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 10일 금요일

 

여는 기도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16하루는 창녀 두 사람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섰다.

17그 가운데서 한 여자가 나서서 말을 하였다. "임금님께 아룁니다. 저희 두 사람은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을 때에 저 여자도 저와 함께 있었습니다.

18그리고 제가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저 여자도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집 안에는 우리 둘만 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9그런데 저 여자가 잠을 자다가, 그만 잘못하여 자기의 아이를 깔아 뭉개었으므로, 그 아들은 그 날 밤에 죽었습니다.

20그런데 이 종이 깊이 잠든 사이에, 저 여자가 한밤중에 일어나서 아이를 바꾸었습니다. 저의 옆에 누워 있는 저의 아들을 데리고 가서 자기 품에 두고, 자기의 죽은 아들은 저의 품에 뉘어 놓았습니다.

21제가 새벽에 저의 아들에게 젖을 먹이려고 일어나서 보니, 아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아침에 제가 자세히 들여다 보았는데, 그 아이는 제가 낳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22그러자 다른 여자가 대들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아이가 자기의 아들이고, 죽은 아이는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우겼다. 먼저 말을 한 여자도 지지 않고, 살아 있는 아이가 자기 아들이고, 죽은 아이는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맞섰다. 그들은 이렇게 왕 앞에서 다투었다.

23왕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두 여자가 서로, 살아 있는 아이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하고, 죽은 아이를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다.'

24왕은 신하들에게 칼을 가져 오게 하였다. 신하들이 칼을 왕 앞으로 가져 오니,

25왕이 명령을 내렸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쪽은 이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26그러자 살아 있는 그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 올라, 왕에게 애원하였다. "제발, 임금님,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어도 좋으니,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다른 여자는 "어차피, 내 아이도 안 될 테고, 네 아이도 안 될 테니, 차라리 나누어 가지자" 하고 말하였다.

27그 때에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렸다. "살아 있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아이를 양보한 저 여자에게 주어라. 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이다."

28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왕이 재판한 판결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왕이 재판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공정하게 판단한다는 것을 알고, 왕을 두려워하였다.

 

솔로몬은 직접 재판을 합니다(16절). 두 여인이 서로 다투면서 살아있는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 주장합니다(17-22절). 솔로몬은 살아있는 아이를 반으로 나누라 명하고 두 여인의 반응을 살핍니다. 그러고는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지 판결합니다(23-27절). 왕이 재판할 때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왕을 두려워합니다(28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증명하는 재판이었습니다. 이 재판을 통해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솔로몬은 재판을 받기 힘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판을 직접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정의와 평화를 세우며 약한 자들을 돌보는데 사용할 수 있기를 간구합시다.

 

——-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성경은 말한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지혜다. 

왕의 위치를 적극 활용하는 지혜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에 사용되는 지혜다. 

재판과 판단에 유익한 지혜다. 

왕으로서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의 재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센세이션이다. 

정말 왕이 이런 재판까지 관여 했을지 의문이긴 하다. 

모든 요소가 자극적이며 관용 언론적 기능을 갖추고 있다. 

정권 홍보에 이만한 기사가 없다. 

솔로몬의 비서실은 이 기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했을 것이다. 

 

익숙한 본문이다. 

그래서 조금 다르게 본문에 접근하게 되었다. 

과연 아이를 반으로 가르라는 명령을 받은 왕의 신하와 집행관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살아있는 갓난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에 의아함과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잘 못 들은 것은 아닌가?’

‘왕이 정신이 나간 건 아닌가?’ 

등등. 

그럼에도 신하들은 가져온 칼을 들어야 했다. 

왕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엄마가 자기 아이를 포기하는데는 아마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왕이 칼로 죽여라하고 명령을 내리자마자 진짜 엄마가 소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짜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 잠깐의 시간, 

엄마도 엄마지만, 왕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집행관도 죽을 맛이다. 

놀라움 속에서 칼을 집어야 하고, 아이를 칼로 베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과연 그 무명의 집행관은 무슨 마음일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행동에 의아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아주 종종 예수님의 행동과 말이 이상하다 생각했다. 

갑자기 사마리아로 여행 경로를 잡지 않나,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몇개의 바구니에 나눠담더니 제자들 보고 무리들에게 갖다 주라고 하질 않나…

매번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시키신다. 

그 때마다 복잡한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예수님의 지혜가 그들을 항상 능가했기에, 그들은 일단 순종하고 따랐다. 

