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01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1 이스라엘은 열매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제단도 많이 만들고, 토지의 수확이 많아질수록 돌기둥도 많이 깎아 세운다.2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제는 그들이 죄값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들의 제단들을 파괴하시고, 돌기둥들을 부수실 것이다.3 “우리가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다가, 임금도 못 모시게 되었지만, 이제 임금이 있은들 무엇에다가 쓰랴?” 하며 한탄할 날이 올 것이다.

4 그들은 빈 약속이나 일삼고, 거짓 맹세나 하며, 쓸모 없는 언약이나 맺는다. 그러므로 밭이랑에 돋아난 독초처럼 불의가 퍼진다.5 사마리아 주민은 벳아웬의 금송아지를 잃고 두려워하고, 그 우상을 잃고 슬퍼할 것이다. 그것을 즐겨서 섬긴 이교의 제사장들은, 우상의 영화가 자기들에게서 떠난 것 때문에 탄식할 것이다.6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앗시리아로 가지고 가서 대왕에게 선물로 바칠 것이다. 그러나 에브라임이 대가로 받아 오는 것은 수치뿐일 것이다. 끝내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긴 일로 수치를 당하고야 말 것이다.7 사마리아는 멸망하게 되었다. 왕은 물 위로 떠내려가는 나무토막과 같다.8 이제 이스라엘의 죄악인 아웬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 올라서 그 제단들을 뒤덮을 것이다. 그 때에 백성들은 산들을 보고 “우리를 숨겨 다오!” 또 언덕들을 보고 “우리를 덮어 다오!” 하고 호소할 것이다.

 

 

NIV

They make many promises, take false oaths and make agreements; therefore lawsuits spring up like poisonous weeds in a plowed field(4절).

 

 

[오늘의 묵상]

북이스라엘은 부유했다. 

농작물이 잘 자랐다. 

포도도 잘 자라고, 추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풍요가 가지고 온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지가 아니라 우상 숭배였다. 

이교 제단을 곳곳에 세운다. 

둘기둥 우상을 허구한 날 만들어 세운다. 

돌기둥은 단순히 예술적 표현이 아니다. 

돌을 깎는 것은 대단히 고된 작업이다. 

종교적 심성으로 만들게 된다. 

복을 내려줄 신을 상상하면서 돌기둥을 만든다. 

당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과는 대조된다.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더라면, 우상들과 경쟁력이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모양이라도 자신의 대표하는 조각을 만들지 말라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인간이다. 

다른 어떤 형상도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전략은 인간과의 언약 관계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 가시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시는 것이다. 

조각품으로 당신을 표현하지 않으시고, 관계와 역사와 서사로 표현하신다. 

그 속에 드러난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며 따르며 사랑하며 살아갈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눈의 동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쉽게 따라가지 못한다. 

귀보다는 눈이 훨씬 욕망적이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확실히 욕망을 자극한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는 순식간에 뇌에 찍힌다. 

소리는 오래 걸리며 뇌는 소리를 해석하느라 쉽게 피곤해진다. 

사람들은 한 눈에 들어오는 금송아지를 세운다. 

그게 하나님이라고 속인다. 

농경 사회에서 송아지만큼 귀한 것이 없다. 

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나르는 일에 소가 기여한다. 

그런 소의 형상을 한 반짝이는 우상은 모든 사람들이 염원하는 풍요를 욕망하게 한다. 

곳곳에 돌기둥을 세워 자신들의 부를 위해 기도한다. 

곳곳에 금송아지를 세워 부의 근원인 가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서 한다. 

그 옛날 모세 때의 금송아지 사건을 모를 리 없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았는지 그새 잊었다. 

경제적으로 풍요해지니, 정신이 허약해졌다. 

돈이 사람들을 망가뜨린다. 

 

욕망이 제어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거짓이 난무하다. 

빈 약속, 거짓 맹세, 쓸모 없는 언약(4절)이 퍼진다. 

