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4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니,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입니다.

 

4 “내가 그들의 반역하는 병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하겠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이제는 다 풀렸다.5 내가 이스라엘 위에 이슬처럼 내릴 것이니, 이스라엘이 나리꽃처럼 피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뿌리를 내릴 것이다.6 그 나무에서 가지들이 새로 뻗고, 올리브 나무처럼 아름다워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향기롭게 될 것이다.7 그들이 다시 내 그늘 밑에 살면서,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거둘 것이다. 포도나무처럼 꽃이 피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유명해질 것이다.8 에브라임이 고백할 것이다. ‘나는 이제 우상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응답할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 주마.’ 나는 무성한 잣나무와 같으니, 너는 필요한 생명의 열매를 나에게서 언제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NIV

I will heal their waywardness and love them freely, for my anger has turned away from them(4절).

 

주석

5절.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야웨는, 여름의 건기 동안 유일하게 꽃과 나무에 필요한 수분을 공급하는 이슬에 비유된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반역은 죄다. 동시에 병적 현상이기도 하다. 

한번 하나님께 반역했더니, 사람들이 반역하는 것을 너무 쉽게 여기게 된다.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 반역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으로 옮긴다. 

영혼에 병이 옮았다. 

사탄이 심어준 교만과 욕망의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 

한 명의 병은 그 사람만 치유되면 해결된다. 

그러나 전염병은 무섭게도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때로는 사회 문화 구조도 바꿔버린다. 

코로나가 그랬다. 

모두가 마스크를 썼고, 온라인 수업과 모임이 표준이 되었다. 

한 사람의 반역은 그 사람의 회개로 해소된다. 

사회 문화 구조가 그 사람의 반역을 반역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모인 반역으로 형성된 새로운 사회 문화 구조는 시스템이 되고, 그 시스템이 자체 역동을 가지고 움직인다. 

반역이 시스템이 되면 그건 반역이 아니라 혁명이요, 칭송의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많은 사람의 반역, 특히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반역은 더 이상 반역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당하는 하나님만 고통을 받으신다. 

사람들은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께 반역이 되는 것이다. 

영혼에 뿌리 내린 병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결국 사회 문화 전반에 퍼진 병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그 병으로부터 회복되기를 바라신다. 

반역의 죄로부터 돌아온다.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이런 날이 오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바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문화가 팽배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저주한다. 

하나님은 공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나, 하나님을 대변해야 할 교회와 기독인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했다. 

왜곡된 하나님이 드러나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심지어는 저주한다.

크게 보면 반역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옳게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둘째, 왜곡되게 보여지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이 둘 다 반역이지만, 수준이 다르다. 

 

첫째가 진짜 반역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와 사랑을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하셨다.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불기둥/구름기둥으로 보호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다. 

율법과 규정을 통해 공의로운 사회상을 보여주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따랐다. 

신약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하셨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의 욕심을 따랐다. 

이것이 진짜 반역이며, 이스라엘과 교회가 지은 죄악이다. 

 

둘째는 잘 몰라서 행하는 반역이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른다. 

그저 무속 신앙의 여러 신들 중 하나라고 여긴다. 

돈과 성공을 위해 도움을 주는 신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공의롭지도 않고 그렇게 사랑이 많지도 않다. 

자기 사람들만 챙기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신이라고 여긴다. 

교회와 교인들이 만들어낸 왜곡된 하나님 상의 결과다. 

그러니 하나님을 저주한다. 

비기독인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정서다.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일까? 

첫째 반역을 저지른 이스라엘과 교회에 잘못이 있다. 

그들이 옳게 하나님을 드러내야 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반역하지 말아야 했다. 

 

이제 방법은 하나다. 

반역의 습관과 정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비판 정신과 순종의 태도에 조화를 맞추는 것이다. 

구조와 문화로 들어와 있는 반역의 정신을 비판하되, 

그 비판 정신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다시 불순종하는 반역의 죄로 나아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비판 정신의 한계를 세우라. 

순종의 태도를 배우라. 

하나님 말씀과 뜻에 대해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배우라. 

비판과 순종의 역설을 몸으로 체득하라. 

 

[오늘의 기도]

예수님, 

정말 어려운 것을 생각했습니다. 

비판도 하고 순종도 해야 한답니다. 

비판 정신으로 구조적 반역의 죄를 밝혀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태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비판만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도 되지 않게 하소서. 