 

때로 하나님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일을 시키실 때가 있다.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예상 범위를 벗어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상을 따르는 자를 이상주의자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부르심을 따르는 부르심주의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예수님의 부르심, 성령님의 부르심을 따른다. 

이상은 관념이지만, 부르심은 일상이다. 

기독교 이상주의도 이상주의의 일종이다. 

기독교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때로 관념에 과몰입하는 우를 범한다. 

부르심주의자는 매일의 순종을 연습한다. 

자신의 꿈에 의거해 일상을 흩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거해 일상을 순종으로 채워간다. 

그때 부르심주의자는 자신이 하는 일의 결말을 예측하는 일을 잠시 접어 둔다. 

예측하지 않고 따라간다.  

결말은 주님의 그림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모자이크의 작은 조각으로서 자신과 자신의 부르심을 이해한다. 

큰 그림은 멀리서 그분이 그리시고 있다. 

언제 내 길과 다른 누군간의 길이 만날지 모른다. 

그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림의 현단계가 완성되고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 

이것이 부르심주의자들이 기뻐하는 순간이다. 

 

——

저를 하나님 나라로 불러 주신 하나님, 

주님의 지혜로 저를 사용해 주세요. 

앞 날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부르심대로 오늘에 충실하되,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만큼 앞으로 내딛게 도와주세요.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이상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년 09월 09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1솔로몬은, 이집트 왕 바로와 혼인 관계를 맺고,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과 주님의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의 건축을 모두 끝낼 때까지, 그 아내를 다윗 성에 있게 하였다.

2주님께 예배드릴 성전이 그 때까지도 건축되지 않았으므로, 백성은 그 때까지 여러 곳에 있는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다.

3솔로몬은 주님을 사랑하였으며, 자기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따랐으나, 그도 여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

4기브온에 제일 유명한 산당이 있었으므로, 왕은 늘 그 곳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솔로몬이 그 때까지 그 제단에 바친 번제물은, 천 마리가 넘을 것이다. 한 번은, 왕이 그리로 제사를 드리러 갔는데,

5그 날 밤에 기브온에서, 주님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나에게 구하여라" 하셨다.

6솔로몬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이요 나의 아버지인 다윗이, 진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살았다고 해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또 그 큰 은혜로 그를 지켜 주셔서, 오늘과 같이 이렇게 그 보좌에 앉을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7그러나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내가 아직 어린 아이인데도, 나의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주님의 종인 나를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아직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처신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8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곧 그 수를 셀 수도 없고 계산을 할 수도 없을 만큼 큰 백성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9그러므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10주님께서는 솔로몬이 이렇게 청한 것이 마음에 드셨다.

11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스스로를 생각하여 오래 사는 것이나 부유한 것이나 원수갚는 것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재판하는 데에, 듣고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는 능력을 요구하였으므로,

12이제 나는 네 말대로,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준다. 너와 같은 사람이 너보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없을 것이다.

13나는 또한, 네가 달라고 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도 모두 너에게 주겠다. 네 일생 동안, 왕 가운데서 너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14그리고 네 아버지 다윗이 한 것과 같이, 네가 나의 길을 걸으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네가 오래 살도록 해주겠다."

15솔로몬이 깨어나서 보니, 꿈이었다. 그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주님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모든 신하에게 잔치도 베풀어 주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3, 15절). 이 솔로몬에게 여호와께서 임하셔서 무엇을 받를 원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기를, 이를 통해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4-10절). 여호와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화, 오래 사는 축복까지 주십니다(11-15절).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종으로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장수나 부유, 원수 갚음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고 있습니까? 나는 최근 어떤 기도제목으로 기도하고 있나요? 주님의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며 사람들을 섬기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

어찌보면 솔로몬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 오늘 본문일 수 있겠다. 

그의 왕권 초기,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다. 

조금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하나님께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그것이 천 마리가 넘는 번제물을 기브온 산당에서 드린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번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기브온에 제단에 가서 천마리의 번제물을 드린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불안함, 인간 왕권의 취약함을 인식하고 있었던 솔로몬은 이제 의지할 데는 하나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솔로몬이 왕이 된지 삼 년째 되던 해에 시므이를 죽이고, 왕권 강화에 성공한 솔로몬은 아마도 그 때까지 계속해서 기브온에 있는 산당에서 번제물을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기간이 얼마 동안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의 노력만은 알아줘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번제물로 드러난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리라. 

말과 행동이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랑하면 자꾸 생각하게 되고, 따라다니게 되고, 만나게 된다. 

