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_누가복음 8:4-15] 

4무리가 많이 모여들고, 고을에서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오니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5“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먹기도 하였다. 6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니,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7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 8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배의 열매를 맺었다.” 말씀을 하시고예수께서는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외치셨다.

예수의 제자들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를 그에게 물었다. 10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이다.”

11“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2길가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뒤에 악마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13돌짝밭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동안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설교]

0. 들어가며 

- 예수님의 가르침 시리즈

8월의 시작입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휴가계획 세우는 것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휴가를 떠나야 하는데, 그게 떠오르질 않습니다. 그나마 요사이 도쿄 올림픽 덕분에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끼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인 김제덕 양궁 선수의 우렁찬 화이팅에 갑자기 울컥하기도 하고요, 배드민턴 여자 복식의 김소영 공희용 선수가 일본 팀과의 접전에서 듀스를 여러 차례 만들면서 결국 이기는 장면에서는 초긴장을 느꼈습니다. 어제는 아쉬움 그리고 역전의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 저녁이었죠.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감동이 됩니다. 부디 건강하게 안전하게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7월의 마지막 당부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라는 바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명령을 받고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중 하나가 과연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치셨나 궁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8월에는 예수님의 가르침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 가르침의 방법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핵심은 단어로 표현할 있을 같아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방식입니다. 성육신적이라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죠. 인격적이라하면 가르치는 대상과 수평적 소통 속에서 공감하며 가르친다는 의미입니다. 통합적이라는 말은 지식 전달만이 아니라 인격과 전체에 영향을 주는 가르침을 목표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8 4-15절입니다. 

 

1. 대상_많은 사람들(4)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조금 다르게예수님의 평지 설교 싣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 17-49절까지 내용이 나오는데, 내용을 오늘 다루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무리를 이루고,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무리를 이루었다.”(6:17) 

 

모였을까요? 평지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수천명은 모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5천명이나 모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만 5천명이니 여인과 어린이를 포함하면 명이 훨씬 넘었을 겁니다. 그러니 아마 평지에서도 최소 수천에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을 수도 있습니다. 정도가 아니더라도, 백명이 모여도 대단한 아닌가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산상수훈의 축소판의 설교를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평지설교에서는 상당히 구체적인 명령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서 설교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그러나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은, 기초없이 위에다가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물살이 집에 들이치니, 집은 무너져 버렸고, 집의 무너짐이 엄청나다” (누가복음 6:49)

 

그러니까 수백에서 수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시는 것으로 설교의 마지막을 장식한 겁니다.  

 

2) 예수님의 활동(8:1-3) 

그리고 예수님은 여러 마을과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케리소인데요. 마을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의 전령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겁니다. 

 

뒤에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그리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8:1-3)

 

일에 제자들도 참여하고 있고요. 일을 돕기 위해 여인들도 발벗고 나섭니다. 여행 경비를 후원하기 시작합니다. 직접 따라다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3) 어마어마한 무리들(4)

이렇다보니 어느새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고을에서 마을에서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였죠. 그런데 예수님은 더이상 평지 설교 같은 직접적인 율법과 명령을 제시하는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죠. 바로 비유라는 방식입니다. 

 

2. 가지 (4-8)

좋은 밭이 되어라라고 권면하거나 가르치지 않으시고, 아마도 바울이라면 그렇게 했을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여러 종류의 밭을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내용은 너무나 유명하니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좋은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립니다. 더러는 길가에 뿌려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밟거나 하늘의 새에 쪼이게 되어 씨가 죽거나 사라집니다. 어떤 씨는 돌짝밭에 뿌려집니다. 흙이 얕아서 싹이 나는 순간 햇볕에 말라 비틀어져 죽습니다.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뿌려집니다. 싹이나고 자라나지만, 가시 덤불이 성장을 막습니다. 충분한 햇볕을 받지 못해 열매까지는 맺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뿌려집니다. 씨앗은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비유의 해석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당시 씨를 뿌리는 농부라면 대부분 쉽게 이해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현상과 농사 짓는 현실이 그러하기에 쉽게 이해한다는 것이지, 예수님이 이야기를 갑자기 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야기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궁금해서 묻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씨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씨가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사단이 와서 말씀이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아예 빼앗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에 도달하는데 실패합니다. 씨가 돌짝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말씀의 뿌리가 없거나 약해서 시련과 고난이 오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가시덤불은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지만, 일상을 살면서 많은 근심과 걱정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한 걱정과 쾌락에 대한 추구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좋은 밭은 말씀을 듣고 믿음의 뿌리를 내려,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일상의 걱정과 돈벌이의 근심과 쾌락의 유혹을 이겨내어 결국엔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엄밀히 말하면 마지막 좋은 밭의 사람들이 구원받는 사람들이 것입니다. 가시덤불의 사람들이 구원에 도달할지는 약간 미지수입니다. 믿음을 떠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2) 모를

처음에 비유를 들었을 여러 마을에서 찾아온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해 봅시다. 평소에 많이 보던 내용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씨앗을 뿌리는 행위야 모두가 번쯤은 경험해 봤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는지는 이해가 안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3) 숙명론 vs 자기 결정론

말씀을 듣고서 이런 질문이 있을 겁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밭을 개간해서 뿌릴 생각은 않고 아무데나 뿌리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같은 땅에다가 씨를 뿌린 사람이 잘못이라는 의견입니다. 숙명적으로 정해진 밭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 방치한 농부의 잘못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숙명론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칠 나오는 현상에 대한 겁니다. 현상을 보니 이러저러한 반응이 나오는데, 현상의 이유가 4가지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이런 관찰을 했을까요? 그건 이미 평지 설교를 마치고 어마어마한 사람들 중에 실제로 열매를 맺는 믿음을 갖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 소수임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미 언급해 드렸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재정으로 지원하는 여인들은 예수님의 선포를 믿고 그에 따른 헌신과 기여를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좋은 밭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평지 설교를 듣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3/4 그런 같습니다.

