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4. 김혁수 

 

[본문_베드로전서 5:1-11] 

1나는 여러분 가운데 장로로 있는 이들에게, 같은 장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 2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떼를 먹이십시오억지로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3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4그러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변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5젊은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복종하십시오.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6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8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9믿음에 굳게 서서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0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11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아멘.

 

[설교]

0. 들어가며 

- 마지막 편지 

언제나 진실한 편지의 마지막은 마음의 울림이 있습니다. 편지는 만날 없음의 메타포입니다. 멀리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거나, 아님 죽음으로 이별했을 ,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편지의 글자 글자에는 마음과 감정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개의 편지를 읽어봤습니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아, 초등학생을 아들 태호님이 이미 떠나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편지를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이렇게 쓰여있더라구요. 

 

“아버지, 어머니 꿈에 얼굴 한 번 보여주세요. 
슬퍼하느라 애썼다 해주시고 이제는 조금 편안해지시라 말씀해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우리 가족이 시간이 흘러 모두 다시 만날 있는 그날까지 저는 저의 해야 일을 하며 언제나 아버지를 기억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들 태호 드림

 

가족의 슬픔이 여전히 묻어 납니다. 여전히 슬퍼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태호님이 그려집니다. 

 

하나의 편지는 유투버 새벽님의 남자친구의 편지였습니다. 최근 67 구독자 유투브 채널을 운영했던 뷰티크리에이터 새벽님이 혈액암으로 투병하다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여자친구를하늘로 보내면서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너를 만나서 많이 달라졌어. 사람은 고쳐쓰는거 아니라는 말, 틀렸다는 걸 내 스스로를 보면서 깨닫게 됐어. 그렇게 만들어 준 너에게 너무나도 감사하고 고마워. 너에게 배운 마음 주변에도 널리 퍼뜨릴게.

사실 아직까지도 너의 빈자리가 믿겨지지가 않아. 지금도 손만 뻗으면 닿을 있고 고개만 돌려도 너가 웃고 있을 것만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더라. 너라는 사람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비대했기에 그걸 비워내는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거 같아.

혹시 내가 그리움에 지쳐 힘들어 하는 밤에는 한번씩 속에 들러서 안부라도 전해줘. 그래야만 내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견뎌낼 있을거 같아.

이렇게 너를 다급하게 데려간걸 보면 하늘나라에서 급하게 천사자리가 하나 필요했나 보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않고 너를 온전히 드러내며 밝게 지냈으면 좋겠다.”

 

이렇게 편지에는 그리움과 애절함이 묻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편지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자주 편지를 주고 받지 못하기에 통의 편지에 마음과 정성을 담아 기록합니다. 방금 소개했던 그런 편지들처럼 돌아가신 분에게 전하는 편지는 아니지만, 초대교회 현실을 놓고 ,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서, 교회의 지도들을 위해서 붓에 힘을 주어 내려갔습니다. 그런 편지들의 마지막 부분들을 우리가 깊이 살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7월에는 마지막 편지라는 시리즈를 준비해봤습니다. 

 

- 초대교회 지도자

5-6월에는 초대교회 지도자 야고보 사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야고보서를 통해 전세계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며 인내하라고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지도자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죠. 오늘은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마지막에 무엇을 강조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떼를 먹이십시오(1-4)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의 번째는 바로 떼를 먹이라는 권면입니다. 일단 베드로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장로들이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떼를 최선을 다해 먹이고 살리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편지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당 지역들은 지금의 터키북부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지역의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졌으며 교회의 장로들은 교회를 운영함과 동시에 성도들을 양육하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떼를 먹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떼를 먹이라는 명령은 누가 누구에게 것이었죠?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이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기 , 부인하고 욕했던 베드로에게 다가가서 번이나 사랑 고백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때마다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죠. 베드로는 명령을 오랫동안 아니 평생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편지의 마지막 권면을 떼를 먹이라라고 했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정말 성공적인 교육을 했습니다. 베드로를 완전히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사람을 돌보는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어부였던 그를 이제는 양을 돌보는 목자의 소명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가지를 추출해 있는데요. 자발성, 사적 이해 불가, 섬김의 리더십, 목자장 임재 의식, 이렇게 가지입니다. 

 

1) 자발성

먼저, 자발성입니다.

2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억지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진해서 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목자의 삶을 사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억지로 하라고 해서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깨닫고 은혜를 알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다가 기쁜 맘으로 목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쁠까요? 복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일어났으며 하나님께서 나라에 같은 죄인을 불러 주신다는 사실이 기쁜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같은 죄인조차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어 교제할 있게 겁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가치를 추구할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교제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분이 나를 목자로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죠. 이런 과정에서 목자에 대한 부르심을 확인하게 되니 억지로 필요가 없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있습니다. 목자는 억지로 필요가 없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합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 

 

우리 청년부를 섬기는 운영위원분들도 모두 자발적으로 동의해서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 공동체의 섬김은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은혜 받은 대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신 일에 감동 받는 대로, 기쁘게 섬기시면 좋겠습니다. 

 

예배를 위해 많은 섬김이 필요합니다. 영감있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기도가 절실합니다. 

 

2) 사적 이해 개입 불가

목자의 태도 번째, 사적 이해 개입 불가입니다.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경우가 있을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와 관련해서 아주 강력한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아시죠? 예루살렘 교회 초창기에 리더십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여러 명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는 재산의 반만 헌금했으면서도 마치 모든 재산을 바친 것인양 거짓말로 자신들의 공적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속이려고 했는데, 이유는 아마도 교회내 영향력을 키워보려는 의도였던 같습니다. 여튼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됩니다. 베드로 앞에서 말이죠. 베드로는 하나님을 경외할 밖에 없었습니다( 5:11). 

 

목자로 섬기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서는 안됩니다. 과정도 깨끗하고 결과도 깨끗해야 합니다. 자신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람을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인적 네트워크는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데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목에서 많은 목자들이 실수하곤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목자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요 죄입니다. 

 

3) 섬김의 리더십

목자의 번째 태도는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다시 반복합니다. 섬김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합니다. 제자들을 위해 발을 씻기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떠오르게 합니다. 양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섬기지 않으면 양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섬기지 않으면 양은 우리를 이탈하게 되어 있습니다. 길을 잃곤 합니다. 격려의 말로, 선물로, 안부 전화로, 식사로 섬겨야 합니다. 

 

4) 목자장 임재 의식

목자의 번째 태도는 목자장 임재 의식입니다. 이게 정말 중요한데요. 인간 목자는 예수님을 목자로 두는 양입니다. 목자장이 누구시라구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본문에서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는 재림의 때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림의 때만을 기다릴 일이 아닙니다. 목자는 매일, 매주 목자장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목양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께 우리의 삶과 마음과 생각과 정서를 나눠야 합니다. 그분께 목양받지 않는 목자는 양을 먹이기 어렵습니다. 

