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장 1-10절 

삭개오의 회심

2018. 2. 4. 김혁수 

 

0. 들어가며 

- 안OO 검사

지난 한주 저는 슬프고 부끄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월요일 JTBC 뉴스룸에서 서지현 현직 검사와의 인터뷰 장면이 방송을 탔는데요.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8년전에 성추행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추행한 사람이 바로 유력한 선배 검사였다는 인터뷰였습니다. 

어떻게 기소권과 수사권을 동시에 가진 검사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말인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더욱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던 것은, 성추행으로 지목당한 안OO 전 검찰국장이 한 대형교회에서 세례 간증을 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힘들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했는데, 그 간증을 듣고 사건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서OO 검사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회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회개, 회심, 용서받기 등등의 기독교적 용어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원래 설교해야할 본문을 내려놓고, 한주동안 이 주제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과 묵상을 했습니다. 

오늘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의 회심이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말씀을 읽어볼까요.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삭개오 이야기의 상황 

1) 삭개오는 누구인가? 

- 여리고의 세관장(1-2절) 

여리고는 국경도시였습니다. 구약에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에 처음 들어가는데, 그 첫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신약에도 베레아 지역과 유대 지역의 중간 도시였습니다. 국경을 넘어설 때 받는 관세나 판매세 등을 걷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여리고는 지금으로 말하면, 인천공항 세관 같은 곳이겠죠.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지역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헤롯대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죠.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따뜻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연평균 온도가 18도인 반면에 여리고는 연평균 온도가 25도입니다. 요사이 처럼 추운 날에는 제주도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 따뜻한 남쪽 나라... 헤롯에게 여리고가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역량도 많고 따라서 세금도 많이 걷히고 있었겠죠. 당시 로마는 세관장에게 입찰을 주었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세금을 걷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세금 공무원의 자격을 준 겁니다. 월급은 따로 없었습니다. 세금을 걷어서 자기 월급을 만들면 되는 구조였습니다.

 

이쯤되면 왜 사람들이 세리들을 성매매여인들과 함께 죄인이라고 말하는 줄 알겠죠? 세리들은 동족의 피 같은 돈을 긁어모아 그들을 강제로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추가로 걷은 세금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자들이 바로 세리들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세관을 맡은 세리장, 혹은 세관장이었습니다. 특별히 험한 꼴을 직접 보지 않고도 그는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민족을 배반하였지만, 그 댓가로 큰 부를 누렸습니다.

 

- 부자(2절) 

그래서 2절에서 그를 부자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뽕나무의 진실

- 그동안 우리는 이 뽕나무에 대해 잘 못 알고 있었는데요. 이 뽕나무는 우리가 흔히 보는 키가 작은 오디 열매가 맺히는 2미터 남짓한 뽕나무가 아닙니다. 이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돌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이며 키가 15-16미터까지 자랍니다. 뿌리부터 나무줄기가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올라가기도 쉬웠습니다. 원래 적군을 보는 망대 역할을 하는 나무로 심겨졌습니다. 

 

150센티미터 정도로 예상되는 작은 키를 가진 삭개오 여리고 지방국세청장님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오래부터 우리는 삭개오님의 적극적인 열성에 대해 칭찬하는 설교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마음에 집중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그것도 좋은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포인트를 짚어볼 생각입니다.

 

3) 공개적 죄인 

일단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른 유대인들이 삭개오 세리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7절입니다. 사람들은 세리장인 삭개오를 다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되았는지, 세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어떻게 자신들의 혈세가 고스란히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민족을 배신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죄인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은 로마 군인들을 대상으로 성을 팔았습니다.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동족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두 그룹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가장 큰 죄인들 중의 죄인이었던 것이죠. 

 

4)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했을까요? 왜 그에게 다가갔을까요? 뽕나무에 올라간 사람은 삭개오 뿐일까요? 올라가기 쉽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널려있는 돌무화과나무위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삭개오 뿐이었을까요? 왜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거신 걸까요? 이 질문을 해결해 보려면 전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30절에 보면, 돈많은 관리가 나타나 무엇을 해야 영생,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을 잘 지켰는지 물어보십니다. 그건 아주 잘 지켜왔다고 합니다. 그 부자 관리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제안하십니다. 