 

오늘 비유는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봐도 좋습니다. 평지 설교의 마지막에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강력한 비유로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열매맺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가지 밭의 비유를 하심으로써 다시 찾아온 무리들에게 새롭게 다가가는 겁니다. 어려운 윤리를 말하기보다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씨앗뿌리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친숙함과 의문 동시에 갖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3. 제자와 무리(10)

1) 비밀을 알도록 허락된 사람들 

비유를 처음 들었던 당시의 수많은 무리들은 대단히 당황했을 겁니다. 비유를 말해 놓고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해했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도 무슨 말인지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따로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따로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 주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 감춰져 있는 비밀 

하나님 나라는 비밀스런 요소가 있습니다. 특히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에는 더욱더 비밀스러웠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예수님의 선포는 매우 인상적이었죠. 예수님이 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아 버렸잖아요.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는 전통적인 통치자에 의해 형성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들처럼 숱한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대량살상해서 만드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라였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 매우 비밀스런 과정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무나 알게 수는 없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지는 비밀이었습니다. 

 

3) 비밀이 폭로되기 전까지

비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일어나면 전세계에 온전히 폭로될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숨겨져야 했습니다. 알린다고 해서 알아들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없는 상황에서 화를 내며 모르냐고 꾸중하는 것은 가르침의 태도가 아닙니다. 비밀이 폭로되기 전까지는 그들이 알아들 있을 정도로만 설명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겁니다. 그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겁니다. 여기에 성육신적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4. 비유로 가르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에게 친숙한 언어를 통해 그들이 내용에 쉽게 도달하도록 그림 언어를 사용하신 겁니다. 윤리적 명령이나 율법적 규정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능하면 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을 사용해서 그들이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셨다고 , 우리는 가지 알아야 사항이 있습니다. 

 

1) 언어

첫째는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언어를 쓰셨다는 겁니다. 아람어, 히브리어를 쓰셨습니다. 씨와 밭의 종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단어들이요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굳이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그저 그분의 방식으로 표현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의 언어 쓰시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자신들의 경험에 갇혀 있습니다. 

 

한국어의 특징에 대해서 많은 외국인분들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의성어 의태어 쓰는 것에 대해 그렇게 놀라하더라구요. BTS 노랫말 중에소복소복 들어가는 노래가 있나봐요. 외국인들이 소복소복을 어떻게 영어로 해석해야 하는지 난감해 하면서 한국어의 의태어에 대해 아름답다고까지 평가하더라구요. 소복소복을 falling falling 으로 번역했어요. 그러나 눈이 적당량으로 쌓여가는 모습을 담은 소복소복의 의미와 말의 반복에서 오는 아름다움은 다른 언어로 표현이 안된다고 합니다. 색깔도 그렇죠. 우리는 푸르스름하다, 푸르다, 파랗다. 샛파랗다 등등 가능하면 색상의 채도에 따라서도 이름을 붙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어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죠. 

 

예수님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기로 결정하신 자체가 성육신적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언어로 포착할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히브리어로도 헬라어로도 그분의 존재를 담아낼 없습니다. 그분의 뜻과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의도를 온전히 담아낼 있는 언어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분이 인간의 언어를 쓰시지 않는 인간은 그분의 뜻에 도달할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언어적으로 성육신적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2) 이해

둘째,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들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셨습니다. 완벽한 이해는 어차피 도달할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조차도 항상 어리둥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 속에서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방식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이해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 최대한 활용하십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당시 농부의 일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셨습니다. 

 

아웃백 같은 패밀리레스토랑들이 처음 생겼을 , 놀랐던 것은 서빙보는 분들이 테이블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들은 손님들의 눈높이 자신들의 눈을 맞추었습니다. 비지니스적으로 히트를 쳤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사람의 경험과 상황을 최대한 고려해야 합니다. 속에서 내용도 방식도 도출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주의 창조자되신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들의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알고 그들과 공감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직접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해를 위한 성육신. 이것이 예수님의 삶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3) 한계 

셋째, 예수님의 비유로 가르치심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것은 예수님의 언어와 이해를 위한 노력해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계가 있다 겁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런 예수님의 성육신적 태도와 내용에 마음을 열지 않으면 어쩔 없다는 점입니다. 자기 마음을 길가, 돌짝, 가시덤불로 방치한다면 예수님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지 못하시기로 결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억지로 길가에서 돌짝밭으로, 가시덤불로, 좋은 밭으로 바꾸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력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라 억지로 기계를 들여와서 마음의 밭을 갈아 엎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마음 밭의 최종 결정은 인간들의 허용입니다. 사람들의 의지 필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래서 하나님과 사단의 오랜 전투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성육신적인줄 아십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스스로 그들의 마음을 좋은밭이 되고자 결정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힘과 능력의 100% 쓰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마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죽기까지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힘을 것입니다. 한계를 최대한 가지고 가시려는 그분의 노력이 지극히 성육신적입니다. 

