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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P 출판사 - 세상 속 하나님 나라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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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IVP 격월간 묵상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IVP 격월간 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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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6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14 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같이 훈계하려는 것입니다.

15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16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17 이 일 때문에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얻은 나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

18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교만해진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19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20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21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채찍을 들고 여러분에게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MESSAGE

“여러분 가운데 자만해서, 내 말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내가 직접 찾아가 얼굴을 마주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여러분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허세가 가득하다는 것을 확인해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능력 입은 삶이기 때문입니다.”(18-20절)

 

고린도 교회 가운데에는 바울이 어차피 자신들을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그의 훈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18, 19절). 이들은 여전히 회개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세속적 교사의 모습과 같이 권위를 세워 엄히 다가가도록 할지, 아니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온유하게 다가가도록 할지 선택하라고 말합니다(21절).

 

허영과 교만은 영적 아버지의 훈계를 거부하게 만들고 서로 간에 험담과 비난의 소리만을 키웁니다. 성도의 건강한 교제는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향해 권면과 훈계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피상적이고 분열된 친교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의 말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바울은 교회내 파당을 없애고 오직 뿌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두자고 했다. 

그런데 4장 마지막에 이르자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하며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고 있다. 

 

15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편안한 말은 아니다. 

영적 아버지라는 태도조차도 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자기가 영적 아비라는 말을 쓰는 것을 막아야 할 듯 싶다. 

만약에 베드로나 아볼로도 자신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한다면, 그 또한 분열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오직 우리의 영적 아버지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시다. 

이것만 계속 강조해도 될 일이다. 

굳이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말하면서 훈계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같은 성도로서, 교회의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훈계하면 될 일이다. 

그정도도 충분히 권위가 있으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바울은 일반적인 상황을 넘어서서 반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듯 싶다. 

 

18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교만해진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19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20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 중 몇몇은 마음과 생각이 교만해졌다.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개척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보인다. 

바울이 사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하다. 

게다가 바울은 말 뿐만 아니라 여러 능력과 기적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음을 놓치고 있는 듯 싶다. 

바울을 공격한다. 다른 사도나 스승의 이름으로 바울을 깎아 내리고 있다.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서 대면하여 일종의 대결을 하겠다고 편지에 쓰고 있다. 

영적 대결이다. 지식과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가 누구에게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말이 아니라, 사역과 성품의 열매로 드러난다. 

엘리야 때는 능력 대결로 등장했다. 

예수님 때는 소명 대결로 등장했다. 

바울의 때는 열매 대결로 등장하는 것 같다. 

말씀이 얼마나 열매를 맺고 있는가, 교회와 사람들의 변화를 얼마나 일으키고 있는가. 

전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는 바울의 선교와 교회 개척에 대해 바울의 반대자들은 대답할 말과 보여줄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대단히 큰 결심을 했다. 

여차하면 큰 분노를 가지고 고린도에 방문할 계획이다. 

교회의 분열이 가라앉고 교만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바울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채찍을 들고 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리해보면, 바울이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내세우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교만한 반대자들, 특히 말은 많지만 능력과 열매는 없는 자들을 다시 되돌리려는 데에 있다. 

그들을 채찍질해서라도 원상복귀시키고 싶어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아버지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분열은 더욱 심해지고, 바울의 반대자들을 결국 놓칠 것 같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엄중하게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를 가져와서 대처하려는 것이다. 

다행히 이 편지에 반응해서 상황이 호전되었고, 몇몇은 회개하였던 걸로 보인다. 

바울의 아버지로서의 호통이 영향을 준 것이다. 

반대자들에게는 무섭게 다가갔고, 옹호자들에게는 교회 일치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두 그룹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모종의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고린도후서(2:1-11)에 등장한다. 

교회내 치리(처벌)과 회개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바울은 자신이 영적 아버지임을 밝힌다. 

그런면에서 오늘 바울을 이해할 수는 있겠다.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영적 아버지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동체에는 조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현실이다. 

방치하는 것은 또 하나의 죄악일 것이다. 

사랑으로 끝까지 품으려고 해야 하지만, 분열과 싸움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에 대한 분별과 적절한 조치는 필수적이다. 

죄로 인해 공동체는 무너질 수 있다. 죄 자체도 무섭지만, 죄를 다루고 조치를 취하는 공동체에 모습에서 성패가 갈린다. 

권위에 대한 근원적인 반감이 많은 세대. 

이들과 함께 공동체를 세워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바울의 말이 남는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결국 성령님의 능력이 더욱 강하게 역사하는 것. 

그렇지 않고서는 젊은 세대가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가득한 기독 공동체가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길 소망한다. 


