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0.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4:1-10] 

4:11형제자매 여러분서로 헐뜯지 마십시오자기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그대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12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분이십니다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13“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들으십시오.

14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5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우리가  것이고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것이다.”

16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그와 같은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17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

5:1부자들은 들으십시오여러분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십시오.

2여러분의 재물은 썩고여러분의 옷들은 좀먹었습니다.

3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녹은 장차 여러분을 고발할 증거가  것이요불과 같이 여러분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여러분은 세상 마지막 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4보십시오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그래서  일꾼들의 아우성소리가 전능하신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5여러분은   위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으며살육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습니다.

6여러분은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지만그는 여러분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설교]
0.
들어가며

지난 쿠팡 이천 물류센터의 화재 속에서 인명을 구조하기 위해 화마 속으로 들어가셨다가 다른 대원들은 내보고 자신은 탈출하지 못하셔서 끝내 돌아가신 김동식 구조대장님의 안따까운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유가족들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 얼간이

코미디 영화를 보다보면 명의 남자들이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웃음을 주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드라마적으로 봐도 명의 주인공으로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1시간 30분으로 이어나기가 쉽지 않죠.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명의 주인공들이 좌충우돌 이야기를 즐겁게 풀어내는 포맷이 그래도 긴장감을 유지시켜 주죠. 인도 코디디 영화 중에 얼간이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4 1절에서 교회내에 있는 싸움과 분쟁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 마음의 열망이 어디로 항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세상을 친구삼아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세상을 섬기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주의로 흐른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롯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할 것을 말씀하셨죠. 이것이 바로 교회에 있는 싸움과 분쟁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울라고 했죠.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권면했습니다(4:9). 

 

그런데 야고보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교회의 분열과 싸움을 일으키는 부류의 사람들을 지목했습니다. 얼간이라는 영화는 코미디이지만, 야고보가 보고 있는 교회내 얼간이는 코미디가 아니라 다큐요 범죄물이었습니다. 도대체 야고보는 어떤 사람들을 얼간이라고 지목하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번째 얼간이_남헌담(4:11-12)

먼저, 번째 얼간이는 남헌담입니다. 남을 헐뜯고 험담을 잘하는 사람들이죠. 11절입니다. 

 

4:11형제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 그대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굳이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서로 비난하고 헐뜯는 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에도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어머니를 대동하여 예수님께 자리 청탁을 하는 장면에서 제자들이 격분하는 모습을 봅니다(마가복음 10:41).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가기 위해 예루살렘을 가는 도중에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사람인지 논쟁이 붙었습니다(마가복음 9:33-35). 베드로인지, 요한인지 아님 다른 제자들인지이게 예수님 제자들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초대교회 형제자매라고 서로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7, 제사장의 기도에서 그렇게 하나될 것을 기도하고 바랬지만, 여전히 초대교회에는 형제자매를 헐뜯고 험담하는 일들이 계속되었던 겁니다. 

 

- 대변동의 초대교회 

야고보는 그냥 넘어갈 없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서 죽이는 일을 하던 바울이 급격하게 개종하더니만 세계를 누비며 은혜의 복음을 설파하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처음부터 마음을 쉽게 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이방인의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죠. 예수님께서 환상 속에서 직접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말이죠.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충돌은 한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기존 사회 계급의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노예 였던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주인이었던 사람을 가르치거나 돌보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적 대변혁이, 사회적 대변화가 교회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신학적, 세계관적 대변혁과 함께 사회적 계층적 대변화가 동시에 진행되면, 한마디로 Chaos 혼란 자체가 것입니다. 속에서는 아주 당연히 비판, 비난, 험담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에는 남헌담 부류의 얼간이들이 많이 생길 있는 상황과 조건이었습니다. 

 

- 율법에 기대다

야고보는 남헌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를 헐뜯는 것은 율법을 헐뜯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일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꾸 이렇게 지적을 하시니 지금 시대에 이분이 설교를 하시면 분명 꼰대라는 소리를 들었을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꼰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은 지적하는 설교를 멈출 같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뭔가 깊은 확신에 있어요. 

 

무엇이냐면, 야고보는 율법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따라서 율법 자체를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확신입니다. 보세요.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야고보는 여전히 율법의 가치를 상당히 높이 두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을 헐뜯지 말아야 이유를 대자면, ‘ 형제자매도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고 사신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게 것입니다. 그게 자연스럽죠. 그런데 야고보는 자연스러운 논리를 쓰지 않고, 갑자기 험담하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적 덕목의 상위 가치로서 율법을 제시하고 있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생각하는 율법의 개념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래도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서 1:25). 

 

야고보는 단순히 구약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완전한 율법, 자유를 주는 율법을 살펴보라고 이미 언급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에 등장하는 율법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세율법+예수님해석입니다. 특히 산상수훈을 통해 새롭게 제시된 율법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강림으로 인해 새롭게 해석된 율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율법인 거죠. 자유를 주는 율법인거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율법이 예수님을 통해 정신이 더욱 밝히 드러나고 성령님을 통해 실천력까지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단순히 죄책감만 주는 율법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완전한 율법이 것이죠. 율법을 심판한다는 겁니다. 누가요? 바로 형제자매를 헐뜯고 비방하고 험담하고 뒷담화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 공적 치리 vs. 험담

공적으로 정당한 치리 과정이 불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필요합니다. 때로 잘잘못을 분명히 가려야 합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의 범죄는 그냥 두어서는 안됩니다.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적인 대화의 자리에서 형제자매들을 증거없이 비방하거나 편을 갈라 헐뜯거나 저주하거나 심판하는 것은 자신이 신적 위치에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번째 얼간이_허망소(4:13-17)

교회 공동체를 망치는 번째 얼간이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허망소입니다. 이들은 헛된 꿈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을 벌겠다는 일념이 강해 보입니다. 계획을 세우고 마치 계획이 드라마틱하게 실현될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는 사람들입니다. 