 

=> 공동체의 장로는 누구? 

양을 먹이는 목자의 가지 태도가 무엇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자발성, 사적 이해 개입 불가, 섬김의 리더십, 목자장 임재 의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묻고 싶습니다. 우리 청년 공동체의 장로는 누구입니까? 우리 교회 전체의 장로님은 담임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분의 장로님과 부교역자분들이 계시죠. 교회 전체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송청만으로 놓고 때는 누구일까요? 물론 제가 목자가 겁니다. 그런데 저만 목자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목자로 부르심을 받는 분이 있습니다. 

 

2.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5-7)

이제 베드로의 당부 번째를 보겠습니다. 번째는 공동체의 장로들에게 부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번째는 젊은이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을 위한 내용입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으라입니다. 옷을 입으라 하니까 겉과 속이 달라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지 옷을 계속 입게 되면 점점 내면도 변화됩니다. 군복을 계속 입으면 군인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신부님들이 입는 로만 카라의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그렇게 행동해야 같은 느낌을 받고 실제로도 행동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겸손의 옷을 입으라는 겸손을 위해 매일 매일 노력하라, 겸손의 이미지로 자신을 덮으라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조금씩 변화되는 자신을 있습니다. 

 

- 상호 순종

처음에 젊은이들게 순종하라는 때문에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핵심 요지는 그게 아닙니다. 서로 순종하라가 본질입니다. 어른이라고 해서 함부로 명령하거나 강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목자는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목자의 태도이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장로님께 순종할 있습니다. 섬김의 리더에게 순종하는 것은 행운이요 축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이 젊은이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 상호 겸손

서로 겸손함으로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적 다이나믹을 고려할 , 참으로 어려운 과제입니다. 공동체는 언제나 힘과 정보와 돈을 가진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돈고 없고, 힘과 정보도 부족한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힘있는 사람은 언제나 가르치고 명령하는 입장에 서게 되고, 힘없는 사람은 반대의 입장에 있게 됩니다. 그러니 서로 겸손하게 순종하라는 말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직적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가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상호 겸손, 상호 순종이 작동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이 주는 불안함 

효율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상호 순종은 세계관적 갈등을 유발합니다. 로마 지배 체제 속에서 주인과 노예의 계급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상호 순종을 가르쳤습니다. 당연히 세상의 가치관과 부딪힙니다. 과연 교회가 살아남을 있을까 불안과 걱정이 몰려 옵니다. 로마의 군대 조직 같이 일사분란하게 명령의 체계 속에서 움직여야 교회가 살아남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이런 불안과 염려에 대해 베드로는 어떻게 말합니까? 

 

7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목자장되시는 예수님,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서로 순종하면서 결정해도 됩니다. 조금 늦게 가도 괜찮습니다. 모두가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겁니다. 몇몇 엘리트들에 의해 너무 빨리 달려가면 교회는 기본적 성품을 잃어버립니다. 교회는 모두의 속도를 배려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3. 견고한 성에 거하십시오(8-11) 

이제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의 번째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제목을 달았습니다. 견고한 성에 거하십시오. 사람들은 8-9절에 무게 중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10절에 무게 중심이 있는 같습니다. 그래서 견고한 성에 거하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실까요. 

 

- 사단의 공격

베드로는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공격할 사람들을 찾아 다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악마를 대적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단의 존재를 가장 강력하게 경험했던 사람이 누군줄 아십니까? 맞습니다. 베드로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가야 한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강하게 꾸짖었던 인물이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8:33) 이건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매번 설교 때마다 때의 일을 말하곤 했을 겁니다. 베드로는 사단이 어떻게 자신을 공격했는지 알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어떻게 물고 늘어지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단이 어떻게 도망갔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대적하는 겁니다. 물러가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 고난

고난과 박해가 찾아오면 개개인의 약점이 더욱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약점은 사단이 공격하기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사단은 사람의 약점을 파고 듭니다. 두려움, 분노, 원망, 과도한 자신감, 외로움, 교만, 자신만 특별하다는 의식, 우월감, 열등감, 중독적 증상이런 심리적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고난과 박해는 각자의 약점을 10 100배로 증폭시킵니다. 여기까지가 8-9절의 내용입니다. 

 

8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9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악마와 맞서 싸우라는 것이 가장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매우 독특한 표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다가올 겁니다. 

 

- In Christ 

그런데 이제 10절을 읽어봅시다. 

10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10절은 너무 평범한 내용이라 주목도가 낮습니다. 차라리 악마와 대적해서 싸우는 것이 긴장도를 높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10절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악마와 싸우러 나갈 생각입니까! 매일 매일 악마와 사단이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건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없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악마를 대적하는 영적 전투를 해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전장터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디로 부르셨나요?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부르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통치가 가득한 그분의 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안에서 우리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여러 고난 속에서 온전케 되고 강건해 지고 튼튼해 지는 겁니다. 혼자 악마와 싸울 없습니다. 혼자 악마를 대적할 없습니다. 그건 상당히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십시오. 안에서 더욱 튼튼해 지십시오. 그리고 어느 순간 찾아오는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순서가 올바릅니다. 

 

=> Jesus castle

예수님 성에 거하십시오. 내가 그분 안에 있는지 아님 나홀로 넓은 들판에서 악마를 찾아 헤메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베드로는 혼자 싸워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밤에 자신이 차고 있는 칼을 꺼내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렇게 열성적으로 싸우려고 했던 그는 그날 새벽에 예수님을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그의 외로운 싸움은 성공했나요? 악마를 제대로 대적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가 회복되고 다시 튼튼한 기초를 놓은 곳은 어디였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이 차려 주시는 아침 밥을 먹을 때였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주께서 아십니다.’

그래 그럼 양을 먹이라 

 

그곳이 바로 예수님 성이었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아침을 먹는 곳이 예수님 성안입니다. 베드로는 깊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 튼튼하게 나가는 겁니다. 그래야 때로 악마를 대적할 있습니다. 

 

4. 나가며 

- 의식주 in Christ

어떻게 하다보니, 오늘은 먹고, 입고, 사는 것에 대해 말하게 되었습니다. 떼를 먹이라, 겸손을 입어라, 예수님 성에서 살아라. 이렇게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다보니, 베드로 전서도 리더 교재로서 적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 지도자가 보내는 마지막 권면매우 감동적고 유용합니다. 야고보와 더불어 베드로를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리더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목자의 가지 태도를 듣습니다. 자발성, 사적이해개입불가, 섬김의 리더십, 목자장 임재 의식, 정말 보물같은 요소들입니다. 게다가  겸손과 상호 순종도 교회 안에서 이뤄져야 태도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안에 살면서 더욱 튼튼해지고 강건해져서 악마를 대적할 있게 됩니다. 그렇게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이겨냅니다. 베드로의 인생 전체가 마지막 권면 안에 담겨 있습니다. 갑자기 편지를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은 여러가지 권면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한꺼번에 지킬 수는 없겠죠. 그런데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리더의 부르심을 듣는 겁니다. 목자로의 부르심을 듣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들이 목자로 자라길 원하십니다. 송청 공동체를 위한, 크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목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부르심을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저를 찾아 주세요. 그리고 목자의 훈련을 받으십시오. 야고보를 통해서도 훈련을 받으시고, 베드로를 통해서도 받으시고, 바울을 통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훈련을 받으세요. 그렇게 성장하는 겁니다. 