하나님, 

바울의 말이 이해가 되면서도, 영적 아버지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 뿐이십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인식하기보다 공동체를 돌보는 청지기요 관리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에는 죄의 문제가 있고, 죄를 다루어야 합니다. 

정당하고 공정한 조치들이 있어야 합니다. 

한 두 사람에 의해 판결되는 일이 아닌 공정한 공동체적 분별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과 조치에 순종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주님, 공정함과 순종이 가득한 공동체를 만들게 해주세요. 

성령님께서 그 두 가지가 함께 가득한 공동체가 되도록 도와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1월 17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10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

1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4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일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5 그러므로,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16 내가 스데바나 가족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마는, 그 밖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석

11절: 여기에 나오는 정보 제공자들은 고린도 아니면 에베소의 부유한 여인이었던 글로에에게 속한 대리자로서 두 도시 사이를 오가며 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비교적 신분이 높은 노예이거나 자유민으로서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이었던 그들은 바울에게 소식을 전했다. 소식이나 서신은 다른 사업을 위해 여행하는 사람들을 통해 가장 빈번하게 전달되었다(IVP 배경주석).


어느 곳에나 분쟁이 있다. 

싸움이 있고, 분열이 있고,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 

고린도교회에도 분쟁이 있었다. 

분쟁의 발단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몇 가지 유추해 볼 요소가 있다. 

먼저, 그들은 아볼로 편, 게바 편, 그리스도 편이라는 단어를 써가면 편가름, 줄서기를 하고 있다. 

둘째, 이는 세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바울은 자신이 매우 적은 소수에게 세례를 베푼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있다(14절)

이 두 가지 근거를 놓고 볼 때, 문제의 발단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문제의 전개 양상은 결국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에게 줄서기를 하고 편을 가르는 행위를 통해 교회 전체가 분열의 양상을 띄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자신을 그리스도 편이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그래도 중심을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중립을 지키면서 당시의 어떤 인물에게 줄을 서지 않고 예수님을 붙잡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평화의 중재자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들도 다른 분파처럼 자신들의 사람들을 모으고 의견을 주장하되 다른 사람들을 비판함으로 분쟁을 가중시켰던 점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로 편이 갈려 서로 의견이 충돌한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세례를 주러 고린도에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다고 한 발 물러선다. 

사실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명령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이 이 시점에서 자신은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본다. 

첫째, 바울은 현재의 분열과 분쟁이 세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세례를 받아 자신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둘째, 바울은 세례를 주는 것보다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그 복음의 핵심에는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셋째, 분열을 막고 새롭게 화합하기 위해서는 세례를 누가 주었는지 따지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보았다. 

 

확실히 이번 편지는 분열과 분쟁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많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이 유지되도록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사역자들의 책임이다. 

분열은 결국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분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분열은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이를 이어주신 예수님의 자기 희생적 중보를 무색하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헐게 한다. 

그리고 그 담을 허무는 일을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우리는 계속해서 담을 쌓는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과 다른 도덕과 윤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그래야 작은 운동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교회는 연합이 아니라 섹터와 된다. 

 

불의와 손잡을 수는 없다. 

거대 악을 묵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를 빼고, 나와 소수의 사람들을 빼고, 주변에 있는 모두가 거대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하다. 

그 순간, 사랑와 화해와 연합은 사라진다.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가?

오늘도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한다. 


예수님, 

주변에 분열과 고통이 참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마다 교회마다 분열이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볼 때마다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 명의 의견과 생각에 모두가 따라야 하는 전체주의나 독재 사회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서로 깊이 용납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계속되길 바랄 뿐입니다. 

주님, 우리 공동체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아픔과 슬픔이 가라앉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28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8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9"이제 너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내가 그 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주도록 일러두었다."

10엘리야는 곧 일어나서, 사르밧으로 갔다. 그가 성문 안으로 들어설 때에,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마실 물을 한 그릇만 좀 떠다 주십시오."

11그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니, 엘리야가 다시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먹을 것도 조금 가져다 주시면 좋겠습니다."

12그 여인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13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방금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14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5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인과 엘리야와 그 여인의 식구가 여러 날 동안 먹었지만,

16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도 마르지 않았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시켜서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17이런 일이 있은 뒤에, 이 집 여주인의 아들이 병이 들었다. 그의 병은 매우 위중하여서, 끝내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18그러자 그 여인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이신 어른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저에게 오셔서, 저의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19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아들을 달라고 하면서, 그 여인의 품에서 그 아이를 받아 안고, 자기가 머물고 있는 다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를 자기의 침대 위에 뉘어 놓고,

20주님께 부르짖었다. "주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집의 과부에게 이렇게 재앙을 내리시어, 그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21그는 그 아이의 몸 위에 세 번이나 엎드려서, 몸과 몸을 맞춘 다음, 주님께 또 부르짖었다. "주 나의 하나님, 제발 이 아이의 호흡이 되돌아오게 하여 주십시오!"