 

- 부유한 상인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부유한 상인그룹이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무역을 통해 돈을 벌어드린 사람들입니다. 현실감각도 뛰어나고 실천력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전하는 세계관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계획한대로 거다. 그동안도 그렇게 되어 왔다. 당장 여길 떠나 이곳저곳 돌아다녀도 충분히 돈을 있으며, 돈으로 최신의 노트북과 자동차와 집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처럼 자랑도 하고 떠벌리고 설득하려고 합니다. 

 

부동산 가격이 올라 여윳돈이 생겼습니다. 이제 나이들어 느지막이 경기도에 펜션을 지어 펜션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싱가폴의 사모펀드에 수익률이 좋다며 펜션업을 접고 자신의 돈과 자녀들의 , 친척들을 돈을 최대한 많이 모아 투자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들어도 이상한 것이 한달이 지난면 매월 투자원금의 10%씩의 수익금을 통장으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1억을 넣으면, 후부터는 매월 천만원씩 계속 수입을 얻을 있다는 겁니다. 봐도 사기성이 농후했습니다. 결국 사기를 당하게 됩니다. 가진 재산을 날리고, 자녀, 친척들의 돈도 날렸습니다. 

 

- 바람잡이

16절을 보세요. 

16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몇몇 부자 상인들이 형제자매들에게 바람을 넣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계획대로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세속주의의 약을 팔고 있는 겁니다. 그들의 혀로 공동체는 싸움이 일어나고 분란이 잦아들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에 넘어간 사람들의 피해가 곳곳에서 들립니다. 야고보는 더이상 사안을 묵과할 없었습니다. 세속주의에 물들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겸손히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야고보는 허망한 꿈을 좇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의 삶을 살라고 충고합니다. 

15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야고보는 일부 부자 상인들의 허풍과 자랑에 빠져 들어 지금 하나님께서 맡기신 나의 일들을 소홀히 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귀가 얇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좋은 정보에 쉽게 빠져듭니다. 여러분, 주식이든 비트코인이든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투자이든 간에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범위 은행 대출을 받거나 지인에게 돈을 빌려서 투자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너무 떠벌리며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각자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부르심에 따르도록 격려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이것이 야고보의 제안입니다. 

 

- 선한 ?

특히 17절은 우리에게 부담을 줍니다. 

17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사람이 해야 선한 일은 바로 15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주어지는 일들을 신실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무리하게 세상의 가치를 따라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것은 죄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작은 일에 끝까지 충성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믿고 확신하는 일에 끝까지 헌신하길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주변사람들과 대화해가면서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작은 섬김이 하나님 나라를 더욱 굳건하게 세워갈 것입니다. 

 

3. 번째 얼간이_강부자(5:1-6)

이제 교회에 싸움과 분란이 생기는 번째 부류가 등장합니다. 이름은 바로 강부자입니다. 이분들은 정말 교회에 있는 분들인지 아니면 교회 외부에서 교회를 시험들게 하는 사람들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과연 성도라면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상습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헷갈립니다. 무슨 일들을 저지르는지 한번 보십시오. 

 

- 썩고 있는 귀금속

이들은 재물을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금과 은이 녹이 쓸고 있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실제 금과 은이 녹이 쓸겠습니까! 그만큼 강부자씨는 돈을 쓰거나 순환시키지 않고 쌓아놓기만 합니다. 썩어서 버리는 재물도 많습니다.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 큽니다. 최근 강대국들이 백신의 유통기한이 되어가는데도 다른 나라들에게 공급하지 않고 상해서 버리려고 했던 현실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 부자들의 악행

게다가 돈을 모으는 방법을 보세요. 일꾼들의 일당을 가로챕니다. 조폭들이나 하는 짓거리입니다. 일꾼들의 아우성과 그들의 울분에 기도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의 히브리 노예들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강부자씨는 사치와 쾌락의 삶을 살아갑니다. 게다가 아무 잘못이 없는 의인을 죽였습니다. 

 

- 교회 부자 vs. 교회 부자

처음에 야고보는 당시 교회에 있는 부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썼지만, 이렇게 살펴보니까 교회 밖에 있는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 제사장, 사두개인들에게 하는 같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하여 종교 시스템을 유지하였던 종교 권력자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특히 6절을 보면 그들은 의인, 예수님을 죽였고, 예수님은 대항하지 않으셨거든요. 

 

- 심판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야고보는 교회내 부자들의 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바로잡길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의 감동을 받아 교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고 임금을 착취하고 사치과 쾌락에 빠져 결국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울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고 진심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로 판명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마따나 쫓겨나서 슬피 이를 갈며 후회하는 순간이 것입니다. 

 

 

4. 하나됨을 향하여

- 우리 안에 얼간이 깨기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 얼간이를 멀리해야 합니다. 이들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싸움과 갈등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됨을 위해 사람은 진심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울면서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애통해하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혹여라도 우리 마음 속에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의 영향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것입니다. 

 

아마도 강부자의 행습을 따라하는 청년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헌담, 허망소는 우리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혹시 우리 공동체를 위협하는 남헌담과 허망소는 없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지 적용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근거없는 비방과 험담을 멈추자.

문제제기와 근거없는 비방은 다른 것입니다.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적절한 통로를 통해 전달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아름다운 덕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적절한 문제제기가 필요합니다. 문제가 있고 불편한 것이 있는데 무조건 몇몇 개인이 참는 것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운영위원들에게 정중하게 말하십시오. 목사인 제게도 말하십시오. 그러나 이런 적절한 절차가 있는데, 그걸 이용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비난조로 험담하는 것은 삼가십시오. 