결국 정보가 부족한 사람, 착한 사람, 타인을 믿어 보려는 사람들이 곤경에 빠지고 죽음에 이른다. 

사기가 판을 치니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불의한 사회는 제어되지 않는 욕망 덩어리, 즉 우상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세 사기, 보이스 피싱, 금융 상품의 불완전 판매… 

죄다 사기다. 

남을 속여 자신의 잇속을 차린다. 

SNS 속에 포장된 거짓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필라델피아 켄싱턴의 마약 거리는 미국 제약 회사의 사기인 펜타닐의 결과다. 

돈을 잃고 신의를 잃고 모든 것을 잃는다. 

불의가 땅에 가득하다. 

 

우상이 판을 치면 사회는 불의하게 된다. 

하나님이 참을 수 없는 사회가 된다. 

물과 불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남는 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길이다. 

서로 싸우다 지옥을 만난다. 

지옥같은 사회를 위해 누가 지키며 누가 헌신하겠는가!
헌신하지 않는 공동체, 사회는 결국 외세의 먹이가 된다. 

침략이 잇따르고, 전쟁의 참화는 지옥의 지옥을 낳는다. 

 

현재 한국 사회도 우상이 판을 친다. 

지도자들이 우상 숭배자가 많다. 

점집이 여전히 방방곡곳에 있다. 

지도자들이 무당을 찾아간다. 

무당과 법사의 말을 듣고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맡긴다.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다. 

경제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으나, 우상과 미신은 전근대적이다. 

그나마 아직은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남아 있다. 

그루터기들이 끝까지 남아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한다. 

 

성령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의 죄악을 불로 태워주시길 기도한다. 

우상을 좋아하는 우리의 본성에 불로 태우시고 물로 씻어주시길 기도한다. 

지금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오늘의 기도]

우상을 싫어하시는 하나님, 

불의한 세상을 혐오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겪고 계시는 딜레마를 생각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시어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당신을 오늘도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내면, 속사람을 바꾸길 원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인지합니다. 

주님! 

저의 속사람을 바꾸소서. 

더욱 사랑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더욱 경건한 존재가 되게 하소서. 

나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게 하소서. 

속이는 사람들을 재빠르게 알아차리게 하소서. 

우상을 배척하고, 불의를 멀리하게 하소서.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가다가, 들에서 오는 시몬이라는 한 구레네 사람을 붙들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27 백성들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서 예수를 따라 가고 있었는데, 여자들은 예수를 생각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28 예수께서 여자들을 돌아다보시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

29 보아라, ‘아이를 배지 못하는 여자와,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태와, 젖을 먹여 보지 못한 가슴이 복되다’ 하고 사람들이 말할 날이 올 것이다.

30 그 때에, 사람들이 산에다 대고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라’ 하며, 언덕에다 대고 ‘우리를 덮어 버려라’ 하고 말할 것이다.

31 나무가 푸른 계절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하거든, 하물며 나무가 마른 계절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주석]

26절. 로마 군인들은 어떤 사람이든 뽑아서 자신들을 위해 물건 나르는 일을 시킬 수 있었다(IVP 성경배경주석).

31절. 만일 이런 것이 로마인들이 무고한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이라면, 죄가 있는 예루살렘의 운명은 얼마나 더 비참하겠는가(IVP 성경주석).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은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게 함락된 동안 일부 지도자가 자행한 끔찍한 일을 예견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시몬은 그 아침에 들에서 오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들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을까? 

무슨 이유건 지나가다가 로마 병사들을 만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들고 골고다 언덕을 끝까지 올라가실 상황이 아니다. 

몸은 만신창이다. 

너무 맞아서 피가 온 몸에 흐른다. 

목수 출신인 그분의 근육은 뼈조각이 박혀 있는 채찍으로 갈기갈기 찢겨졌다. 

힘을 쓸 수가 없다.

몇 번이고 쓰러지신다. 

주변에는 흐느끼는, 통곡하는 여인들의 울음 소리로 가득하다.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건장해 보이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는다.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한다. 

