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23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15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17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18 요한은 그 밖에도, 많은 일을 권면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19 그러나 분봉왕 헤롯은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관련된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 때문에, 요한에게 책망을 받았고, 20 거기에다가 또 다른 악행을 보태었으니, 요한을 옥에 가둔 것이다.

 

주석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16절) 요한 자신은 메시아의 신발 끈을 푸는 종이 될 자격조차 없다고 말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성령과 불 세례(16절) 성령과 불 세례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요한의 종말론적 기대를 나타낸다(IVP 성경비평주석). 

 

헤로디아와 관련된 일(19) 헤롯 안티파스는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륜 관계였다. 그 뒤에 헤로디아는 빌립과 이혼하고 안티파스와 재혼했다. 유대교 율법은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요한은 헤롯에 맞서 거침없이 말했고, 그 결과를 감수해야 했다(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15절).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예비하는 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16절). 예수님은 요한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분으로서 불과 성령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첨예하게 가르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16-17절). 요한은 자신의 권면이 ‘기쁜 소식’이라고 말했습니다(18절). 그리고 그는 그 기쁜 소식을 따라 왕의 행실을 책망했고, 결국 옥에 갇히게 됩니다(19-20절).

 

요한은 자신에게 집중된 기대를 예수님께 돌리며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동시에 그에 따른 대가 역시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는 요한과 같은 겸손함과 충직함이 필요합니다. 나보다 예수님이 더 주목받으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립시다. 또한 옳은 길이라면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타협 없이 충직하게 걸어갑시다. 기쁜 소식을 따라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은 기도로 시작하고 싶다. 

 

몸과 마음을 주님께 솔직히 보여드립니다. 

꾸미거나 위장하지 않겠습니다. 

좋게 보이려고, 그렇다고 부러 나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갑니다. 

주님, 말씀으로 저를 비춰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요한의 겸손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므온도, 안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분들이었고, 게다가 성령님으로 충만한 분들이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고 싶었다. 

이집트에서 히브리 백성들을 탈출 시켰던 모세처럼, 가나안의 여러 폭력적인 민족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던 사사들처럼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탈출 시켜주는 새로운 지도자를 원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단순히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요단강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실 메시야는 물이 아니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새로운 백성으로 다시 만들어 주는 일, 그 일이 메시야의 역할이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요한은 더욱 겸손해 질 수 있었다.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었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러 온 대사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 일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3년간의 공생애를 무사히 시작하고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분위기를 만들었고, 사람들을 길러냈다. 

예수님의 메시지에 반응할 수 있는 환경과 사람들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역할을 탁월하게 잘 감당했다. 

그의 겸손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다. 

 

나는 탁월해지기를 갈망한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특별한 존재로 살고 싶다.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특별한 기여, 역사에 남는 공로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욕구가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나에게 주어진 역할보다 더 많은 것을 꿈꾸는 교만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겸손하게 내 역할에 집중하지 못하고, 항상 더 위대한 것을 갈망한다. 

그러니 참 피곤하다. 

나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도 피곤하다. 

탁월함은 유지하면서 겸손할 수 있는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2. 요한의 용기 

요한은 겸손할 뿐 아니라 용기와 결기의 사람이다. 

당시 권력자의 추한 행동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광야에서 설교를 했을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부정을 폭로했다.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일반 백성들의 죄만 아니라 권력자의 죄를 언급한다. 

위험한 일이다. 

권력자들은 언제나 백성들의 인기를 가진 사람들의 발언에 주목한다. 

허약한 권력 정당성을 가지면 더욱 그렇다. 

자신이 부족하고 그래서 열등감을 가진 권력자들은 언제든지 권좌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위협을 받는다. 

지금 이스라엘 전역에 가장 핫한 인물이 요한이다. 

그를 내편으로 삼든지, 죽이든지 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요한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회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죄를 지은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다. 

자신들의 권력으로 율법을 어기고도 버젓이 왕 노릇을 하고 있다. 

구약의 숱한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세례 요한도 용기있게 비판하는 설교를 한다. 

주저함이 없다. 

두려움이 없다. 

요사이 윤석렬 정부가 하는 일은 이해하기가 참 힘들다.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일을 감행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영구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데, 도리어 전쟁 위기를 부추긴다. 

경제 정책이 실패할 수도 있고, 지난 과거 정부의 정책 여파로 현재 상황이 어려울 수도 있다. 