 

리더로의 부르심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를 키우는 일에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신앙의 여정이 다르고, 출발점도 속도도 여행지도 다릅니다. 천편일률적으로 모든 분들이 한날 한시에 리더가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리더로의 부르심은 언젠가는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세요.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고 리더로의 부르심, 목자로의 부르심을 소중히 받으십시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소원을 말씀해 주세요. 제게 말씀해 주세요. 피트니스 센터에 가면 개인 pt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PT 하면 되죠. 

 

목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우리를 목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반응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각자의 신앙 여정 속에서 언젠가는 목자가 되길 바라십니다. 혹여 지금 그런 부르심을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 말씀드려 봅시다. 저를 사용해 달라고, 좋은 목자가 되게 달라고 말입니다.  

 

2. 이미 목자로 섬기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선생님으로 섬기시는 , 청년부의 소그룹 리더로 섬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오늘 말씀처럼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섬기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베드로는 목자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중에 가장 중요해 보이는 태도는 무엇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2. 목자로의 부르심(리더로의 부르심) 느껴본 적이 있나요? 언제 우리는 리더로의 부르심을 느끼게 되나요?

2021. 6. 27.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5:7-20] 

7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보십시오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8여러분도 참으십시오마음을 굳게 하십시오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9형제자매 여러분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보십시오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앞에  계십니다.

10형제자매 여러분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 삼으십시오.

11보십시오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주님은 가여워하시는 마음이 넘치고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크십니다.

1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하늘이나 땅이나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다만, “” 해야  경우에는 오직 “라고만 하고, “아니오” 해야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14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그리고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15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 병든 사람을 낫게  것이니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것입니다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  효력을 냅니다.

17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비가 오지 않도록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18다시 기도하니하늘이 비를 내리고땅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19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 가운데서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20 사실을 알아두십시오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G7 정상회의 & J12

최근 G7 정상회의가 있었습니다. 세계 보건위기와 기후 위기 앞에서 서방세계의 리더격인 나라들이 모여 회의를 합니다. 1975년부터 매년 모였던 G7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가 회원국가입니다. 세계적인 군사, 경제 선진국이며, 민주주의 국가들입니다. 모임에 한국이 초대받아 갔는데,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한국의 위상을 있었습니다. 세계 보건 위기 극복과 탄소중립을 위한 미래 산업의 선두 주자로 한국을 그들의 동반자로 여기게 것입니다. 세계적인 위기를 함께 극복하자고 한국에게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스럽습니다. 사실 개발도상국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세계로부터 원조를 받으며살아가는 것이 어찌보면 편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의 리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일에 동의를 하고 전세계 문제에 더욱 민감하게 살펴나가야 합니다. 한국의 뉴스 아니라 전세계 뉴스를 적극적으로 비판적 발전적으로 읽고 듣고 의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세계 리더 나라의 국민이 가져야 태도죠. 위기 속에서 한국은 리더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를 리더로 부르고 있습니다. 특히 고난 속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돕는 리더로 부르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어떻게 우리를 부르는지, J12 모임에 어떻게 부르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언제까지?(7-12)

- 야고보의 당부와 한계 

온갖 내외부의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야고보의 마지막 당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오실 때까지 끝까지 참으십시오

저는 말을 듣는 순간, 소리를 지르고 싶었습니다. !! 언제까지 참으라는 말입니까? 도대체 주님이 언제 오신단 말입니까? 코로나 사망자 수가 391만명이라고 합니다. 이건 공식 통계치이지 연구기관에 따라서는 숫자에 2 이상이라고도 합니다. 기후위기는 점점 우리 주위로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이상 고온 현상과 무자비한 태풍과 폭풍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통제할 없는 자연의 역습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전쟁과 이로 인한 기아와 난민수많은 고통이 지구 상에 존재합니다.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점점 세게 들립니다.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인류가 겪는 고통의 소리가 전달됩니다. !! 언제까지 참으란 말입니까? 

 

이것이 솔직한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말씀을 처음 읽은 수요일부터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 속에 계속 메아리치는 소리는 바로 소리였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마음의 소리를 가라앉히고, 야고보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 농부 

야고보는 농부의 예를 듭니다. 

저의 아버지는 작은 농부셨습니다. 주인이 관리하지 않는 , 거의 주인 없는 땅이나 다름 없는 중턱에 매일 올라가 고랑과 이랑을 파고 물길을 만들고 방울토마토, 고추, 상추, 배추, 가지, 호박,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셨습니다. 마석 아버지 집에 다녀올 때마다 그동안 키우신 채소들을 얼마나 바리바리 주시는지, 결국 이상을 장인장모님께 드리곤 했습니다. 

 

하루는 태풍이 올라와서 그동안 자랐던 온갖 작물들이 망신창이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안따까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울지 않으셨습니다. 다음날 밭에 가셔서 나무가지로 지지대를 세워 넘어졌던 작물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떠내려간 것들도 많았고, 물이 넘어 많아 섞은 것도 있었지만, 살릴 있는 것은 최대한 살려서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하루는 산에서 멧돼지가 내려와서 밭을 망가뜨렸다는 겁니다. 밟고 지나가서 쑥대밭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울지 않으셨습니다. 망가진 것들은 버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자주 겪는 일처럼 익숙하게 열매가 맺히고 먹을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가꾸시고 돌봤습니다. 

 

농부는 기다릴 압니다. 그러나 온라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기다리는 것이 정말 싫습니다. 설교문을 쓰기 위해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컴퓨터가 너무 느린 겁니다. 커서가 멈춰서 몇초간을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습니다. 짜증이 몰려 옵니다. 순간 핸드폰을 집고 다음 뉴스를 검색합니다. 10초의 짧은 시간도 기다리게 하는 컴퓨터가 아주 짜증스럽습니다. 하지만, 땅의 소출, 밭의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들은 기다릴 압니다. 하루 하루 별로 자라는 같지 않은 농작물을 보면서 매일 기다립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농부의 태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농부에게 배우라고 합니다. 

 

- 예언자들 그리고

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어떻게 기다렸는지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받았던 구약의 이사야, 미가, 예레이먀, 에스겔 등의 많은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끝나기 전에 메시아 만나기를 고대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메시아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몇백년이 지난 후에 메시아 예수님이 오셨죠. 