 

- 돈 많은 관리의 근심

그러나 이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 부자 관리는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어렵다, 과장법을 사용해서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씀합니다. 

 

-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깜짝 놀라죠. 계명을 잘 지키며 부자로서 사회적으로 덕망있는 관리자, 지도자인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니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_부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18장에 이어서 19장에 삭개오를 주목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부자를 구원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를 구원하십니다. 

삭개오와 부자관원과의 핵심적인 차이는 진정한 회심의 차이입니다. 부자관원은 자신의 돈이 아까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버렸습니다. 이게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자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삭개오의 회심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2. 삭개오의 회심 

1)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모심(6절)

삭개오의 회심의 첫 번째 요소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매우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얼른 내려왔습니다. 어린이가 아닙니다. 청년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장년이겠죠. 그러니까 세리장을 하고 있겠죠. 다 큰 어른이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나무에서 거의 뛰어내리듯이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흥분과 기쁨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맞이하죠. 

“So he hurried and came down and received him joyfully”(ESV)

“in great excitement and joy”(NLT)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인격적 반응이 회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나의 죄인됨을 알고 오직 그분만이 나를 구원할 분임을 믿고 그분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회심에 있어 첫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나의 죄만을 들쑤시는 죄의 고백은 바른 회심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이상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회심은 바른 회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회심의 첫번째는 그분에 대한 기쁨입니다. 

 

2)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는 것(8절)

삭개오의 회심의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자신의 소유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돈이 너무 많다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그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강제적으로 뺏앗은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 그 어머어마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혹이나 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과 대중앞에 공표를 해 버린 겁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분의 가르침에도 호의적이고 적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삭개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신을 처분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3. 회심의 다양한 측면 

1) 회심이란? 

여러분 회심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제가 몇가지 선택지를 드려볼게요. 

- 죄를 인식하는 것 

- 죄를 뉘우치는 것 

-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

-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 

- 죄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는 것 

- 더이상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 선을 행하기 위한 노력하는 것 

 

=> 인식, 감정의 반응을 넘어선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회심이다. 

회심이란 터닝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과 애통만으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 (shub)는 “돌아서다. 되돌아오다. 도로 찾다. 회복하다”의 뜻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 (metanoein) 는 “방향전환”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회심은 죄의 습성과 죄된 방향으로의 진행을 멈추고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 및 진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터닝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죄를 인식하거나 뉘우치는 것을 넘어섭니다. 짐 윌리스, <회심> 에 나오는 정의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회심이 무엇인지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건 바로 돌이킴입니다. “뒤로 돌아 가”입니다. 돈과 안정을 위해 달려가던 삶을 멈추고 뒤돌아서 완전히 다른 방향,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2) 회심의 신비

회심에는 신비로운 요소가 분명있습니다. 회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사회문화적 존재인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마치 속옷처럼 입고 다니던 그 사회적 관습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중생, 곧 회심이 일어나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회심에서 인간의 결단과 결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회심은 돌이켜서 걸어가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로봇이 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방향을 틀고 새로운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입니다. 

 

3) 회심했는가? 

여러분 회심했나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 들이셨나요? 정말 그분이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는 분 맞습니까? 동시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가치에 따라 구체적인 결단이 있었습니까? 예를 들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까?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잘못된 관행과 불의에 대해 먼저 나서서 피해자에게 용서와 보상을 결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회심의 진정성은? 

- 앞으로의 말과 행동에 달렸다. 

저는 안OO 성도의 회심을 믿고 싶습니다. 그가 경험한 예수님에 대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분도 개인적으로야 꽤나 힘든 시기를 보냈겠죠.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겠죠. 그분이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제가 판단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회심이 진심이라면, 그가 진정성있게 회심을 했다면,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그의 말과 행동이 그의 회심의 진정성을 보여주게 될 겁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우리 국가 공동체가 정해놓은 법의 형벌을 담담하게 받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 문화적 교인들의 한계 

이건 안OO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터닝이 없는, ‘돌아서서 감’이 없는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죄의 회개를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에서 해결하면 된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눈물이 나오면 모든 죄가 사라졌다는 생각은 너무 주일학교적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에서 대형캠프에서 다루는 너무나 대중적인 관점입니다. 

