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6.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3:1-12]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은 선생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됩니다여러분이 아는 대로가르치는 사람 우리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우리는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누구든지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몸을 다스릴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3말을 부리려면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그리하여 우리는 말의  몸을 끌고 다닙니다.

4보십시오배도 그렇습니다배가 아무리 커도 거센 바람에 밀려도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사공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5이와 같이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엄청난 일을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보십시오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숲을 태웁니다.

6그런데  불이요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이지만 몸을 더럽히며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결국에는  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

7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사람이 길들이고 있으며 길들여 놓았습니다.

8그러나 사람의  길들일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잡을  없는 악이며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있습니다.

9우리는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11샘이  구멍에서  물과  물을   있겠습니까?

1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있겠습니까마찬가지로  샘은  물을   없습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여러분 인생에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계시나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기억에 남는 선생님을 떠올려 봤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났지만, 가장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분은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체육 선생님이셨어요. 학기 초였습니다. 당시에는 공부를 시키기 위해 정규 수업 이외에 특별반 수업이 편셩되었던 때였습니다. 지금도 그럴 있겠지만, 당시에는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었죠. 하지만, 특별반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별도의 수업료를 내야 했습니다. 선생님이 저에게도 수업을 들으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리셨죠. 그런데 저희 집은 가난해서 사실 특별 수업료를 있는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아침 조회가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가시는 선생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수업료를 없어서 특별반 수업을 들을 수는 없겠다고 말씀드렸죠. 체육 선생님은 저의 귀싸다귀를 날려버렸습니다. 눈물이 돌았습니다. “김혁수, 뭐가 이렇게 약해 빠졌어. 수업료는 내가 해결할테니 그냥 들어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분은 저의 소심하고 약해빠진 태도, 당당하지 못한 태도가 못마땅했었나 봅니다. 지금이야 있을 없는 일이지만, 뺨을 때리고 수업료도 내주시는 그분이 이상하게 기억에 가장 오래남습니다. 

 

가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체육 선생님의 힘은 정말 세다. 그리고 인생은 조금 당당하게 살아도 된다. 등등..

여전히 저는 소심한 측면이 있지만, 인생을 살펴보면 소심함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도 때부터였던 같아요. 저의 소심함이 생각보다 저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때가 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선생님들의 영향을 받아서 곳에 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수많은 선생님들이 우리의 인격과 지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읽어볼까요?

 

1. 선생님 전성시대(1)

- 초대 교회 선생님들 

초대교회에도 선생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새롭게 생겨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사도 바울도 중에 분이죠. 사도들을 비롯하여 바나바와 아볼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등의 12사도 이외의 사람들이 등장해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반복해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어쩔 없이 조금씩 말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다뤘던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너무 강조한 선생님들이 등장했으며,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공동체의 연약하고 가난한 지체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가르쳤던 것이죠. 

 

- 너에게는 나에게는(2:18)

혹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야고보서 2:18절인데요. 

 

2: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행동을 구분하고 마치 믿음이 행동과는 따로 노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것이죠.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잘못이지만, 둘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마치 선한 행동이면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로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세지를 전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1절입니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정말 무서운 생각들이 듭니다. 하나님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시는 분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가르침을 보고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마태복음 15:14) 

 

- 신앙 인격을 좌우하는 설교들

사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엄청 많은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배 드릴 때마다 설교 시간만 되면 졸음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었던 설교들이 우리의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크게 기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매주 죄에 대해 생각하고, 죄를 용서하시는 분을 떠올리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매주 듣는 삶은 기독인들의 특수한 성품을 낳습니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과 특히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의 세계관에 크게 영향을 줍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듣는 설교, 성경 해석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실제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로서 두려운 마음입니다.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을 제대로 해석했는가, 적용점이 적실한가, 가르침과 행동이 일치하는가 등등 생각할 내용이 참으로 많습니다. 제대로 설교자들은 이런 싸움을 계속 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제대로된 설교자가 있도록 말입니다. 

 

2. 말의 (2-8)

- 현실적 인간론 

야고보는 인간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실수가 많습니다.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특별히 말의 실수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누군가를 씹는 대화를 시작하면 어느덧 욕이 나오고, 이러저러한 비난이 수위를 넘습니다. 뒷담화, 험담이 안주가 되면 술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8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Horse and Ship 

야고보는 말이 가지는 무서운 힘에 대해 말하면서 혀를 언급합니다. 우리 몸에서 작은 지체에 속하는 혀가 우리의 행동과 존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말과 배를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말에 재갈을 물려 말을 조종합니다. 배도 마찬가지죠. 배가 결국 배의 뒤에 있는 작은 키로 방향을 조정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작은 신체 기관인 혀에 의해 우리의 생각, 행동, 존재가 영향을 받는다고 적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존재가 영향을 받습니다. 쉴새 없이 욕을 하며 남을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은 생각과 행동과 존재가 터프해집니다. 부드러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 행동, 존재가 부드럽기 마련입니다. 이건 어쩔 없습니다. 