 

참고 견디는 데는 욥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고통을 참고 견뎠습니다. 재신을 잃었습니다. 건강을 잃었습니다. 자녀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도 잃었습니다. 홀로 남겨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회복시킬 것을 소망하면서 참았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에서 인내의 대명사 격인 대표적인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참고 견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언제까지? 

언제까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견디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시련도 이겨내고, 내부의 시험도 통과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최소한 야고보는 대목에서 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도 오지 않으셨거든요. 2천년이 넘도록 오지 않고 계십니다. 이러니 답답합니다. 농부의 마음과 태도도 이해가 되고, 구약의 예언자나 욥의 태도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2천년은 너무 오랜기간이라 뭔가 아리송합니다. 

 

=> 한숨과 소망 

정말 야고보의 말은 소망을 주는 같지만 편으로는 한숨만 나오게 합니다. 도대체 주님의 재림은 언제쯤 일어난단 말이야.. 이런 한숨의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개인에게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나 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개인은 언제든지 죽습니다. 죽음 다음은 그분의 재림이며 심판입니다. 죽음은 통제불가능한 영역입니다. 갑작스럽게 죽든 병에 걸려 천천히 죽든 죽음을 피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아무리 장수마을의 최장수 할머니도 150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그분의 재림의 순간으로 이동시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재림은 개인에게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 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초대 교회 야고보 시절 그리스도인들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기다림의 시간의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100년이 안됩니다. 인생의 기간 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 기다리는 방법_찬양과 기도(13-18)

야고보는 가지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바로 기도와 찬양입니다.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3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기다리다보면 고난 속에서 고통당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야고보는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는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즐겁고 기쁜 순간에는 찬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기본 전제는 하나님을 향한 행동입니다. 기도나 찬양이나 인생의 굴곡에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1) 고난 기도(13)

먼저, 우리는 고난 속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일상의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일들이 이뤄지지 않을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외부적 환경 때문에 내면의 상황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일들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국제 경기 때문에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이것도 고난입니다. 돈이 충분치 결혼을 미루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면 그것도 엄청난 고난입니다. 군대에서 겪는 수많은 수모도, 직장에서 겪는 숱한 어려움도 고난일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런 일상적 고난 아니라 현대사회는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아니라 초림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사역하시다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외부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말이죠. 이게 고난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2) 병든 사람을 위한 기도(14-15) 

둘째,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14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그리고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15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것이니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병든 시기는 언제나 고통스럽습니다. 병자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공동체는 이렇게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병의 원인을 알게 해달라고, 좋은 의사와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게 달라고, 환자의 생활 습관이 바뀌어 병이 온전히 치료될 있게 달라고, 그리고 가능하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경험하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 시절에는 손만대고 기도하면 낫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고, 바울고 그랬습니다. 이적,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죠. 하나님 나라가 땅에 왔음을 확실히 알려주는 광고판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런 이적과 기적이 일어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좀더 다양하게 퍼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좋은 병원, 좋은 의사를 만난다거나 적절한 약을 처방받는다거나 나에게 맞는 치료법을 발견하게 된다거나 등등우리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과정에는 공동체적 기도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는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병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병자에게 효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삶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은 정말 믿음의 기도가 병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까? 때로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습니까? 그럼 기도하게 되고요 기도 부탁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고 있습니까? 그럼 기도 부탁을 받아도 기도하지 않고요, 기도 부탁하지도 않습니다. 이게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3) 죄의 고백을 통한 기도(16) 

셋째, 죄의 고백을 통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15b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것입니다

 

이건 어떻습니까? 진심어린 죄의 고백은 서로를 위한 기도를 낳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런 전통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예수님의 용서를 선포할 있습니다. 그렇게 용서는 더욱 현실이 됩니다. 과도한 죄책감에서 벗어납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사회법 상의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른 영역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서로 기도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그분께 다가가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죄의 고백과 서로를 위한 기도는 용서를 경험하게 줍니다. 

 

4) 의인의 기도(16b-18) 

넷째, 의인들의 기도를 통해 인내합니다. 

 

16b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효력을 냅니다.

17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비가 오지 않도록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18다시 기도하니하늘이 비를 내리고땅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야고보에게 엘리야는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그는 보고받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곳마다 상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인생 자체가 기적과도 같았습니다. 수많은 반대자의 암살 시도를 뚫고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성도들, 의인들의 기도는 베드로를 감옥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님들의 삶을 기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5) 그리고 찬양 

이렇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때때로 즐거움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어떻게 하라구요. 그렇습니다. 찬양하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고 확장되는 이야기를 들을 우리는 기뻐할 있습니다. 기쁨을 우리는 찬양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신실한 선교사님을 찾아 그의 기도 편지를 요청하십시오. 그리고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조금씩 후원해 보십시오. 그의 기도편지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보십시오. 

 

=> 오래 기다리기 위해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기다릴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고, 고난 속에서, 병든 자를 위해, 아픈 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합니다. 때로 기적적으로 일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때마다 찬양합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기다리는 겁니다. 오랫동안 기다릴 있습니다. 

 

3. 언제까지!!(19-20) 

- 진리를 떠나는 사람들 

편지는 이제 끝이 납니다. 야고보는 흔한 인사말도 없이 세계 교인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그의 간절함과 시급함이 묻어납니다. 그는 진리를 떠나 방황하는 형제자매들을 보고 있습니다. 

 

19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 가운데서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20 사실을 알아두십시오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믿음과 실제적인 행동으로 구원의 대열에 함께 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구는 다시 유대교의 덫에 빠져 버렸습니다. 누구는 혼합주의의 마약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누구는 이방의 신들을 다시 섬기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 돌아서게 하는 사람들

야고보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보다 시급한 것은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진리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다시 설득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야고보는 편지 시종일관 이렇게 믿음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 대한 안따까움으로 가득합니다. 때로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면서 돌아오라고 벗어나지 말라고 애타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시험을 이기라고, 시련을 견디라고 말했습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니 구체적인 실천을 하라고 목이 터져라 말했습니다. 공동체를 말로 위협하는 사람들을 경고했습니다. 특히 부자들의 말과 행동을 조심할 것을 지적했죠. 모든 것이 진리로부터 벗어난 사람들,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을 돌이키기 위한 그의 목회적 관심이 녹아 있었던 겁니다. 

 

4. 나가며 

- 리더로의 부르심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달에 걸친 야고보서가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야고보는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를 리더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을 닮은 리더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은 특별히 그의 그런 의도를 매우 강력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에서 떠난 사람들,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분노와 비방을 멈추고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면서 진리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고 죄의 자리에서 돌아오게 도움을 있는 리더의 출현을 야고보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야고보서는 리더 훈련의 최고 교재였습니다. 편지를 읽는 모든 사람들은 야고보의 부르심을 느끼게 됩니다. 리더로의 부르심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우리 청년부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청년들에게 다가가서 진리로 돌아올 것을 사랑의 마음으로 권면하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리더가 되어 주세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리더가 되어 주세요. 

