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05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1악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반역의 충동 있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

2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의기 양양하고, 잘못을 찾아내 버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3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사기와 속임수뿐이니, 슬기를 짜내어서 좋은 일을 하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4잠자리에 들어서도 속일 궁리나 하고, 범죄의 길을 고집하며, 한사코 악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5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6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7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찌 그리 값집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여 숨습니다.

8주님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그들이 배불리 먹고, 주님이 그들에게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게 합니다.

9생명의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10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11오만한 자들이 발로 나를 짓밟지 못하게 하시고, 악한 자들이 손으로 나를 휘두르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12 때에 악을 일삼는 자들은 넘어지고,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시인은 악인의 모습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교만한 , 거짓된 ,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악한 계획을 꾸미는 것으로 묘사합니다(1-4). 반면 하나님의 사랑은 넓은 하늘을 채울 만큼 가득하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바다처럼 깊습니다(5-6).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주의 사랑과 의로운 돌보심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7-9).

 

시인은 주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며,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10-11).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며 악한 일을 일삼다 심판을 받지만(12),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길 기도합시다.

 

——

1. 반역의 충동

시인은 악인들의 마음에 있는 충동에 대해 다룬다. 

충동은 본능적이다. 갑자기 튀어 나온다. 무조건적 반응이다. 

이면도로를 오손도손 걷다가도 뒤에서 갑자기 경적을 울려대면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온다. 

악인의 마음에 있는 충동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반역의 충동이다. 

누구에 대한 반역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길 원한다. 

 

시인은 제대로 짚었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반역의 충동을 계속 안고 산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분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학습하지 않았거나, 믿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 듣지 않는 , 들어도 거부하는 , 다른 신들의 이야기에 현혹된 자는 하나님을 업신 여기기 일쑤다. 

그렇게 반역의 충동을 방치하게 되면 악인이 되어간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만 반역의 충동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이웃에 대한 악행으로 이어진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속일 생각을 한다. 범죄의 길을 한사코 고집한다. 악을 고집한다. 

머리를 쓰는데 슬기와 지혜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골탕먹이고 죽이는 일이다. 

 

2. 하나님의 신실하심

시인은 악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에 대해서 노래하기 시작한다(5 이하). 

악인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자연스런 흐름은 의인에 대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 집중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하심을 노래한다. 

유독 눈의 띄는 표현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대한 고백이다. 

 

6_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사람과 짐슴을 똑같이 돌보신다는 그의 고백에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짐승을 돌보신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린다. 

나도 점점 동물에 대한 사랑이 커져가고 있다. 

개는 훌륭하다, 고앙이를 부탁해, 동물 농장 등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동물에 대한 애정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 전체를 사랑하신다. 

창조때부터 지금까지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시인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3. 시인의 간구 

시인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주목했는가? 

시의 마지막 10-12절에 이유가 나온다. 

약간 유치하기도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에게 간청을 드린다. 

 

10_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11_오만한 자들이 발로 나를 짓밟지 못하게 하시고, 악한 자들이 손으로 나를 휘두르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12_ 때에 악을 일삼는 자들은 넘어지고,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시인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오만한 자들은 넘어지길 요청한다. 

시인의 진심이 드러난다.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자신에 대한 보호와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에 대한 저주로 이어진다. 

 

이게 시다. 기도다. 지극히 개인적인 요구요, 간청이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현실의 악에 맞설 힘이 없다. 

하루 종일 악한 생각과 계획을 짜는 사람과 어찌 맞설 있단 말인가? 

 

드라마 빈센조의 핵심 메시지는거악을 소악이 혼쭐낸다이다. 쓰레기를 치우는 것은 쓰레기이다.

거대한 악의 카르텔에 맞서 상대적으로 약자의 악에 의존한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이 악한 생각을 집요하게 이어나간다. 

규모와 깊이의 구조악에 맞서 사람들은 악을 이길 새로운 연대를 형성하지만, 그것이 선은 아니다. 

 

, 과연 일상의 신실한 사람들이 거대악에 맞설 있는가? 

매일 모든 시간에 악을 계획하고 치밀하게 디테일하게 공격하는 악인들에게 평범한 범부들이 어떻게 대적할 있는가? 

그렇다. 이제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 의지할 이다. 

신실하신 , 모든 자연을 사랑하시는 , 악인을 미워하시는 , 생명의 샘이 되시고, 쉼터가 되시고, 빛을 비추시는 , 그분께 집중할 밖에 없다. 

울분을 토로할 분은 밖에 없다. 

