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6. 김혁수

 

[본문_요한복음 1:1-18_새번역]

1태초에말씀 계셨다.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 하나님이셨다. 2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창조된 것은 4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6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요한이었다. 7 사람은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빛이 있었다.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14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5(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6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17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18일찍이, 하나님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0. 들어가며 

- 가장 수확

저는 이번 12 시리즈를 준비하고 설교하면서 나름 수확을 얻었습니다. 4 복음서가 각기 특징이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간사가 되기 위한 시험이 있는데, 때도 공부했었구요. 신학교에서도 공부했습니다. 당연히 여러 책들을 통해 전부터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명의 성경 저자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지를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지식이 어떤 적용점을 낳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당장 답하기가 궁색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명의 저자가 자신만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주목하고 집중했다는 사실은 저에게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감을 심어 줍니다. 안전한 바운더리를 넘지 않는 선에서 저는 맘껏 예수님을 묵상하고 상상하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크심에 놀라며, 그분의 양파같은 신비로움에 설렙니다. 

 

1. 사도 요한

- 요한의 저작들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의 저작은 요한복음과 요한 1, 2, 3 그리고 요한 계시록입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서로 다른 저자가 썼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교회 전통에서는 오랫동안 다섯 권의 책을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 사랑과 계시

요한 1, 2, 3서의 핵심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 요한에게 컴플레인을 제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매번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의 사도가 요한 계시록이라는 책도 씁니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 에베소교회를 섬기던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요, 거기서 환상을 보고 기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요한 계시록이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한 계시록은 우주적 스케일의 대변혁을 그리고 있습니다. 언뜻보면 사랑의 사도인 요한이 그런 계시록을 썼다는 것이 쉽게 조화되지가 않습니다. 사랑과 계시, 둘이 왠지 매칭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지극히 따뜻한 정서적인 표현같고, 계시는 그림언어로 경고하는 보입니다. 사랑은 품고 안아주고, 계시는 경고하고 배척합니다. 둘이 상극처럼 느껴지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상대적으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요한에게 사랑과 계시는 어울리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는 본질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그분의 메시지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것을 꿰뚫어 봤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 나라가 로마의 세계 통치를 뒤엎고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올 것을 강력한 그림 언어로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강력한 통찰능력을 하나님이 끝까지 사용하신 것이라고 있습니다. 

 

- 철학적 신학자 & 비전가

그런 면에서 요한은 철학적 신학자요 또한 비전가였습니다. 예수님의 본질, 그분의 메시지의 본질을 통찰했습니다. 그리고 미래 비전에 한껏 고취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이런 점들이 철학을 전공하고, 신학을 공부했으며, 여전히 비전을 따라 살아가는 같은 수많은 사역자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줍니다. 현실의 디테일이 부족할 있습니다. 계산적이지 못합니다. 현실 감각이 떨어질 있습니다. 구름을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박해의 시대, 절망의 시대, 두려움의 시대에는 사안의 본질과 미래 비전을 통찰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요. 

 

AD 90년대가 바로 그랬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지도 오래되었으며, 예수님을 직접 사람들도 거의 사망하고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이제 요한만 남았습니다. 그도 박해를 받아 섬으로 유배를 떠나는 상황입니다.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이단들이 득실댑니다. 예수님은 사실 참된 인간이 아니었다는 가현설이 등장합니다. 내외부에서 찾아오는 공격에 초대교회는 위태위태했습니다. 요한은 현실을 뚫어내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며, 그분의 메시지는 사랑이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어 승리한다는 비현실적 비전과 근본적인 메시지를 설파한 겁니다. 

 

2. 하나님이신 예수님 

요한복음은 권의 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기록된 책입니다. 신학적 난제에 빠져 들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누구인가? 문제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 겁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신학적 문제 의식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럼 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의 성육신을 보고 있나요? 

 

1) 로고스(1-4, 14)

 

첫째로 요한은 예수님은 로고스 말씀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이건 묘한 단어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사용되는 로고스는 비인격적인 우주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유대교에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창조물로 비춰집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과 권세를 가진 분의 출현을 표현합니다. 