죄는 지극히 사회적이며 관계적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는 경우도 태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렇다면 이제 그 받은 은혜를 힘입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게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무릎을 꿇어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쇼가 아니라 진심이 담겨야 합니다. 이렇게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힘도 내가 용서 받았기 때문이며, 용서를 비는 힘도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욱 이상적인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5:23-24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심지어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나올 때, 형제 자매 중에 원한과 원망이 있다고 생각이 들때는 예배드리는 도중에라도 그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한 뒤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회심은 하나님과만의 관계 회복에 제한 혹은 국한 되지 않습니다. 회심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5. 나가며

저는 큰 원리를 알려드린 겁니다. 케바케가 정말 많을 겁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벌써 돌아가셨거나, 연락이 두절인 경우도 있겠죠. 가해와 피해가 교묘하게 섞여 있어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용서구함이나 용서함이 성립되기가 어려운 경우도 다반사겠죠. 그건 함께 고민해봅시다. 무엇이 성경적으로 회심한다는 말인지 그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봅시다. 

 

하지만, 큰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회심은 그분을 기쁘게 맞이하는 겁니다. 회심은 자신의 소유를 베푸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회심은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보상배상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인식과 감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회심은 “돌아서 감”입니다. 

 

*** 기도회 

하나님은 여러분을 진정한 회심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1) 진정한 회심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2) 하나님께 용서받은 그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이제는 나의 잘못에 대해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기도합시다. 

 

*** 참고 도서

짐 윌리스의 [회심]

김영봉 목사의 [숨어있는 하나님]

2021. 5. 23.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2:1-17]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당신은 거기 있든지, 발치에 앉든지 하오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6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여러분이 받드는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라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하신 분이 또한살인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설교]
0.
들어가며
역시 야고보서는 난해합니다. 때로 성경 저자가 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지 관점으로, 딜레마 혹은 트릴레마 없이 평이하게 이해되는 글로 적혀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 말이죠. 

 

바울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야고보의 글은 너무 단도직입적입니다.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서 보이는 신학적 진술, 그리고 토대 위에 설계된 생활 윤리, 공동체 윤리이렇게 집을 지어가야 이해가 그나마 쉬울 텐데, 야고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시험에 인내하라, 분노하지 말고 조심하라, 그리고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서 같기도 하고, 규정집 같기도 하고, 여튼 신학이 정확히 노출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고 어떤 토대에서 말하는지 흐릿해서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문맥도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자유를 주는 율법같은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적용되는 상황에서도 율법의 기능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언급이 빨리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의 초기 지도자 야고보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특별한 갈등과 긴장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둘을 통합해서 조화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한번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차별 노노

확실히 야고보서는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편지입니다. 공동체 내외부의 위기를 겪고 있음을 초대 교회 지도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박해와 같은 외부의 핍박과 시련을 인내하라고 편지의 1장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의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분노의 말을 삼가며 성경 말씀을 실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의 말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야고보는 그걸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가 눈여겨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동체내에 존재하는 차별입니다. 2-4절을 읽어봅시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야고보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비슷한 경우가 발생했음을 우리는 충분히 추측할 있습니다. 왜냐면, 당시에 편지를 쓴다는 것은 오늘날 이메일을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비용도 많이 드는 일입니다. 필요한 내용만 넣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예를 들었다는 것은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 모범 되신 예수 그리스도 