 

그렇다고 거대악에 맞서지 말라는 말인가? 

아니다. 맞설 있다. 그러나 혼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의 도움을 힘입어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있는 일이다. 

 

미얀마 군부의 유혈 진압을 규탄한다. 

미얀마 청년들의 울부짖음에 나의 외침을 덧붙인다. 

 

주님, 선량한 시민들의 목숨을 구해주소서. 

 

 

 

2021 04 03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38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39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근쯤 가지고 왔다.

40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

41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 하나 있었다.

42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유대 사람이 두려워 남몰래 조용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기를 내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내려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38).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값비싼 몰향에 침향을 섞은 향료를 가지고 유대의 풍속을 따라 요셉과 함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십니다(39-42).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 것을 나타내길 두려워했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을 꺼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례를 위해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고 자신들의 소중한 것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섬깁니다. 우리에게도 혹시 이런 모습이 있습니까? 용기를 내어 주님을 섬겨야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지 살펴봅시다.

 

——

 

죽음의 폭로

 

1. 오늘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신 날을 기념한다. 동시에 제주 4.3 민중항쟁을 추념한다. 우주적인 죽음이 가져다 슬픔과 국가폭력의 희생이 가져다온 슬픔이 겹치는 날이다. 수많은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 인간사에 넘친다. 지도자의 욕망은 선량한 보통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것도 대량 학살로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보편적인 죄를 폭로했다. 4.3 억울한 죽음들은 국가로 응집된 인간들의 죄를 폭로했다. 죽음은 진실을 폭로한다. 

 

 

2.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다. 

 

명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 사람들이 두려웠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서 살아갈 용기는 없었다. 예수님을 바로 곁에서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12제자들의 삶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흠모했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깊이 탄복했다. 자신의 부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때문이었을까? 가족 때문이었을까? 명예였을까? 무엇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다른 명은 요한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던 니고데모였다. 바리새인 유대인의 지도였던( 3:1) 니고데모는 영적인 궁금함으로 늦게 예수님을 찾아왔던 인물이었다.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다는 말에엄마의 자궁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되느냐 상상력 넘치는 발언을 장본인이기도 하다. 번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섬기고 있었다. 십자가 죽음을 막지 못했음에 좌절을 느끼고 있었지도 모른다. 유대 지도자로서 전체 흐름을 바꾸고 싶었지만, 주류 기득권의 주장과 과격함을 이길 없었다. 어쩔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볼 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음의 진실을 드러내기에는 니고데모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몰약과 침향 ? 분명 아무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니고데모는 부가 있었다. 그는 명예/지위가 있었다. 예수님에게도 밤에 몰래 찾아오지 않았었나! 그의 지위는 그렇게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도자였지만, 대제사장은 아니었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 그의 지위와 명예가 순식간에 날아갈 수도 있었고, 그게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높다. 

 

3. 죽음의

 

아무리 두려움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들 마음에 뜨거운 뭔가를 남겼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이 결국 무고한 죽음으로 귀결되었다는 죄책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당당함과 자신들의 비겁함이 대비되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순간 보인 하늘의 싸인이 그들의 마음속 동굴에 빛을 비추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빛이 되어 그들을 비춘다. 누구도 벗어날 없다. 빛이 들어왔다. 

 

 

4. 죽음의 폭로

 

빛은 인간의 심연을 폭로한다. 두려움, 비겁함, 합리화, 이중성 등등. 죽음의 빛이 빠르게 인간 존재를 드러낸다. 이상 숨길 수가 없다. 뜨거운 눈물이 심장을 적신다. 십자가의 잔상은 깊은 애도를 남기고 애도가 피를 끓게 한다. 숨겨 놨던 용기의 주위에 애도의 피가 둘린다. 결국 문이 열린다. 

 

빌라도를 찾아간다.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의 무덤을 그것도 무덤을 제공한다. 

비싼 향유를 드린다. 제자들에게 향유를 전달한다. 그리고 장례에 참여한다.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더이상 숨어지낼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온 급격한 변화였다. 

 

 

5. 자기 폭로의 시간

 

때로 강렬한 폭로의 시간이 찾아온다. 오랫동안 숨겨놨던 마음의 이중성, 충돌 되는 욕망, 손해 같은 두려움, 누리지 못할 즐거움,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예수님의 죽음 앞에 다시 돌아본다. 

 

4.3 사건의 무고한 희생도, 세월호 사건 꽃들의 죽음도 우리 인간들의 한계없는 욕망을 폭로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매년 되새기는 것은 나의 욕망이 폭주하지 않도록 미리 폭로하는 과정이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대의 흑암을 미리 정기적으로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나는 어떤 심연을 주님께 드러낼 것인가?