 

구레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와 있다. 

북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이라고 하는데, 예루살렘과는 상당히 먼 거리다. 

유월절을 맞아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까지 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얼떨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다. 

오랫동안 여행 혹은 순례를 하면서 지쳤을 법한데, 그는 타의든 자의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뒤따른다.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왜 저 사람은 십자가 형을 받았을까? 

그런데 왜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이렇게 울고 있는가? 

살인자, 범법자의 사형 집행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울일은 아니지 않는가? 

만약 십자가가 정치범들에게 내리는 형벌이라면 더욱 이해가 안된다. 

정치범을 위해 울면 그것 또한 반역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함부로 울 수 없는 상황에서 통곡의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이상한 상황에 어리둥절하다. 

의문만 깊어간다. 

 

예수님은 알듯모를듯한 말씀을 하신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신다. 

미래에 일어날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만, 당시의 어떤 사람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파괴와 고통이 너무 심해서 산과 언덕 보고 외치게 된단다. 

“우리에게로 넘어져서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소서…”

극심한 고통에 생명을 끊어버리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게다가 그 파괴가 봄 여름이 아니라 건조하고 추운 날에 일어난다면 그 고통은 더 심해질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시는 예수님의 예언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우는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울음을 그치라고 말씀하셨다 생각했을 것이다. 

힘없는 상황에서도 뒤를 돌아보며 말씀하신다. 

꽤 긴 호흡으로 말씀하신다. 

쉽지 않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예루살렘의 백성들의 고통을 슬퍼하시는 것 같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는 것을 내다보며 슬퍼했던 것과 비슷하다. 

AD 70년에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함락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예루살렘의 영광은 사그라들고, 예수님의 교회가 전 세계로 퍼진다. 

 

구레네 시몬은 이 모든 말씀과 행동을 주의깊게 살핀다. 

시몬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린다.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단는 소식이 들린다. 

시몬은 이 모든 일에 증인이다. 

그는 예수님이 흘리는 피를 보았고, 그 피를 밝고, 그 피를 뒤집어 쓰고(십자가에 묻은) 예수님을 따랐다. 

우주적 사건이 일어난 그날 시몬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수제자 시몬 베드로는 멀찍어 떨어져 있었지만, 처음 보는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과 죽음의 길을 걸었다. 

이 경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명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구레네 시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알렉산더와 루포였다. 

그들은 나중에 로마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구레네 시몬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내까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했다. 

어떻게 죽으셨는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 

때로 주님의 피로 몸과 마음을 덮고 싶다. 

더욱 정결하고 순결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저의 이름을 불러주셨던 하나님, 

그 부르심이 생생히 들리는 듯 합니다. 

제가 주님을 부르듯, 주님도 저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감동합니다. 

그저 불러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새힘을 달라고 간청했더니, 

정결하라 하시고, 

예수님을 사랑하라 하시더니, 

이제는 제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정결이 새로운 힘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함이 새로운 힘입니다. 

주님이 불러주시는 그 음성이 새로운 힘입니다. 

그 힘을 얻어 다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로 나아갑니다. 

 

매일 매일 힘차게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저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8월 22일 화요일

 

여는 기도

내가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31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35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The Message

Jesus said, “Tell that fox that I’ve no time for him right now. Today and tomorrow I’m busy clearing out the demons and healing the sick; the third day I’m wrapping things up(32절).

 

주석

32절. 고대에 어떤 사람을 ‘여우’라고 부른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교활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대신 그 사람이 쓸모없거나, 남을 비방하거나, 믿을 수 없거나, 아니면 파렴치하고 간사하다는 것을 묘사하는 말일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여기서 헤롯에게 뜻밖의 인사를 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 구절에 좀 더 적절한 핵심은, 여우는 기회가 닿으면 암탉을 약탈한다는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경고를 준다. 

얼핏보면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두 가지 다 가능하다. 

1. 예수님을 보호하다. 