 

4) 성육신적 가르침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시고, 사람들의 경험을 활용하셔서 이해를 도모하시고, 모든 인간적 한계를 안고서 노력하신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지는 성육신적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분의 성육신은 이렇게 그분의 가르침에서 아주 보여집니다. 

 

5. 나가며

1) 예수님의 성육신을 사랑하기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성육신을 사랑할 있겠습니까! 그분의 낮아지심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사랑할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몸과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신 것에는 감사하지만, 그것 자체를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너무 약해지셨거든요. 너무 자기를 낮추셨거든요. 너무 자기 부인을 많이 하셨거든요. 우리는 이런 그분의 태도를 사랑하기가 어려울 있습니다. 왜냐구요. 사랑하면 따라해야 하거든요. 감사는 그냥 표현하기만 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이렇게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과 동일시하고픈 마음이 듭니다. 따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2) 성육신을 따라하기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성육신에 감사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고 따라하시겠습니까? 이것이 가르치는 자의 숙명과도 같은 태도입니다. 우리는 평생 배우거나 가르치거나 하며 살아갑니다. 어렸을 때는 배우는 일이 많다면 나이가 들면 점점 가르치는 일이 많아집니다. 그렇다고 배우는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또한 가르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가르침에서 중요한 태도가 무엇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닮을 우리는 가르칠 있습니다. 가르치는 대상의 언어와 경험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강제하지 않고 그들이 반응할 때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적 가르침을 따라하는 자들의 태도입니다.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있거나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게 모든 교사나 어른 분들께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적 가르침을 사랑하고 따라합시다. 

 

 

[함께 기도하기]

1. 나의 마음은 어떤 밭인지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길가입니까, 돌짝밭입까, 가시덤불입니까, 아니면 좋은 밭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있나요? 새싹이 자라고 있나요? 줄기가 자라고 열매를 맺고 있나요?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를 드립시다. 조용히 기도를 드려봅니다.    

 

2. 예수님의 성육신적 가르침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분이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경험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의 한계 속에서 가르치신 성육신적 가르침을 따라갈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배우고 가르치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분의 가르침의 방식을 배울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분이 느끼셨던 가르침의 한계는 무엇이었나요?       

 

2. 우리는 우리의 마음 밭을 개간할 있을까요? 어떻게 좋은 밭이 있을까요? 

2021. 7. 25. 김혁수 

 

[본문_디모데후서 4:1-8] 

1나는 하나님 앞과,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2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3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6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Chapter 4

1 I solemnly urge you in the presence of God and Christ Jesus, who will someday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when he comes to set up his Kingdom: 2 Preach the word of God. Be prepared, whether the time is favorable or not. Patiently correct, rebuke, and encourage your people with good teaching. 

3 For a time is coming when people will no longer listen to sound and wholesome teaching. They will follow their own desires and will look for teachers who will tell them whatever their itching ears want to hear. 4 They will reject the truth and chase after myths. 

5 But you should keep a clear mind in every situation. Don’t be afraid of suffering for the Lord. Work at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nd fully carry out the ministry God has given you. 

6 As for me, my life has already been poured out as an offering to God. The time of my death is near. 7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and I have remained faithful. 8 And now the prize awaits me—the crown of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the righteous Judge, will give me on the day of his return. And the prize is not just for me but for all who eagerly look forward to his appearing. 

 

 Tyndale House Publishers, Holy Bible: New Living Translation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2015), 딤후 4.

 

 

[설교]

0. 들어가며 

- 레디 플레이어  

어제 딸과 영화 편을 보았습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어디 나가기도 그렇고, 딸도 심심해하는 같아서 영화를 봤는데요,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영화입니다. 집에 계시다면 검색해보세요. 

 

요사이 유행하고 있는 가상 현실, 소위 메타버스를 다룬 영화입니다. 코로나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요. 마치 코로나를 통해 비약적으로 비대해진 온라인 세상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는 , 가상 현실 아바타의 생활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VR 고글을 쓰고, 프로그램 반응형 수트를 입고 일상의 대부분을 가상 현실 세계인 오아시스에서 보냅니다. 가상 현실은 더이상 가상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현실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가상 현실은 미래의 현실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측면인데요, 성경의 장절이 가상 현실로 들어가는 코드가 되어 언제든지 성경의 세계로 들어갔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누르면 1세기 로마와 로마 감옥 속에 갇힌 바울, 그리고 바울의 편지가 도착한 에베소 교회와 편지를 읽는 디모데의 장면으로 이동하는 것이죠. 성경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측면인데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관을 뚫고 나가기는 점점 어려워지겠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선호하는 세계 속에 매몰되어 나오려고 하지 않을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각자의 세계에 갇혀 전혀 배우려고 하지 않는, 그래서 가르침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할 같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당부 시리즈 마지막 시간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당부를 들으면서 메타버스에 익숙해질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있는지 함께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 

 

1. 엄중함

1) 꼰대 바울 

오늘 말씀을 처음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꼰대 바울이었습니다. 왜냐구요. 1절을 읽어볼까요? 

