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 06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8 삼 년 뒤에 나는 게바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나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는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다만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그가 전에 없애버리려고 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 하는 소문을 들을 따름이었습니다.

24 그래서 그들은 나를 두고 하나님께 줄곧 영광을 돌렸습니다.

 

주석

18-19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가진 회담을 전하는 내용에서도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결국 갔다고 인정하지만, 이런 양보마저 게바와 야고보 두 사도만 거명함으로써 그 의미가 축소된다(IVP 성경비평주석).

 

18-19절. 바울은 회심 후 어떤 사람들과도 의논하지 않고 아라비아에 가서 3년을 보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밑에서 어떤 기간 동안 가르침을 받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갈라디아서는 참 흥미로운 본문이다. 

바울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반대자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반대자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들, 그러니까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람들보다는 낮은 수준과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이 펼치는 이방인 선교에 대해 무가치하거나 혹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또한 바울이 현재 힘주어 주장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적 진술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는, 바울 개인의 사상이나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자신에게 전달하신 것이라 논박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분명하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아라비아(나바테아 왕국)에서 3년의 시간을 보냈다. 

어떤 학자들은 이곳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신학적 준비를 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선교 활동을 했다고도 한다. 

분리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 3년의 시간은 바울에게 귀중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신학을 재정립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3년간 예수님의 제자들을 따로 보지 않고 스스로 예수님 중심의 신학을 정립했다. 

그리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를 만났다. 

얼마나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바울을 본다. 

보름 즉 15일을 게바(베드로)와 지낸다. 

사실 사도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박해했던 사울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속임수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핵심 제자들을 깡그리 잡기 위한 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아마도 그 기간이 3년이나 걸렸을 것이다. 

회심했다고 주장하는 사울을 금방 만나지 않았던 당시 사도들의 결정은 정당했다. 

검증이 필요했다. 

3년이 지나서도,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 둘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외에는 만나지 못했다. 

다들 선교 활동에 바빴기도 했겠지만, 모든 사도들이 사울을 만나는 것은 위험 부담이 그만큼 컸던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의 자기 변호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바울의 신학과 선교적 활동은 사도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만난 예수님이 주신 소명이었다. 

그동안 바울이 펼쳤던 이방인의 선교는 사도들이 명령했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특권이나 책무였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물론 아무리 자신의 신학과 선교 활동의 독특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다른 사도들의 권위를 침범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그 사도들에 의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사도들에 의해 전해지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듣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기존 신학을 재점검할 수 있었다. 

바울은 물론 예수님께 직접 받은 계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백지 상태에서 받은 것은 아니란 말이다. 

 

예루살렘에서 나와 바울은 자신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향했다. 

그리고 유대 지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울이 바울로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음에 크게 기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들은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시고, 생각을 바꾸시고, 적대자가 옹호자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보았던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바울은 배신자요 변심자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바울은 잃어버린 양이었고, 새로 얻은 둘째 아들이었다. 

처음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는 놀라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바울을 통해 유대, 사마리아 지역을 넘어 지중해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그리스도 복음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찾아온 복음의 역사를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훌륭한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잃어버리기 전에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 

신앙의 자서전을 쓰자. 

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자. 

나를 변화시키시고, 이끄셨던 그분에 대해 더 많이 기록하고, 알리자. 

큰 변화가 없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 삶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정리하면 되는 일이다. 

언제가 시간을 내어 그 이야기를 적어 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의 기도]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켜 주신 예수님, 

가난한 집의 소심한 저를 하나님 나라의 일꾼 삼아 주신 예수님, 

주님의 일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것 투성이였지만, 그래도 주님께서는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계속 기억하게 하소서. 

그 선물을 끝까지 기억하도록 계속 기록하고, 공유하고, 전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10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5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6 그러나 나는 우리가 실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7 우리는 여러분이 악을 저지르지 않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합격자임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실격자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러분만은 옳은 일을 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

9 우리는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완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0 내가 떠나 있는 동안에 이렇게 편지를 하는 것은, 내가 가서, 주님께서 주신 권한 가지고 사건들을 처리할 때에, 너무 엄하게 대할 필요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권위는 여러분을 넘어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NASB

For we rejoice when we ourselves are weak, but you are strong; this we also pray for, that you become mature(9절).

 

이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를 시험해 봐야 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실격자입니다(5절). 바울의 소망은 고린도 교인들이 옳은 일을 행하며, 진리 안에 강하게 서는 것입니다(7-9절). 이 편지의 목적도 고린도 교인들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10절).