 

- 불의

단순히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혀를 어떻게 놀리는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굳이 실험 결과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쉽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매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상대방의 때문에 상처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 동안 마음 상했던 떠올려 보세요.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말로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100밀리미터의 철갑판을 대고 사는 같습니다. 살살 웃으면서 말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모습을 보면, 전쟁터와 다름 없습니다. 한마디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가장 끔찍한 말을 사용했던 사람은 아마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갈라치기의 대마왕이었죠. 잠잠했던 인종 차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민자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국 이기주의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평화/환경 공조가 흐트러졌습니다. 혀가 너무 가볍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말을 안하고 수는 없습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화병에 걸려 죽을 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고유한 중에 하나가 화병이라고 합니다. 꾹꾹 참으면서 살다보니 섞은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서 결국 화병이 나고 마는 것이죠. 지난 20세기 한국이 당한 역사를 보면 화병이 생길 수가 없었을 같긴 합니다. 36년의 일제치하에서 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해방되자 좌우 이념 대결 때문에 숨죽이고 살다가 동족 상잔의 한국 전쟁이 터집니다. 남한에 살던 사람들은 반공주의와 군사독재의 권위주의 시대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화병이 생기죠. 이해할만 합니다. 

 

우리는 말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혀를 놀려야 합니다. 크게 웃어야 합니다. 때로는 분노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말과 말의 태도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의 근원은 우리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3. 말의 중심(9-12)

- 말의 근원 

 

1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짠 샘은 단 물을 낼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말은 사람의 중심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을 없습니다. 포도나무가 무화가 열매를 맺을 없습니다. 짭짤한 샘에서는 물이 나올 없습니다. 바닷물에 영향을 받고 있는 샘에서는 사람이 마실 있는 민물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 분노가 가득한데 부드러운 말이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마음 속에 사도들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마음이 가득한데, 사도들 가르침 그대로 말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 말과 말의 태도 

마음의 중심에서는 말의 내용 아니라 말하는 태도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말의 뉘앙스를 파악합니다. 말의 내용 아니라 바디 랭귀지가 의사소통에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우리가 줌에서 오랫동안 대화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서로 마주보며 눈과 손짓과 제스처를 봐가며 말의 뉘앙스를 파악하면서 대화를 해야 하는데, 말의 내용만으로 소통하려고 하니 더욱 피곤해지는 것이고, 충분히 소통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런 말의 내용 아니라 말의 태도도 바로 우리의 마음 중심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기 마련이다.

 

4. 축복의 말이 넘치는 공동체 

- 용서 그리고 평안 

야고보가 보고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실상을 그려보실 있으시겠어요?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이 일파만파 퍼져나갑니다. 사도들이 원래 가르쳤던 내용을 넘어서는 말들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는 파괴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분열을 일으킵니다. 말의 힘이 그렇게 무섭게 초대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선택했습니다. 사람을 비판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축복하는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으로 형제자매들을 저주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당한 판단이라는 것이 있을 겁니다. 잘못에 대해 잘못이라고 말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를 저주해서는 안됩니다. 분노가 도를 지나쳐 욕을 하거나 저주를 부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언어 속에 용서의 말이 조금 늘어나야 합니다. 형제 자매의 약점과 실수와 잘못에 대해 용서를 통해 평안을 전하는 말들이 늘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서 용서의 말들이 사라지는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잘못했다는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용서한다는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서로 말없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용서는 우리 시대에 맞지 않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어색하지 않는 분위기가 연출하기 위해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웃음으로 뭉개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진심으로 용서의 말과 용납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 비판 보다는 축복

비판 보다는 축복의 말이 우리의 일상의 언어에 많이 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축복의 말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동안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던 삶에 대해 서로 축복의 말로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고,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5. 나가며 

- 바른 설교자 그리고 축복의 성도들
오늘 야고보는 가지를 한국 교회와 우리 공동체에 던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바른 설교자입니다. 말로 다른 사람들의 신앙 인격을 좌우하는 저를 비롯한 설교자들이 더욱 최선을 다해 바른 말씀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것입니다. 둘째는 성도들의 말이 축복의 언어로 바뀌어야 합니다. 말만하면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처음 배우는 언어는 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축복의 말이 흘러가야 합니다. 이번 주는 어떤 축복의 말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누구인가요? 그분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2.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 야고보는 우리의 언어 생활에 변화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평소에 쓰는 언어 중에 삭제하고 싶은 말과 말의 습관 혹은 장착하고 싶은 말과 말의 습관이 있다면 나줘주세요. 