 

나에게 하나님 사랑은 어떻게 표출, 표현되고 있는지 묻게 된다. 

수많은 기독교적 활동 말고, 나만의 하나님 사랑의 표현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한 길 가는 인생… 

갑자기 떠오르는 문구다.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사랑 표현은 말이다. 

나에겐 내가 주신 이 길을 오랫동안 한 길로 추구해 왔다. 

중3부터 지금까지, 전임 사역자의 길을 걷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한 길을 걸어왔다. 

나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보여준 사랑과 겸손의 표현에 극적으로 응답하신다. 

꿈이다. 

꿈에서 솔로몬의 소원을 물으신다. 

이런 경우가 많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의 상황을 이미 아시고 명령을 내리시거나, 비전을 보여주시거나, 책망을 하시는 경우는 구약 성경에 참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꿈에 오셔서 기도자의 소원을 물으시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천 번 동안 번제물을 드리면서 솔로몬은 계속 자신의 소원을 아뢰었을 수도 있다. 

매번 재판에 시달리면서, 더욱 지혜로운 판결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도니야, 아비아달, 요압, 시므이의 사건을 접하면서 선악 간의 판결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했었던 내용일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 꿈에 나타나 솔로몬에게 물으신다. 

솔로몬의 대답이 하나님 마음에 흡족했다.

 

6솔로몬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이요 나의 아버지인 다윗이, 진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살았다고 해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또 그 큰 은혜로 그를 지켜 주셔서, 오늘과 같이 이렇게 그 보좌에 앉을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7그러나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내가 아직 어린 아이인데도, 나의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주님의 종인 나를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아직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처신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8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곧 그 수를 셀 수도 없고 계산을 할 수도 없을 만큼 큰 백성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9그러므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겸손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도록 도와달라는 간청이었다. 

젊은 왕, 통치자로서 적절한 대답이었다.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하나님의 몫이다. 

그러니 선악을 제대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아담은 자기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통치에 필요한 선악의 분별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 

참 좋은 자세다. 

하나님 사랑, 그리고 세상 통치에 필요한 지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자세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자세다. 

하나님 사랑, 세상 통치에 필요한 지혜. 

 

솔로몬의 최전성기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이런 그의 모습이 끝까지 갔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위해 애굽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안좋은 징조다. 

왕권 강화의 집착이 결국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뛰어넘고 만다.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오늘은 솔로몬을 있는 그대로 칭찬하고 싶다. 

하나님 사랑과 지혜에 대한 추구에 대해 높게 평가한다. 

이점은 배우고 싶다. 

예수님 모습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끝까지 이런 모습을 유지하기를 기도한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긴장되고 부담되는 일들이 여럿있다. 

주님의 은혜와 지혜로 술술 풀리길 기도한다. 

 

——

주님, 

오늘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이 드러나게 해 주세요.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주님의 지혜를 부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09월 08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36그 뒤에 왕은 사람을 보내어서, 시므이를 불러다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예루살렘에다가 당신이 살 집을 짓고, 거기에서만 살도록 하시오. 다른 어느 곳으로든지, 한 발짝도 나가서는 안 되오.

37바깥으로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당신은 반드시 죽을 것이오. 당신이 죽는 것은 바로 당신 죄 때문임을 명심하시오."

38그러자 시므이는 "임금님께서 하신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임금님의 종은 그대로 이행할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하고,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거기에서 지냈다.

39그로부터 거의 세 해가 지났을 무렵에, 시므이의 종들 가운데서 두 사람이 가드 왕 마아가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도망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시므이에게, 그 종들이 가드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40그래서 시므이는 나귀에 안장을 얹고, 자기의 종들을 찾아 오려고 가드에 있는 아기스에게로 갔다. 시므이가 직접 내려가, 가드에서 자기 종들을 데리고 왔다.

41시므이가 이와 같이, 예루살렘에서 가드로 내려갔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솔로몬에게 전해지니,

42왕은 사람을 보내어서, 시므이를 불러다 놓고 문책하였다. "내가 당신에게, 주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고, 당신에게 경고하기를, 당신이 바깥으로 나가서 어느 곳이든지 가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당신도 나에게 좋다고 하였고, 내 말에 순종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43그런데 어찌하여, 주님께 맹세한 것과, 내가 당신에게 명령한 것을, 당신은 지키지 않았소?"

44왕은 계속하여 시므이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당신이 나의 아버지 다윗 왕에게 저지른 그 모든 일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이 저지른 일을 당신에게 갚으실 것이오.