2. 예수님을 위협하다. 

예수께 헤롯왕의 살해 위협을 알려줌으로써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 

제법 예수님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활동에 위협을 가하려고 알려 준 사람들일 수도 있다. 

더이상 예수의 활동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사람들이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떠나 달라는 것이 그들의 핵심 메시지다.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단호했다. 

자신이 갈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포부다. 

이런 저런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일을 감당하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길, 

하나님 나라의 그 길을 끝까지 걷겠다고 하신다. 

죽음이 예수님의 길을 막을 수 없다. 

원래부터 죽음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태도를 배워야 한다. 

자신의 욕심과 습관을 밀어부치는 것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끝까지 붙드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소명을 따라 살아간다. 

과거 민주화 투쟁을 했던 사람들의 삶의 태도다.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기 위해 달려갔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태도다. 

한 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다. 

그 한계에 대해 너무 과대 해석하지 말자. 

사람이 어찌 한결 같을 수가 있는가! 

대의를 위해 살다가도, 가족들 앞에서 이기적인 결정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다. 

혹 그런 한계를 느끼더라도, 지금 이 순간 소명을 위한 결정을 해야 한다면, 용기 있게 기도하고 결정할 일이다. 

하나님 나라 위해 애써왔던 시간들을 후회하지 말자. 

소명을 위해 결정했던 숱한 순간들을 섭섭해하지 말자.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품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었는지 모른다. 

정말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개를 선포하고 요청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신들의 왕권만을 생각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까지도 죽이려고 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다. 

여전히 이스라엘을 품고 싶어하신다. 

그 마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을 품기 위해 이방인을 품으신다. 

이스라엘의 원래 소명을 이룸으로써 유대인들이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또 주신다. 

이스라엘이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뜻 안에 이 모든 것이 들어있다. 

 

주님의 오랜 인내의 사랑을 다시 느낀다. 

그분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사랑하셨다. 

그리고 지금 우리를 위해서도 그런 사랑으로 대하신다. 

그분의 품 안에 들어가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오랜 시간 참고 인내해 주신 하나님, 

주님의 사랑 덕분에 저에게까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자발적으로 주되심을 인정하도록 기다려주시는 예수님, 

시간이 더디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주변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도와주소서. 

 

오늘 만나는 친구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게 하소서. 

그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도우소서. 

감당해야 할 일들을 지혜롭게 감당하다록 도우소서. 

특히 교회 수련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일을 미루지 않고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6월 17일 토요일

 

여는 기도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37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38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41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때에 네가 똑똑히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ESV

...You hypocrite, first take the log out of your own eye, and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take out the speck that is in your brother’s eye(42절 후).

 

주석

눈먼 사람 비유(39-40절) 여기서 요점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기 전에 교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심판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사람 

원수 사랑의 위대한 메세지를 던지신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하신다.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말라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이다. 

그리고 용서하라다. 

원수를 사랑하여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쉽게 남을 심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될 것이다. 

심판과 정죄에 능한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 항상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정죄했다. 

아쉽다, 서운하다가 아니라, 너희는 죄인이니 죽어도 싸다 등의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 모두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는가? 

그런 포괄적 보편적 죄인됨에 대한 선포가 아니다.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죽을 죄인이라고 사적 심판을 내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류의 심판을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집단이 검사들이다. 

검사들은 사람들을 항상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일단 의심하고 본다. 

의심해야 진짜 범인을 잡을 수 있다. 

이해가 된다. 

경력있고 능력있는 검사들은 아주 그럴듯이 속이는 지능형 범죄자들을 찾아내야 한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숨긴 범죄들을 찾아내는 데 명수다. 

이들은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기 마련이다. 

사회를 정의롭게 만드는 순기능을 갖고 있지만, 그 권력과 권한 만큼이나 무고한 사람들을 사법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는 집단이 바로 검사 조직이다. 

검사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자신들이 법관이 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사람은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가 없이는 인간 관계를 유지될 수 없다. 