기독 공동체에 암암리에 녹아 있는 차별을 보았습니다. 야고보는 그냥 넘어갈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원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차별이 사라져야 했습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놓인 차별의 간극을 메워야 했죠. 야고보가 사용한 논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차별해야 하지 않아야 하는 번째 이유는, 야고보의 형제 자매가 우리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영광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자/빈자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경험한 예수님에 관한 충격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을 뽑았습니다.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더니 갑자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원래 이런 소문은 삽시간에 번지잖아요.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먹을 시간조차 없습니다. 밀려오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자리에 앉히고 순서를 정해서 병도 고쳐 주시고, 귀신도 내쫓으십니다. 그런데 너무 갑자기 인기를 얻으니 사람들의 시기 어린 가짜 뉴스가 돌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것입니다. 혹은 악한 귀신이 들려서 귀신이 벌이는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런 소문이 누구의 귀에 들어갔냐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가족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형님을 찾으러 갑시다. 가서 더이상 외부활동을 하지 않도록 집에 가둬둡시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갔고, 결국 어머니와 동생들, 특히 야고보를 필두로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그냥 가까이 오기엔 불가능해보였죠.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지난 30 동안 함께 보냈던 형님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 33-35)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알았습니다. 예수님에겐 혈통/혈육 조차도 특혜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이 많은 사람과 없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인들을 선대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친가족이라고 해도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그의 동생 야고보는 보았던 거죠. 충격적인 예수님의 말에 당시에는 분개했지만, 나중에는 알게 되었죠. 그분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사람들의 외모, 외형, 권력과 돈의 유무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적을 있었던 겁니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본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남자건 여자건, 부자건 빈자건 간에 공평하게 대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입니다. 최근 서울시장, 부사시장 보궐선거 이후에 남녀의 성갈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십대 남자들이 대거 국민의힘을 지지하게 되면서 이유에 대해 궁금함이 많이 커졌습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염려가 되는 부분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과 감정의 골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베, 메갈 등의 단어가 서로를 향한 혐오를 드러냅니다. 

 

3. 인생역전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차별하지 말아야 번째 이유도 적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세상을 다스리면서, 혹은 개입하시면서 사용했던 방식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빈자를 택해서 믿음의 부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게 아이러니 한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능력있고 부유한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시기 보다는 볼일 없어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입니다. 

 

여러분, 부자들은 쉽게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곤 합니다.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 빈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운영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많은 결정을 내려왔고, 많은 일들을 왔습니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보수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애적입니다. 어쩔 없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그렇게 밖에 없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죠. 생각의 메커니즘, 행동의 방식이 고착화됩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하게 됩니다. 부자의 논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참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 나라는 빈자들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고 관리하고 경영하는 권리가 생긴 것이죠. 부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권리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업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실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바울이 빌레몬서에 드라마틱하게 등장합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의 돈에 손해를 입히고 도망자가 됩니다. 우연히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되죠. 그리고 바울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그럼에도 노예 도망자의 신분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죠.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대하라고 말이죠. 나중에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어 바울의 편지를 모아 정경화 하는 과정 속에서 빌레몬서를 신약 성경에 포함시키게 되죠. 

 

야고보는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생역전의 드라마가 곳곳에 넘쳐납니다. 그러니 결코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참고)  서종현 선교사의 삶과 사역

https://www.youtube.com/watch?v=yv6mgVT0sLM

http://www.gospe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1

 

 

4. 율법 순종

번째 이유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생각보다 치밀합니다. 논거들을 가지나 드는 것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차별하지 말아야 번째 이유는, 율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8-12절입니다.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한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그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율법의 주요 강령은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으뜸가는 율법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와 빈자를 구별해서 다르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죠.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혼자 산다면 굳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하나님께 시기에 맞춰 예배하고 찬양하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적, 사회적 존재이기에 법이 필요하고, 법과 규정은 개인과 공동체를 자유하게 합니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있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해하지 않을 있는 자유까지 포괄하죠. 죄를 짓지 않을 있는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대로 하면, 자유를 얻을 없습니다. 욕구대로 하면, 이웃 아니라, 가족과 자기 자신조차도 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니 법은 포괄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와 사람들을 용서하고 은혜가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가져다 주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죄인을 용서한다해도, 여전히 율법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나요?  율법도 그렇습니다. 물론 억압과 부자유의 율법이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주는 율법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율법이 바로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같은 것이죠. 