45그러나 나 솔로몬 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보좌는 주님 앞에서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오."

46왕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령하니, 그가 바깥으로 나가서, 시므이를 쳐죽였다. 솔로몬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예루살렘에서만 거한다면 생명을 살려주는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내립니다(36-38절). 그러나 3년 후 시므이는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예루살렘 밖을 나갑니다(3940절). 그가 약속을 어기자 솔로몬은 다윗 왕에게 했던 시므이의 행동을 언급하면서 처벌합니다(41-46절).

 

솔로몬은 아비아달과 요압에 이어서 시므이를 처벌함으로써 왕권을 견고하게 세워나갑니다. 솔로몬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서 견고하게 세우려 합니다. 솔로몬이 왕권을 확립하며, 나라를 세워가는 과정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다윗 왕의 유언을 뒤를 이은 솔로몬이 자신의 지혜대로 이행하고 있다. 

제사장 아비아달은 귀향을 보내고, 요압은 제단 뿔 앞에서 살해한다. 

시므이는 압살롬의 반란 때, 다윗을 저주하며 욕했던 인물이다. 

비록 그가 다윗의 귀환 때, 용서를 구했을지는 몰라도 그의 저주에 대한 기억은 다윗 말년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유언에까지 남겼던 것이다.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님으로 갈 때에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으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왕상 2:8-9) 

 

다윗의 마지막 유언을 받들었던 솔로몬은 시므이와 약속을 한다. 

‘예루살렘에서 떠나지 말라. 만약에 떠나게 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엄중한 왕의 명령이 내려진다. 

 

삼 년 동안 시므이는 왕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게 된다. 

그러나 그의 종들이 아기스로 도망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 사달이 난다. 

도망친 종들을 데려온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시므이는 그 일을 해 내고 만다. 

사실 시므이는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도망친 노예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무력과 재력을 겸비해야 했다. 

시므이의 집안은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력한 집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솔로몬은 시므이의 약점을 잡고 그를 죽이게 된다. 

원래 가야할 길이었다. 정해진 일이었다. 솔로몬은 시므이를 그냥 편안하게 죽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솔로몬은 이 모든 일이 다윗 왕조의 영원한 통치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45그러나 나 솔로몬 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보좌는 주님 앞에서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오."

 

솔로몬 자신의 왕권 강화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고 생각했다. 

그 일을 위해 반대파들은 완전히 숙청하게 된 것이다. 

숙청의 정당성은 하나님 언약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도출했다. 

그렇게 솔로몬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성경의 저자는 미묘한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솔로몬의 왕권 강화를 인정하는 눈치다. 

왕권 강화의 노력을 칭찬하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깊이 살펴보면, 과연 솔로몬의 지혜가 진정한 지혜인지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다윗은 솔로몬을 지혜의 사람으로 보고 있다. 

자기 지혜로 사건을 해결할 사람으로 보고 있다. 

어느새 선지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나단 선지자는 권력 장악과 점진적인 숙청 과정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아도니야를 죽이고, 아비아달을 귀향 보내고, 요압을 죽이고, 시므이를 죽이는 일련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개입은 어디에 있는가? 

솔로몬이 왕의 유언을 실행하는 것은 알겠는데, 과연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다윗의 보좌는 주님 앞에서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라는 솔로몬의 확신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다. 

그 언약은 미래에 달성될 것이다. 영원토록 견고해질 다윗의 왕권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된다. 

인간 왕으로서는 저 약속을 달성할 수 없다. 

솔로몬이 아무리 왕권을 강화해도, 그의 인간적인 노력은 그 스스로를 교만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가 다윗 왕궁의 미래를 걱정해서 최대한 강력한 왕권과 부국 양병을 실천한다고 해도, 결국 후대의 왕들에 의해 나라가 두 조각이 나고,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만다. 

스스로 지혜있다 생각한 사람의 결말이다. 

결코 교만한 자의 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수 없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므로, 겸손하게 그분의 뜻과 명령에 순종할 뿐이다.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현실적으로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에 십분 동의한다. 

다윗 왕이 겪었던 수많은 수모를 직간접적으로 함께 겪었던 장본인(아들)으로서 다윗 왕보다 더욱 결단력 있고 지혜롭게 통치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시는 왕이 수모를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랬을 것이다. 

제대로된 왕국을 건설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부 성공했다. 

그러나 한 때 뿐이었다. 

곧 지나간다. 

