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 06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8 삼 년 뒤에 나는 게바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나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는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다만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그가 전에 없애버리려고 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 하는 소문을 들을 따름이었습니다.

24 그래서 그들은 나를 두고 하나님께 줄곧 영광을 돌렸습니다.

 

주석

18-19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가진 회담을 전하는 내용에서도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결국 갔다고 인정하지만, 이런 양보마저 게바와 야고보 두 사도만 거명함으로써 그 의미가 축소된다(IVP 성경비평주석).

 

18-19절. 바울은 회심 후 어떤 사람들과도 의논하지 않고 아라비아에 가서 3년을 보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밑에서 어떤 기간 동안 가르침을 받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갈라디아서는 참 흥미로운 본문이다. 

바울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반대자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반대자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들, 그러니까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람들보다는 낮은 수준과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이 펼치는 이방인 선교에 대해 무가치하거나 혹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또한 바울이 현재 힘주어 주장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적 진술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는, 바울 개인의 사상이나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자신에게 전달하신 것이라 논박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분명하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아라비아(나바테아 왕국)에서 3년의 시간을 보냈다. 

어떤 학자들은 이곳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신학적 준비를 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선교 활동을 했다고도 한다. 

분리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 3년의 시간은 바울에게 귀중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신학을 재정립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3년간 예수님의 제자들을 따로 보지 않고 스스로 예수님 중심의 신학을 정립했다. 

그리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를 만났다. 

얼마나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바울을 본다. 

보름 즉 15일을 게바(베드로)와 지낸다. 

사실 사도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박해했던 사울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속임수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핵심 제자들을 깡그리 잡기 위한 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아마도 그 기간이 3년이나 걸렸을 것이다. 

회심했다고 주장하는 사울을 금방 만나지 않았던 당시 사도들의 결정은 정당했다. 

검증이 필요했다. 

3년이 지나서도,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 둘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외에는 만나지 못했다. 

다들 선교 활동에 바빴기도 했겠지만, 모든 사도들이 사울을 만나는 것은 위험 부담이 그만큼 컸던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의 자기 변호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바울의 신학과 선교적 활동은 사도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만난 예수님이 주신 소명이었다. 

그동안 바울이 펼쳤던 이방인의 선교는 사도들이 명령했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특권이나 책무였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물론 아무리 자신의 신학과 선교 활동의 독특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다른 사도들의 권위를 침범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그 사도들에 의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사도들에 의해 전해지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듣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기존 신학을 재점검할 수 있었다. 

바울은 물론 예수님께 직접 받은 계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백지 상태에서 받은 것은 아니란 말이다. 

 

예루살렘에서 나와 바울은 자신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향했다. 

그리고 유대 지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울이 바울로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음에 크게 기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들은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시고, 생각을 바꾸시고, 적대자가 옹호자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보았던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바울은 배신자요 변심자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바울은 잃어버린 양이었고, 새로 얻은 둘째 아들이었다. 

처음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는 놀라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바울을 통해 유대, 사마리아 지역을 넘어 지중해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그리스도 복음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찾아온 복음의 역사를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훌륭한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잃어버리기 전에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 

신앙의 자서전을 쓰자. 

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자. 

나를 변화시키시고, 이끄셨던 그분에 대해 더 많이 기록하고, 알리자. 

큰 변화가 없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 삶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정리하면 되는 일이다. 

언제가 시간을 내어 그 이야기를 적어 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의 기도]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켜 주신 예수님, 

가난한 집의 소심한 저를 하나님 나라의 일꾼 삼아 주신 예수님, 

주님의 일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것 투성이였지만, 그래도 주님께서는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계속 기억하게 하소서. 

그 선물을 끝까지 기억하도록 계속 기록하고, 공유하고, 전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5월 19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 있는 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5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6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주석

디베료 황제, 헤롯, 빌립(1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무자비한 디베료가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제국 동부에서 이미 신으로 숭배되고 있었다. 헤롯 대왕의 두 아들 헤롯 안티파스와 빌립은 로마의 묵인 하에 나라의 북쪽 지역을 상당히 위태롭게 통치했다. 하지만 로마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남쪽 지역은 직접 관할했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헤롯의 아들들을 진정한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회개의 세례(3절)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낡은 언약을 새롭게 하여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새로운 자유로 이끌 운동이 시작되기를 기대했다. 요단 강물에 잠기는 세례는 이러한 새 시대의 강력한 표시였다.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예언자들은 말했다. 즉 ‘회개’다(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주님의 길을 예비함(4절) 요한은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이교도를 위해 만든 의식을 따르라고 요청한다. 그는 죄악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준비시키는 임무를 맡은 예언자적 비판자였다(IVP 성경비평주석).

