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03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15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주석

13절. 육체에 대한 경고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가 윤리적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우리는 항상 특정 존재로부터 자유롭지만 동시에 특정 존재에게 예속되어 있다. “서로 종노릇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한계를 극적으로 역설한다. 공동체 안의 종살이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상호 관계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백번 맞는 말씀이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맘대로 살라고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은 내 욕망대로 살라고 방치한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새로운 관계로 부르신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가져온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이 율법의 요약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율법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았다. 

예수님은 당연히 이 진리를 알았고, 그래서 이 진리를 통해 율법을 재해석했고, 급기야는 자신의 생명을 주는 이유도 이 진리의 실천임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을 사랑하시기에 그분께 순종했고, 이웃을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으셨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순종과 희생을 멀리 두지 않는다. 

 

그런데 좀전까지 할례주의자들과 싸우던 바울의 모습은 갑자기 사라졌다. 

할례주의자들을 대적하고, 그들에게 심지어는 “그 지체라도 잘라 버려라”라고 말했던 바울이 갑자기 사랑으로 섬기라고 하고 있다. 

좀전의 감정선과 사뭇 다른 흐름이 느껴진다. 

편지를 쓰다가 잠시 쉬었던 것일까? 

진리에 대한 불타오르는 열정 이후에 사랑에 대한 광활한 전망이 눈에 보였던 걸까? 

자유라는 단어로 연결되어 논리적 확장이 일어난 걸까? 

할례주의자들은 부자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 그러나 자유란 방임이 아님… 이런 논리로 이어가다보니 서로 섬김이라는 주제로 들어왔다고 봐야 하나? 

논리는 그렇다고 해도, 감정은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듯 싶다. 

쉽게 적응이 안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바울은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라고 하면서, 왜 할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강경하게 비판했는가?”

이렇게 답할 수는 있다. 

진리를 훼손하여 자신 뿐 아니라 타인들을 억압하고 죄로 다시 빠져들게 만드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 경고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행위가 사랑의 섬김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다시 죄의 부자유함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고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기에 그토록 강경하게 진리를 수호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은 무조건적인 허용이 아니다. 

섬김은 타인이 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섬김은 진리를 기반으로 적절한 한계지음이 없이는 도리어 타인과 공동체에 해가 되고, 관계를 파괴한다. 

사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시한 이유도 그러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진리에 기반한, 시대적 적절성을 확보한 율법을 주셨다. 

진리를 기반으로 한 적절한 한계지음이 바로 율법이었다. 

사랑과 섬김의 표현이었다. 

 

나는 가족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하고, 나와 관련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때로 그들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려는 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은 사랑과 섬김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그들을 망치는 길이며, 공동체를 해치는 길이다. 

적절한 한계를 지어주어야 한다. 

그 적절한 한계를 진리(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를 기반으로, 우리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여 잘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딸이 남친과의 혼전 동거를 허락해 달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사랑은 ‘보편적 진리’와 ‘시대적/상황적 문화’ 이 둘 사이의 상호 관계를 연구하라고 촉구한다. 

사랑은 어떤 면에서 분별력이다. 

 

[오늘의 기도]

우주의 모든 진리를 포함하시는 하나님, 

사랑이 어렵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무조건적인 내어줌이 진정한 사랑인지 점점 헷갈립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합니다. 

분별력 없는 희생으로는 참 사랑을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지혜로 분별하게 하소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 진리를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도 알게 하소서. 

아는 것을 넘어 실천하게 하시고, 그 결과로 희생과 섬김이 일어나게 하소서.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무턱대고 지지하는 일이 없도록, 

더욱 예리한 분석과 더욱 종합적인 분별력을 갖추게 도우소서. 

그리고 때가 되면 머리가 아니라 손과 발로 섬기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저의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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