 

저는 사실 순종하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습니다. 순종은 비판적인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변명같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가 드니까 율법에 순종하라는 말의 중요성을 점점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지성은 한계를 가집니다. 정보는 쌓이고 게다가 방대해집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해를 최신의 지식으로 하려고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는 늙고 지력은 줄어듭니다. 이상 혁신적인 생각을 받아들이는 한계를 느낍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절대 불변의 말씀에 귀의하고 싶어 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 육체는 젊고 생각이 싱싱하기에 무엇이든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할 있다고 믿으시죠?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때로는 필요합니다. 젊은 자기만의 생각을 갖는 , 포스트모던 시대에 주체적인 신앙의 자아를 형성하는 , 너무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일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순종의 의미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우리 나름 각자의 방식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5. 나가며_차별하지 않는 공동체 

야고보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 공동체가 빈부의 차이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하게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 율법이 이웃 사랑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공동체를 꿈꿔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단순히 개인 윤리의 책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책입니다. 차별이 없는 공동체가 되도록 지속적인 리플렉션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를 계속해서 돌아보고 잘못한 것은 뉘우치고, 잘하는 것은 더욱 잘하도록 격려하며, 부족한 것은 서로 채워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개인도 일기를 쓰지만 공동체도 그렇게 일기를 내려가야 합니다. 

 

부자와 빈자가 차별받지 않는 공동체, 남녀가 차별대우 받지 않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있을까요? 

이건 혼자의 고민, 혼자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의 고민,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것입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우리 공동체의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면 어떨까 논의 중에 있습니다.  급한 재정적 필요가 있는 분들은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공동체 모두가 함께 기금을 마련해서 돕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주도 오늘의 말씀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나 차별의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고, 제거할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2. 우리 주변에 고난 받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도울 있는 우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차별 대우를 받은 적은 없었나요? 때의 마음은 어떠했나요?  

 

2. 나와 우리 공동체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2021. 5. 16.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1:19-27] 

19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말하기는 더디 하고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20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25그러나 완전한 율법  자유를 주는 율법을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26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5
주부터 우리는 야고보의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참고 인내하라는 야고보의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적실한 메시지였음을 확인했습니다. 기독교 문화, 내부의 부패와 리더십의 부재, 코로나로 인한 공동체의 약화 등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그리스도인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시련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일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존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어진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분노를 더디하라

첫째, 분노에 조심하세요. 

어려움이 닥치고 시련이 몰려오면 분노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세계 그리스도인들도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공동체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힘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니까 분노를 하다보면 누군가의 말을 듣기 보다 자기 말을 빨리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분노하면 심장이 나대기 시작합니다.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 톤도 올라갑니다. 생각해서 말하지 않고 말을 하면서 논리가 만들어집니다. 때로는 공격적이고 감정이 섞인 논리적 비약이 있는 말도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감당이 안됩니다. 외부의 시련과 박해도 견디기 어려운데, 공동체 형제 자매의 분노의 폭언을 듣는 것은 더욱 상황을 힘들게 만듭니다. 

 

서점가에 보면, 분노하라는 메시지의 책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장하성 교수님은 그의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노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작가며 인권운동가인 스테판 에셀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제목이분노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의 불의한 문제앞에 분노해야 때가 있겠죠. 구약의 예언자도 분노했습니다. 예수님도 분노했죠. 그러나 그런 분노와 오늘 본문의 분노는 다릅니다. 뭐가 다르죠? 남의 말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가 다릅니다. 예언자의 분노나 예수님의 분노나 혹은 시대 인권 운동가의 분노는 남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생기는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분노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욕심에 이끌려 자기 열망의 좌절 때문에 생기는 화와 짜증을 곳곳에 다니면서 터뜨리는 사람들의 분노입니다. 

 

19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야고보는 듣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 발하는 분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 경청하는 사람들은 공감의 분노를 느끼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분노의 감정도 함께 느끼게 되죠. 때로 같이 화도내고, 전화도 하고, 문제제기도 합니다. 그런 분노는 그래도 정당화될 있는 공분이 있죠. 그러나 자신의 꿈과 목표, 욕구가 좌절되어서 불만이 쌓이고 쌓인 불만이 외부를 향한 분노로 폭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연발 속사포같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붓습니다. 때부터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는 자신이 우주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런 것이 공동체를 깨뜨립니다. 이런 분노는 연쇄적인 분노를 낳습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분노에 조심하라가 오늘 분문의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럼 번째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2. 말씀을 듣고 행하라

둘째, 말씀을 듣고 행하십시오. 