 

1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구절을 읽을 때는 심각하게 목소리를 굵게 만들어서 말해야 합니다. 바울의 표정과 말투를 상상해봅시다.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꼰대 모습입니다. ‘진리 안에 머물라라고 한다든지, 성경의 중요성을 역설한다든지,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엄숙하게 명령한다든지이런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단어를 쓰면서 무게 잡고 명령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아마 그래서 여러분 중에 일부는 바울을 싫어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꼰대를 정말 상대하기 싫지만, 꼰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꼰대에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들을 들어줄 만큼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없겠지만, 간혹 정말 배울만한 컨텐츠 진정성을 가진 꼰대라면 번쯤 기울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울이 그런 꼰대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배울만한 컨텐츠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삶에 진정성이 묻어 있습니다. 그냥 꼰대가 아닙니다. 

 

2) 누구 앞에 있는가

그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엄중하고 무겁게 명령을 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는 하나님 ,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 그리고 재림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할 가장 엄중하고 무겁고 핵심적인 존재와 사건들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재림, 그리고 심판바울은 지금 앞으로 닥칠 일들을 떠올리고 있는 겁니다. 과거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뤄놓은 인류 구원의 역사도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할 , 무거움과 긴박성과 엄중함을 떠올리며 가장 확신에 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엄중함은 단순히 그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엄중함은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있기 떄문에 나오는 입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존재도 존재지만, 바울은 그분들이 하실 일들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심판자이기도 하십니다. 다시 오셔서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 인류는 앞에서 마지막 정산 혹은 심판을 받게 것입니다. 바울은 미래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의 명령어를 입밖으로 꺼냅니다. 

 

2. 말씀을 선포하라 

1)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그렇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19-20)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나, 바울이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이나 지극히 유사합니다. 

 

2) 케리소 

그런데 약간 다른 점도 포착됩니다. 그것은 바로 케리소라는 단어가 가진 원래 때문에 일어납니다. 바울은 말씀을 선포하라고 , 케리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왕의 전령이 사람들에게 정책이나 입장 등을 선포할 쓰는 단어입니다. 전령은 왕의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습니다. 사람들은 전령을 왕의 대리자라고 생각하고 전령의 말은 왕의 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공표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라 가까이 왔다이런 것이 바로 케리소입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케리소해왔습니다. 이제 누구에게도 명령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디모데에게도 케리소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의 핵심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 끌고 들어왔음을 케리소하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따르면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케리소하라는 겁니다. 

 

선포는 모두가 알아야 공적 사실입니다. 단독 보도, 속보와도 같은 겁니다. 나라가 독립되었다고 공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올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라고 알리는 일본 국왕의 선포와 같습니다. 남북한이 통일한국이 되었다는 소식은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왔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기만하면 나라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언론에 뿌려야 합니다. SNS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케리소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시즌을 타지 않습니다. 계절에 따라 할지 말지를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왕의 전령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3)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그러나 바울은 케리소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성경의 유익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 가지고 있습니다.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선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탁월함 길러줍니다. 이런 성경을 계속 가르치고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살짝 꼰대같은 느낌이 나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같이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가르치고,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라 등의 단어들입니다. 혼날 쓰는 단어들이잖아요.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현저한 차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는 책이 많지도 않았고,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투브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성경이 있었으며, 그마저도 읽을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성경을 해석하고 해설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도 소수였으며,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의 말씀이 가르쳐져야 했습니다. 그러니 소수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요? 지금은 오히려 반대죠. 너무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공중에 다닙니다. 유툽을 열면 수많은 목사님들이, 설교가들이, 성경교사들이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꼰대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죠. 그렇지만, 그렇게 너무 많은 지식들과 해석이 난무하기 때문에, 도리어 건강한 가르침과 건강한 책망과 건강한 경계와 건강한 권면이 더욱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단편적인 정보와 지식 전달을 넘어서서 통합적이고 인격적이고 성육신적인 가르침과 책망과 주의를 주는 것과 권면을 하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기준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기준에 어긋나 있는 성도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어긋나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주의를 니다. 그리고 기준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함께 권면 합니다. 

 

어떻게요? 성육신적이고 인격적이고 통합적으로 말이죠. 전달하는 방식도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용 아니라 내용에 걸맞는 가르침의 방식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걸 성육신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통합적으로 실천하셨습니다. 그것도 함께 가르쳐지는 겁니다. 이게 건강한 가르침입니다. 

 

3.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이다. 

1) 개의 동사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는 것에 진심일까요? 동사를 개나 사용하면서 가르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 책망하라, 경계하라, 권면하라 등의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이렇게 엄중하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3-4절입니다. 

 

3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2) 듣고 싶은 것만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방금 말씀드렸던 건강한 가르침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선생님을 쫓아 다니게 것입니다. 자신들의 귀에 듣기 좋은 가르침만 들으려고 것입니다.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소설같은 꾸며진 이야기만을 좋아하게 것입니다. 벌써 2천년 전에 바울은 이런 현상을 보고 있었고, 심해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던 겁니다. 

 

3) 자동 추천 기능 

정말 어떻게 이렇게 떨어집니까! 현대 사회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세상입니다. 그걸 더욱 가속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자동추천기능입니다. 더욱 정교화된 인공지능 기술이 우리가 선택했던 사항들을 보고 무엇을 좋아할지 통계적으로 판단해서 우리에게 계속 추천해줍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검색하지 않는한 유툽과 각종 SNS들은 내가 좋아할만한 내용들만 계속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점점 한쪽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종합적으로 사고할 없게 되고, 편향적이고 당파적인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이죠. 소위 일베니 메갈이니 하는 그룹들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렇습니다.