 

2021. 5. 30.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2:14-26] 

14나의 형제자매 여러분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있겠습니까?

15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몸을 따뜻하게 하고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나에게는 행함이 있다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잘하는 일입니다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20어리석은 사람이여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2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것입니다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23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24여러분이 아는 대로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25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6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지난 주에 우리는 차별 없는 공동체를 꿈꾸는 야고보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의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죠. 권력, , 혈연 이런 것이 차별을 정당화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 보호받지 못했던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소위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셨죠. 야고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봤습니다.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을 봤는데, 그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죠. 오히려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최전선에 서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에베소의 감독이 되는 인생역전의 이야기가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넘쳐났습니다. 게다가 야고보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우리 인생을 자유롭게 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주는 율법, 자기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차별 없는 공동체를 꿈꾸는 야고보는 이제 조금은 논쟁적인 주제로 들어갑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내에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어이없는 생각의 흐름을 보았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맞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자녀라는 생각이 무섭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동안 주장했던 내용,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로마서에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할례와 음식법과 예식법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주장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유대인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쳤죠.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왜곡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심각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필요없다, 율법은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들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오해했고, 바울의 주장도 오해했습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없었습니다.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아주 강한 어조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1. 행함 없는 믿음

사실 내용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읽어보면 야고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있습니다. 야고보는 돌려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최고 행정가답습니다. 그의 글은 명료합니다. 14절에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 행동이 따라오지 않으면 과연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사람이 입을 옷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그런 중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에 찾아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초췌해 보이십니까? 그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도 예배를 드렸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몸도 따뜻하게 하시고, 밥도 맛있게 많이 드세요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겁니다. 실제적인 도움이 없습니다. 옷도 나누지 않고, 밥도 나누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것을 행함 없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무섭게 다음 문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땅에 선포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 주인이시며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것이 지식에 머무는 죽은 지식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받는 방법에 항상 집중해 왔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는 원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왔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까지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16장까지 있습니다. 로마서 8장까지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믿음이라는 새로운 원리가 도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씀을 이어갑니다. 서로 잘난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낫다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통합된 새로운 공동체의 윤리가 탄생한 것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하나될 것을 의도하였습니다. 12장부터는 더욱더 믿음대로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2) 

 

그렇습니다. 바울도 믿음으로 구원의 대열에 동참한 사람들의 삶의 실천과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지 로마서라는 편지에 함께 놓았던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편지가 바울의 갈라디아서입니다. 그곳에서도 바울은 할례주의자들과 한판 크게 싸우면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합니다(갈라디아서 2:16). 그러나 5-6장에 보면 바울은 성령에 따라 행동하라고 강하게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언급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라디아서 5:22-25 중 발췌) 

 

어떻습니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은 행함으로 이어지도록 배치했습니다. 복음이 윤리를 낳는 겁니다. 개인 윤리, 공동체 윤리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 자기 위안입니다. 절반의 로마서, 절반의 갈라디아서가 되는 겁니다.

 

2. 어리석도다 

편지에 쓰지 말아야 단어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것입니다. 글을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대화 속에서 나온 욕이나 비방은 실수였다고 변명이라도 있지만, 혹은 대화의 맥락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쌍방의 잘못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공적인 문서, 이메일, SNS 등에 남겨진 욕과 비방은 영원히 남아 나의 꼬리표가 되어 잊을만하면 튀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더더욱 조심해야 일입니다. 

 

그런데 최고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가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험한 말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이죠? 

 

20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어리석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써서는 안되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리석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험한 말을 쓰고 있는 걸까요? 18절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과 행함을 나누고 있음을 있습니다. 둘은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있군요. 저에게는 행함이 있답니다. 행함이 없는 당신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행함으로 통해 나의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얼핏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행동을 중시하는 바른 신앙의 사람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믿음과 행함이라는 이분법에 빠져 있음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습니다. 둘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잘못합니다. 믿음이 없는데, 행함만 있으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행함의 근원적 동기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어야 것입니다. 동기가 없이 행함으로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으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게 믿음과 행함은 뗄레야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적극적이고 때로는 급진적인 행함이 뒤따라야 하는 겁니다. 