 

 

——

예수님, 

 

당신의 죽음에 잠잠해 집니다. 

나도 모르게 폭주하던 온갖 부정적 감정들을 죽음이라는 영광의 앞에 노출시킵니다. 

열망/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저를 십자가 앞에 펼칩니다. 

주님의 피로 용기의 문을 열어 주소서. 

두려움을 이기고 더욱 정직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01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7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18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박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19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명패에는유대인의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20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21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22빌라도는나는 것을 썼다하고 대답하였다.

23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몫으로 나누어서, 사람이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것이므로

24그들은 서로 말하기를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하였다. 이는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25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있었다.

26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곁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어머니,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시고,

27 다음에 제자에게는, 이분이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때부터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의미의골고다라는 곳에서 , 우편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십니다(17-18). 그의 죄를 알리는 명패에는유대인의 이라는 내용이 아람어와 그리스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19-22). 이것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왔던 흩어진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모두가 알아볼 있는 언어로 표시된 것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음으로 인해, 시편에 기록된 메시야 수난에 대한 예언( 22:18 참조) 성취됩니다(23-2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시는 , 모친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십니다(25-27).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십자가에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세상을 위한 사랑의 왕이십니다.

 

——

진짜 유대인의  

십자가를 끌고 가시는 장면은패션오브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 실감나게 그렸다. 

구절 하나로도 오랫동안 머물고 묵상할 있을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사형틀을 직접 끌고 가신다. 

몸에 상처 투성이요. 머리엔 가시 면류관 자국이 선명하고, 옷은 피로 얼룩져 있다. 겉옷과 속옷 것없이 예수님의 피로 물들었다. 나중에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그의 속옷을 제비 뽑아 가져갔다고 하는데,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 왕의 피를 빨아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명패를 자세히 묘사한다(19-22). 아마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보인다. 

무슨 메시지일까? 

십자가에는 죄명이 달리는 것이 상식적이다. 

The irony in John continues as the reason for the death of Jesus received its official entitlement or “notice” (titlon). Frequently persons condemned to death had their offense written on a placard and either hung on their bodies or carried before them as they were paraded to the execution site.
_Gerald L. Borchert, John 12–21, vol. 25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2), 264.

사람이 여기에 이런 처벌을 받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행위다.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도 형벌의 정당성을 확보해준다. 

사람들은 공개 처형의 끔찍함을 그의 죄를 보고 상쇄시킨다. 

 

그런데 요한이 보기에 예수님의 명패(죄명)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죄명과 너무 다르다. 

유대인의 나사렛 사람 예수”, 이것은 죄명이라고 하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있었을까? 유대인의 삶을 애정했던 예수님, 유대인들의 병을 고치고, 먹을 것을 나눠주셨던 예수님,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했던 예수님. 그래서 많은 민중들은 예수님을 왕처럼 대하지 않았나!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께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누가복음 19:38) 이라고 노래를 불렀다. 과연 죄패로 이런 민중들을 설득할 있었을까? 의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을 자극하고, 민중들을 격동케 하는 행동 아닌가? 사실 비정치적인 행위로 비춰진다. 

 

게다가 죄패가 맘에 안들었는지, 대제사장들은 수정을 요구했다. ‘자칭이라는 말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유대 민중들이 그를 임금으로 왕으로 추앙하고 있지 않다고 애써 부인하는 자세다. 만약 빌라도가 INRI(라틴어: IESVS·NAZARENVS·REX·IVDÆORVM) 한국어로 번역하면 "유다인들의 임금나사렛 사람 예수이란 뜻을 가진 천주교의 두문자어이다.) 쓰려고 한다면, 그것도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 출신 유대인 그리고 심지어 로마병정들까지도 죄패를 읽게 하려고 한다면(20), 결코 유대인의 왕으로 써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같다. 대제사장이 원했던 죄패는 아마도 반역자, 신성 모독자, 사기꾼, 반역시위 주동자, 민심 소란죄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이 스스로 말했던 ,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던 말을 죄패에 썼다. 제사장들의 요청도 거부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제사장 손에 맡긴 것은 사실이지만, 사형을 집행함에 있어서 그는 제사장들의 요구를 들어 마음이 없었다. 뭐에 홀렸는지, 빌라도는 유대 민중들이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는 , 그것을 그대로 죄패에 적었다. 그리고 죄패는 예수님의 영광의 명패 되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의 유대인의 왕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날은 죄인의 처형식이 아니라 왕의 대관식이었다고 말이다. 맞는 같다.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고 벌거벗겨진 채로, 왕의 대관식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왕의 대관식이 이토록 처참하고 부끄러울 있는가. 과연 대관식을 영광의 순간이라고 부를 있는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요한은 십자가를 예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왕이 부끄럽게 죽어가고 있는데, 그게 우주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의 대관식이었다. 