22주님께서 엘리야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아이의 호흡을 되돌아오게 하여 주셔서, 그 아이가 살아났다.

23엘리야는,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내려와서, 아이를 돌려주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24그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제야 저는, 어른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시라는 것과, 어른이 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밧 지역으로 보내신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아합 왕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했었다. 

그녀의 악행으로 하나님은 진노는 이스라엘 땅에 기근으로 이어졌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 원흉의 땅 시돈으로 보내신다.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아합과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시돈 땅에도 여호와를 아는 사람이 있으며, 그는 세계적 기근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삶을 살아간다. 

이방땅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시돈의 왕 엣바알이 섬기는 바알은 기근 속에서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신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근을 주관할 뿐 아니라 기근 속에서도 사람들을 살릴 수 있으신 분이시다. 

이 대조를 통해 북이스라엘이, 아합 왕과 이세벨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인지 밝히신다. 

그들은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한다. 

 

그 땅의 한 과부는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알아차린다. 

 

12그 여인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아마 그 여성은 당시의 주변국들이 어떤 신을 섬기는지 대강 알았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앎은 아주 피상적일 뿐이다. 

그는 아직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야가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작은 믿음을 가지고 엘리야의 말을 따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던 여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손길을 믿어 본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실제가 된다.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다. 

만나의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아합와 이세벨은 자신들의 멋진 왕궁에서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사르밧의 어머니는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 신뢰와 믿음이 결국 기적을 보게 했다. 

 

그런데 비극적인 일이 찾아왔다. 

이제 음식은 있어서 다시 살게 되었는데, 생존의 문턱은 넘었는데, 아들이 병으로 인해 죽어버린 것이다. 

이전에는 같이 죽으려했으나, 지금은 자신만 살고 아들은 잃었다. 

그 어머니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그 전보다 더 심각하다.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 그래서 놀라운 기적을 매일 경험하고 있는데, 아들이 죽다니… 혹여 내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잘못한 것이라고 있나? 아님 전 남편에게 잘못한 것이 있나?’ 

이런 저런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고통의 눈물만 흘린다. 

밤낮 눈물로 옷이 젖는다. 

하나님은 그 어머니를 너무 고통스럽게 하셨다. 

 

18그러자 그 여인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이신 어른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저에게 오셔서, 저의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저 어머니의 고통에 찬 호소와 부르짖음이 들리는 듯 하다. 

자신의 모든 죄들을 떠올려본다. 

남편도 없고, 오직 아들만으로 인생의 희망과 소망을 두었는데, 그마저도 이제 사라졌다. 

그는 더이상 살아갈 용기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기 죄가 밤낮 떠오르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르밧의 한 어머니가 보인다. 

그의 심장과 위장은 오그라들고 폐는 찌그라든다. 

머리에는 생각이 끊이지 않고 고통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고통은 사르밧 어머니에게만 찾아온 것은 아니다. 

엘리야도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밀가루와 기름의 기적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긴 하지만, 결국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아들의 죽음으로 고통만 가중되었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재앙을 사르밧의 어머니에게 주시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고통스런 부르짖음이 들리는 듯 싶다. 

 

20주님께 부르짖었다. "주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집의 과부에게 이렇게 재앙을 내리시어, 그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21그는 그 아이의 몸 위에 세 번이나 엎드려서, 몸과 몸을 맞춘 다음, 주님께 또 부르짖었다. "주 나의 하나님, 제발 이 아이의 호흡이 되돌아오게 하여 주십시오!"

 

엘리야는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부른다. 

최선을 다해 그분을 부른다.

결국 이 부르짖음의 기도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24그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제야 저는, 어른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시라는 것과, 어른이 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돈의 사르밧 어머니의 고백은 시돈의 공주인 이세벨과 크게 대조를 이룬다. 

이세벨이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현실에서도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자신의 권력이, 혹은 세상의 성공을 부추기는 바알과 같은 존재가 더 위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분이 생명의 근원되신다.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 

주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바알같은 신과 하나님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모욕입니다. 

그럼에도 저도 모르게 ‘돈, 명예, 쾌락보다 하나님이 더욱 중요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그런 것들과 비교하곤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런 비교조차 기분 상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려주세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주세요. 

육이 죽어가는 거야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살려주세요. 

그보다도 더 간절히 기도합니다. 

영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주세요. 

좌절하지 않고 주님의 살려주심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생명을 느끼는 하루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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