리더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리더가 되어 주세요. 

 

여러분 모두가 리더가 되어 죄에 빠진 사람들을 돌보는 리더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기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다시 얻을 있도록 기도합시다. 의심하는 마음보다 확신에 거할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의심이 더욱 각광받고 비판이 더욱 우대받는 세상에서 확신에 거하고 건강한 확신을 유지할 있도록 기도합시다. 

 

2.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병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나요?    

 

2. 기도와 찬양을 통해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라고 야고보는 추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찬양의 삶을 돌아봅시다. 기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의 정도는 어떠한가요? 찬양할 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마음 속에 있나요? 

2021. 6. 20.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4:1-10] 

4:11형제자매 여러분서로 헐뜯지 마십시오자기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그대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12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분이십니다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13“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들으십시오.

14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5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우리가  것이고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것이다.”

16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그와 같은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17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

5:1부자들은 들으십시오여러분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십시오.

2여러분의 재물은 썩고여러분의 옷들은 좀먹었습니다.

3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녹은 장차 여러분을 고발할 증거가  것이요불과 같이 여러분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여러분은 세상 마지막 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4보십시오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그래서  일꾼들의 아우성소리가 전능하신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5여러분은   위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으며살육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습니다.

6여러분은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지만그는 여러분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설교]
0.
들어가며

지난 쿠팡 이천 물류센터의 화재 속에서 인명을 구조하기 위해 화마 속으로 들어가셨다가 다른 대원들은 내보고 자신은 탈출하지 못하셔서 끝내 돌아가신 김동식 구조대장님의 안따까운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유가족들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 얼간이

코미디 영화를 보다보면 명의 남자들이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웃음을 주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드라마적으로 봐도 명의 주인공으로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1시간 30분으로 이어나기가 쉽지 않죠.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명의 주인공들이 좌충우돌 이야기를 즐겁게 풀어내는 포맷이 그래도 긴장감을 유지시켜 주죠. 인도 코디디 영화 중에 얼간이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4 1절에서 교회내에 있는 싸움과 분쟁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 마음의 열망이 어디로 항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세상을 친구삼아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세상을 섬기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주의로 흐른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롯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할 것을 말씀하셨죠. 이것이 바로 교회에 있는 싸움과 분쟁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울라고 했죠.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권면했습니다(4:9). 

 

그런데 야고보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교회의 분열과 싸움을 일으키는 부류의 사람들을 지목했습니다. 얼간이라는 영화는 코미디이지만, 야고보가 보고 있는 교회내 얼간이는 코미디가 아니라 다큐요 범죄물이었습니다. 도대체 야고보는 어떤 사람들을 얼간이라고 지목하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번째 얼간이_남헌담(4:11-12)

먼저, 번째 얼간이는 남헌담입니다. 남을 헐뜯고 험담을 잘하는 사람들이죠. 11절입니다. 

 

4:11형제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 그대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굳이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서로 비난하고 헐뜯는 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에도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어머니를 대동하여 예수님께 자리 청탁을 하는 장면에서 제자들이 격분하는 모습을 봅니다(마가복음 10:41).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가기 위해 예루살렘을 가는 도중에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사람인지 논쟁이 붙었습니다(마가복음 9:33-35). 베드로인지, 요한인지 아님 다른 제자들인지이게 예수님 제자들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초대교회 형제자매라고 서로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7, 제사장의 기도에서 그렇게 하나될 것을 기도하고 바랬지만, 여전히 초대교회에는 형제자매를 헐뜯고 험담하는 일들이 계속되었던 겁니다. 

 

- 대변동의 초대교회 

야고보는 그냥 넘어갈 없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서 죽이는 일을 하던 바울이 급격하게 개종하더니만 세계를 누비며 은혜의 복음을 설파하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처음부터 마음을 쉽게 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이방인의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죠. 예수님께서 환상 속에서 직접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말이죠.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충돌은 한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기존 사회 계급의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노예 였던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주인이었던 사람을 가르치거나 돌보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적 대변혁이, 사회적 대변화가 교회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신학적, 세계관적 대변혁과 함께 사회적 계층적 대변화가 동시에 진행되면, 한마디로 Chaos 혼란 자체가 것입니다. 속에서는 아주 당연히 비판, 비난, 험담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에는 남헌담 부류의 얼간이들이 많이 생길 있는 상황과 조건이었습니다. 

 

- 율법에 기대다

야고보는 남헌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를 헐뜯는 것은 율법을 헐뜯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일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꾸 이렇게 지적을 하시니 지금 시대에 이분이 설교를 하시면 분명 꼰대라는 소리를 들었을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꼰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은 지적하는 설교를 멈출 같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뭔가 깊은 확신에 있어요. 

 

무엇이냐면, 야고보는 율법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따라서 율법 자체를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확신입니다. 보세요.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야고보는 여전히 율법의 가치를 상당히 높이 두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을 헐뜯지 말아야 이유를 대자면, ‘ 형제자매도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고 사신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게 것입니다. 그게 자연스럽죠. 그런데 야고보는 자연스러운 논리를 쓰지 않고, 갑자기 험담하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적 덕목의 상위 가치로서 율법을 제시하고 있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생각하는 율법의 개념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래도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서 1:25). 

 

야고보는 단순히 구약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완전한 율법, 자유를 주는 율법을 살펴보라고 이미 언급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에 등장하는 율법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세율법+예수님해석입니다. 특히 산상수훈을 통해 새롭게 제시된 율법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강림으로 인해 새롭게 해석된 율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율법인 거죠. 자유를 주는 율법인거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율법이 예수님을 통해 정신이 더욱 밝히 드러나고 성령님을 통해 실천력까지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단순히 죄책감만 주는 율법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완전한 율법이 것이죠. 율법을 심판한다는 겁니다. 누가요? 바로 형제자매를 헐뜯고 비방하고 험담하고 뒷담화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 공적 치리 vs. 험담

공적으로 정당한 치리 과정이 불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필요합니다. 때로 잘잘못을 분명히 가려야 합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의 범죄는 그냥 두어서는 안됩니다.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적인 대화의 자리에서 형제자매들을 증거없이 비방하거나 편을 갈라 헐뜯거나 저주하거나 심판하는 것은 자신이 신적 위치에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번째 얼간이_허망소(4:13-17)

교회 공동체를 망치는 번째 얼간이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허망소입니다. 이들은 헛된 꿈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을 벌겠다는 일념이 강해 보입니다. 계획을 세우고 마치 계획이 드라마틱하게 실현될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는 사람들입니다. 