 

바울은 충분하고 끈질기게 자신을 소명했습니다. 그를 의심하던 사람들은 이제 자기 자신을 의심해야 합니다. 약하고 어리석다는 사실은 실격자를 가르는 척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강해집니다. 나의 믿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그 안에서 강하고 완전하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1. 스스로 시험&검증

바울은 성도들에게 스스로 믿음에 있는지 시험하고 검증하라고 요청한다. 

무엇보다 그 시험과 검증의 핵심은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는지에 대한 인식과 확신이다. 

예수님은 성도들 마음 속에 거하면서 성도들을 변화시키신다. 

예수님의 숨과 영이신 성령님은 성도들 내면에서 성도들을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로 만드신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 예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확신하고 있다면 합격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실제로는 교회에는 나오지만 구원받는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인들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하고 있는가?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고, 대답해보고, 시험하고 검증해야 할 일이다. 

 

자신을 속이면서 대답할 일이 아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변화의 움직임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바울은 몇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1) 자신 안에 예수님을 인식

2) 악을 저지르지 않음

3) 진리를 위해서 일함

4) 완전함을 향함

5) 자신 뿐 아니라 상대의 성장을 도모함

예수님을 안에 품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변화가 있다.

악을 일부러 저지르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를 위해 일한다. 

진리를 거스르는 일을 거부한다. 

점점 완전해지길 위해 노력한다. 

물론 완전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성도의 성장을 기뻐하고 그것을 추구한다. 

이런 기준으로 자신을 시험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 

 

2. 성도를 세우는 권위

바울은 자신이 권한과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다른 사도들의 권위와 견주어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많은 교회가 그것을 인정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사도들도 인정했다. 

그런데 그 권위는 단순히 설교를 위한, 사역을 위한 권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도들을 세우기 위한 권위였다. 

성도들을 징계하고 꾸중하고 판단하는 권위가 아니라,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더욱 완전함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권위였다. 

권위가 없으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기준을 마련하고, 급기야는 자신 맘대로 기준을 바꾼다. 

자기가 만든 기준도 기분따라 바꾼다. 

권위가 없으면 공동체는 무너진다. 

건강한 권위, 사람을 살리는 권위가 필요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가서 처리해야 할 일과 사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권위자로서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잘못이 교회에 너무 큰 문제가 되면, 적절하게 치리, 징계, 권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교회로부터 떠나가게 만드는 조치가 아니다. 

그 사람이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지도록 돕기 위함이다. 

권위를 가지고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권위자는 더욱 정결하며 높은 도덕 수준을 유지해야 하며, 교회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전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디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서 말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와서 잘잘못을 분별하고, 엄하게 치리하기 전에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봐야 했다. 

과연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들이 할 일이다.  

그리고 바울도 스스로 그러해야 했다. 

 

자신을 권위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 권위를 다른 사람의 성장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의 쾌락을 쫓아 권위를 남발한다. 

위계를 사용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종속시켜버린다. 

가스라이팅, 그루밍… 범죄다. 

그래서 점점 사람들은 권위자를 멀리하기에 이른다. 

제대로된 권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니라 남을 세우고 돕는 권위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슬픈 현실이다. 

슬프지만, 실제요 현실이다. 

 

나는 과연 자신있게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권위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의 질문이자 반성이다. 

 

[오늘의 기도]

참된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권한과 권세를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세우기 위한 참된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참된 권위의 본을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주님, 

저도 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섬기고 세우는 일에 더 깊이 헌신하게 하소서. 

저에게 권위가 있다면 공동체를 세우고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사용하도록 도우소서. 

억지로 함이나 짜증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새로운 한 주의 시작입니다. 

이번 한 주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 완전이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무결함이 아니라, 많은 일상의 문제들 속에서도 주님의 마음으로 대처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살아오셨듯이 저도 주님을 따라 매일의 일상의 일들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하게 하소서. 

하나님 나라의 큰 계획을 마음에 품고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29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관대하심을 힘입어서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

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강경하다고들 합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청하는 것은, 내가 가서 여러분을 대할 때에 강경하게 대해야 할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정을 따라서 처신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대하려고 생각합니다.

3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4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궤변을 무찌르고,

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6 그리고 여러분이 온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모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NIV

For though we live in the world, we do not wage war as the world does(3절).

 

주석

온유하심과 관대하심(1절) 그리스도의 ‘유순함(온유)’과 ‘관대함’은 마태복음 11:29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헬라 문화는 온유함을 덕목으로 여기지 않았다(IVP 성경배경주석).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유순함과 관대함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입니다(1절). 바울은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좋은 무기의 조건은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고 교만한 생각을 쳐부숴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권위가 없고, 사도로서 비범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강조했습니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우월해 보이는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육정을 따라 싸우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육체의 무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갑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 편지에서 주제가 갑자기 바뀐다. 