 

부담이 되고, 껄끄러운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래 걸리고 장기적으로 연마해야 지식이나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거나 삶의 전반에 영향을 주는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내용만 계속 배우다 보면 그분야에 전문가는 있을지 모르나 통합적 진리에서는 점점 멀어져서 극단적 자기 세계에 갇히기도 하는 겁니다. 

 

4)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이러니 바울의 오늘 엄중한 명령은 우리가 여러 차례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정말로 꾸중도 듣고, 주의도 듣고, 권면도 받고 설득도 당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는가? 단순히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통합적인 진리를 배우고 익히고 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관점을 성경의 관점으로 계속 비춰보고 있는가? 성경의 관점으로 구석구석을 점검하고 있는가? 과연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4. 나가며

- 10분의 1

사랑하는 여러분, 가르침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가르침은 더욱더 힘듭니다. 가장 힘든 것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2 디모데를 계속 배출해야 하는 곳입니다. 여전히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면서 책망과 경계와 권면을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청년들 중에 2 디모데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임사역자, 선교사, 목사가 필요는 없겠지만, 10 , 혹은 20 중에 명은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에서 좋은 직장인이 되는 ,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무 귀하고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다만, 2 디모데도 나와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책망하고 주의를 주고 권면하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운 일이죠. 이해가 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정말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게 족쇄가 되어서 스스로가 위선자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하나님께서 일로 부르시는 사람이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당부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진리 안에 머물러라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쳐라. 죽음을 기다리는 바울이 마지막 호소와 당부가 우리 마음에도 남아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길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

1. 바울의 마지막 당부가 우리 뇌리와 마음에 남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진리에 머물라.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라. 그의 마지막 진심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기도합시다.    

 

2. 성경을 가르치고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는 2 디모데가 나오길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개인의 결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대하고 기도해야 일입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바울이 엄중하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토록 무겁게 말하고 있나요?      

 

2.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2021. 7. 18. 김혁수 

 

[본문_디모데후서 3:10-17] 

10그러나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행동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따르며, 11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내가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박해를 견디어냈고, 주님께서는 모든 박해에서 나를 건져내셨습니다. 12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입니다. 13그런데,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것입니다. 14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15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 있습니다.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17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너의 진리를 존중한다

개취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 취향 존중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나가싫존주의라는 말도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도 존중한다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취향 아니라 개인이 싫어하는 것도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화 현상은 진리에 대해서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너의 진리를 존중한다정도의 뉘앙스가 사회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조금 풀어보면, “너의 진리가 있고, 나의 진리가 있으니 나는 너의 진리를 존중한다. 그러니 너도 나의 진리를 존중하라.”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 보면,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취향에 가까움을 있습니다. 시각, 관점, 오피니언, 생각에 가깝습니다. 더이상 사람들은 진리를 진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우주적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과연 우리는 진리를 계속 이야기할 있을까요? 

 

- 바울의 마지막 옥중 서신 

7 한달 동안 우리는 신약의 저자들의 마지막 당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동안에는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를 다루었습니다. 오늘부터 다음 주에 이어서 바울의 마지막 당부를 공부할까 합니다. 바울은 너무 유명해서 아마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겁니다. 바울의 말년은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바울은 자신이 정말 사랑한 아들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바로 디모데후서인데요. 인생 마지막의 바울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읽어볼까요? 

 

1. 진리의 경험(10-12)

1)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 선교여행 루스드라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바울의 설교와 가르침에 깊이 감명을 받고 회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2 선교 여행 때부터 함께 동역합니다. 시기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언제 강도들을 만날지 모릅니다. 게다가 바울을 지극히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추적하면서 그가 가는 도시마다 살해위협을 가했습니다. 디모데는 모든 광경을 직접 보았습니다. 함께 경험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정말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바울은 이슈가 생기는 교회마다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디모데를 맞이하는 여러 도시의 교회들은 마치 바울을 맞이하듯 그를 대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들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서 6개의 편지의 공동 저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와 후서라는 이름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를만 했습니다. 

 

그들은 동거동락했습니다. 함께 세계를 걸어다니며 여러 도시들을 방문했습니다. 속에서 좋았던 경험도 있었겠지만, 많은 경우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오랫동안 함께 겪었던 고난의 시간들을 다시 회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박해받았던 지역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편지를 받는 디모데에게 기억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2) 박해 속에서의 구원 

기억에는 박해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원도 있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바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순간들이 여럿됩니다. 분명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실 루스드라에서의 사건은 충격적입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무리들을 충동질합니다. 길거리 연설이 이어집니다. 바울을 신성모독죄 같은 것으로 프레임을 씌웁니다. 결국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죽입니다. 그리고 성밖으로 시신을 옮겨 놓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바울이 먼지를 훌훌 털고 일어나는 아닙니까(14:19-20).