 

- 부유한 상인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부유한 상인그룹이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무역을 통해 돈을 벌어드린 사람들입니다. 현실감각도 뛰어나고 실천력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전하는 세계관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계획한대로 거다. 그동안도 그렇게 되어 왔다. 당장 여길 떠나 이곳저곳 돌아다녀도 충분히 돈을 있으며, 돈으로 최신의 노트북과 자동차와 집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처럼 자랑도 하고 떠벌리고 설득하려고 합니다. 

 

부동산 가격이 올라 여윳돈이 생겼습니다. 이제 나이들어 느지막이 경기도에 펜션을 지어 펜션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싱가폴의 사모펀드에 수익률이 좋다며 펜션업을 접고 자신의 돈과 자녀들의 , 친척들을 돈을 최대한 많이 모아 투자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들어도 이상한 것이 한달이 지난면 매월 투자원금의 10%씩의 수익금을 통장으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1억을 넣으면, 후부터는 매월 천만원씩 계속 수입을 얻을 있다는 겁니다. 봐도 사기성이 농후했습니다. 결국 사기를 당하게 됩니다. 가진 재산을 날리고, 자녀, 친척들의 돈도 날렸습니다. 

 

- 바람잡이

16절을 보세요. 

16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몇몇 부자 상인들이 형제자매들에게 바람을 넣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계획대로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세속주의의 약을 팔고 있는 겁니다. 그들의 혀로 공동체는 싸움이 일어나고 분란이 잦아들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에 넘어간 사람들의 피해가 곳곳에서 들립니다. 야고보는 더이상 사안을 묵과할 없었습니다. 세속주의에 물들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겸손히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야고보는 허망한 꿈을 좇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의 삶을 살라고 충고합니다. 

15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야고보는 일부 부자 상인들의 허풍과 자랑에 빠져 들어 지금 하나님께서 맡기신 나의 일들을 소홀히 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귀가 얇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좋은 정보에 쉽게 빠져듭니다. 여러분, 주식이든 비트코인이든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투자이든 간에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범위 은행 대출을 받거나 지인에게 돈을 빌려서 투자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너무 떠벌리며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각자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부르심에 따르도록 격려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이것이 야고보의 제안입니다. 

 

- 선한 ?

특히 17절은 우리에게 부담을 줍니다. 

17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사람이 해야 선한 일은 바로 15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주어지는 일들을 신실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무리하게 세상의 가치를 따라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것은 죄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작은 일에 끝까지 충성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믿고 확신하는 일에 끝까지 헌신하길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주변사람들과 대화해가면서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작은 섬김이 하나님 나라를 더욱 굳건하게 세워갈 것입니다. 

 

3. 번째 얼간이_강부자(5:1-6)

이제 교회에 싸움과 분란이 생기는 번째 부류가 등장합니다. 이름은 바로 강부자입니다. 이분들은 정말 교회에 있는 분들인지 아니면 교회 외부에서 교회를 시험들게 하는 사람들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과연 성도라면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상습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헷갈립니다. 무슨 일들을 저지르는지 한번 보십시오. 

 

- 썩고 있는 귀금속

이들은 재물을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금과 은이 녹이 쓸고 있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실제 금과 은이 녹이 쓸겠습니까! 그만큼 강부자씨는 돈을 쓰거나 순환시키지 않고 쌓아놓기만 합니다. 썩어서 버리는 재물도 많습니다.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 큽니다. 최근 강대국들이 백신의 유통기한이 되어가는데도 다른 나라들에게 공급하지 않고 상해서 버리려고 했던 현실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 부자들의 악행

게다가 돈을 모으는 방법을 보세요. 일꾼들의 일당을 가로챕니다. 조폭들이나 하는 짓거리입니다. 일꾼들의 아우성과 그들의 울분에 기도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의 히브리 노예들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강부자씨는 사치와 쾌락의 삶을 살아갑니다. 게다가 아무 잘못이 없는 의인을 죽였습니다. 

 

- 교회 부자 vs. 교회 부자

처음에 야고보는 당시 교회에 있는 부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썼지만, 이렇게 살펴보니까 교회 밖에 있는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 제사장, 사두개인들에게 하는 같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하여 종교 시스템을 유지하였던 종교 권력자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특히 6절을 보면 그들은 의인, 예수님을 죽였고, 예수님은 대항하지 않으셨거든요. 

 

- 심판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야고보는 교회내 부자들의 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바로잡길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의 감동을 받아 교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고 임금을 착취하고 사치과 쾌락에 빠져 결국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울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고 진심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로 판명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마따나 쫓겨나서 슬피 이를 갈며 후회하는 순간이 것입니다. 

 

 

4. 하나됨을 향하여

- 우리 안에 얼간이 깨기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 얼간이를 멀리해야 합니다. 이들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싸움과 갈등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됨을 위해 사람은 진심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울면서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애통해하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혹여라도 우리 마음 속에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의 영향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것입니다. 

 

아마도 강부자의 행습을 따라하는 청년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헌담, 허망소는 우리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혹시 우리 공동체를 위협하는 남헌담과 허망소는 없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지 적용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근거없는 비방과 험담을 멈추자.

문제제기와 근거없는 비방은 다른 것입니다.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적절한 통로를 통해 전달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아름다운 덕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적절한 문제제기가 필요합니다. 문제가 있고 불편한 것이 있는데 무조건 몇몇 개인이 참는 것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운영위원들에게 정중하게 말하십시오. 목사인 제게도 말하십시오. 그러나 이런 적절한 절차가 있는데, 그걸 이용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비난조로 험담하는 것은 삼가십시오. 

 

2) 교회 네트워크를 이용한 피라미드(다단계) 사기에 주의합시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교회들에서는 잊을만하면 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회원을 모집하고 등록비를 모아 수입을 만듭니다. 회원을 많이 모집하면 그만큼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돈을 많이 받게 됩니다. 어디까지가 사기고 어디까지가 참신한 사업 아이템인지 헷갈리는 지점이 있습니다만 일단 피해사례가 생기고 피해자가 다수 발생했다면 조심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특히 최근 암호화폐가 인기가 많아지니까 그곳에서도 이런식의 다단계 사기가 횡행합니다. 사기성이 놓후한 것을 교회에 들여와서는 안됩니다. 