사랑은 용서의 총합이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의로 가득찬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베드로처럼, 레위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용서 받음의 과정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잘못과 죄가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고 건강한 공동체와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전파하는 대리 통치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하다. 

그것은 그거대로 의미가 있고, 따라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람에게 분노할 필요는 없다. 

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나누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 죄로 인해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망을 만드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람에겐 용서가 필요하다. 

 

본문에서 “남”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1)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가? 

2) 아님 나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가? 

내 판단엔 1)이 아니라 2)번에 가깝다. 

41절에 예수님은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내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문자적으로 볼 때, 남의 눈에 티를 보려면 매우 가까워야 한다. 

그리고 남을 “친구”라고 부른다. 

이로 볼 때, 예수님은 기본적으로는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친구를 상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권력자에 대한 비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친구관계에서 더욱 더 적용될만한 말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인 것이다.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 많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심판하고 정죄한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는다. 

가족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친구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도 잘 하지 않는다. 

용서한다는 말도 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용서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비판하고 저주하는 것이 더 알아주는 능력이 되었다. 

용서는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이제는 순진하고 착한 것을 무능하고 민폐적인 것을 여기는 풍조다. 

재빠르고, 약삭빠르고, 자기 것 잘 챙기는 사람이 유능하고 인정받는 세상이다. 

순박하고, 순전하고, 온유함은 위선적이라는 규정하는 분위기다. 

그러니 용서의 언어가 점점 사라져 간다. 

 

2. 위선자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없다. 

용서하지 않고 심판과 정죄를 밥먹듯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눈먼 사람들이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눈먼 사람들이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용서를 모르는 사람들을 이끈다. 

결국엔 둘다 구덩이에 빠진다. 

스스로 스승이라는 작자가 용서를 모르는 눈먼 사람이라면, 그의 제자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도 없거니와 다 배우고 나도 결국 스승 수준에 그칠 것이다. 

그러니 용서을 모르는 눈먼 사람을 스승을 둔 사람은 결국 그 수준에 머물 것이며, 결국 구덩이에 빠진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을 스승으로 두지 말라. 

남을 심판하기 좋아하고, 정죄하기 좋아하고,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스승으로 두지 마라. 

결국 그와 자신도 구덩이에 빠질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남의 눈의 티는 엄청 잘 본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잘 못 본다. 

“모두까기”라는 말이 있다. 

자신 외에 모든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용서는 잘 모르고, 비판만 아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을 스승으로 삼는 사람들은 구덩이에 같이 빠진다. 

부정한 권력에 대해 비판하라. 

불의한 권한에 대해 판단하라.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을 용서하라. 

그들의 잘못과 실수를 용납하라. 

 

모두까기가 되지 말고, 자신의 소명에 따라 까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을 것이다. 

그 소명은 현실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눈을 개발하게 만든다. 

소명이란 부족하고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그 현실을 보게 하신다. 

그리고 그 현실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심장에 부어주신다. 

그 소명에 따라 권력자를 비판하고, 그 소명에 따라 속한 공동체의 부족함을 지적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하라. 

비판에 중독되지 마라. 

비판에 중독되면 중독되어 있는 자신의 연약함을 잊고 무조건 비판하기 마련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이 한 마디 하신다. 

“위선자야”

그렇다. 이런 사람이 위선자다. 

자기는 거룩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모든 것에 능한 척, 모든 것에 선한 척 하나, 

그래서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 실수한 사람, 잘못한 사람을 모두 비판하고 까내리지만, 

실제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은 쉽게 잊는다. 

 

본문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언제 누구를 비판하는 것은 허용이 되는지 의문으로 남는다.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최소한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더욱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송청과 아벱에서 관계 맺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더욱 용서하고 사랑하고 싶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오늘의 기도]

용서를 명령하시는 예수님, 

하나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입니다. 

용서가 없이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그리고 제 주변의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주변의 친구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용서를 해 본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은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어리석은 눈먼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루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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