이것이 인간의 조직이요. 인간의 성과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권력은 십 년을 못가고 활짝 핀 꽃도 열흘을 가지 못한다. 

 

지금의 모든 노력이 영원에 이르리라는 것은 헛된 망상이다. 

그저 부르신 그 분의 뜻에 따라 발 맞춰 가면 되는 일이다. 

지혜있다하는 자들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 노력을 ‘의미없다, 불필요하다’ 등으로 무시하려는 말이 아니다. 

발버둥의 끝을 보장받는다 생각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한다. 

아니 성과가 있어 업적이 쌓인다고 한들, 그것이 백년 천년 가는 일이 아니다. 

영원에 기대어 이상을 꿈꾸는 것은 과도한 욕심이다. 

한 가지만 뺴고 말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이상은 열외다. 

그것만이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과도한 욕망으로 영혼과 정서를 망가뜨리지 말자. 

그저 부르심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 시키신 그 만큼, 충성스럽게 일하다 가면 된다. 

혹시 아나, 나의 노력의 일부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흡수되어 그 나라에서도 명예롭게 빛날지… 

그건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일이다. 

 


인간의 모든 노력을 아시는 하나님, 

사람의 욕망과 그 욕망의 결과도 오랫동안 보아오신 하나님,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하게 해 주세요. 

몇 가지 아이디어로 마치 영원한 업적을 이룰 것처럼 과몰입하는 저를 봅니다. 

겸손하게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감당하게 해 주세요. 

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게 해 주시되, 

과도한 기대와 열정으로 폭주하지 않게 해 주세요. 

겸손히 주님과 보조를 맞추고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영원한 지혜에 튜닝하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오늘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저의 후원자, 교회 청년들, 아벱 동역자들, 특히 신입간사들에게 주님의 돌보심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아픈 자들을 위로하시고, 오늘 그들의 마음에 찾아가셔서 위로와 평안을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09월 07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6솔로몬 왕은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제사장께서는 상속받은 땅 아나돗으로 가시오. 제사장께서는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이지만, 나의 아버지 다윗 앞에서 제사장으로서 주 하나님의 법궤를 메었고, 또 나의 아버지께서 고통을 받으실 때에 그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오늘은 내가 제사장을 죽이지는 않겠소."

27솔로몬은 아비아달을 주님의 제사장 직에서 파면하여 내쫓았다. 이렇게 하여서, 주님께서는 실로에 있는 엘리의 가문을 두고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28이런 소문이 요압에게 들렸다. 비록 그는 압살롬의 편을 들지는 않았으나, 아도니야의 편을 들었으므로, 주님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았다.

29요압이 이렇게 주님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곁에 피하여 있다는 사실이, 솔로몬 왕에게 전해지니, 솔로몬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면서 "가서, 그를 쳐죽여라!" 하였다.

30브나야가 주님의 장막에 들어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어명이오. 바깥으로 나오시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못 나가겠소. 차라리 나는 여기에서 죽겠소." 브나야가 왕에게 돌아가서, 요압이 한 말을 전하니,

31왕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 그를 쳐서 죽인 뒤에 묻어라. 그리하면 요압이 흘린 죄 없는 사람의 피를, 나와 나의 가문에서 지울 수 있을 것이다.

32주님께서, 요압이 흘린 그 피를 그에게 돌리실 것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 다윗께서 모르시는 사이에, 자기보다 더 의롭고 나은 두 사람, 곧 넬의 아들인 이스라엘 군사령관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인 유다의 군사령관 아마사를, 칼로 죽인 사람이다.

33그들의 피는 영원히 요압과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왕실과 그의 왕좌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34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올라가서, 그를 쳐죽였다. 요압은 광야에 있는 그의 땅에 매장되었다.

35왕은 요압 대신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군사령관으로 삼고, 아비아달의 자리에는 사독 제사장을 임명하였다.

 

아비아달은 반역하였지만 제사장이며 다윗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솔로몬은 그를 죽이지 않고 파면하여 고향으로 보냅니다. 이로써 엘리 가문을 두고 하신 무명의 선지자의 말씀(삼상 2:27~36 참조)이 드디어 이루어집니다(26-27절). 또 다른 반역자 요압은 제단의 뿔을 잡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했지만, 의로운 사람들을 죽인 것의 죄를 물어 죽임당합니다(28-34절). 솔로몬은 군사령관과 제사장을 새롭게 임명합니다(35절).