 

#아기 고양이 '새까미' 구조 이야기 

지난 주일 저에게는 엄청난 일이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교회 근처에서 놀다가 심한 고양이 감기에 걸려 어미에게 버림받고 홀로 있던 2-3개월된 아기 고양이를 구조했습니다. 예배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동물병원에 가자고 해서 치료만 하고 다시 원래 자리에 놓고 가려고 했습니다. 아내도 알러지가 있고 저도 먼지 알러지가 있어서 동물을 집에서 키우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하고 있었죠. 아들이 아직 다섯살이라 그것도 조금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날씨를 확인해보니 계속 비가 내린다는 거예요. 허피스라는 고양이 감기에 걸리면, 면역이 약한 아기 고양이는 죽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어쩔 없이 집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가다가 다시 병원에 들러 구충제 주사를 맞히고 귀에 있는 진드기 제거를 했죠. 분변 검사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기 고양이 임시보호를 시작하게 되었죠. 병원비만해도 10만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난 병든 아기 고양이 돌보느라 잠도 번이나 설쳤죠. 밥도 못먹는 아이 고양이 입을 벌려서 미음 같이 만들어 먹였습니다. 정성을 들였더니 회복되어 어제 병원에 갔는데,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구요. 처음에는 허피스 고양이 감기 때문에 결막염이 와서 눈도 못떴었거든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정말 데려가기 싫었지만, 작은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했죠. 작은 실천이지만, 이런 실천들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3. 밖의 본문#1

야고보는 결코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철저하게 성경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 라합이 이스라엘의 여리고 공격을 도와주는 이야기를 꺼내들고 있습니다. 구약이 익숙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적합한 이야기 구성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죠.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당시에 뉴욕, 런던, 서울 같은 세계적인 도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도시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라고 하시죠.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그럼에도 아브라함을 자기 고향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땅과 자손과 그리고 세계가 자신을 통해 복을 누리게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되고 그것을 철썩같이 믿습니다. 믿음을 통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김을 받습니다. 

 

바울은 부분을 주목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였기에 그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할례를 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로마서에 등장하는 이신칭의의 중요한 근거입니다(로마서 4). 

 

하지만,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다른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바로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렵사리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저히 말도 안되는 명령에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리고 직접 죽이려고 하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말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은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아라. 니가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니 진정 나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겠다.’(창세기 22:11-12, 의역)

 

아브라함의 여러 실수에도 불구하고 사건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완전히 인정해주십니다. 야고보는 이런 실천과 행동이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22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의롭다하심을 받는 선포와 선포에 걸맞는 삶을 인정받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의롭다하심의 선포를 받습니다. 그러나 선포에 걸맞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합니다. 

 

4. 밖의 분몬#2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어찌보면 수치스런 이야기를 꺼내들었습니다. 바로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이야기였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광야에서 40년간 지내면서 온갖 기적을 경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믿음만으로 그녀가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여리고를 정탐하러 이스라엘 병사 둘을 몰래 숨겨주고 돌아갈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며 결국 난공불낙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졌으며,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면서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였던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보아스의 어머니였으며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여인이 되었습니다(마태복음 1:5). 그리고 따지고 보면 편지를 쓰고 있는 야고보의 직계 조상이기도 했습니다. 기생 라합이 믿음과 행동으로 인류구원의 약속을 이어가는 엄청난 가계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죠. 

 

야고보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믿음의 지적인 측면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라합의 믿음도 지적인 동의나 지식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지적인 동의나 지식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마치 귀신도 구원에 이를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없습니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이쯤 되니까 야고보가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말로만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어리석다 말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자칫하면 그들은 귀신들의 믿음과 동급이 수도 있습니다.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죽은 것이고 죽음은 사단과 귀신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5. 나가며_믿음의 실천이 살아있는 공동체 

여러분, 만약 야고보가 다시 살아나서 우리 공동체를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 같습니까? 야고보가 환생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편지를 쓸까요? 환생은 기독교적 용어는 아니지만, 그냥 상상해 보자는 겁니다. 질문을 심도있게 곰곰이 살펴야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나요? 우리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송죽원의 아이들이었습니다. 교회 옆에 신기한 놀이터가 생겼습니다. 주말이면 정말 놀이 공원 처럼 많은 부모님들이 자신들의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좋은 일이죠. 그런데 송죽원의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왠지 비교될 같아 갑자기 마음이 쓰입니다. 우리 교회 유치부 아동부에는 송죽원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은 우리가 있는 아주 작은 실천이 것입니다. 송죽원을 졸업하는 분들, 보호가 종료되는 분들의 나이는 18세입니다. 정착지원금으로 국가로부터 500만원에서 800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돈만큼 중요한 것이 이들의 갑작스런 자립과 그로부터 오는 자유 그리고 외로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돈, 안정적인 직장, 학업 유무를 성공한 자립의 기준으로 많이 봐요. 이것들이 충족되면 겉으로 보기엔 잘한 자립이겠죠. 하지만 아무리 물리적인 자립에 성공했더라도 아이가 혼자 지내며 외로움을 스스로 견뎌내지 못하면, 상처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이 또한 성공적인 자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물리적인 자립을 잘했을 지라도 아이들이 스스로에게 있는 상처를 잘 헤쳐나갈 수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필요해요.”
-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커뮤니티 ‘케어센터’ 조한나 기획처장/
출처 : https://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348

 