 

빌라도는 부지불식간에, 어찌저찌하다가 결국 예수님의 왕의 대관식을 준비한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모든 민중들이 함께 인정하는 왕이 것이다. 

십자가에서 사단, ,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를 이루신다. 승리가 왕의 대관식이 것이다. 마치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에서처럼 말이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왕이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그래서 그분이 왕이 되신 것이다. 진짜 말이다. 자칭 왕이 아니라 우주가 인정할 밖에 없는 왕이 되신 것이다. 

 

왕을 찬양한다. 

수치로 영광의 관을 쓰셨다. 

고통으로 왕좌에 오르셨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주인이 되셨다. 

그의 놀라운 너무나 창의적인 지혜를 찬양한다.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20“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아버지,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2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25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26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그분을 믿게 사람들(교회)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십니다(20). 그들이 하나 주님 안에 거하며 세상에 주님을 나타내게 것입니다(21).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영광을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것입니다(22-23).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 것입니다(25-26). 예수를 믿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가장 강력히 증거 하게 됩니다. 나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 4:3) 힘써 지켜가고 있습니까? 내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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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 Prayer

 

본문에 대한 반응, 감탄사였다. 미친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 갈수록 기도가 얼마나 미친 기도였는지 실감한다. 

너무 이상적이고, 원대하며, 초월적이기까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기도의 이상에 반했었다. 

기도처럼만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가 말씀을 근거로 이렇게 살아가자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동시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가 하나만 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이 분명히 알게 것이라는 진리에 흥분했었다. 그러나 가지가 걸린다. 하나는 일단 우리가 하나가 없다는 점이다. 둘은 하나가 된다는 것의 개념이 너무 다양하며 또한 만의 관념 속에 갇혀 있었다는 점이다. 셋은 세상 사람들이 알게 것에 흥분한 이유가 바로 교회 성장과 영향력 확대라는 나의 야망과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지 때문에 점점 말씀이 멀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상을 붙들고 살고 있다. 사역도 하고 있다. 하나됨의 정도와 수준도 수정되었고, 속도와 범위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이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됨을 붙들고 살고 있다. 다양성을 말살하는 하나됨을 포기했다. 더욱 다양해도 된다. 그럼에도 포기할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26)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시에 감지된다면, 우리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과 감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되었다고 말하고자 한다. 정치적 지향이 어찌 똑같을 있단 말인가? 사역의 방법론과 방식이 어떻게 같을 있을까? 각자가 지향하는 방향이 조금씩 다르다. 소명이 다른데 방향을 어찌 맞추는가? 하지만, 한가지 빼지 말아야 공통 분모가 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사랑이 나에게,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랑은 성육신의 사랑이요, 십자가로의 사랑이다. 또한 부활로의 사랑이며 영광으로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사랑의 결과와 행동은 희생과 섬김 그리고 영광과 통치, 이렇게 분화되고 통합된다. 

 

사랑이 나와 우리에게 있는가? 사랑을 믿고, 인식하고, 따르고 있는가? 공통분모를 놓치기가 싫다. 누군가 이것도 너의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에서 하나됨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요. 하나됨을 이루는 아교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심도있게 고려한다면, 이런 결론은 자연스럽다(26). 

 

너무 보편적으로 추출했다고 보는가? 맞다. 보편과 상황은 주고 받는 것이다. 왔다갔다한다. 보편 없는 상황은 허무주의를 낳는다. 상황없는 보편은 전체주의 절대악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됨의 보편이다. 보편을 나의 상황, 우리 공동체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그것 나름의 깊이 있는 묵상과 사색의 결과여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사랑이라는 보편을 추구한다. 사랑이 결여된 구체적인 행동을 그저 멀끔히 수용하고 싶지 않다. 환경운동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물어라. 사회개혁운동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물어라. 하나님의 사랑없이 환경운동도 있고, 사회개혁운동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불의에 대한 분노, 사회 발전에 대한 비전에 의해서 촉발되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허나, 그리스도인의 보편은 그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이 기본이요. 보편이요. 하나됨의 아교다. 그래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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