 

2) 교회 네트워크를 이용한 피라미드(다단계) 사기에 주의합시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교회들에서는 잊을만하면 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회원을 모집하고 등록비를 모아 수입을 만듭니다. 회원을 많이 모집하면 그만큼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돈을 많이 받게 됩니다. 어디까지가 사기고 어디까지가 참신한 사업 아이템인지 헷갈리는 지점이 있습니다만 일단 피해사례가 생기고 피해자가 다수 발생했다면 조심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특히 최근 암호화폐가 인기가 많아지니까 그곳에서도 이런식의 다단계 사기가 횡행합니다. 사기성이 놓후한 것을 교회에 들여와서는 안됩니다. 

 

청년들끼리 서로 의기투합해서 멋진 사업 아이템으로 사업을 펼쳐나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동업에 있어서도 조심할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서로 간의 공정한 계약서를 미리 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중에 분란이 있는 부분이 무엇이 있는지 철저하게 점검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이익 배분이나 근무 시간 같은 부분에서 서로 명확하게 계약서에 명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5. 나가며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교회를 병들게 하는 얼간이를 주의합시다. 무엇보다 야고보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무진장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싸움과 분열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감춰버립니다. 불의와 부당함 만큼이나 싸움과 분열이 미치는 폐해가 큽니다. 험담과 뒷담화 대신 서로를 존중하고 축복하는 말들이 많아져야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버는 방법이 많다며 사기성이 농후한 말들로 현혹하는 일들은 교회에서 사라져야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경영자, 자산가들은 직원들의 삶의 복지를 위해 애를 써야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부는 자기 자신과 가족들에게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주변의 이웃을 섬기는 일에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투자가 있어야 것입니다. 이렇게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를 멀리하고 공동체를 더욱 하나되게 하는 일에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우리 자신 안에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의 영향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형제자매를 험담하고, 허망한 소망에 마음을 빼앗기고, 부자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마음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겸손하게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드려지길 위해 기도합시다. 찬양, 기도, 말씀 속에서 더욱 우리의 정서와 마음이 표현되고 그분을 향한 사랑이 드러나길 위해 기도합시다. 또한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서로 모이고 하나의 공동체가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야고보는 그들을 지목하고 주의를 주었을까요?    

 

2.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가 나와 공동체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우리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무엇을 조심하면 좋을까요? 

 

   

 

 

 

2021. 6. 13.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4:1-10]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6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하고 말합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야고보 의식의 흐름

시련의 하나님의 지혜로 인내하라. 

말씀을 듣고 행하라. 

특히 빈자들을 차별대우하지 말라.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무엇보다 말에 실수가 없도록 조심하라. 

 

이런 일련의 메시지가 어떻게 도출 되었을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메시지를 던졌을까요? 당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 공동체, 사실 공동체들은 그렇게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메가처치들이 즐비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의 가정교회들이 도시마다 형성되어 있었죠. 그런 교회들에게 야고보가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는 기본적으로 회람되든지 아니면 필사본을 가지고 도시마다 전달되었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애를 썼을까요? 

 

저는 힌트가 오늘 본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싸움과 분쟁(1-3)

- 초대 교회 현실 

야고보는 기독 공동체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죠. 예수님을 본받아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사람들을 섬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그렇게 예수의 제자들로 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기독 공동체에는 싸움과 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이며, 성령님이 가장 강하게 역사하던 때의 교회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현실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야고보서의 저술 연대가 대략 40-50년대고 ,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지 10-20 지난 시점의 교회 공동체는 싸움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인 야고보가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 싸웠을까? 

어떤 종류의 싸움과 분쟁이었을까요? 아까 전에 우리는 야고보의 의식의 흐름을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야고보서 전체를 통해, 사회 계층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빈자와 부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었고 이것인 때로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을 겁니다. 또한 신학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도 구원에 있어서 충분하다는 입장과 믿음보다는 선한 행위에 방점이 있다는 구원의 방법론의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혀를 제어할 것을 야고보가 주문했던 것이죠. 이런 종류의 싸움과 분쟁과 갈등이 초대교회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 싸움의 본질 

야고보는 이런 싸움과 분쟁의 본질을 꿰뚫는 아주 인싸이트풀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1-3절을 읽어볼까요?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욕심입니다. 욕심이란 쾌락을 누리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욕심은 십계명의 탐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웃의 재물을 탐하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소유와 권리를 탐하는 마음입니다. 십계명 유일하게 마음의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것이 번째 계명, 탐심입니다. 육심의 욕심이 기독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도들이라고 해서 이런 탐심,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끔찍한 현상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습니다. 단순한 말싸움 정도로 끝나지 않고 실제적인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보고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라고 말씀해주셨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니, 사람들이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간구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간구가 이뤄지지 않을 , 자신의 쾌락과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 그들은 때로 살인도 서슴지 않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까지 들어 주실 의무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육신의 욕심, 자기 쾌락을 위한 기도와 같은 기도조차 무조건 들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2. 하나님께로(4-8) 

-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럼 그런 욕신의 욕심을 제어하고 자신의 쾌락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간구하고 열망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야고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야고보는 싸움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욕심, 자기의 쾌락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분께 집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많이 닮았습니다.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쓰던 단어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간음, 외도, 바람피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 아세라, 바알 같은 신들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실 없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오래된 하나님의 성품을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의 인용구는 정확히 어떤 성경인지는 길이 없습니다. NIV에서는그가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이 강하게 시기한다이렇게 번역했는데,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인간 개개인에게 불어 넣으신 각각의 영과 교제하기 위해 그리워하신다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는 좀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 하나님께로 가까이

그러니 욕심과 쾌락을 절제하고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고 야고보가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께서도 더욱 가까이 오실 겁니다. 죄인들이라도 하나님은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다가서는 사람을 하나님을 보듬어 주십니다. 다만, 주인을 섬기겠다는, 명의 아내, 명의 남편, 명의 애인을 두겠다는 생각과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오늘 야고보는 마음을 품는 , 바람을 피고, 외도를 하는 것을 악마에 비유하는 같습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악마는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겠지만, 곧바로 전략을 쓰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전략을 쓰나요? 마음 전략을 쓰는 겁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네전략입니다. 여러분, 물론 현대 사회는 다원성의 사회며, 취존의 사회입니다. 좋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없느니라”(마태복음 6:24). 세상의 가장 강력한 신이 바로 돈의 , 풍요의 신인데, 돈의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주인으로 두고 섬길 없다는 겁니다. 악마의 마음 전략은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무언가를 동시에 섬길 있다고 꼬득입니다. 온갖 감언이설로 꼬시고, 설득합니다. 