100번 양보해서 그렇다하더라고, 최소한 무기 밀집도가 최상위인 이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최대한으로 낮추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최근에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비상용 배낭을 하나 구입해야 할까봐”

나도 모르게 두려움이 찾아온다.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등의 생각이 든다. 

나라를 더욱 힘든 상황으로 이끌고 있는 윤석렬 정부를 비판한다. 

그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하는 것도 힘들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에 적을 두고,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다스리기 위해 권력, 권한을 활용해야 한다. 

어떤 정부건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어떤 대통령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아서는 안된다. 

대통령과 관료들은 과거 시대의 왕과 신하들이 아니다. 

지금은 국민을 위해 섬기는 공무원일 뿐이다. 

따라서 국민을 위해 국익을 위해 일하도록 역할과 돈을 맡긴 것뿐이다. 

그렇다면, 기독인들은 하나님 나라 가치를 심사숙고해서 자신의 양심에 맞게 지지와 반대를 보내면 되는 것이지,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렇기에 기독인들은 회색지대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면서도 혼전성관계를 반대할 수 있다. 

독신주의를 옹호하면서도 비혼주의를 반대할 수 있다. 

민주당의 정책을 옹호하면서도 민주당의 당론을 반대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우리는 정치 단체 자체를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에 반한다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동일시 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비교적 잘 드러내는 정치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그 집단과 단체를 일시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어느 집단이나 단체나 할 것 없이 첫 마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우리는 자신이 옹호하는 집단의 변화를 예민하게 관찰해야 할 것이다. 

 

나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너무 숨고 지냈나 싶다.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내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도 그렇다. 

겸손과 용기, 세례 요한만 가진 자질이 아니라, 예수님도 가졌던 자질이다. 

그러기에 나도 그 자질들을 갖고 싶다.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신 주님, 

주님을 닮아 때로는 한없이 겸손하게, 때로는 한없이 날까롭게 해주세요. 

겸손과 용기를 허락하소서.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어린이처럼 마음이 여립니다. 

용기가 없습니다. 

새로운 용기를 허락하소서.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5월 10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67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69 우리를 위하여 능력 있는 구원자를 자기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 70 예로부터 자기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71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셨다.72 주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자기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73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니,74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75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

 

76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78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79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80 아기는 자라서, 심령이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석

거룩한 언약(72절) 누가의 주장에 따르면, 아브라함 및 다윗과 맺은 언약은 조건 없는 약속으로,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에서 성취되었다(IVP 성경비평주석).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78-79절) 하나님은 요한의 정의 요구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어둠 속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요한의 탄생 이후 사가랴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언합니다(67절).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며 원수들로부터 건져내십니다(68-71절). 이는 아브라함과 맺은 ‘자기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며, 그 백성들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의롭게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72-75절).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이 언약을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76-79절).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된 존재로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여러 염려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우리 정체성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함과 자비는 지금도 우리를 향합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의롭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간구합시다.

 

[오늘의 묵상]

사가랴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자 사가랴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언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구원자에 대한 예언이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당시에 이 예언을 듣던 사람들은 뜨아 했을 것이다. 

방금 태어난 아기 요한에 대한 예언인지, 아님 다른 아기에 대한 예언인지 처음에는 헷갈렸을 것 같다. 

물론 예언을 끝까지 들으면, 아기 요한에 대한 예언이 등장하기 때문에 정리가 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사가랴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 과연 저주라고 할 수 있을까? 

가브리엘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받은 저주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저주가 아니라 징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다. 

그 말씀을 계속 간직할 것을 강제하는 강력한 표시등이다.

말을 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사가랴는 임신한 아내의 배를 보면서 복합적인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져갔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머리를 멤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되씹고, 동시에 성경에 비슷한 사례를 다시 찾아 읽어본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묵상하고 기도한다. 

그러니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훈련이다. 

그 침묵의 기간이 끝나자, 그는 성령님의 충만을 받는다. 

말을 많이해서 받는 성령님이 아니라, 말이 없는 중에 받는 성령님의 충만이다. 

몇 개월을 말없이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뜻에 대해 기도한 뒤에 받는 성령 충만이다. 

오순절 성령 충만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같고 다른지는 논의하지 않겠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에게 침묵은 그래서 축복이다. 

 

말이 많은 시대를 산다.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낸다. 