 

청년들끼리 서로 의기투합해서 멋진 사업 아이템으로 사업을 펼쳐나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동업에 있어서도 조심할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서로 간의 공정한 계약서를 미리 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중에 분란이 있는 부분이 무엇이 있는지 철저하게 점검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이익 배분이나 근무 시간 같은 부분에서 서로 명확하게 계약서에 명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5. 나가며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교회를 병들게 하는 얼간이를 주의합시다. 무엇보다 야고보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무진장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싸움과 분열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감춰버립니다. 불의와 부당함 만큼이나 싸움과 분열이 미치는 폐해가 큽니다. 험담과 뒷담화 대신 서로를 존중하고 축복하는 말들이 많아져야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버는 방법이 많다며 사기성이 농후한 말들로 현혹하는 일들은 교회에서 사라져야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경영자, 자산가들은 직원들의 삶의 복지를 위해 애를 써야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부는 자기 자신과 가족들에게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주변의 이웃을 섬기는 일에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투자가 있어야 것입니다. 이렇게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를 멀리하고 공동체를 더욱 하나되게 하는 일에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우리 자신 안에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의 영향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형제자매를 험담하고, 허망한 소망에 마음을 빼앗기고, 부자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마음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겸손하게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드려지길 위해 기도합시다. 찬양, 기도, 말씀 속에서 더욱 우리의 정서와 마음이 표현되고 그분을 향한 사랑이 드러나길 위해 기도합시다. 또한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서로 모이고 하나의 공동체가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야고보는 그들을 지목하고 주의를 주었을까요?    

 

2. 남헌담, 허망소, 강부자가 나와 공동체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우리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무엇을 조심하면 좋을까요? 

 

   

 

 

 

2021. 6. 13.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4:1-10]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6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하고 말합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야고보 의식의 흐름

시련의 하나님의 지혜로 인내하라. 

말씀을 듣고 행하라. 

특히 빈자들을 차별대우하지 말라.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무엇보다 말에 실수가 없도록 조심하라. 

 

이런 일련의 메시지가 어떻게 도출 되었을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메시지를 던졌을까요? 당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 공동체, 사실 공동체들은 그렇게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메가처치들이 즐비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의 가정교회들이 도시마다 형성되어 있었죠. 그런 교회들에게 야고보가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는 기본적으로 회람되든지 아니면 필사본을 가지고 도시마다 전달되었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애를 썼을까요? 

 

저는 힌트가 오늘 본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싸움과 분쟁(1-3)

- 초대 교회 현실 

야고보는 기독 공동체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죠. 예수님을 본받아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사람들을 섬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그렇게 예수의 제자들로 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기독 공동체에는 싸움과 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이며, 성령님이 가장 강하게 역사하던 때의 교회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현실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야고보서의 저술 연대가 대략 40-50년대고 ,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지 10-20 지난 시점의 교회 공동체는 싸움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인 야고보가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 싸웠을까? 

어떤 종류의 싸움과 분쟁이었을까요? 아까 전에 우리는 야고보의 의식의 흐름을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야고보서 전체를 통해, 사회 계층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빈자와 부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었고 이것인 때로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을 겁니다. 또한 신학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도 구원에 있어서 충분하다는 입장과 믿음보다는 선한 행위에 방점이 있다는 구원의 방법론의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혀를 제어할 것을 야고보가 주문했던 것이죠. 이런 종류의 싸움과 분쟁과 갈등이 초대교회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 싸움의 본질 

야고보는 이런 싸움과 분쟁의 본질을 꿰뚫는 아주 인싸이트풀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1-3절을 읽어볼까요?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욕심입니다. 욕심이란 쾌락을 누리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욕심은 십계명의 탐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웃의 재물을 탐하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소유와 권리를 탐하는 마음입니다. 십계명 유일하게 마음의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것이 번째 계명, 탐심입니다. 육심의 욕심이 기독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도들이라고 해서 이런 탐심,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끔찍한 현상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습니다. 단순한 말싸움 정도로 끝나지 않고 실제적인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보고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라고 말씀해주셨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니, 사람들이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간구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간구가 이뤄지지 않을 , 자신의 쾌락과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 그들은 때로 살인도 서슴지 않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까지 들어 주실 의무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육신의 욕심, 자기 쾌락을 위한 기도와 같은 기도조차 무조건 들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2. 하나님께로(4-8) 

-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럼 그런 욕신의 욕심을 제어하고 자신의 쾌락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간구하고 열망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야고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야고보는 싸움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욕심, 자기의 쾌락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분께 집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많이 닮았습니다.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쓰던 단어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간음, 외도, 바람피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 아세라, 바알 같은 신들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실 없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오래된 하나님의 성품을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의 인용구는 정확히 어떤 성경인지는 길이 없습니다. NIV에서는그가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이 강하게 시기한다이렇게 번역했는데,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인간 개개인에게 불어 넣으신 각각의 영과 교제하기 위해 그리워하신다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는 좀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 하나님께로 가까이

그러니 욕심과 쾌락을 절제하고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고 야고보가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께서도 더욱 가까이 오실 겁니다. 죄인들이라도 하나님은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다가서는 사람을 하나님을 보듬어 주십니다. 다만, 주인을 섬기겠다는, 명의 아내, 명의 남편, 명의 애인을 두겠다는 생각과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오늘 야고보는 마음을 품는 , 바람을 피고, 외도를 하는 것을 악마에 비유하는 같습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악마는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겠지만, 곧바로 전략을 쓰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전략을 쓰나요? 마음 전략을 쓰는 겁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네전략입니다. 여러분, 물론 현대 사회는 다원성의 사회며, 취존의 사회입니다. 좋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없느니라”(마태복음 6:24). 세상의 가장 강력한 신이 바로 돈의 , 풍요의 신인데, 돈의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주인으로 두고 섬길 없다는 겁니다. 악마의 마음 전략은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무언가를 동시에 섬길 있다고 꼬득입니다. 온갖 감언이설로 꼬시고, 설득합니다. 

 

- 난점_분리주의? 

사실 지점에서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야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도태되고 사회 부적응자가 되고 삶의 많은 부분에서 제약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갖지 않고 살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모두 속세를 벗어나서 산사람, 자연인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님 수도원을 짓고 우리 만의 격리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나요? 마치 아미쉬 공동체처럼 말입니다. 

 

성경이 그런 수도원적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 보편적 공동체 상으로 두지도 않습니다. 왜냐구요? 초대 교회 공동체들이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여전히 남아 활동했습니다. 에베소, 고린도, 로마, 갈라디아, 데살로니가이런 지역들은 당시 최고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던 도시였습니다. 바울도 도시에 가서 전도했습니다. 그러니 야고보는 단순히 분리주의자의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전제로 하고 말하는 겁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마음을 품게 가능성이 높고, 그러니 마음 전략으로 다가오는 악마, 사단, 귀신을 대적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악마의 교묘한 꾀임과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수단으로서 돈을 벌고, 수단으로서 다른 여러 가지를 좋아합니다. 결코 수단이 목적이 되어 섬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돈과 재능과 에너지는 오로지 하나님께 드릴 예배요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겁니다. 