그동안 우리 교회가 송죽원의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유치부 아이들을 많이 섬긴 것으로 압니다. 만약 우리 송청이 송죽원의 보호 종료된 청년들을 재정적이든 정서적이든 도울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 좀더 많은 분들이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송죽원의 아이들을 섬기는 에너지를 쓰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부, 아동부의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섬겨 주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야고보는 말로만 하는 위로 지식으로만 갖고 있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이 말하는 것과 배치되거나 상반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로부터 빨리 풀려나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함께 기도하기]

1. 우리의 믿음이 지식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에 원하시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있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2. 송죽원의 어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마음의 상처들이 회복되고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누리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보호 종료 되는 18살의 청년들이 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충분한 도움 속에서 건강하게 자립할 있도록 기도합시다.  

 

3.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둘이서 잠깐 짝을 지어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바울의이신칭의 야고보의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사이의 부조화를 느껴 적이 있나요? 어떻게 해소할 있을까요? 

 

2. 나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뜻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있을까요? 

 

 

누가복음 19장 1-10절 

삭개오의 회심

2018. 2. 4. 김혁수 

 

0. 들어가며 

- 안OO 검사

지난 한주 저는 슬프고 부끄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월요일 JTBC 뉴스룸에서 서지현 현직 검사와의 인터뷰 장면이 방송을 탔는데요.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8년전에 성추행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추행한 사람이 바로 유력한 선배 검사였다는 인터뷰였습니다. 

어떻게 기소권과 수사권을 동시에 가진 검사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말인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더욱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던 것은, 성추행으로 지목당한 안OO 전 검찰국장이 한 대형교회에서 세례 간증을 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힘들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했는데, 그 간증을 듣고 사건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서OO 검사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회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회개, 회심, 용서받기 등등의 기독교적 용어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원래 설교해야할 본문을 내려놓고, 한주동안 이 주제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과 묵상을 했습니다. 

오늘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의 회심이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말씀을 읽어볼까요.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삭개오 이야기의 상황 

1) 삭개오는 누구인가? 

- 여리고의 세관장(1-2절) 

여리고는 국경도시였습니다. 구약에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에 처음 들어가는데, 그 첫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신약에도 베레아 지역과 유대 지역의 중간 도시였습니다. 국경을 넘어설 때 받는 관세나 판매세 등을 걷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여리고는 지금으로 말하면, 인천공항 세관 같은 곳이겠죠.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지역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헤롯대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죠.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따뜻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연평균 온도가 18도인 반면에 여리고는 연평균 온도가 25도입니다. 요사이 처럼 추운 날에는 제주도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 따뜻한 남쪽 나라... 헤롯에게 여리고가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역량도 많고 따라서 세금도 많이 걷히고 있었겠죠. 당시 로마는 세관장에게 입찰을 주었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세금을 걷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세금 공무원의 자격을 준 겁니다. 월급은 따로 없었습니다. 세금을 걷어서 자기 월급을 만들면 되는 구조였습니다.

 

이쯤되면 왜 사람들이 세리들을 성매매여인들과 함께 죄인이라고 말하는 줄 알겠죠? 세리들은 동족의 피 같은 돈을 긁어모아 그들을 강제로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추가로 걷은 세금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자들이 바로 세리들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세관을 맡은 세리장, 혹은 세관장이었습니다. 특별히 험한 꼴을 직접 보지 않고도 그는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민족을 배반하였지만, 그 댓가로 큰 부를 누렸습니다.

 

- 부자(2절) 

그래서 2절에서 그를 부자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뽕나무의 진실

- 그동안 우리는 이 뽕나무에 대해 잘 못 알고 있었는데요. 이 뽕나무는 우리가 흔히 보는 키가 작은 오디 열매가 맺히는 2미터 남짓한 뽕나무가 아닙니다. 이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돌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이며 키가 15-16미터까지 자랍니다. 뿌리부터 나무줄기가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올라가기도 쉬웠습니다. 원래 적군을 보는 망대 역할을 하는 나무로 심겨졌습니다. 

 

150센티미터 정도로 예상되는 작은 키를 가진 삭개오 여리고 지방국세청장님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오래부터 우리는 삭개오님의 적극적인 열성에 대해 칭찬하는 설교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마음에 집중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그것도 좋은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포인트를 짚어볼 생각입니다.

 

3) 공개적 죄인 

일단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른 유대인들이 삭개오 세리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7절입니다. 사람들은 세리장인 삭개오를 다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되았는지, 세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어떻게 자신들의 혈세가 고스란히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민족을 배신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죄인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은 로마 군인들을 대상으로 성을 팔았습니다.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동족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두 그룹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가장 큰 죄인들 중의 죄인이었던 것이죠. 

