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23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15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17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18 요한은 그 밖에도, 많은 일을 권면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19 그러나 분봉왕 헤롯은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관련된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 때문에, 요한에게 책망을 받았고, 20 거기에다가 또 다른 악행을 보태었으니, 요한을 옥에 가둔 것이다.

 

주석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16절) 요한 자신은 메시아의 신발 끈을 푸는 종이 될 자격조차 없다고 말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성령과 불 세례(16절) 성령과 불 세례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요한의 종말론적 기대를 나타낸다(IVP 성경비평주석). 

 

헤로디아와 관련된 일(19) 헤롯 안티파스는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륜 관계였다. 그 뒤에 헤로디아는 빌립과 이혼하고 안티파스와 재혼했다. 유대교 율법은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요한은 헤롯에 맞서 거침없이 말했고, 그 결과를 감수해야 했다(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15절).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예비하는 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16절). 예수님은 요한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분으로서 불과 성령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첨예하게 가르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16-17절). 요한은 자신의 권면이 ‘기쁜 소식’이라고 말했습니다(18절). 그리고 그는 그 기쁜 소식을 따라 왕의 행실을 책망했고, 결국 옥에 갇히게 됩니다(19-20절).

 

요한은 자신에게 집중된 기대를 예수님께 돌리며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동시에 그에 따른 대가 역시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는 요한과 같은 겸손함과 충직함이 필요합니다. 나보다 예수님이 더 주목받으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립시다. 또한 옳은 길이라면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타협 없이 충직하게 걸어갑시다. 기쁜 소식을 따라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은 기도로 시작하고 싶다. 

 

몸과 마음을 주님께 솔직히 보여드립니다. 

꾸미거나 위장하지 않겠습니다. 

좋게 보이려고, 그렇다고 부러 나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갑니다. 

주님, 말씀으로 저를 비춰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요한의 겸손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므온도, 안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분들이었고, 게다가 성령님으로 충만한 분들이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고 싶었다. 

이집트에서 히브리 백성들을 탈출 시켰던 모세처럼, 가나안의 여러 폭력적인 민족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던 사사들처럼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탈출 시켜주는 새로운 지도자를 원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단순히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요단강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실 메시야는 물이 아니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새로운 백성으로 다시 만들어 주는 일, 그 일이 메시야의 역할이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요한은 더욱 겸손해 질 수 있었다.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었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러 온 대사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 일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3년간의 공생애를 무사히 시작하고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분위기를 만들었고, 사람들을 길러냈다. 

예수님의 메시지에 반응할 수 있는 환경과 사람들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역할을 탁월하게 잘 감당했다. 

그의 겸손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다. 

 

나는 탁월해지기를 갈망한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특별한 존재로 살고 싶다.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특별한 기여, 역사에 남는 공로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욕구가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나에게 주어진 역할보다 더 많은 것을 꿈꾸는 교만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겸손하게 내 역할에 집중하지 못하고, 항상 더 위대한 것을 갈망한다. 

그러니 참 피곤하다. 

나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도 피곤하다. 

탁월함은 유지하면서 겸손할 수 있는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2. 요한의 용기 

요한은 겸손할 뿐 아니라 용기와 결기의 사람이다. 

당시 권력자의 추한 행동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광야에서 설교를 했을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부정을 폭로했다.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일반 백성들의 죄만 아니라 권력자의 죄를 언급한다. 

위험한 일이다. 

권력자들은 언제나 백성들의 인기를 가진 사람들의 발언에 주목한다. 

허약한 권력 정당성을 가지면 더욱 그렇다. 

자신이 부족하고 그래서 열등감을 가진 권력자들은 언제든지 권좌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위협을 받는다. 

지금 이스라엘 전역에 가장 핫한 인물이 요한이다. 

그를 내편으로 삼든지, 죽이든지 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요한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회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죄를 지은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다. 

자신들의 권력으로 율법을 어기고도 버젓이 왕 노릇을 하고 있다. 

구약의 숱한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세례 요한도 용기있게 비판하는 설교를 한다. 

주저함이 없다. 

두려움이 없다. 

요사이 윤석렬 정부가 하는 일은 이해하기가 참 힘들다.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일을 감행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영구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데, 도리어 전쟁 위기를 부추긴다. 

경제 정책이 실패할 수도 있고, 지난 과거 정부의 정책 여파로 현재 상황이 어려울 수도 있다. 

100번 양보해서 그렇다하더라고, 최소한 무기 밀집도가 최상위인 이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최대한으로 낮추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최근에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비상용 배낭을 하나 구입해야 할까봐”

나도 모르게 두려움이 찾아온다.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등의 생각이 든다. 

나라를 더욱 힘든 상황으로 이끌고 있는 윤석렬 정부를 비판한다. 

그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하는 것도 힘들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에 적을 두고,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다스리기 위해 권력, 권한을 활용해야 한다. 

어떤 정부건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어떤 대통령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아서는 안된다. 

대통령과 관료들은 과거 시대의 왕과 신하들이 아니다. 

지금은 국민을 위해 섬기는 공무원일 뿐이다. 

따라서 국민을 위해 국익을 위해 일하도록 역할과 돈을 맡긴 것뿐이다. 

그렇다면, 기독인들은 하나님 나라 가치를 심사숙고해서 자신의 양심에 맞게 지지와 반대를 보내면 되는 것이지,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렇기에 기독인들은 회색지대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면서도 혼전성관계를 반대할 수 있다. 

독신주의를 옹호하면서도 비혼주의를 반대할 수 있다. 

민주당의 정책을 옹호하면서도 민주당의 당론을 반대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우리는 정치 단체 자체를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에 반한다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동일시 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비교적 잘 드러내는 정치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그 집단과 단체를 일시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어느 집단이나 단체나 할 것 없이 첫 마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우리는 자신이 옹호하는 집단의 변화를 예민하게 관찰해야 할 것이다. 

 

나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너무 숨고 지냈나 싶다.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내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도 그렇다. 

겸손과 용기, 세례 요한만 가진 자질이 아니라, 예수님도 가졌던 자질이다. 

그러기에 나도 그 자질들을 갖고 싶다.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신 주님, 

주님을 닮아 때로는 한없이 겸손하게, 때로는 한없이 날까롭게 해주세요. 

겸손과 용기를 허락하소서.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어린이처럼 마음이 여립니다. 

용기가 없습니다. 

새로운 용기를 허락하소서.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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