 

- 난점_분리주의? 

사실 지점에서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야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도태되고 사회 부적응자가 되고 삶의 많은 부분에서 제약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갖지 않고 살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모두 속세를 벗어나서 산사람, 자연인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님 수도원을 짓고 우리 만의 격리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나요? 마치 아미쉬 공동체처럼 말입니다. 

 

성경이 그런 수도원적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 보편적 공동체 상으로 두지도 않습니다. 왜냐구요? 초대 교회 공동체들이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여전히 남아 활동했습니다. 에베소, 고린도, 로마, 갈라디아, 데살로니가이런 지역들은 당시 최고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던 도시였습니다. 바울도 도시에 가서 전도했습니다. 그러니 야고보는 단순히 분리주의자의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전제로 하고 말하는 겁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마음을 품게 가능성이 높고, 그러니 마음 전략으로 다가오는 악마, 사단, 귀신을 대적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악마의 교묘한 꾀임과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수단으로서 돈을 벌고, 수단으로서 다른 여러 가지를 좋아합니다. 결코 수단이 목적이 되어 섬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돈과 재능과 에너지는 오로지 하나님께 드릴 예배요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겁니다. 

 

- 세상 속에서 마음 갖기

여러분은 마음을 가져다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마음이 아니라 오롯이 여러분의 재물과 은사와 에너지를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간이 돈이요, 재능이 돈이요, 외모가 돈이요, 건강이 돈이고, 에너지가 돈이요, 웃음이 돈입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됩니다. 자칫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곤 합니다. 그러니 돈을 섬기기 시작하면, 우리의 모든 존재를 교환가치를 높게 쳐주는 시장에 진열하려는 욕망을 갖게 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 재능, 에너지를 아깝게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돈에게 예배합니까? 하나님께 예배합니까? 

 

 

3. 순결을 향해(9-10)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마음을 버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있을까요? 야고보는 이외의 제안을 합니다. 보실까요?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야고보는 순결한 마음, 마음이 되는 데에, 가지를 제안합니다. 

 

- 울라

첫째는 우십시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울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고 욕심과 쾌락을 절제하지 못해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는 공동체를 바라보며, 야고보는 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슬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정서적인 반응입니다. 구약에서 자신의 죄를 인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 옷을 찢고 재를 뿌리고 털썩 주저 앉아 며칠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왕이 그러기고 했고, 선지자들이 그러기도 했죠. 예수님은 옷을 찢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죄로 신음하는 모습에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죠. 야고보는 이런 감정적 반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야고보 자신도 당시 기독 공동체가 서로 싸우고 분열하는 모습, 마음을 품으며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행동했을지 예상이 됩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야고보도 울었을 겁니다. 슬퍼하며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어제 말씀을 준비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아니 싫었습니다. 야고보서를 설교하는 것이 점점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문학 장르가 등장하잖아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묵상하고 상상하고 이야기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즐겁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그래서 좋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줄기차게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진술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무슨 법률 같고 회사의 규정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왠지 그러다 보니 마음이 딱딱해지고, 연구하고 싶지 않고, 말씀을 준비하고 싶지 않고, 자꾸 다른 것에 눈이 돌아가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9 말씀을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야고보가 지금 울고 있구나. 야고보가 몇날 며칠 애통해하며 고통 속에 있구나. 피상적인 웃음과 현실 도피의 즐거움, 기쁨을 버리고 근심과 슬픔으로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저를 깊이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저의 불성실함, 무거운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마음, 말씀에 깊이 천착하지 못하는 모습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꿈에서 저의 죄가 보였습니다. 하나님 보다 다른 것으로 기쁨을 찾으려는 저의 모습이 보였고, 그게 슬펐습니다. 설교자로서 목사로서 깊이 말씀과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저의 모습이 보였고, 그게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애통하는 눈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찬양하다가 혹은 기도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저의 죄와 부족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우리 공동체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소망 때문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것도보다는 저와 공동체의 현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이후로 눈물이 말랐습니다. 온라인 예배는 이상하게 사람의 정서를 터치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정서를 표현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쁨이든 애통이든간에 우리는 찬양을 통해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정적 존재입니다. 감정은 우리 내면 깊은 곳의 갈망과 바램을 드러나게 줍니다. 이게 원활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예배가 이런 감정이 풍부하게 표현되는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낮추라

순결한 마음 마음이 되기 위한 야고보의 번째 제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해지는 겁니다. 스스로 높아졌던 마음을 낮추어 그분께 나아오는 겁니다. 이것은 번째 제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높였던 마음, 높아진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가면들, 위선들, 연기들을 포기하는 겁니다. 거짓된 웃음, 경직된 눈빛, 반응하지 않겠다는 굳은 표정, 깊은 내면의 감정을 들키지 않겠다는 딱딱한 몸짓,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어투와 손사래이런 자신 만의 속에서 살겠다는 의지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겁니다. 그분께 자신의 과오와 실수와 부족함과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그분께 우리의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리고 때로는 무릎을 꿇는 겁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마음이 아닌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고 다시 시작하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왜냐구요, 그분은 우리가 가까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시거든요. 