지금 이렇게 묵상의 글을 쓰는 것도 내 목소리를 찾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메시지를 나의 말과 글로 정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과 글이 너무 많다. 

신문도 많고, 블로그, 유툽도 많다. 

공식, 비공식 문건도 너무 많다. 

모든 것을 다 읽고 들을 수 없다. 

인공 지능, 수퍼 컴퓨터도 아니고, 사람이 어찌 그 모든 것을 다 처리하겠는가? 

말과 글과 메세지가 넘치는 세상, 

그래서 우리는 침묵이 필요하다. 

흘러 넘쳐 속옷까지 다 적셨다.  

내가 나인지, 주변의 말들이 나인지 헷갈리는 시대다. 

그렇기에 침묵한다. 

그 침묵 속에서 성령님의 충만을 경험하고 싶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집중해본다. 

 

성령님의 충만은 인류 역사의 가장 소중한 순간을 감지하게 한다. 

메시아의 탄생, 인류 구원의 시작, 원수에게서의 해방,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기, 거룩하고 의로운 삶. 

메시야의 탄생은 이 같은 새로운 삶과 역사를 낳는다. 

그리고 충만한 성령님의 임재는 이 역사를 감지하게 한다. 

 

예언 중에 눈의 띄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시면 더이상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지 않게 될 것이다. 

사단의 기소가 끝난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문을 여신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 

두려움 때문에 기도하고, 두려움 때문에 예배드리는 삶이 청산된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 

 

둘째, 평생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간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너무 대단하고 멋지지만, 결국 우리의 삶도 바뀌게 된다는 점이 감사하다. 

말로만의 신분 변화는 참 받아들이기 싫다. 

신분이 바뀌었다면, 그에 걸맞는 인품과 삶이 따라와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일조차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경의 인물들이 증명하고, 내 삶이 증명한다. 

내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메시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간다. 

 

역시 여기서도 순서가 중요하다. 

우리가 거룩해지고 의로워져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니, 점점 거룩해지고 의로워지는 것이다.

원수로부터 해방되어 더이상 참소를 받지 않으니, 하나님께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고, 그러니 점점 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영적, 심리적 역동이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을 꿈꾼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이상한 지점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는 표현이다. 

언제부터 광야에 갔다는 말인가? 

광야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가? 

누가는 왜 이런 내용을 이 책에 담았는가? 

세례 요한은 참 신비로운 인물이다. 

사가랴의 예언대로 그는 예수님의 도래를 준비했다. 

예수님보다 앞서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그 자신도 인기를 누렸지만, 언제나 자신보다 더 큰 이가 있다는 사실, 자신은 그저 그분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 소명 의식이 그의 삶의 지배했다. 

아마도 이런 그의 의식과 삶의 스타일과 메시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광야가 아닌가 싶다. 

사가랴가 침묵을 통해 배웠던 것을 요한은 광야에서 배웠다. 

침묵을 통해 성령님의 충만함에 이른 것처럼, 광야를 통해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사역한다. 

침묵과 광야를 그렇게 서로 통한다. 

 

나에게 침묵과 광야는 어디인가? 

나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 침묵과 광야는 어디인가?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 인생에 침묵과 광야는 어디인가?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길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침묵과 광야!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인가!! 

 

 

[오늘의 기도]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를 기대합니다. 

당신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관계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교제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남고 싶습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관계로 남고 싶습니다. 

지식이 과하여 당신을 분석하고 재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성령님의 충만함 속에서 꼭 필요한 말을 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12. 26. 김혁수

 

[본문_요한복음 1:1-18_새번역]

1태초에말씀 계셨다.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 하나님이셨다. 2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창조된 것은 4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6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요한이었다. 7 사람은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빛이 있었다.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14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5(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6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17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18일찍이, 하나님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0. 들어가며 

- 가장 수확

저는 이번 12 시리즈를 준비하고 설교하면서 나름 수확을 얻었습니다. 4 복음서가 각기 특징이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간사가 되기 위한 시험이 있는데, 때도 공부했었구요. 신학교에서도 공부했습니다. 당연히 여러 책들을 통해 전부터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명의 성경 저자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지를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지식이 어떤 적용점을 낳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당장 답하기가 궁색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명의 저자가 자신만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주목하고 집중했다는 사실은 저에게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감을 심어 줍니다. 안전한 바운더리를 넘지 않는 선에서 저는 맘껏 예수님을 묵상하고 상상하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크심에 놀라며, 그분의 양파같은 신비로움에 설렙니다. 

