 

성경의 주제들은 마치 섞이지 않는 다른 재질과 물성들을 지닌 같다. 

믹서기에 넣어 주제들이 서로 어울리도록 갈고 흔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믹싱되는지 과정을 보는 것도 필요하다. 

내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노력없이 한두가지 주제에 꽂혀 그대로 밀어 부친다면, 

약간 괴기스러운 존재의 신앙 인격이 등장한다. 

자기부인이 사라진 사라진 신앙 인격은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의 가면 혹은 옷을 입고 길거리를 활보한다. 

어울림과 자연스러움이 사라진 신앙의 옷은 개성을 넘어 크로테스크 쪽으로 발전한다. 

대중과의 접점을 잃어버리고, 자기만의 삶에 틀어박혀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는 히키코모리같은 모습으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가 비록 어렵고 거부하고 싶더라도 

우리의 신앙 인격의 믹서기 안에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씨름해야 한다. 

그분의 정의과 심판은 어떻게 다른 성경의 주제들과 어울리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신앙이 하나님과의 관계이기에 기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그분에 대한 이해이기에 상당히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그걸 오늘도 인내하며 그분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요한이 보았던 비전과 그림을 오늘도 나의 신앙 인격의 믹서기 안으로 밀어 넣는다. 

더욱 온전해질 모습으로 기대하면서 

더욱 예수님을 닮을 자아가 되길 기대하면서 

 

——

예수님, 어찌보면 이미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쏟아부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숱한 전쟁과 기아와 기후 재앙이 끊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못먹어서 죽고, 병들어 죽고, 싸우다 죽습니다. 

참혹한 전쟁을 멈출 능력이 인류에게 없습니다. 

1, 2 세계대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미사일이 떨어지고, 포탄이 날아다닙니다.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독가스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무작정 자연 현상에 대입하는 우를 범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고 단정짓기도 주저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시간을 제가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든,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이든 간에 지금 세계는 재앙적 환경을로 치닫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를 구원해주세요. 

우리를 구출해주세요. 

 

인류를 버리지 마시고, 주님의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건져주세요.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예수님의 통치를 세상이 온전히 인정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주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간청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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