 

1태초에말씀 계셨다.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 하나님이셨다. 2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창조된 것은 4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로고스는 요한에 의해 새롭게 정의됩니다. 그는 헬라 철학도 알고 있었고 유대교 전통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철학과 전통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분이 계신데, 바로 100% 하나님, 100%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을 표현할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접근할 있는 단어를 하나 골랐는데, 그것이 로고스인 겁니다. 오해를 낳을 있었으나 친근한 단어에 새로운 개념을 추가하여 예수님을 설명하고자 시도한 겁니다. 로고스라는 단어에 인격성을 불어넣었습니다. 로고스라는 단어에 하나님의 지위와 능력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로고스가 실제 인간이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헬라인들도 유대인들도 요한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독특한 실제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요한을 철학적 신학자라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하는 일들이 이런 거잖아요. 이미 알고 있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와 생기를 불어넣어 새로운 쓰임을 창조합니다. 요한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전혀 감을 못잡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육신 되셔서 세상의 역사 속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거죠. 

 

2) 요한의 예언(6-8, 15)

둘째로 요한은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은 구별하실 있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사가랴의 아들이고요, 사도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에요.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요한복음 1:37-40). 사도 요한의 자신의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을 소개하면서 그도 비범했지만, 사실 세례 요한은 빛을 증언하러 미리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6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요한이었다. 7 사람은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진정한 메시야, 진정한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요한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광야 설교와 요단강의 세례 운동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사전 준비 작업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빛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3) 성전 정화 사건(2:13-22)
번째로 요한은 예수님의 핵심 사역을 성전 정화 사건에 둡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번째 분노가 무엇이었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장사꾼들의 소굴로 더럽혀진 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14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요한복음 2:13-15) 

 

예수님의 분노가 느껴지십니까? 요한은 사건을 이렇게 앞에다 배치했을까요? 여러분, 성전 정화 사건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21장에 배치했습니다. 마가는 11장에 두었고, 누가는 19장에 두었습니다. 자신들의 후반부에 배치했던 겁니다.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라서 기록은 했지만, 요한은 특히나 사건을 예수님의 성육신의 본질과 연결시키는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에 사건을 끌어 왔던 것이죠. 

 

예수님이 성전이십니다. 예수님이 지성소가 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 더럽혀져 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세요. 

 

18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19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예수님은 타락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아예 허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시죠. 여기에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 화해와 용서의 공간인 성전을 예수님 당신이 대체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의미를 성육신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고 봤던 것이죠. 예수님의 성육신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세상살이입니다. 참성전은 이제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전이 세상에 찾아온 겁니다. 건물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시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을 시공간에 제한시키는 한계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성전이 되시면서, 성령님이 거하시는 곳은 어디나 언제나 성전이 되는 놀라운 변화의 시작을 예수님이 시작하신 겁니다. 

 

3. 사도 요한의 성육신 

-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4)

그래서 사도 요한이 성육신을 구절로 표현한다면, 바로 14절입니다. 

 

14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은혜와 진리로 가득한 로고스가 바로 우리 곁에 계셨고 사셨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진리를 굳게 붙들었습니다. 요한은 분명 과거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분이 육신이 되셨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렇게 말이죠. 그러나 요한복음 전체로 보면 그분은 우리와 여전히 함께 계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성령님의 등장도 그렇거니와 마지막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면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함께 삼위일체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게 달라고 기도하십니다(요한복음 17:21). 그건 여전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니 14절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고, 앞으로도 계속 보게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며, 여전히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현재진행형으로 말이죠. 노년의 사도 요한은 불안한 초대교회 내외부를 바라보며 단호히 주장합니다. 

은혜와 진리로 똘똘 뭉쳐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자 하나님이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4. 나가며 

-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사시는 하나님

요한이 성육신은우리 가운데 사시는 하나님으로 요약할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분은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물리적 성전에 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따라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겁니다. 우주의 왕이자 하나님이 우리 옆에,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이것이 요한이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모이기가 어렵습니다. 사회적인 비판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무신론의 공격도 날이 갈수록 매섭습니다. 윤리적으로도 자리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신앙 교육은 지지부진합니다. 공동체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갑니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사도 요한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함께 사시는 예수님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집중해야 일도 그러합니다. 상황은 우리를 억눌러도 우리의 정신만은 우리의 영혼만은 독수리처럼 높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갑시다. 우리와 함께 사시는 예수님께 고도로 집중하여 그분의 날개 위에 올라타고 현실을 뛰어넘는 비전에 몰입합시다. 위에서 그분과 함께 세계를 조망합시다. 요한의 정신을 배웁시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번 주에 주시는 그분의 메시지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한 주가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우주의 , 하나님이십니다. 사실을 다시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을 높이는 기도를 드립시다. 그분이 누군신지 다시 고백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여전히 함께 사시는 분이십니다. 2천년 전의 역사 인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으로 우리와 사십니다.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중에 여러분은 누구에게 매력을 느끼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2.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사실을 어떻게 경험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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