 

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시련과 고난 속에서 분노할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행하는 힘을 쏟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얼핏보면 분노에 대응하는 단어가 온유한 마음으로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맞죠. 그러나 메시지의 무게로 보면 분노에 대응하는 단어는 말씀을 듣고 행하라입니다. 분노하지 말고 구약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구약과 예수님의 말씀을 해설하는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라는 말입니다. 듣지만 말고 행동으로 옮기라고 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일종의 폭력적 행동입니다. 이걸 치유하고 대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라는 겁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고, 얼굴에 밥풀이 묻었다는 것을 거울을 통해 봤으면서도 금방 잊어버려서 밥풀을 떼지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22-24).

 

23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듣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운동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정기적으로 보겠다는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결심은 변화를 낳는데, 변화라는 것이 나의 습관과 관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새로운 습관과 관성이 생길 때까지는 본성적 저항과 거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렵죠. 그럼에도 우리는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지난 재정 강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걸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것입니다. 

 

분노하지 말라가 번째,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럼 번째는 무엇일까요? 

 

3. 경건

셋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십시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보았습니다. 바로 당시의 고아와 과부였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전쟁은 수시로 일어나고 밝혀지지 않은 범죄가 빈번했습니다. 남편,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과 과부들은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지금과 비교할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는 같습니다. 자기를 위해 분노하지 말고,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 죽음으로 몰리는 사람들을 위해 분노의 감정을 승화시켜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분출하십시오. 이것이 경건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좋은 경건입니다이렇게 말입니다. 경건은 말씀을 듣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데, 실천의 방향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어제 송청 운영위원회에서는 지난 겨울 수련회에서 전재윤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 그리고 지난 설성호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재정적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도울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펀드 혹은 기금을 조성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작은 실천이지만, 조금씩 시도해보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함께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4. 나가며 

야고보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전체가 통으로 엮여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뚝뚝 끊어져서 무슨 잠언집 같고 명언집 같은 인상을 주는데요, 야고보 시대의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야고보의 위치를 고려하면서 읽으면 점점 통합된 의미들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곱씹는 맛이 있는 편지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분노하지 마라, 말씀을 듣고 행하라, 그리고 참된 경건으로 나아가라. 이렇게 가지 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로 다가가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제대로 듣지도 않고 분노하고 짜증내는 우리의 성향과 죄성을 주님께 아뢰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우리 주변에 고난 받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도울 있는 우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요사이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요?     

 

2. 참된 경건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와 우리 공동체에게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가요?   

누가복음 19장 1-10절 

삭개오의 회심

2018. 2. 4. 김혁수 

 

0. 들어가며 

- 안OO 검사

지난 한주 저는 슬프고 부끄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월요일 JTBC 뉴스룸에서 서OO 현직 검사와의 인터뷰 장면이 방송을 탔는데요.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8년전에 성추행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추행한 사람이 바로 유력한 선배 검사였다는 인터뷰였습니다. 

어떻게 기소권과 수사권을 동시에 가진 검사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말인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더욱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던 것은, 성추행으로 지목당한 안OO 전 검찰국장이 한 대형교회에서 세례 간증을 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힘들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했는데, 그 간증을 듣고 사건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서OO 검사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회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회개, 회심, 용서받기 등등의 기독교적 용어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원래 설교해야할 본문을 내려놓고, 한주동안 이 주제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과 묵상을 했습니다. 

오늘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의 회심이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말씀을 읽어볼까요.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삭개오 이야기의 상황 

1) 삭개오는 누구인가? 

- 여리고의 세관장(1-2절) 

여리고는 국경도시였습니다. 구약에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에 처음 들어가는데, 그 첫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신약에도 베레아 지역과 유대 지역의 중간 도시였습니다. 국경을 넘어설 때 받는 관세나 판매세 등을 걷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여리고는 지금으로 말하면, 인천공항 세관 같은 곳이겠죠.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지역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헤롯대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죠.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따뜻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연평균 온도가 18도인 반면에 여리고는 연평균 온도가 25도입니다. 요사이 처럼 추운 날에는 제주도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 따뜻한 남쪽 나라... 헤롯에게 여리고가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역량도 많고 따라서 세금도 많이 걷히고 있었겠죠. 당시 로마는 세관장에게 입찰을 주었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세금을 걷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세금 공무원의 자격을 준 겁니다. 월급은 따로 없었습니다. 세금을 걷어서 자기 월급을 만들면 되는 구조였습니다.