 

그런데 유대 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거기로 몰려와서 군중을 설득하고, 바울을 돌로 쳤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제자들이 바울을 둘러 섰을 때에, 그는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틑날 그는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다.”(사도행전 14:19-20)

 

디모데는 이런 상황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숱한 박해 속에서도 바울을 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디모데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3) 진리를 따르는 것의 결과_박해

진리를 따르는 것의 결과는 박해입니다. 바울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2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로마 감옥 안에 갇힌 바울은 지난 선교 사역의 마무리가 감옥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불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정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의 경험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위험이 뒤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말하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위협이 찾아옵니다. 게다가 진리대로 살아가려고 시작하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바울 당시만해도 예수라는 진리를 따르는 무리는 소수였습니다. 소수의 무리가 매주 모여서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 예식 합니다. 그리고 서로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당시 기록에 보면 이런 예식 행위와 서로에 대한 호칭 때문에 식인 풍습과 근친상간 행한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여러분 소수의 무리가 다수가 따르는 로마황제 숭배 다신교의 사회 문화 거부하고, 매주 밤마다 몰래 모여 한다는 것이 식인예식과 근친상간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혐오하게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따르려는 사람들 모두는 박해를 받을 밖에 없었습니다. 

 

2. 진리 안에 머물라(13-14) 

1) 진리에 반대하는 사람들

다른 민족, 로마 사람,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받는 박해는 그나마 그러려니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바울과 디모데를 아프게 사람들 자신들의 뿌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동족,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박해보다 뼈를 때리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디모데 평생을 따라 다니면서 사역을 방해하고 음해하고 모함하고 박해했습니다. 심지어는 1세기 말의 기록인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이들 유대인들을 사단의 무리라고 부르며 주의하라 당부했습니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요한계시록 2:9). 

 

2) 간절한 호소

이렇게 전세계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불신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동족으로부터도 미움과 비방과 모함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왜요? 진리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살아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되신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다시 한번 간절히 호소합니다.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세계를 제패한 대제국 로마의 감옥에서 동족의 비방과 모함과 고소 앞에서 그의 마지막 외침을 들어봅시다. 

진리 안에 머무세요.”

호소가 들리시나요? 간절한 외침이 들리시나요? 바울 인생 전체가 압축된 외침입니다. 진리를 위한 그의 오랜 투쟁의 음성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보다 지금의 우리가 진리를 주장하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당시는 소수에서 다수로 나아가는 성장기의 환경이었습니다. 복음의 확장기였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 때문에 그래도 진리가 진리라는 사실을 믿을 있었고, 박해를 참을 있었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기독교 세계가 다수에서 소수로 전락하는 수축기이기 때문에 사실 진리를 주장하고 살아내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일리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살해의 위협 속에서 살다가 급기야는 동족의 고소로 지금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몇몇 지인들은 바울을 버리고 진리에서 떠났습니다. 

 

그대는 속히 나에게로 오십시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디모데후서 4:9-10)

 

이런 외로운 상황 속에서 진리를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있습니다. 기독교의 확장기라는 사회학적 통계만으로는 바울의 인내를 설명할 없습니다. 개인이 겪는 이런 고난과 심리적 좌절 속에서도 끝까지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끝내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3. 진리의 보고_성경(15-17) 

 

바울은 진리 안에 머무는 가장 좋은 도구, 가장 좋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우리가 익히 듣고 알고 때로는 외우는 구절이 등장합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16). 그런데 구절이 어느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몰랐을 겁니다. 바울의 마지막 권면, 당부의 맥락입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감옥에서 나온 말이라는 겁니다. 요사이 말씀을 가르치는 글들을 보면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바로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말은 책의 맨처음 등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을 마지막에 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목이 신기하면서도 감동을 줍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바울은 성경의 가치를 후대에 알려야 필요를 느꼈습니다. 구약과 복음서 얼마나 소중한 문서인지 후세대에 알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가치가 있나요? 

 

1) 하나님의 영감

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여진 책입니다. 수많은 인간 저자가 있지만, 성경의 제일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적 감동이 없이 성경이 씌여지지도 않았고, 이렇게 편집되지도 않았으며, 이렇게 전달 전수 되지도 않았습니다. 말씀이 글이 되고, 편집이 되어 책이 되고, 책이 후세대에 전달되는 과정 모두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감동받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2) 구원에 이르는 지혜 

둘쨰, 성경은 특히 구약과 함께 당시 거룩한 문서로 통용되던 복음서 일부 바울 서신서의 경우,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있습니다.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구약도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밀스런 지혜를 구약이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누가복음 24:44)

 

이게 복음주의 성경해석학의 근본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말이죠. 성경 66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3) 의의 교과서 

셋째, 성경은 의로운 삶을 위한 교과서입니다. 성경은 거룩한 삶에 대해 말합니다. 의로운 삶이 어떤지에 대해 말합니다. 수많은 이야기와 속의 인물을 통해 배웁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배웁니다. 1600년의 역사를 관통하여 기록된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 담겨 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삶을 있는 역설적 통합적 진리 담겨 있습니다. 극단적, 당파적 주장으로 사람들을 갈라치기 하지 않습니다. 지정의가 통합되어 있습니다. 몸과 영혼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나와 세상, 무리와 우주 통합되어 있습니다. 사실과 윤리가 조화 이룹니다. 성경이 모든 과학과 수학지식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인생을 의롭게 살아가는 데는 가장 탁월한 가르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는 겁니다. 