문제가 무엇인지 비판할 수 있되,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제가 구현할 수 없는 이상이라는 사실도 잘 압니다. 

그러기에 기도합니다.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셔서 비판 정신을 유지하되, 순종의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어려우니 도움을 강청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7 16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법도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의로 내게 힘을 주십시오.

 

1 나는 ,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고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2 내가 보니, 힘센 천사가 소리로 "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외쳤습니다.

3 그러나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있는 이는, 하늘에도 없고 위에도 없고 아래에도 없었습니다.

4 두루마리를 펴거나 자격이 있는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일곱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6 나는 보좌와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일곱과 일곱이 있었는데, 눈들은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7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8 그가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대접을 가지고 어린 앞에 엎드렸습니다. 향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9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10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다스릴 입니다."

11 나는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은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13 나는 하늘과 위와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14 그러자 생물은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주석
7: 요한계시록은일곱으로 가득하지만, 로마의 유언장이 보통 일곱 개의 봉인으로 쳐졌다는 사실은 중요할 것이다. 법적 서류의 봉인은 어느 누구도 서류를 개봉하거나 함부로 고치지 않았음을 보증했다. 유언장은 작성한 사람의 죽음이 입증될 때까지는 개봉할 없었다. 여기서 유언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을 열기에 합당한 분은 죽임당한 어린양이라는 것이 중요하다(IVP 성경배경주석).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손에 봉인된 두루마리가 있습니다(1절). 하지만 그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3절). 그래서 요한은 큰 소리로 웁니다(4절). 하지만 곧 그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분이 나타납니다. 그분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입니다(6-8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울고 있는 요한의 마음을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그 요한의 눈물을 그치게 하시는 어린 양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께서 자신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들을 위해 값을 치루시고, 그들을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 시키셨습니다(9절). 이 어린 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라가 되고 제사장이 되었습니다(10절). 어린 양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

하늘 노래의 가사는 두고두고 되새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9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10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다스릴 입니다."

 

어린 양이 봉인을 해제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봉인을 해제할 없다. 

우주의 비밀, 역사의 비밀, 미래의 비밀을 해제할 없다. 

오직 어린 , 죽임을 당하신 어린 만이 일을 있다. 

처음 유다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말을 들었을 때는, 엄청난 인물이 나오는 알았다. 

다윗은 당시에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린 영웅이었다. 

이스라엘을 고대 세계에서 구원해 민족의 구원자였다. 

용사요 장수요 왕이었다. 

유다의 사자와 다윗의 뿌리인 영웅이 나와서 영광스런 보좌의 봉인을 해제한다고 한다. 

말만 놓고 보면, 위대한 왕의 대관식 같은 느낌이다. 백성이 모여 있다. 그들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런데 어린 양이 나온다. 

그것도 죽임을 당했던 어린 양이다. 

보잘 없어 보이는 어린 . 죽임을 당해 보이는 듯한 비참한 느낌의 어린 양인데, 게다가 일곱 개의 뿔과 일곱 개의 눈이 있었다. 

뭔가 괴기스럽기도 하고, 맞지 않는 같고, 심히 역설적이다.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일곱 개의 뿔과 눈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다. 

역설적 존재, 예수님은 모두에게 충격이다. 

일단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 충격이다. 

우주의 왕이 죽임을 당했었다. 

자발적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주의 운명과 미래를 이끌고 일곱 개의 뿔과 눈을 가지신 권능의 주인이시다. 

역설적 존재인 예수님을 천하 만물이 지켜 보고 있다. 

역설이 우주를 구원한다. 

왕으로만 계신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만 계신 분이 아니다. 

죽음과 생명이 동시에 존재하며 역설이 그를 통해 통합된다. 

 

그분만이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다. 

그분이 하신 일은 분명하다.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을 사서 하나님께로 드리셨다. 

인류를 구원하셨다. 

원래의 주인에게도 되돌려 놓으셨다. 

사단의 노예로 죽음의 노예로 결국 죽음을 향해 가던 인류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다.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구원한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원리에 순종하는 나라가 되게 하셨다. 전세계와 하나님을 이어주는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땅을 다스리게 하셨다. 

이건 가히 혁명적이다. 

노예로부터 구원해서 자유민이 되게 하는 것을 넘어서는 조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된다. 

평범한 일반 시민으로 살아도 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계획은 조금 다르다. 

노예가 왕이 된다. 