 

- 세상 속에서 마음 갖기

여러분은 마음을 가져다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마음이 아니라 오롯이 여러분의 재물과 은사와 에너지를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간이 돈이요, 재능이 돈이요, 외모가 돈이요, 건강이 돈이고, 에너지가 돈이요, 웃음이 돈입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됩니다. 자칫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곤 합니다. 그러니 돈을 섬기기 시작하면, 우리의 모든 존재를 교환가치를 높게 쳐주는 시장에 진열하려는 욕망을 갖게 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 재능, 에너지를 아깝게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돈에게 예배합니까? 하나님께 예배합니까? 

 

 

3. 순결을 향해(9-10)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마음을 버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있을까요? 야고보는 이외의 제안을 합니다. 보실까요?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야고보는 순결한 마음, 마음이 되는 데에, 가지를 제안합니다. 

 

- 울라

첫째는 우십시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울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고 욕심과 쾌락을 절제하지 못해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는 공동체를 바라보며, 야고보는 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슬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정서적인 반응입니다. 구약에서 자신의 죄를 인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 옷을 찢고 재를 뿌리고 털썩 주저 앉아 며칠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왕이 그러기고 했고, 선지자들이 그러기도 했죠. 예수님은 옷을 찢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죄로 신음하는 모습에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죠. 야고보는 이런 감정적 반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야고보 자신도 당시 기독 공동체가 서로 싸우고 분열하는 모습, 마음을 품으며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행동했을지 예상이 됩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야고보도 울었을 겁니다. 슬퍼하며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어제 말씀을 준비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아니 싫었습니다. 야고보서를 설교하는 것이 점점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문학 장르가 등장하잖아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묵상하고 상상하고 이야기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즐겁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그래서 좋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줄기차게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진술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무슨 법률 같고 회사의 규정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왠지 그러다 보니 마음이 딱딱해지고, 연구하고 싶지 않고, 말씀을 준비하고 싶지 않고, 자꾸 다른 것에 눈이 돌아가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9 말씀을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야고보가 지금 울고 있구나. 야고보가 몇날 며칠 애통해하며 고통 속에 있구나. 피상적인 웃음과 현실 도피의 즐거움, 기쁨을 버리고 근심과 슬픔으로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저를 깊이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저의 불성실함, 무거운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마음, 말씀에 깊이 천착하지 못하는 모습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꿈에서 저의 죄가 보였습니다. 하나님 보다 다른 것으로 기쁨을 찾으려는 저의 모습이 보였고, 그게 슬펐습니다. 설교자로서 목사로서 깊이 말씀과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저의 모습이 보였고, 그게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애통하는 눈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찬양하다가 혹은 기도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저의 죄와 부족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우리 공동체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소망 때문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것도보다는 저와 공동체의 현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이후로 눈물이 말랐습니다. 온라인 예배는 이상하게 사람의 정서를 터치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정서를 표현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쁨이든 애통이든간에 우리는 찬양을 통해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정적 존재입니다. 감정은 우리 내면 깊은 곳의 갈망과 바램을 드러나게 줍니다. 이게 원활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예배가 이런 감정이 풍부하게 표현되는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낮추라

순결한 마음 마음이 되기 위한 야고보의 번째 제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해지는 겁니다. 스스로 높아졌던 마음을 낮추어 그분께 나아오는 겁니다. 이것은 번째 제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높였던 마음, 높아진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가면들, 위선들, 연기들을 포기하는 겁니다. 거짓된 웃음, 경직된 눈빛, 반응하지 않겠다는 굳은 표정, 깊은 내면의 감정을 들키지 않겠다는 딱딱한 몸짓,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어투와 손사래이런 자신 만의 속에서 살겠다는 의지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겁니다. 그분께 자신의 과오와 실수와 부족함과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그분께 우리의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리고 때로는 무릎을 꿇는 겁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마음이 아닌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고 다시 시작하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왜냐구요, 그분은 우리가 가까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시거든요. 

 

4. 순결한 공동체

- 산상수훈의 초대 교회 적용 버전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초대교회 적용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정말 이상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상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초대교회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현실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분쟁, 약자에 대한 차별, 욕심과 욕망에 치우친 기도들야고보는 이를 치료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야고보가 21세기 한국 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분은 여전히 비슷한 아니 그때보다 심한 기독 공동체를 보며 아연실색하며 눈물로 몇날 며칠을 지냈을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순결한 공동체가 되기를 요청하셨을 겁니다. 마음이 아니라 마음으로 오롯이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공동체가 되길 요구하셨을 겁니다. 자본주의, 다원주의,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돈과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야고보는 오직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 위해 애통하기를 그리고 더욱 겸손해 지기를 우리에게 요청했을 겁니다. 

 

- 송청 예배 적용 버전

저는 부작용이 염려되지만 그래도 좀더 구체적으로 특히 예배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예배 시간을 지킵시다. 시간을 지키는 것은 마음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열망은 시간 사용으로 드러납니다. 

2) 찬양 시간에 우리의 감정을 충분히 드러냅시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찬양과 기도에 드러나야 합니다. 기쁨만이 아니라 때로는 애통함도 표현합시다. 찬양인도자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이 표현되도록 노래로 혹은 멘트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형식에 그치지 않도록 합시다. 최대한 집중해서 나의 마음을 표현합시다. 

3) 설교를 들을 , 적극적으로 리액션합시다. 하나님께 리액션하라는 말입니다. 이해가 안되면 이해가 안된다고, 납득이 되면 납득이 되었다고, 은혜가 있으면 은혜가 있다고, 감동이 있으면 감동이 있다고, 마음이 무감각하다면 무감각하다고그렇게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리액션하는 겁니다. 설교 중간에 해도 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설교를 듣고 나서 함께 기도 , 그때 더욱 집중해서 우리의 리액션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순결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 이런 몇가지 실천 사항은 아주 작은 요소일 겁니다. 그럼에도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될까봐 부작용이 걱정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책감이 아니라 소망으로 전환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그리고 야고보가 전한 순결한 공동체에 대한 비전과 이상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상과 비전을 향해 함께 가자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5. 나가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싸우고 분열되는 초대 교회 현실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나뉘어져서 육신의 욕망과 쾌락에 빠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성도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로 밤잠을 설칩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편지를 씁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세요. 마음을 품지 마세요. 마음을 품게 만드는 악마를 대적하세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세요. 그게 안된다면 나처럼 울면서 애통해 하면서 슬퍼하세요.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야고보의 메시지는 여전히 우리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송청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메시지를 다시 우리 마음에 새기고 음미해서 정말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순결한 공동체가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혹시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충분히 타협하면서 살아갈 있다는 믿음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오직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다짐의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2.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드려지길 위해 기도합시다. 찬양, 기도, 말씀 속에서 더욱 우리의 정서와 마음이 표현되고 그분을 향한 사랑이 드러나길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나요? 때의 심정을 나눠주세요.   

 

2. 예배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요? 마음의 중심을 드리기 위해 나의 예배 생활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떤 부분인가요? 어떻게 변화되길 원하나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