 

4. 순결한 공동체

- 산상수훈의 초대 교회 적용 버전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초대교회 적용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정말 이상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상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초대교회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현실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분쟁, 약자에 대한 차별, 욕심과 욕망에 치우친 기도들야고보는 이를 치료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야고보가 21세기 한국 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분은 여전히 비슷한 아니 그때보다 심한 기독 공동체를 보며 아연실색하며 눈물로 몇날 며칠을 지냈을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순결한 공동체가 되기를 요청하셨을 겁니다. 마음이 아니라 마음으로 오롯이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공동체가 되길 요구하셨을 겁니다. 자본주의, 다원주의,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돈과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야고보는 오직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 위해 애통하기를 그리고 더욱 겸손해 지기를 우리에게 요청했을 겁니다. 

 

- 송청 예배 적용 버전

저는 부작용이 염려되지만 그래도 좀더 구체적으로 특히 예배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예배 시간을 지킵시다. 시간을 지키는 것은 마음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열망은 시간 사용으로 드러납니다. 

2) 찬양 시간에 우리의 감정을 충분히 드러냅시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찬양과 기도에 드러나야 합니다. 기쁨만이 아니라 때로는 애통함도 표현합시다. 찬양인도자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이 표현되도록 노래로 혹은 멘트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형식에 그치지 않도록 합시다. 최대한 집중해서 나의 마음을 표현합시다. 

3) 설교를 들을 , 적극적으로 리액션합시다. 하나님께 리액션하라는 말입니다. 이해가 안되면 이해가 안된다고, 납득이 되면 납득이 되었다고, 은혜가 있으면 은혜가 있다고, 감동이 있으면 감동이 있다고, 마음이 무감각하다면 무감각하다고그렇게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리액션하는 겁니다. 설교 중간에 해도 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설교를 듣고 나서 함께 기도 , 그때 더욱 집중해서 우리의 리액션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순결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 이런 몇가지 실천 사항은 아주 작은 요소일 겁니다. 그럼에도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될까봐 부작용이 걱정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책감이 아니라 소망으로 전환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그리고 야고보가 전한 순결한 공동체에 대한 비전과 이상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상과 비전을 향해 함께 가자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5. 나가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싸우고 분열되는 초대 교회 현실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나뉘어져서 육신의 욕망과 쾌락에 빠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성도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로 밤잠을 설칩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편지를 씁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세요. 마음을 품지 마세요. 마음을 품게 만드는 악마를 대적하세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세요. 그게 안된다면 나처럼 울면서 애통해 하면서 슬퍼하세요.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야고보의 메시지는 여전히 우리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송청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메시지를 다시 우리 마음에 새기고 음미해서 정말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순결한 공동체가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혹시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충분히 타협하면서 살아갈 있다는 믿음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오직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다짐의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2.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드려지길 위해 기도합시다. 찬양, 기도, 말씀 속에서 더욱 우리의 정서와 마음이 표현되고 그분을 향한 사랑이 드러나길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나요? 때의 심정을 나눠주세요.   

 

2. 예배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요? 마음의 중심을 드리기 위해 나의 예배 생활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떤 부분인가요? 어떻게 변화되길 원하나요?  

 

 

 

 

2021. 6. 6.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3:1-12]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은 선생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됩니다여러분이 아는 대로가르치는 사람 우리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우리는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누구든지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몸을 다스릴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3말을 부리려면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그리하여 우리는 말의  몸을 끌고 다닙니다.

4보십시오배도 그렇습니다배가 아무리 커도 거센 바람에 밀려도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사공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5이와 같이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엄청난 일을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보십시오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숲을 태웁니다.

6그런데  불이요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이지만 몸을 더럽히며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결국에는  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

7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사람이 길들이고 있으며 길들여 놓았습니다.

8그러나 사람의  길들일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잡을  없는 악이며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있습니다.

9우리는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11샘이  구멍에서  물과  물을   있겠습니까?

1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있겠습니까마찬가지로  샘은  물을   없습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여러분 인생에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계시나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기억에 남는 선생님을 떠올려 봤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났지만, 가장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분은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체육 선생님이셨어요. 학기 초였습니다. 당시에는 공부를 시키기 위해 정규 수업 이외에 특별반 수업이 편셩되었던 때였습니다. 지금도 그럴 있겠지만, 당시에는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었죠. 하지만, 특별반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별도의 수업료를 내야 했습니다. 선생님이 저에게도 수업을 들으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리셨죠. 그런데 저희 집은 가난해서 사실 특별 수업료를 있는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아침 조회가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가시는 선생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수업료를 없어서 특별반 수업을 들을 수는 없겠다고 말씀드렸죠. 체육 선생님은 저의 귀싸다귀를 날려버렸습니다. 눈물이 돌았습니다. “김혁수, 뭐가 이렇게 약해 빠졌어. 수업료는 내가 해결할테니 그냥 들어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분은 저의 소심하고 약해빠진 태도, 당당하지 못한 태도가 못마땅했었나 봅니다. 지금이야 있을 없는 일이지만, 뺨을 때리고 수업료도 내주시는 그분이 이상하게 기억에 가장 오래남습니다. 

 

가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체육 선생님의 힘은 정말 세다. 그리고 인생은 조금 당당하게 살아도 된다. 등등..

여전히 저는 소심한 측면이 있지만, 인생을 살펴보면 소심함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도 때부터였던 같아요. 저의 소심함이 생각보다 저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때가 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선생님들의 영향을 받아서 곳에 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수많은 선생님들이 우리의 인격과 지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읽어볼까요?