 

솔로몬은 재빨리 반역자들에 대한 처분을 내립니다. 아버지 다윗의 유언을 따라 요압을 처분하며, 다윗 왕실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있을 것이라 선언합니다(33절). 아비아달과 요압은 그 행실에 대한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

솔로몬의 형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자들이 축출되고 있다. 

왕권은 솔로몬에게 있으며, 아도니야는 어리석게도 욕심을 부리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다윗의 마지막 몸종이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맞게 해 달라고 요청하다가 솔로몬의 분노를 샀다. 

아도니야가 죽자 그의 라인이었던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사령관 요압도 징계를 받고 귀향을 가거나 죽임을 당한다. 

인간 세계의 권력은 대체로 무자비하다. 

혈연이라도 왕의 권력에 위배되는 자들은 숙청되기 마련이다. 

이런 현실이 갑자기 슬퍼진다. 

권력이 집중되면 어쩔 수 없이 인간성이 말살된다. 

최고 권력자에게 무한 권력이 주어지면 주변 사람들은 파리 목숨이다. 

왕의 심기에 의해 생명이 들고나간다. 

다윗의 왕조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거해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리는 온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용서와 회복과 포용과 환대가 있는 하나님 나라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왕정국가의 모순이 부각된다. 

물론 다른 나라에 비하면 조금 나은 구석이 있긴 하다. 

율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간청은 나름 훌륭한 기도였다. 

지혜롭게 재판하고 판견하는 에피소드는 그것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온전한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솔로몬 시대 당시의 다른 민족들의 왕국과는 대조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우리의 기준에 못 미친다. 

솔로몬도 어쩔 수 없이 정적을 죄다 숙청한다. 

이유야 어떻든 왕권 강화를 위한 현실적 대처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왕국을 안정화시키며 자칫 다시 찾아 올지 모르는 반역과 내전을 미리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나도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지지하지만, 속은 쓰리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함과 온전함에 눈을 돌린다. 

 

 

32주님께서, 요압이 흘린 그 피를 그에게 돌리실 것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 다윗께서 모르시는 사이에, 자기보다 더 의롭고 나은 두 사람, 곧 넬의 아들인 이스라엘 군사령관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인 유다의 군사령관 아마사를, 칼로 죽인 사람이다.

 

솔로몬의 이런 평가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과연 요압보다 아브넬과 아마사가 더 의로웠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솔직히 거기서 거기다. 

요압, 아브넬, 아마사… 모두 공과가 있다.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왕상 2:5-6절)을 받들어 요압에게 더욱 냉혹하다. 

제단 뿔을 잡아 도움을 요청함에도 솔로몬은 요압을 죽였다. 

요압이 과실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의 공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다윗의 편에서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했던 장군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불명예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럴바에야 전장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명예롭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에 이끌려 결정한다. 

오랜시간 요압은 요압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사람들을 죽여왔다. 

아마도 다윗을 위한 일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는 있었겠지만, 내적 동기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요압이 자각했든 못했든 자신 안에 있는 정치적 욕망이 강하게 작동했다. 

그 결과는 불명예스런 죽음이었다. 

 

예수님이 그리셨던 하나님 나라와 비교, 대조해 본다.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은 그에 한참 못미친다. 

솔로몬의 왕권 강화는 어떻게 보면 최종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때 일어날 사단과의 전투에 비견될 수도 있겠다. 

조금 과도한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억지로 의미 부여를 할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솔로몬이 만드는 왕국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와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 더욱 그립다. 

그분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다시 꿈꾸게 된다. 

 

기독공동체는 이상을 꿈꾼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모두가 화목하고 용서하는 아름답고 순전한 공동체를 상상한다. 

하지만 현실은 쪼잔한 문제로 싸우고, 감정이 상하고, 토라지고, 뒷담화하고, 욕하고 배신한다. 

그래서 이상을 꿈꾸지 말란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현실을 인정한다. 그 현실을 항구로 두고 이상을 향해 노를 젓는다. 

아벱, 송청 모든 공간에 이상을 향한 추구가 끊이지 않길 소망한다. 

 

——

꿈을 주시는 하나님, 

현실은 무시무시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폭력이 있고, 암투가 있고, 살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꿈은 배려, 포용, 용서, 화해, 평화가 있습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왕도 하나님 나라의 꿈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보여준 용기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고 동료를 살해하고 혈연을 몰살시켰습니다. 

주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인간의 죄악과 잔혹함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꿈을 주시는 예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어 주시고 그것을 위해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오늘도 분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저에게 성령님의 은사로 채워주세요. 

힘과 지혜가 가득하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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