 

이쯤되면 왜 사람들이 세리들을 성매매여인들과 함께 죄인이라고 말하는 줄 알겠죠? 세리들은 동족의 피 같은 돈을 긁어모아 그들을 강제로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추가로 걷은 세금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자들이 바로 세리들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세관을 맡은 세리장, 혹은 세관장이었습니다. 특별히 험한 꼴을 직접 보지 않고도 그는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민족을 배반하였지만, 그 댓가로 큰 부를 누렸습니다.

 

- 부자(2절) 

그래서 2절에서 그를 부자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뽕나무의 진실

그동안 우리는 이 뽕나무에 대해 잘 못 알고 있었는데요. 이 뽕나무는 우리가 흔히 보는 키가 작은 오디 열매가 맺히는 2미터 남짓한 뽕나무가 아닙니다. 이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돌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이며 키가 15-16미터까지 자랍니다. 뿌리부터 나무줄기가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올라가기도 쉬웠습니다. 원래 적군을 보는 망대 역할을 하는 나무로 심겨졌습니다. 

 

150센티미터 정도로 예상되는 작은 키를 가진 삭개오 여리고 지방국세청장님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오래부터 우리는 삭개오님의 적극적인 열성에 대해 칭찬하는 설교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마음에 집중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그것도 좋은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포인트를 짚어볼 생각입니다.

 

3) 공개적 죄인 

일단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른 유대인들이 삭개오 세리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7절입니다. 사람들은 세리장인 삭개오를 다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되았는지, 세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어떻게 자신들의 혈세가 고스란히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민족을 배신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죄인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은 로마 군인들을 대상으로 성을 팔았습니다.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동족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두 그룹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가장 큰 죄인들 중의 죄인이었던 것이죠. 

 

4)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했을까요? 왜 그에게 다가갔을까요? 뽕나무에 올라간 사람은 삭개오 뿐일까요? 올라가기 쉽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널려있는 돌무화과나무위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삭개오 뿐이었을까요? 왜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거신 걸까요? 이 질문을 해결해 보려면 전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30절에 보면, 돈많은 관리가 나타나 무엇을 해야 영생,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을 잘 지켰는지 물어보십니다. 그건 아주 잘 지켜왔다고 합니다. 그 부자 관리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제안하십니다. 

 

- 돈 많은 관리의 근심

그러나 이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 부자 관리는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어렵다, 과장법을 사용해서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씀합니다. 

 

-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깜짝 놀라죠. 계명을 잘 지키며 부자로서 사회적으로 덕망있는 관리자, 지도자인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니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_부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18장에 이어서 19장에 삭개오를 주목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부자를 구원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를 구원하십니다. 

삭개오와 부자관원과의 핵심적인 차이는 진정한 회심의 차이입니다. 부자관원은 자신의 돈이 아까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버렸습니다. 이게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자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삭개오의 회심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2. 삭개오의 회심 

1)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모심(6절)

삭개오의 회심의 첫번째 요소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매우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얼른 내려왔습니다. 어린이가 아닙니다. 청년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장년이겠죠. 그러니까 세리장을 하고 있겠죠. 다 큰 어른이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나무에서 거의 뛰어내리듯이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흥분과 기쁨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맞이하죠. 

“So he hurried and came down and received him joyfully”(ESV)
“in great excitement and joy”(NLT)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인격적 반응이 회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나의 죄인됨을 알고 오직 그분만이 나를 구원할 분임을 믿고 그분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회심에 있어 첫 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나의 죄만을 들쑤시는 죄의 고백은 바른 회심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이상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회심은 바른 회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회심의 첫번째는 그분에 대한 기쁨입니다. 