 

1. 선생님 전성시대(1)

- 초대 교회 선생님들 

초대교회에도 선생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새롭게 생겨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사도 바울도 중에 분이죠. 사도들을 비롯하여 바나바와 아볼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등의 12사도 이외의 사람들이 등장해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반복해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어쩔 없이 조금씩 말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다뤘던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너무 강조한 선생님들이 등장했으며,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공동체의 연약하고 가난한 지체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가르쳤던 것이죠. 

 

- 너에게는 나에게는(2:18)

혹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야고보서 2:18절인데요. 

 

2: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행동을 구분하고 마치 믿음이 행동과는 따로 노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것이죠.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잘못이지만, 둘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마치 선한 행동이면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로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세지를 전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1절입니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정말 무서운 생각들이 듭니다. 하나님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시는 분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가르침을 보고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마태복음 15:14) 

 

- 신앙 인격을 좌우하는 설교들

사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엄청 많은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배 드릴 때마다 설교 시간만 되면 졸음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었던 설교들이 우리의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크게 기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매주 죄에 대해 생각하고, 죄를 용서하시는 분을 떠올리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매주 듣는 삶은 기독인들의 특수한 성품을 낳습니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과 특히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의 세계관에 크게 영향을 줍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듣는 설교, 성경 해석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실제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로서 두려운 마음입니다.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을 제대로 해석했는가, 적용점이 적실한가, 가르침과 행동이 일치하는가 등등 생각할 내용이 참으로 많습니다. 제대로 설교자들은 이런 싸움을 계속 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제대로된 설교자가 있도록 말입니다. 

 

2. 말의 (2-8)

- 현실적 인간론 

야고보는 인간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실수가 많습니다.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특별히 말의 실수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누군가를 씹는 대화를 시작하면 어느덧 욕이 나오고, 이러저러한 비난이 수위를 넘습니다. 뒷담화, 험담이 안주가 되면 술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8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Horse and Ship 

야고보는 말이 가지는 무서운 힘에 대해 말하면서 혀를 언급합니다. 우리 몸에서 작은 지체에 속하는 혀가 우리의 행동과 존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말과 배를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말에 재갈을 물려 말을 조종합니다. 배도 마찬가지죠. 배가 결국 배의 뒤에 있는 작은 키로 방향을 조정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작은 신체 기관인 혀에 의해 우리의 생각, 행동, 존재가 영향을 받는다고 적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존재가 영향을 받습니다. 쉴새 없이 욕을 하며 남을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은 생각과 행동과 존재가 터프해집니다. 부드러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 행동, 존재가 부드럽기 마련입니다. 이건 어쩔 없습니다. 

 

- 불의

단순히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혀를 어떻게 놀리는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굳이 실험 결과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쉽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매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상대방의 때문에 상처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 동안 마음 상했던 떠올려 보세요.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말로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100밀리미터의 철갑판을 대고 사는 같습니다. 살살 웃으면서 말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모습을 보면, 전쟁터와 다름 없습니다. 한마디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가장 끔찍한 말을 사용했던 사람은 아마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갈라치기의 대마왕이었죠. 잠잠했던 인종 차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민자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국 이기주의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평화/환경 공조가 흐트러졌습니다. 혀가 너무 가볍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말을 안하고 수는 없습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화병에 걸려 죽을 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고유한 중에 하나가 화병이라고 합니다. 꾹꾹 참으면서 살다보니 섞은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서 결국 화병이 나고 마는 것이죠. 지난 20세기 한국이 당한 역사를 보면 화병이 생길 수가 없었을 같긴 합니다. 36년의 일제치하에서 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해방되자 좌우 이념 대결 때문에 숨죽이고 살다가 동족 상잔의 한국 전쟁이 터집니다. 남한에 살던 사람들은 반공주의와 군사독재의 권위주의 시대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화병이 생기죠. 이해할만 합니다. 

 

우리는 말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혀를 놀려야 합니다. 크게 웃어야 합니다. 때로는 분노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말과 말의 태도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의 근원은 우리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3. 말의 중심(9-12)

- 말의 근원 

 

1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짠 샘은 단 물을 낼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말은 사람의 중심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을 없습니다. 포도나무가 무화가 열매를 맺을 없습니다. 짭짤한 샘에서는 물이 나올 없습니다. 바닷물에 영향을 받고 있는 샘에서는 사람이 마실 있는 민물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 분노가 가득한데 부드러운 말이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마음 속에 사도들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마음이 가득한데, 사도들 가르침 그대로 말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 말과 말의 태도 

마음의 중심에서는 말의 내용 아니라 말하는 태도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말의 뉘앙스를 파악합니다. 말의 내용 아니라 바디 랭귀지가 의사소통에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우리가 줌에서 오랫동안 대화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서로 마주보며 눈과 손짓과 제스처를 봐가며 말의 뉘앙스를 파악하면서 대화를 해야 하는데, 말의 내용만으로 소통하려고 하니 더욱 피곤해지는 것이고, 충분히 소통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런 말의 내용 아니라 말의 태도도 바로 우리의 마음 중심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기 마련이다.

 

4. 축복의 말이 넘치는 공동체 

- 용서 그리고 평안 

야고보가 보고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실상을 그려보실 있으시겠어요?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이 일파만파 퍼져나갑니다. 사도들이 원래 가르쳤던 내용을 넘어서는 말들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는 파괴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분열을 일으킵니다. 말의 힘이 그렇게 무섭게 초대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선택했습니다. 사람을 비판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축복하는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으로 형제자매들을 저주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당한 판단이라는 것이 있을 겁니다. 잘못에 대해 잘못이라고 말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를 저주해서는 안됩니다. 분노가 도를 지나쳐 욕을 하거나 저주를 부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언어 속에 용서의 말이 조금 늘어나야 합니다. 형제 자매의 약점과 실수와 잘못에 대해 용서를 통해 평안을 전하는 말들이 늘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서 용서의 말들이 사라지는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잘못했다는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용서한다는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서로 말없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용서는 우리 시대에 맞지 않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어색하지 않는 분위기가 연출하기 위해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웃음으로 뭉개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진심으로 용서의 말과 용납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 비판 보다는 축복