 

4)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했을까요? 왜 그에게 다가갔을까요? 뽕나무에 올라간 사람은 삭개오 뿐일까요? 올라가기 쉽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널려있는 돌무화과나무위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삭개오 뿐이었을까요? 왜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거신 걸까요? 이 질문을 해결해 보려면 전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30절에 보면, 돈많은 관리가 나타나 무엇을 해야 영생,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을 잘 지켰는지 물어보십니다. 그건 아주 잘 지켜왔다고 합니다. 그 부자 관리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제안하십니다. 

 

- 돈 많은 관리의 근심

그러나 이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 부자 관리는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어렵다, 과장법을 사용해서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씀합니다. 

 

-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깜짝 놀라죠. 계명을 잘 지키며 부자로서 사회적으로 덕망있는 관리자, 지도자인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니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_부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18장에 이어서 19장에 삭개오를 주목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부자를 구원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를 구원하십니다. 

삭개오와 부자관원과의 핵심적인 차이는 진정한 회심의 차이입니다. 부자관원은 자신의 돈이 아까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버렸습니다. 이게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자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삭개오의 회심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2. 삭개오의 회심 

1)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모심(6절)

삭개오의 회심의 첫 번째 요소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매우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얼른 내려왔습니다. 어린이가 아닙니다. 청년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장년이겠죠. 그러니까 세리장을 하고 있겠죠. 다 큰 어른이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나무에서 거의 뛰어내리듯이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흥분과 기쁨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맞이하죠. 

“So he hurried and came down and received him joyfully”(ESV)

“in great excitement and joy”(NLT)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인격적 반응이 회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나의 죄인됨을 알고 오직 그분만이 나를 구원할 분임을 믿고 그분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회심에 있어 첫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나의 죄만을 들쑤시는 죄의 고백은 바른 회심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이상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회심은 바른 회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회심의 첫번째는 그분에 대한 기쁨입니다. 

 

2)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는 것(8절)

삭개오의 회심의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자신의 소유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돈이 너무 많다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그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강제적으로 뺏앗은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 그 어머어마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혹이나 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과 대중앞에 공표를 해 버린 겁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분의 가르침에도 호의적이고 적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삭개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신을 처분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3. 회심의 다양한 측면 

1) 회심이란? 

여러분 회심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제가 몇가지 선택지를 드려볼게요. 

- 죄를 인식하는 것 

- 죄를 뉘우치는 것 

-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

-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 

- 죄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는 것 

- 더이상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 선을 행하기 위한 노력하는 것 

 

=> 인식, 감정의 반응을 넘어선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회심이다. 

회심이란 터닝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과 애통만으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 (shub)는 “돌아서다. 되돌아오다. 도로 찾다. 회복하다”의 뜻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 (metanoein) 는 “방향전환”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회심은 죄의 습성과 죄된 방향으로의 진행을 멈추고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 및 진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터닝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죄를 인식하거나 뉘우치는 것을 넘어섭니다. 짐 윌리스, <회심> 에 나오는 정의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회심이 무엇인지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건 바로 돌이킴입니다. “뒤로 돌아 가”입니다. 돈과 안정을 위해 달려가던 삶을 멈추고 뒤돌아서 완전히 다른 방향,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2) 회심의 신비

회심에는 신비로운 요소가 분명있습니다. 회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사회문화적 존재인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마치 속옷처럼 입고 다니던 그 사회적 관습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중생, 곧 회심이 일어나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회심에서 인간의 결단과 결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회심은 돌이켜서 걸어가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로봇이 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방향을 틀고 새로운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입니다. 

 

3) 회심했는가? 

여러분 회심했나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 들이셨나요? 정말 그분이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는 분 맞습니까? 동시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가치에 따라 구체적인 결단이 있었습니까? 예를 들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까?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잘못된 관행과 불의에 대해 먼저 나서서 피해자에게 용서와 보상을 결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회심의 진정성은? 

- 앞으로의 말과 행동에 달렸다. 

저는 안OO 성도의 회심을 믿고 싶습니다. 그가 경험한 예수님에 대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분도 개인적으로야 꽤나 힘든 시기를 보냈겠죠.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겠죠. 그분이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제가 판단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회심이 진심이라면, 그가 진정성있게 회심을 했다면,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그의 말과 행동이 그의 회심의 진정성을 보여주게 될 겁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우리 국가 공동체가 정해놓은 법의 형벌을 담담하게 받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 문화적 교인들의 한계 

이건 안OO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터닝이 없는, ‘돌아서서 감’이 없는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죄의 회개를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에서 해결하면 된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눈물이 나오면 모든 죄가 사라졌다는 생각은 너무 주일학교적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에서 대형캠프에서 다루는 너무나 대중적인 관점입니다. 