어린 양이 우주의 주인이 된다. 

역설이 곳곳에 일어난다. 

노예였던 존재들이 일어나 전세계를 다스린다. 

하나님의 통치 질서로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 

일곱개의 뿔과 눈이 달린 어린 양을 따라 그들도 세계의 통치자로 등극한다. 

낮아지심의 본을 쫓아, 죽음과 생명의 통합을 따라, 그들을 우주의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생명의 기운으로 심는다. 

섬김의 리더십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그렇게 성도들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12절은 역설적 찬양을 분명히 보여준다. 

 

12 그들은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온갖 수식어의 찬양이 합당하다. 

적군을 죽인 무시무시한 영웅, 사자와도 같은 용맹과 전투력을 가진 장수에게 붙는 찬양이 아니다. 

오히려 적에게 목숨을 내놓았다. 순순히 사형의 틀을 받아들였다. 살해를 당하셨다. 그것도 아주 부끄러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죽음이 오히려 그에게 가장 영광이 되었다. 

요한이 보았던 찬양이 결국 영원한 찬양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는 칭호를 들으셔야 한다. 

왕이신 예수님은 죽임 당한 어린 양으로 영원히 살아가신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고 우주를 원래대로 회복하는 결정적 우주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모든 불확정의 질서가 그분의 죽음으로 새롭게 확정되었다. 

바로 인류와 우주를 구원하기로 하신 것이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주의 빛이 되어, 모든 원소들의 자리를 잡아 주었다. 

 

어린 양으로 불림받으며 영원히 이름으로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과연 어떻게 들릴까 상상해 본다. 

예수님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기뻐하실까? 

나로서는 약간 부끄러울 같다. 

아슬란이라고 불리고 싶을 같다. 

위대한 사자로 불리고 싶을 같다. 

어떤 순간에는 어린 양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영원히 이름으로 불린다면 그건 조금 아니다 싶다. 

 

역설을 때로 하나님이 원하실 때가 있다고 느낀다. 

강함과 약함이 공존하는 인품.

하나님으로 인해 가장 강력한 자아상을 유지함과 동시에 인간의 가장 연약함을 인정하는 태도.. 

대리통치자의 권세와 권능을 유지함과 동시에, 여전히 취약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 

지금 현실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가지를 동시에 원하신다는 생각이다. 

겸손함과 자신감. 

자기 부인과 자기 확신.

돌아봄과 나아감. 

연약함과 강력함. 

가지 모순되고 역설적인 태도를 동시에 갖추길 원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특성을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고 동시에 유지할 있을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우기는 정신승리 아닐까? 

깊은 심리적, 철학적 논의에 빠지고 싶지 않다. 

오늘 본문이 주는 힌트는 이것이다. 

보좌에 계신 어린 양을 영원히 찬양하는 .. 

그분을 칭송하는 . 역설적 상황에 계신 분을 노래하는  

그것이 본문이 주는 해답이다. 

개인으로는 역설과 모순을 통합해 없다. 

그러나 역설의 주님을 계속 높이고 찬양하다보면, 칭송하다보면, 새로운 성품이 장착될 것인데, 바로 역설적 성품이다. 

약함 속에 강함이 드러나고, 자기 부인 속에 자기 긍적과 확신이 표현되고, 겸손함과 온유함 속에 자부심과 자신감이 뿜뿜이다. 자신을 약함을 인정하는 것과 그럼에도 극강의 확신을 표현하는 일이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충돌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의 통치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역설의 주님을 찬양하면서 역설적 통치자가 되어 간다. 

섬김이 가장 권위가 됨을 몸으로 드러내는 통치자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어린 예수님을 찬양한다. 

죽임 당하신 유다의 사자, 어린 예수님을 높인다. 

그분만이 나의 구원자시요. 왕이심을 

영원히 찬양 받으실 분이심을 

 

——

역설과 모순의 주님, 

그래서 주님을 충격을 받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분의 이름이 어린 양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성품을 배우고 싶습니다. 

주님, 약함 속에 강함을, 겸손함 가운데 확신을, 자기 부인 가운데 자기 긍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통합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을 닯기 원합니다. 

찬양 속에서 주님을 더욱 떠올리기 원합니다. 

오늘도 저의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주님으로 인해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고, 마음의 크기가 커지고, 사랑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도록 도와주세요. 

저의 생각에 갇히지 않고 주님의 생각으로 통합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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