이제까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에 대해 열심을 내어줄 것을 부탁했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기근으로 인해 고통받는 성도들을 돕자고 요청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뭔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누군가가 바울을 평가하고 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할 때는 온유하고 부드러운데, 편지로 이야기 할 때는 날카롭고 강경하니, 도대체 바울의 진짜 성격은 무엇인가 등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바울이 기본적으로 강경한 사람에 속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스데반이 죽을 때에도 바울은 강경했다. 

자신의 신념에 있어서 흐뜨러짐이 별로 없다. 

그 신념이 행동으로 이어진다. 

바나바와 싸울 때도 그렇다. 

마가가 1차 선교 여행 때, 중도 포기 한 것에 대해 크게 실망한 바울은 다음 선교 여행 때는 마가를 배제했다. 

바나바는 마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고 했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바울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철두철미하고, 완벽주의에 가깝고, 신념이 투철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베드로와도 싸웠다.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베드로를 강하게 비판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신앙의 기초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러니 편지가 강경하다는 인상이 남을 만 하다. 

내 생각엔, 편지만 강경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의 성격은 올곧고 분명하고 신념에 투철해서, 만나서 대화를 해도 그의 단호한 모습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언제부턴지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함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마음 속이야 강경하고 담대하고 두려움이 별로 없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율법을 연구하면서 학자로서의 강경한 양심의 소유자였을 것이지만,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조금씩 조금씩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무엇인지, 성도들을 돌보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이다.

자신의 성격의 모난 부분을 다뤄가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경험했다. 

그러니 이제는 사람들을 만날 때, 무조건 강경하게, 단호하게, 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대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마가를 용서하고 그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르는 모습에서도 보면, 바울은 점점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고 본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그와 같은 표현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얼마나 많은 묵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 깊이를 오랫동안 묵상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사람이 바뀐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온유함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 일부는 그 온유함을 비판하고 있다. 

카리스마 있는 다른 교사들과 비교하면서 바울을 비난하고 있다. 

사람들과 있을 때는 제대로 말도 못하면서, 편지에는 강경하게 쓴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바램은 성도들이 그들의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쌓아가는 것이다. 

자신들의 지식의 교만함을 버리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우상들이 만들어 내는 지식이 있다. 

우상숭배자들이 만들어 내는 정보와 생각의 틀이 있다. 

JMS, 아가동산, 만민성결교회와 이단, 사이비를 보라. 

자신이 신이 되어 사람들을 현혹한다. 

선악의 판단을 자기 스스로 내린다. 

교주를 세우고, 그 위계를 만들어, 자신들의 왕국을 만든다. 

교주도 악하지만, 그 바로 밑에서 이용하는 제 2-3위의 권력자들도 악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지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체계, 시스템을 강화시킨다.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그 교만함을 버리지를 못한다. 

자신이 최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듯이 생각한다. 

모든 생각과 그 생각의 틀 모두가 그리스도께 반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언젠가는 칼을 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온유함으로 권유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글은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때문에, 또한 지면의 한계 때문에 딱딱하고 정리되어 제시된다. 

그러기에 강경해보이고 단호해 보인다. 

말과 대화는 사랑하는 상대가 있고, 상황이 각자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그 뉘앙스와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비판한다면, 그것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만약 그 비판이 선을 넘고 도에 지나쳐,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그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따라서 언젠가는 아주 단호하고 담대하게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가짐이다.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이 신이 되어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을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다 알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거나 교회를 이용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한다. 

담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훼손되고, 왜곡되고, 성도들이 피해를 입는다. 

물질적 피해만이 아니라 영적 피해다.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정신적 세뇌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이런 싸움을 싸워야 할 때도, 세상의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을 최우선적으로 의지한다. 

육체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무기를 사용한다.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힘이다. 

바울은 숱하게 경험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는 알고 있다. 

육체의 무기는 분노와 복수를 낳지만, 성령님의 무기는 양심을 건드리고, 회개에 이르게 하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한다. 

 

온유함, 단호함, 성령님께 대한 의존… 

바울의 삶과 사역의 태도에서 이런 요소들이 춤을 춘다. 

예술적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예술적 조합이 이뤄져, 예수님의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바울은 예수님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태도가 점점 드러난다. 

그렇게 한 개인이, 한 인간이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온유함, 단호함, 성령님께 대한 의존… 

 

오늘 내가 배워야 할 점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아침부터 몸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납니다. 

짜증과 무기력으로부터 저를 건져주소서.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참고 인내하고 온유함으로 대하려는 바울을 봅니다. 

그럼에도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불타는 열정으로 분명하게 기준을 제시하는 바울을 봅니다. 

주님, 저런 사람으로 자라가고 싶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온유함과 담대함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성령님께 의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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