 

4) 선한 일과 탁월함의 원천

넷째, 성경은 탁월함과 선한 일의 원천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유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성공하는 유능하게 만든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함에 있어 유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입니다. 성경은 돈을 많이 버는 탁월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교보문고에 있는 자기 계발서 코너의 베스트셀러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탁월하고 유능하게 만들어 주는 책입니다. 목표가 다릅니다. 

 

4. 나가며

- 진리를 배우자/ 진리 안에 머물자

진리가 무시되고 배격당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팩트첵크는 중요하지만 진리체크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늘고 있습니다. 진리 체크는 현대사회의 적이며, 관용과 포용의 반대라고 합니다. 

 

점점 진리를 따르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소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구비율로 따지자면 점점 바울의 시대와 비슷해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기에 점점 사회적 압박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고 따르려는 사람들은 고난과 박해를 받는 시대가 왔으며 강도는 점점 세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저는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주를 관통하는,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진리는 다름 아니라, 성경이 오랫동안 가리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 안에 머뭅시다. 진리 안에 거합시다. 진리를 항상 품고 삽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의 전체 흐름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어내는 눈과 해석 전략 배워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파악하는 통독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용과 내용을 이어주는 해석전략입니다. 그래서 66 전체를 통일성 있게 바라보도록 돕는 프레임을 배워야 합니다. 

 

여름에 놀러가는 것도 좋고 쉬는 것도 좋지만, 성경을 배우기 위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어떨까요? 여러분의 여름을 응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진리를 주장하기 점점 어려워집니다. 도리어 조롱당하고 무시당하고 강퇴당할 있는 환경입니다. 그럼에도 진리 되신 예수님을 끝까지 진리로 믿고 따를 있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2. 성경은 우주적 진리를 배우는 최적의 교과서입니다. 여름 성경을 깊이 있게 읽고 배우겠다는 결심의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바울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바울이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라고 말할 , 그의 음성은 어떠했을까요? 상상력을 발휘해서 묘사하거나 연기해볼까요?     

 

2. 여름 성경을 배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 계획인가요? 만약 아직 계획이 없다면 함께 계획을 세워보시면 어떨까요?   

 

 

 

2021. 7. 11. 김혁수 

 

[본문_베드로후서 3:8-18] 

8사랑하는 여러분,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주님께는 하루가 같고, 년이 하루 같습니다. 9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10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것입니다.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11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속에서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13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하늘과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있도록 힘쓰십시오. 15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16바울은 모든 편지에서 이런 것을 두고 말하고 있는데, 가운데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거나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것입니다. 17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사실을 미리 알고, 불의한 자들의 유혹에 휩쓸려서 자기의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18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십시오. 이제도 영원한 날까지도 영광이 주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설교]

0. 들어가며 

- 조롱하는 사람들 vs. 무관심한 사람들

1992 10 28, KBS, MBC, SBS, 외신기자들이 마포구 성산동의 건물에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한국 방송사에 길이 남는 황당한 생방송이 진행되었습니다. 다미선교회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휴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장림 목사는 92 10월에 28 휴거된다고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휴거를 기다렸지만, 12시가 지났는데도 모두가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휴거는 없었고, 속은 사람들의 분노와 허탈함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의 조롱 소리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례에 세기말적 종말론이 몰아쳤지만,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휴거니 재림이니 혹은 하나님의 심판 같은 개념들에 대해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관심을 주지 않게 됩니다. 그전에는 관심이 있으니 조롱도 하고 비웃기도 하고 나아가 비난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종교이야기를 꺼내면 한귀로 흘려보냅니다. 관심을 두지 않기로 결심한 보입니다. 

 

- 베드로의 고뇌

 초대교회에서는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중에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을 보며 놀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어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석될 수도 있는데, 때의 제자들이 박해로 죽고, 나이들어 죽고 있는데, 여전히 오시지 않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은 점점 드세지고 설득력을 얻는 같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 마지막 당부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함께 성경을 읽어 볼까요? 

 

1. 그날이 늦어지는 이유

베드로는 그날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가지 설명을 붙입니다. 

 

1) 하나님의 시간 개념(8) 

첫째,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우리의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겁니다. 시편의 90:4절을 인용하고 있는데요. 시간을 만드신 , 영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의 시간 개념과 다르게 생각하실 있다는 점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상대성이론의 아이디어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중력에 의해 시간이 휘어질 있다는 사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움직이게 되면 시간이 멈춘다는 사실 말이죠.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었던 겁니다. 

 

우리의 인식과 하나님의 인식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의 시간 개념에 꿰어 맞추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땡깡과 비슷합니다. 

 

2) 회개와 구원을 위해(9, 15) 

둘째, 그날이 늦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9절과 1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9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15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멈추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라고 심판을 연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한 말씀을 적이 있었는데요. 로마서 2:4절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롬2:4) 

 

사실 저는 내용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되기도 하고 되기도 합니다.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믿는 사람들도 많아지지만 어쩔 없이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지는데, 그럴바에 빨리 오셔서 심판에 넘겨지는 사람이 줄어들게 하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질문에 갇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마도 날이 늦어지는 이유가 이게 다가 아닐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소원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유만으로 그분의 재림이 혹은 심판의 날이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해보입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우리가 그분의 뇌를 들여다 없다는 사실 말이죠.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때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림의 때를 결정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오실 수도 있겠죠. 