죄는 지극히 사회적이며 관계적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는 경우도 태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렇다면 이제 그 받은 은혜를 힘입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게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무릎을 꿇어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쇼가 아니라 진심이 담겨야 합니다. 이렇게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힘도 내가 용서 받았기 때문이며, 용서를 비는 힘도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욱 이상적인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5:23-24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심지어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나올 때, 형제 자매 중에 원한과 원망이 있다고 생각이 들때는 예배드리는 도중에라도 그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한 뒤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회심은 하나님과만의 관계 회복에 제한 혹은 국한 되지 않습니다. 회심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5. 나가며

저는 큰 원리를 알려드린 겁니다. 케바케가 정말 많을 겁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벌써 돌아가셨거나, 연락이 두절인 경우도 있겠죠. 가해와 피해가 교묘하게 섞여 있어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용서구함이나 용서함이 성립되기가 어려운 경우도 다반사겠죠. 그건 함께 고민해봅시다. 무엇이 성경적으로 회심한다는 말인지 그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봅시다. 

 

하지만, 큰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회심은 그분을 기쁘게 맞이하는 겁니다. 회심은 자신의 소유를 베푸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회심은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보상배상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인식과 감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회심은 “돌아서 감”입니다. 

 

*** 기도회 

하나님은 여러분을 진정한 회심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1) 진정한 회심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2) 하나님께 용서받은 그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이제는 나의 잘못에 대해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기도합시다. 

 

*** 참고 도서

짐 윌리스의 [회심]

김영봉 목사의 [숨어있는 하나님]

2021. 5. 23.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2:1-17]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당신은 거기 있든지, 발치에 앉든지 하오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6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여러분이 받드는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라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하신 분이 또한살인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설교]
0.
들어가며
역시 야고보서는 난해합니다. 때로 성경 저자가 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지 관점으로, 딜레마 혹은 트릴레마 없이 평이하게 이해되는 글로 적혀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 말이죠. 

 

바울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야고보의 글은 너무 단도직입적입니다.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서 보이는 신학적 진술, 그리고 토대 위에 설계된 생활 윤리, 공동체 윤리이렇게 집을 지어가야 이해가 그나마 쉬울 텐데, 야고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시험에 인내하라, 분노하지 말고 조심하라, 그리고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서 같기도 하고, 규정집 같기도 하고, 여튼 신학이 정확히 노출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고 어떤 토대에서 말하는지 흐릿해서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문맥도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자유를 주는 율법같은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적용되는 상황에서도 율법의 기능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언급이 빨리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의 초기 지도자 야고보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특별한 갈등과 긴장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둘을 통합해서 조화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한번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차별 노노

확실히 야고보서는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편지입니다. 공동체 내외부의 위기를 겪고 있음을 초대 교회 지도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박해와 같은 외부의 핍박과 시련을 인내하라고 편지의 1장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의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분노의 말을 삼가며 성경 말씀을 실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의 말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야고보는 그걸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가 눈여겨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동체내에 존재하는 차별입니다. 2-4절을 읽어봅시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야고보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비슷한 경우가 발생했음을 우리는 충분히 추측할 있습니다. 왜냐면, 당시에 편지를 쓴다는 것은 오늘날 이메일을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비용도 많이 드는 일입니다. 필요한 내용만 넣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예를 들었다는 것은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 모범 되신 예수 그리스도 

기독 공동체에 암암리에 녹아 있는 차별을 보았습니다. 야고보는 그냥 넘어갈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원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차별이 사라져야 했습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놓인 차별의 간극을 메워야 했죠. 야고보가 사용한 논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차별해야 하지 않아야 하는 번째 이유는, 야고보의 형제 자매가 우리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영광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자/빈자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경험한 예수님에 관한 충격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을 뽑았습니다.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더니 갑자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원래 이런 소문은 삽시간에 번지잖아요.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먹을 시간조차 없습니다. 밀려오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자리에 앉히고 순서를 정해서 병도 고쳐 주시고, 귀신도 내쫓으십니다. 그런데 너무 갑자기 인기를 얻으니 사람들의 시기 어린 가짜 뉴스가 돌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것입니다. 혹은 악한 귀신이 들려서 귀신이 벌이는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런 소문이 누구의 귀에 들어갔냐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가족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형님을 찾으러 갑시다. 가서 더이상 외부활동을 하지 않도록 집에 가둬둡시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갔고, 결국 어머니와 동생들, 특히 야고보를 필두로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그냥 가까이 오기엔 불가능해보였죠.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지난 30 동안 함께 보냈던 형님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 33-35)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알았습니다. 예수님에겐 혈통/혈육 조차도 특혜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이 많은 사람과 없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인들을 선대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친가족이라고 해도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그의 동생 야고보는 보았던 거죠. 충격적인 예수님의 말에 당시에는 분개했지만, 나중에는 알게 되었죠. 그분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사람들의 외모, 외형, 권력과 돈의 유무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적을 있었던 겁니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본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남자건 여자건, 부자건 빈자건 간에 공평하게 대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입니다. 최근 서울시장, 부사시장 보궐선거 이후에 남녀의 성갈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십대 남자들이 대거 국민의힘을 지지하게 되면서 이유에 대해 궁금함이 많이 커졌습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염려가 되는 부분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과 감정의 골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베, 메갈 등의 단어가 서로를 향한 혐오를 드러냅니다. 