 

1. 사도 요한

- 요한의 저작들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의 저작은 요한복음과 요한 1, 2, 3 그리고 요한 계시록입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서로 다른 저자가 썼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교회 전통에서는 오랫동안 다섯 권의 책을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 사랑과 계시

요한 1, 2, 3서의 핵심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 요한에게 컴플레인을 제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매번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의 사도가 요한 계시록이라는 책도 씁니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 에베소교회를 섬기던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요, 거기서 환상을 보고 기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요한 계시록이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한 계시록은 우주적 스케일의 대변혁을 그리고 있습니다. 언뜻보면 사랑의 사도인 요한이 그런 계시록을 썼다는 것이 쉽게 조화되지가 않습니다. 사랑과 계시, 둘이 왠지 매칭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지극히 따뜻한 정서적인 표현같고, 계시는 그림언어로 경고하는 보입니다. 사랑은 품고 안아주고, 계시는 경고하고 배척합니다. 둘이 상극처럼 느껴지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상대적으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요한에게 사랑과 계시는 어울리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는 본질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그분의 메시지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것을 꿰뚫어 봤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 나라가 로마의 세계 통치를 뒤엎고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올 것을 강력한 그림 언어로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강력한 통찰능력을 하나님이 끝까지 사용하신 것이라고 있습니다. 

 

- 철학적 신학자 & 비전가

그런 면에서 요한은 철학적 신학자요 또한 비전가였습니다. 예수님의 본질, 그분의 메시지의 본질을 통찰했습니다. 그리고 미래 비전에 한껏 고취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이런 점들이 철학을 전공하고, 신학을 공부했으며, 여전히 비전을 따라 살아가는 같은 수많은 사역자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줍니다. 현실의 디테일이 부족할 있습니다. 계산적이지 못합니다. 현실 감각이 떨어질 있습니다. 구름을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박해의 시대, 절망의 시대, 두려움의 시대에는 사안의 본질과 미래 비전을 통찰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요. 

 

AD 90년대가 바로 그랬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지도 오래되었으며, 예수님을 직접 사람들도 거의 사망하고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이제 요한만 남았습니다. 그도 박해를 받아 섬으로 유배를 떠나는 상황입니다.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이단들이 득실댑니다. 예수님은 사실 참된 인간이 아니었다는 가현설이 등장합니다. 내외부에서 찾아오는 공격에 초대교회는 위태위태했습니다. 요한은 현실을 뚫어내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며, 그분의 메시지는 사랑이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어 승리한다는 비현실적 비전과 근본적인 메시지를 설파한 겁니다. 

 

2. 하나님이신 예수님 

요한복음은 권의 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기록된 책입니다. 신학적 난제에 빠져 들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누구인가? 문제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 겁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신학적 문제 의식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럼 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의 성육신을 보고 있나요? 

 

1) 로고스(1-4, 14)

 

첫째로 요한은 예수님은 로고스 말씀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이건 묘한 단어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사용되는 로고스는 비인격적인 우주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유대교에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창조물로 비춰집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과 권세를 가진 분의 출현을 표현합니다. 

 

1태초에말씀 계셨다.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 하나님이셨다. 2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창조된 것은 4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로고스는 요한에 의해 새롭게 정의됩니다. 그는 헬라 철학도 알고 있었고 유대교 전통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철학과 전통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분이 계신데, 바로 100% 하나님, 100%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을 표현할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접근할 있는 단어를 하나 골랐는데, 그것이 로고스인 겁니다. 오해를 낳을 있었으나 친근한 단어에 새로운 개념을 추가하여 예수님을 설명하고자 시도한 겁니다. 로고스라는 단어에 인격성을 불어넣었습니다. 로고스라는 단어에 하나님의 지위와 능력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로고스가 실제 인간이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헬라인들도 유대인들도 요한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독특한 실제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요한을 철학적 신학자라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하는 일들이 이런 거잖아요. 이미 알고 있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와 생기를 불어넣어 새로운 쓰임을 창조합니다. 요한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전혀 감을 못잡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육신 되셔서 세상의 역사 속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거죠. 