비판 보다는 축복의 말이 우리의 일상의 언어에 많이 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축복의 말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동안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던 삶에 대해 서로 축복의 말로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고,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5. 나가며 

- 바른 설교자 그리고 축복의 성도들
오늘 야고보는 가지를 한국 교회와 우리 공동체에 던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바른 설교자입니다. 말로 다른 사람들의 신앙 인격을 좌우하는 저를 비롯한 설교자들이 더욱 최선을 다해 바른 말씀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것입니다. 둘째는 성도들의 말이 축복의 언어로 바뀌어야 합니다. 말만하면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처음 배우는 언어는 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축복의 말이 흘러가야 합니다. 이번 주는 어떤 축복의 말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누구인가요? 그분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2.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 야고보는 우리의 언어 생활에 변화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평소에 쓰는 언어 중에 삭제하고 싶은 말과 말의 습관 혹은 장착하고 싶은 말과 말의 습관이 있다면 나줘주세요. 

 

2021. 5. 30.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2:14-26] 

14나의 형제자매 여러분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있겠습니까?

15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몸을 따뜻하게 하고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나에게는 행함이 있다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잘하는 일입니다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20어리석은 사람이여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2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것입니다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23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24여러분이 아는 대로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25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6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지난 주에 우리는 차별 없는 공동체를 꿈꾸는 야고보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의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죠. 권력, , 혈연 이런 것이 차별을 정당화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 보호받지 못했던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소위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셨죠. 야고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봤습니다.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을 봤는데, 그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죠. 오히려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최전선에 서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에베소의 감독이 되는 인생역전의 이야기가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넘쳐났습니다. 게다가 야고보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우리 인생을 자유롭게 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주는 율법, 자기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차별 없는 공동체를 꿈꾸는 야고보는 이제 조금은 논쟁적인 주제로 들어갑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내에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어이없는 생각의 흐름을 보았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맞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자녀라는 생각이 무섭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동안 주장했던 내용,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로마서에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할례와 음식법과 예식법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주장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유대인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쳤죠.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왜곡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심각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필요없다, 율법은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들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오해했고, 바울의 주장도 오해했습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없었습니다.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아주 강한 어조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1. 행함 없는 믿음

사실 내용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읽어보면 야고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있습니다. 야고보는 돌려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최고 행정가답습니다. 그의 글은 명료합니다. 14절에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 행동이 따라오지 않으면 과연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사람이 입을 옷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그런 중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에 찾아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초췌해 보이십니까? 그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도 예배를 드렸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몸도 따뜻하게 하시고, 밥도 맛있게 많이 드세요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겁니다. 실제적인 도움이 없습니다. 옷도 나누지 않고, 밥도 나누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것을 행함 없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무섭게 다음 문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땅에 선포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 주인이시며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것이 지식에 머무는 죽은 지식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받는 방법에 항상 집중해 왔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는 원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왔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까지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16장까지 있습니다. 로마서 8장까지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믿음이라는 새로운 원리가 도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씀을 이어갑니다. 서로 잘난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낫다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통합된 새로운 공동체의 윤리가 탄생한 것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하나될 것을 의도하였습니다. 12장부터는 더욱더 믿음대로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2) 

 

그렇습니다. 바울도 믿음으로 구원의 대열에 동참한 사람들의 삶의 실천과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지 로마서라는 편지에 함께 놓았던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편지가 바울의 갈라디아서입니다. 그곳에서도 바울은 할례주의자들과 한판 크게 싸우면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합니다(갈라디아서 2:16). 그러나 5-6장에 보면 바울은 성령에 따라 행동하라고 강하게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언급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라디아서 5:22-25 중 발췌) 

 

어떻습니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은 행함으로 이어지도록 배치했습니다. 복음이 윤리를 낳는 겁니다. 개인 윤리, 공동체 윤리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 자기 위안입니다. 절반의 로마서, 절반의 갈라디아서가 되는 겁니다.

 

2. 어리석도다 

편지에 쓰지 말아야 단어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것입니다. 글을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대화 속에서 나온 욕이나 비방은 실수였다고 변명이라도 있지만, 혹은 대화의 맥락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쌍방의 잘못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공적인 문서, 이메일, SNS 등에 남겨진 욕과 비방은 영원히 남아 나의 꼬리표가 되어 잊을만하면 튀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더더욱 조심해야 일입니다. 

 

그런데 최고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가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험한 말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이죠? 

 

20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어리석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써서는 안되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리석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험한 말을 쓰고 있는 걸까요? 18절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과 행함을 나누고 있음을 있습니다. 둘은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있군요. 저에게는 행함이 있답니다. 행함이 없는 당신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행함으로 통해 나의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얼핏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행동을 중시하는 바른 신앙의 사람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믿음과 행함이라는 이분법에 빠져 있음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습니다. 둘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잘못합니다. 믿음이 없는데, 행함만 있으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행함의 근원적 동기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어야 것입니다. 동기가 없이 행함으로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으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게 믿음과 행함은 뗄레야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적극적이고 때로는 급진적인 행함이 뒤따라야 하는 겁니다. 