 

2)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는 것(8절)

삭개오의 회심의 두번째 요소는 바로 자신의 소유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돈이 너무 많다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그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강제적으로 뺏앗은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 그 어머어마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혹이나 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과 대중앞에 공표를 해 버린 겁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분의 가르침에도 호의적이고 적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삭개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신을 처분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3. 회심의 다양한 측면 

1) 회심이란? 

여러분 회심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제가 몇가지 선택지를 드려볼게요. 

- 죄를 인식하는 것 

- 죄를 뉘우치는 것 

-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

-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 

- 죄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는 것 

- 더이상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 선을 행하기 위한 노력하는 것 

 

=> 인식, 감정의 반응을 넘어선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회심이다. 

회심이란 터닝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과 애통만으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 (shub)는 “돌아서다. 되돌아오다. 도로 찾다. 회복하다”의 뜻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 (metanoein) 는 “방향전환”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회심은 죄의 습성과 죄된 방향으로의 진행을 멈추고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 및 진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터닝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죄를 인식하거나 뉘우치는 것을 넘어섭니다. 짐 윌리스, <회심> 에 나오는 정의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회심이 무엇인지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건 바로 돌이킴입니다. “뒤로 돌아 가”입니다. 돈과 안정을 위해 달려가던 삶을 멈추고 뒤돌아서 완전히 다른 방향,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2) 회심의 신비

회심에는 신비로운 요소가 분명있습니다. 회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사회문화적 존재인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마치 속옷처럼 입고 다니던 그 사회적 관습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중생, 곧 회심이 일어나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회심에서 인간의 결단과 결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회심은 돌이켜서 걸어가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로봇이 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방향을 틀고 새로운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입니다. 

 

3) 회심했는가? 

여러분 회심했나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 들이셨나요? 정말 그분이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는 분 맞습니까? 동시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가치에 따라 구체적인 결단이 있었습니까? 예를 들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까?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잘못된 관행과 불의에 대해 먼저 나서서 피해자에게 용서와 보상을 결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회심의 진정성은? 

- 앞으로의 말과 행동에 달렸다. 

저는 안OO 성도의 회심을 믿고 싶습니다. 그가 경험한 예수님에 대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분도 개인적으로야 꽤나 힘든 시기를 보냈겠죠.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겠죠. 그분이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제가 판단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회심이 진심이라면, 그가 진정성있게 회심을 했다면,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그의 말과 행동이 그의 회심의 진정성을 보여주게 될 겁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우리 국가 공동체가 정해놓은 법의 형벌을 담담하게 받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 문화적 교인들의 한계 

이건 안OO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터닝이 없는, ‘돌아서서 감’이 없는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죄의 회개를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에서 해결하면 된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눈물이 나오면 모든 죄가 사라졌다는 생각은 너무 주일학교적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에서 대형캠프에서 다루는 너무나 대중적인 관점입니다. 

죄는 지극히 사회적이며 관계적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는 경우도 태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렇다면 이제 그 받은 은혜를 힘입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게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무릎을 꿇어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쇼가 아니라 진심이 담겨야 합니다. 이렇게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힘도 내가 용서 받았기 때문이며, 용서를 비는 힘도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욱 이상적인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5:23-24_“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심지어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나올 때, 형제 자매 중에 원한과 원망이 있다고 생각이 들때는 예배드리는 도중에라도 그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한 뒤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회심은 하나님과만의 관계 회복에 제한 혹은 국한 되지 않습니다. 회심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5. 나가며

저는 큰 원리를 알려드린 겁니다. 케바케가 정말 많을 겁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벌써 돌아가셨거나, 연락이 두절인 경우도 있겠죠. 가해와 피해가 교묘하게 섞여 있어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용서구함이나 용서함이 성립되기가 어려운 경우도 다반사겠죠. 그건 함께 고민해봅시다. 무엇이 성경적으로 회심한다는 말인지 그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봅시다. 

 

하지만, 큰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회심은 그분을 기쁘게 맞이하는 겁니다. 회심은 자신의 소유를 베푸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회심ㄴ은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보상배상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인식과 감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회심은 “돌아서 감”입니다. 

 

 

*** 참고 도서

짐 윌리스, [회심] 

김영봉 목사, [숨어있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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