 

2) 요한의 예언(6-8, 15)

둘째로 요한은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은 구별하실 있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사가랴의 아들이고요, 사도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에요.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요한복음 1:37-40). 사도 요한의 자신의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을 소개하면서 그도 비범했지만, 사실 세례 요한은 빛을 증언하러 미리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6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요한이었다. 7 사람은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진정한 메시야, 진정한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요한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광야 설교와 요단강의 세례 운동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사전 준비 작업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빛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3) 성전 정화 사건(2:13-22)
번째로 요한은 예수님의 핵심 사역을 성전 정화 사건에 둡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번째 분노가 무엇이었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장사꾼들의 소굴로 더럽혀진 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14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요한복음 2:13-15) 

 

예수님의 분노가 느껴지십니까? 요한은 사건을 이렇게 앞에다 배치했을까요? 여러분, 성전 정화 사건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21장에 배치했습니다. 마가는 11장에 두었고, 누가는 19장에 두었습니다. 자신들의 후반부에 배치했던 겁니다.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라서 기록은 했지만, 요한은 특히나 사건을 예수님의 성육신의 본질과 연결시키는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에 사건을 끌어 왔던 것이죠. 

 

예수님이 성전이십니다. 예수님이 지성소가 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 더럽혀져 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세요. 

 

18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19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예수님은 타락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아예 허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시죠. 여기에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 화해와 용서의 공간인 성전을 예수님 당신이 대체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의미를 성육신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고 봤던 것이죠. 예수님의 성육신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세상살이입니다. 참성전은 이제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전이 세상에 찾아온 겁니다. 건물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시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을 시공간에 제한시키는 한계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성전이 되시면서, 성령님이 거하시는 곳은 어디나 언제나 성전이 되는 놀라운 변화의 시작을 예수님이 시작하신 겁니다. 

 

3. 사도 요한의 성육신 

-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4)

그래서 사도 요한이 성육신을 구절로 표현한다면, 바로 14절입니다. 

 

14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은혜와 진리로 가득한 로고스가 바로 우리 곁에 계셨고 사셨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진리를 굳게 붙들었습니다. 요한은 분명 과거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분이 육신이 되셨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렇게 말이죠. 그러나 요한복음 전체로 보면 그분은 우리와 여전히 함께 계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성령님의 등장도 그렇거니와 마지막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면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함께 삼위일체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게 달라고 기도하십니다(요한복음 17:21). 그건 여전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니 14절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고, 앞으로도 계속 보게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며, 여전히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현재진행형으로 말이죠. 노년의 사도 요한은 불안한 초대교회 내외부를 바라보며 단호히 주장합니다. 

은혜와 진리로 똘똘 뭉쳐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자 하나님이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4. 나가며 

-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사시는 하나님

요한이 성육신은우리 가운데 사시는 하나님으로 요약할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분은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물리적 성전에 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따라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겁니다. 우주의 왕이자 하나님이 우리 옆에,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이것이 요한이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모이기가 어렵습니다. 사회적인 비판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무신론의 공격도 날이 갈수록 매섭습니다. 윤리적으로도 자리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신앙 교육은 지지부진합니다. 공동체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갑니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사도 요한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함께 사시는 예수님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집중해야 일도 그러합니다. 상황은 우리를 억눌러도 우리의 정신만은 우리의 영혼만은 독수리처럼 높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갑시다. 우리와 함께 사시는 예수님께 고도로 집중하여 그분의 날개 위에 올라타고 현실을 뛰어넘는 비전에 몰입합시다. 위에서 그분과 함께 세계를 조망합시다. 요한의 정신을 배웁시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번 주에 주시는 그분의 메시지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한 주가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우주의 , 하나님이십니다. 사실을 다시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을 높이는 기도를 드립시다. 그분이 누군신지 다시 고백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여전히 함께 사시는 분이십니다. 2천년 전의 역사 인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으로 우리와 사십니다.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중에 여러분은 누구에게 매력을 느끼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2.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사실을 어떻게 경험하셨나요?  