 

#아기 고양이 '새까미' 구조 이야기 

지난 주일 저에게는 엄청난 일이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교회 근처에서 놀다가 심한 고양이 감기에 걸려 어미에게 버림받고 홀로 있던 2-3개월된 아기 고양이를 구조했습니다. 예배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동물병원에 가자고 해서 치료만 하고 다시 원래 자리에 놓고 가려고 했습니다. 아내도 알러지가 있고 저도 먼지 알러지가 있어서 동물을 집에서 키우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하고 있었죠. 아들이 아직 다섯살이라 그것도 조금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날씨를 확인해보니 계속 비가 내린다는 거예요. 허피스라는 고양이 감기에 걸리면, 면역이 약한 아기 고양이는 죽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어쩔 없이 집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가다가 다시 병원에 들러 구충제 주사를 맞히고 귀에 있는 진드기 제거를 했죠. 분변 검사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기 고양이 임시보호를 시작하게 되었죠. 병원비만해도 10만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난 병든 아기 고양이 돌보느라 잠도 번이나 설쳤죠. 밥도 못먹는 아이 고양이 입을 벌려서 미음 같이 만들어 먹였습니다. 정성을 들였더니 회복되어 어제 병원에 갔는데,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구요. 처음에는 허피스 고양이 감기 때문에 결막염이 와서 눈도 못떴었거든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정말 데려가기 싫었지만, 작은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했죠. 작은 실천이지만, 이런 실천들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3. 밖의 본문#1

야고보는 결코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철저하게 성경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 라합이 이스라엘의 여리고 공격을 도와주는 이야기를 꺼내들고 있습니다. 구약이 익숙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적합한 이야기 구성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죠.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당시에 뉴욕, 런던, 서울 같은 세계적인 도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도시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라고 하시죠.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그럼에도 아브라함을 자기 고향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땅과 자손과 그리고 세계가 자신을 통해 복을 누리게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되고 그것을 철썩같이 믿습니다. 믿음을 통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김을 받습니다. 

 

바울은 부분을 주목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였기에 그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할례를 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로마서에 등장하는 이신칭의의 중요한 근거입니다(로마서 4). 

 

하지만,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다른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바로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렵사리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저히 말도 안되는 명령에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리고 직접 죽이려고 하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말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은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아라. 니가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니 진정 나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겠다.’(창세기 22:11-12, 의역)

 

아브라함의 여러 실수에도 불구하고 사건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완전히 인정해주십니다. 야고보는 이런 실천과 행동이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22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의롭다하심을 받는 선포와 선포에 걸맞는 삶을 인정받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의롭다하심의 선포를 받습니다. 그러나 선포에 걸맞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합니다. 

 

4. 밖의 분몬#2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어찌보면 수치스런 이야기를 꺼내들었습니다. 바로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이야기였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광야에서 40년간 지내면서 온갖 기적을 경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믿음만으로 그녀가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여리고를 정탐하러 이스라엘 병사 둘을 몰래 숨겨주고 돌아갈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며 결국 난공불낙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졌으며,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면서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였던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보아스의 어머니였으며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여인이 되었습니다(마태복음 1:5). 그리고 따지고 보면 편지를 쓰고 있는 야고보의 직계 조상이기도 했습니다. 기생 라합이 믿음과 행동으로 인류구원의 약속을 이어가는 엄청난 가계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죠. 

 

야고보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믿음의 지적인 측면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라합의 믿음도 지적인 동의나 지식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지적인 동의나 지식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마치 귀신도 구원에 이를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없습니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이쯤 되니까 야고보가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말로만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어리석다 말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자칫하면 그들은 귀신들의 믿음과 동급이 수도 있습니다.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죽은 것이고 죽음은 사단과 귀신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5. 나가며_믿음의 실천이 살아있는 공동체 

여러분, 만약 야고보가 다시 살아나서 우리 공동체를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 같습니까? 야고보가 환생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편지를 쓸까요? 환생은 기독교적 용어는 아니지만, 그냥 상상해 보자는 겁니다. 질문을 심도있게 곰곰이 살펴야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나요? 우리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송죽원의 아이들이었습니다. 교회 옆에 신기한 놀이터가 생겼습니다. 주말이면 정말 놀이 공원 처럼 많은 부모님들이 자신들의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좋은 일이죠. 그런데 송죽원의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왠지 비교될 같아 갑자기 마음이 쓰입니다. 우리 교회 유치부 아동부에는 송죽원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은 우리가 있는 아주 작은 실천이 것입니다. 송죽원을 졸업하는 분들, 보호가 종료되는 분들의 나이는 18세입니다. 정착지원금으로 국가로부터 500만원에서 800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돈만큼 중요한 것이 이들의 갑작스런 자립과 그로부터 오는 자유 그리고 외로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돈, 안정적인 직장, 학업 유무를 성공한 자립의 기준으로 많이 봐요. 이것들이 충족되면 겉으로 보기엔 잘한 자립이겠죠. 하지만 아무리 물리적인 자립에 성공했더라도 아이가 혼자 지내며 외로움을 스스로 견뎌내지 못하면, 상처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이 또한 성공적인 자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물리적인 자립을 잘했을 지라도 아이들이 스스로에게 있는 상처를 잘 헤쳐나갈 수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필요해요.”
-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커뮤니티 ‘케어센터’ 조한나 기획처장/
출처 : https://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348

 

그동안 우리 교회가 송죽원의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유치부 아이들을 많이 섬긴 것으로 압니다. 만약 우리 송청이 송죽원의 보호 종료된 청년들을 재정적이든 정서적이든 도울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 좀더 많은 분들이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송죽원의 아이들을 섬기는 에너지를 쓰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부, 아동부의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섬겨 주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야고보는 말로만 하는 위로 지식으로만 갖고 있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이 말하는 것과 배치되거나 상반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로부터 빨리 풀려나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함께 기도하기]

1. 우리의 믿음이 지식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에 원하시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있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2. 송죽원의 어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마음의 상처들이 회복되고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누리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보호 종료 되는 18살의 청년들이 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충분한 도움 속에서 건강하게 자립할 있도록 기도합시다.  

 

3.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둘이서 잠깐 짝을 지어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바울의이신칭의 야고보의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사이의 부조화를 느껴 적이 있나요? 어떻게 해소할 있을까요? 

 

2. 나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뜻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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