 

베드로는 그런 여러 가지 이유들을 설명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가지에 집중했던 거죠. 하나는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열망이었습니다. 저도 오늘은 가지에 집중해서 말씀드리는 좋겠습니다. 

 

2. 도둑같이 vs. 앞당기자

그런데, 재림의 때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크게 가지 신앙 양상을 띄는 같습니다. 하나는도둑같이 신앙입니다. 다른 하나는앞당기자' 신앙입니다. 

 

1) “도둑같이 신앙

먼저, 도둑같이의 신앙이 있습니다. 

 

10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도둑같이의 신앙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와 하나님의 심판의 때는 인간이 파악할 없다는 겁니다.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날짜와 시간을 알지 못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도둑같이 어느 순간 갑자기 임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손에 달렸다고 인정합니다. 문제는 인정이 도를 지나쳐서 우리의 역할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렸다고 하면서 인간적 노력의 포기를 선언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겁니다. 

 

에이, 어차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잖아요. 우리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죠

이렇게 말하는 신앙이 있을 있습니다. 

 

2) “앞당기자 신앙

도둑같이 신앙과 조금 다른 신앙이 있습니다. 바로앞당기자 신앙입니다. 

 

11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날을 앞당기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소리를 내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재림의 때를, 심판의 때를 앞당길 있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예스, 그럼요. 우리가 앞당길 있습니다. 단순히 기다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때를 앞당길 있습니다이렇게 대답할 확률이 더욱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으면 그날은 오게 겁니다. 그날이 오게 되는 조건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베드로가 제시하는 것은구원받는 사람들의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144,000명의 수와 관련이 있을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 24:14)

 

이렇게 성경은 앞당기자의 신앙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이 생각하신 조건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날과 시를 정하실 때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충족하는지 최종적으로 살피실 겁니다. 조건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겸손하게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최종 결정은 그분이 하시라고 그분의 왕되심을 인정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인간의 조급성과 성경 해석의 편협함이 시한부 종말론을 만들거나 혹은 재림을 위한 선교 목표를 정해서 자신의 부르심 이상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는 거죠. 이게 앞당기자 신앙의 부작용입니다. 

 

도둑같이 신앙이나 앞당기자 신앙이나 부작용이 찾아올 있습니다. 나태하게 기다리기만 한다거나 조급하게 행동주의에 빠진다거나 있는 거죠. 그럼 베드로가 생각하는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은 무엇인가요?  

 

3. 현재를 위한 베드로의 권면

- 관심의 변화_미래에서 현실로

첫째, 우리의 관심을 미래에서 현실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베드로야 말로 누군가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부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를 찾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아침밥을 먹이시고, 산책을 하기 시작하시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번이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죠. , 예수님은 베드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려주십니다. 어떻게 죽게 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가 뒤를 돌아다보면서 요한의 미래와 죽음은 어떻게 되는지 물은 겁니다( 21:21).  베드로는 누군가의 미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질문은 하는 모습이 그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는 미래 자체보다 현실을 중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1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14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날과 시는 우리가 없습니다. 최종결정은 그분이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현실 세계 속에서 거룩한 행실, 경건한 ,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도록 힘써야 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현실에서 힘을 쓰는 겁니다. 미래를 예측하며 그날을 계산하는 힘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죠. 성령님을 의지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겁니다. 실패하더라도 노력하는 겁니다.  

 

- 인내와 열정

둘째, 인내와 열정입니다.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라는 말이죠. 수많은 조롱이 있고, 심지어는 무관심이 팽배해져서 우리의 믿음이 약해질 , 재림의 때를 믿고 인내하라는 겁니다. 동시에 앞당기기 위해 열정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준에서 시기를 앞당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라고 권면하고 있죠. 

 

기디리고 앞당기기, 인내와 열정, 개념이 붙어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인내는 소극적으로 참는 것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부동자세로 오래 버티는 것을 상상하게 합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디는 것을 그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내에 멈추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앞당기기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진취적으로 뭔가를 계획하고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하라는 거죠. 역동성이 넘칩니다. 창의적인 생각들이 마구마구 쏟아집니다. 

 

인내는 열정을 만나고 열정은 인내를 만나야 열매를 맺습니다. 열정없는 소극적 인내는 자칫 나태한 회피 혹은 도피로 있습니다. 인내 없는 극단적 열정은 열광주의, 분파주의, 인간 중심 주의, 세속주의로 있습니다. 둘의 극단을 벗어나야 합니다. 인내와 열정이 만나야만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 생활을 있습니다. 

 

4. 나가며 

- 앞당기기

요사이 청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청년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때와는 달리 혹시 너무 미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실 미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미래,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의 날에 대한 관심이런 미래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너무 줄어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조롱을 우리도 모르게 내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렇게도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청년부는 인내와 열정 중에 어느 것이 부족할까? 아마도 열정이 조금 부족해보였습니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과 역할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사명과 역할을 우리는 쉽게 망각하고, 현실의 문제로 덮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내는 잘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이 약할 있다고 봤어요. 혹여 우리가 열정이 부족한 것이 맞다면, 우리에게 날을 앞당기기 위한 열정을 갖게 달다고 기도해야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가 우리의 뇌리와 마음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지치지 않는 인내와 열정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고 앞당기는 일에 헌신할 있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조롱과 무관심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나요?     

 

2. 우리 공동체가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노력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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