2021 07 07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9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인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10 주님의 날에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11 음성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12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오는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촛대가 있는데,

13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14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과 같이,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15 발은 풀무불에 달구어 놋쇠와 같고, 음성은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16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17 그를 때에, 내가 그의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것과 지금의 일들과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20 네가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심부름꾼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주석
18절: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권세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지금 닥칠 수 있는 죽음에 용감하게 맞서도록 격려해 줄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요한에게 본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큰 음성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큰 음성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분은 일곱 금 촛대(일곱 교회) 한 가운데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일곱 교회의 심부름꾼)을 쥐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모습은 성경의 여러 부분(겔 1:24, 9:2, 단 10:5-6, 7:9 참조)에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마주한 요한은 큰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이런 요한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7절). 그 분은 처음과 마지막,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고,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17, 18절). 초대교회에 전해진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

예수님과의 만남

 

사도 요한 만큼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지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했었다. 예수님은 삽자가에서 돌아가실 ,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길 정도였다. 서로 깊이 신뢰하는 관계라고 있다. 

예수님의 얼굴을 누구보다도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의 말년, 그는 밧모섬에 갇힌다. 

여러 환난을 겪었으며, 그럼에도 끝까지 인내하고 있는 요한은 밧모섬에서 성령님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음성을 듣게 된다. 

신기한 것은 앞에서 음성이 들리지 않고 뒤에서 그것도 엄청 크게 들렸다는 사실이다.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겼다기보다는 그저 신기할 뿐이다. 일반적이지는 않다. 아마도 깜짝 놀래키려고 그러셨나싶다. 

하나님은 굳이 음성으로 말씀하지 않으셔도 충분히 신적이다. 

작은 음성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도 없는데 소리가 들린다면 깜짝 놀라게 것이다. 

그런데 뒤에게 음성이 들렸다. 엄청 놀랐을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들어 육체의 귀는 쇠하였을지 모르나 요한의 영적인 귀는 엄청난 음성을 아주 정확하게 캐치하였다. 

노인 요한, 그는 이제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다. 

젊었을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자하고 자비로웠던 예수님의 모습보다는 위엄과 능력으로 가득한 모습이었으며, 언뜻 보기에는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모습으로 계신다. 

영광스러운 왕의 모습이었다. 흰머리, 붉은 눈동자, 발이 끌리는 , 가슴엔 금빛 띠를 누르시고, 발에는 장화를 신으셨는데 놋쇠같은 강인한 신이었다. 하나같이 위엄있고 권위있는 모습이었다. 과거에 예수님이 입고 다니시던 일반인의 복장이 아니었다. 

노인 요한은 이제 왕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다시 보게 것이었다. 

어찌보면 모습이 원래의 왕되신 예수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예전에 보았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을 하러 세상에 오신 분의 모습이었지, 우주의 왕의 풍모와 복장을 갖춘 왕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진정한 왕으로 오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왕의 모습으로 오실 있었던 여러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죽음을 맛보았다. 정말 죽었다고 봐야 한다. 그저 죽은 했다가 아니다. 정말 그분은 죽음이 가지고 있는 여러 특성을 몸소 경험하셨다. 숨이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오랜 영적 연합에서 이탈되었다. 어떤 문서에 보면 죽음의 기간에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말도 있다. 그걸 인정하든 하지 않든 그분이 인간이 겪는 죽음의 과정을 온전히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주는 고통과 외로움과 막막함을 그분도 경험하셨다. 그렇게 그분은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는 싶었다. 하지만 죽음도 그분을 계속 가두지 못했다. 사단도, 지옥도, 죽음도, 죄의 구렁텅이도 그분을 가두지 못했다. 그분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영원한 생명의 기운이 다시 작동하였다. 그러니 사망의 세계, 지옥의 세계도 그분께 순종할 밖에 없다. 사망도 지옥도 이제 주인은 엄밀하게 말해 사단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분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사망과 지옥의 불이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그분은 모든 것의 중심이시며 모든 자체이시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역사의 처음과 역사의 마지막은 바로 그분에게 있다. 

빛의 시작과 우주의 시작, 그리고 빛의 만개와 새로운 우주의 시작은 바로 그분에게 달렸다. 

지구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시는 비전. 

예수님은 날을 기다리고 계시다. 

 

왕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인생 최대의 사건이다. 

자기를 왕으로 알고 자라나는 수많은 인생들에게 진정한 왕은 오직 예수님 분이라는 사실은 충격이다. 

여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길 기도한다. 

때로 예배에서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길 기도한다. 

 

——

왕이신 예수님, 

당신의 모습을 실물영접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습니다. 

빨리 오셔서 왕이신 예수님께 저의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싶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여름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수련회와 훈련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주님, 오늘도 왕되신 주님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집중하고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