 

3. 인생역전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차별하지 말아야 번째 이유도 적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세상을 다스리면서, 혹은 개입하시면서 사용했던 방식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빈자를 택해서 믿음의 부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게 아이러니 한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능력있고 부유한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시기 보다는 볼일 없어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입니다. 

 

여러분, 부자들은 쉽게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곤 합니다.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 빈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운영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많은 결정을 내려왔고, 많은 일들을 왔습니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보수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애적입니다. 어쩔 없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그렇게 밖에 없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죠. 생각의 메커니즘, 행동의 방식이 고착화됩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하게 됩니다. 부자의 논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참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 나라는 빈자들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고 관리하고 경영하는 권리가 생긴 것이죠. 부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권리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업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실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바울이 빌레몬서에 드라마틱하게 등장합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의 돈에 손해를 입히고 도망자가 됩니다. 우연히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되죠. 그리고 바울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그럼에도 노예 도망자의 신분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죠.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대하라고 말이죠. 나중에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어 바울의 편지를 모아 정경화 하는 과정 속에서 빌레몬서를 신약 성경에 포함시키게 되죠. 

 

야고보는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생역전의 드라마가 곳곳에 넘쳐납니다. 그러니 결코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참고)  서종현 선교사의 삶과 사역

https://www.youtube.com/watch?v=yv6mgVT0sLM

http://www.gospe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1

 

 

4. 율법 순종

번째 이유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생각보다 치밀합니다. 논거들을 가지나 드는 것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차별하지 말아야 번째 이유는, 율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8-12절입니다.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한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그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율법의 주요 강령은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으뜸가는 율법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와 빈자를 구별해서 다르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죠.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혼자 산다면 굳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하나님께 시기에 맞춰 예배하고 찬양하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적, 사회적 존재이기에 법이 필요하고, 법과 규정은 개인과 공동체를 자유하게 합니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있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해하지 않을 있는 자유까지 포괄하죠. 죄를 짓지 않을 있는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대로 하면, 자유를 얻을 없습니다. 욕구대로 하면, 이웃 아니라, 가족과 자기 자신조차도 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니 법은 포괄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와 사람들을 용서하고 은혜가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가져다 주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죄인을 용서한다해도, 여전히 율법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나요?  율법도 그렇습니다. 물론 억압과 부자유의 율법이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주는 율법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율법이 바로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같은 것이죠. 

 

저는 사실 순종하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습니다. 순종은 비판적인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변명같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가 드니까 율법에 순종하라는 말의 중요성을 점점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지성은 한계를 가집니다. 정보는 쌓이고 게다가 방대해집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해를 최신의 지식으로 하려고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는 늙고 지력은 줄어듭니다. 이상 혁신적인 생각을 받아들이는 한계를 느낍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절대 불변의 말씀에 귀의하고 싶어 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 육체는 젊고 생각이 싱싱하기에 무엇이든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할 있다고 믿으시죠?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때로는 필요합니다. 젊은 자기만의 생각을 갖는 , 포스트모던 시대에 주체적인 신앙의 자아를 형성하는 , 너무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일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순종의 의미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우리 나름 각자의 방식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5. 나가며_차별하지 않는 공동체 

야고보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 공동체가 빈부의 차이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하게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 율법이 이웃 사랑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공동체를 꿈꿔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단순히 개인 윤리의 책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책입니다. 차별이 없는 공동체가 되도록 지속적인 리플렉션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를 계속해서 돌아보고 잘못한 것은 뉘우치고, 잘하는 것은 더욱 잘하도록 격려하며, 부족한 것은 서로 채워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개인도 일기를 쓰지만 공동체도 그렇게 일기를 내려가야 합니다. 

 

부자와 빈자가 차별받지 않는 공동체, 남녀가 차별대우 받지 않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있을까요? 

이건 혼자의 고민, 혼자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의 고민,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것입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우리 공동체의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면 어떨까 논의 중에 있습니다.  급한 재정적 필요가 있는 분들은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공동체 모두가 함께 기금을 마련해서 돕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주도 오늘의 말씀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나 차별의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고, 제거할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2. 우리 주변에 고난 받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도울 있는 우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차별 대우를 받은 적은 없었나요? 때의 마음은 어떠했나요?  

 

2. 나와 우리 공동체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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