 

묵상

이스라엘이 로마의 통치 아래 고통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내립니다(1-2절). 요한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3절). 그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말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돌아가실 길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이교도처럼 세례를 받아야 할 만큼 국가적, 도덕적 곤경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4-6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신음을 듣고 그들을 출애굽 시키셨던 하나님은 로마의 통치 아래서 새로운 출애굽을 갈망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세례 요한을 세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위해서는 먼저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종살이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오늘날 곤경에 빠져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나는 무엇에서 돌아서야 하겠습니까?

 

[오늘의 묵상]

회개에 대한 선포는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과 베드로와 사도들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였다. 

마음을 돌이키고 몸을 돌이켜야 한다. 

회심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회개는 마음에서 시작해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진정성 있는 회개는 순간적인 방향전환이 아니라, 지속적인 한 길 가기다. 

한 번의 결단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자꾸 뒤를 돌아보려는 우리의 성향과 싸워야 한다. 

광야의 히브리 노예들처럼, 롯의 아내처럼 우리는 계속 뒤돌아본다. 

회개의 결정적 순간은 일시적일지 모르지만, 회개의 최종 결론은 인고의 열매로 드러난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 온 몸을 씻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나 수족은 매일 씻어야 한다. 

삶의 리듬이 무너졌는가? 다시 돌이키라.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겼는가? 다시 마음을 씻으라. 

오직 마음을 예수님께 두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일에 두라. 

 

[오늘의 기도]

주님, 

제 마음을 다시 주님께로 돌립니다. 

흐뜨러진 마음을 주님의 마음과 눈과 손으로 향합니다.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를 듣습니다. 

예수님의 회개 선포를 듣습니다. 

베드로의 회개 선포를 듣습니다. 

한 번 들은 것으로 끝내지 않겠습니다. 

한 번 회심했다고 거룩을 향한 노력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오늘도 다시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시고 허투루 인생을 허비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누가복음 19장 1-10절 

삭개오의 회심

2018. 2. 4. 김혁수 

 

0. 들어가며 

- 안OO 검사

지난 한주 저는 슬프고 부끄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월요일 JTBC 뉴스룸에서 서지현 현직 검사와의 인터뷰 장면이 방송을 탔는데요.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8년전에 성추행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추행한 사람이 바로 유력한 선배 검사였다는 인터뷰였습니다. 

어떻게 기소권과 수사권을 동시에 가진 검사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말인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더욱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던 것은, 성추행으로 지목당한 안OO 전 검찰국장이 한 대형교회에서 세례 간증을 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힘들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했는데, 그 간증을 듣고 사건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서OO 검사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회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회개, 회심, 용서받기 등등의 기독교적 용어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원래 설교해야할 본문을 내려놓고, 한주동안 이 주제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과 묵상을 했습니다. 

오늘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의 회심이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말씀을 읽어볼까요.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삭개오 이야기의 상황 

1) 삭개오는 누구인가? 

- 여리고의 세관장(1-2절) 

여리고는 국경도시였습니다. 구약에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에 처음 들어가는데, 그 첫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신약에도 베레아 지역과 유대 지역의 중간 도시였습니다. 국경을 넘어설 때 받는 관세나 판매세 등을 걷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여리고는 지금으로 말하면, 인천공항 세관 같은 곳이겠죠.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지역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헤롯대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죠.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따뜻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연평균 온도가 18도인 반면에 여리고는 연평균 온도가 25도입니다. 요사이 처럼 추운 날에는 제주도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 따뜻한 남쪽 나라... 헤롯에게 여리고가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역량도 많고 따라서 세금도 많이 걷히고 있었겠죠. 당시 로마는 세관장에게 입찰을 주었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세금을 걷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세금 공무원의 자격을 준 겁니다. 월급은 따로 없었습니다. 세금을 걷어서 자기 월급을 만들면 되는 구조였습니다.

 

이쯤되면 왜 사람들이 세리들을 성매매여인들과 함께 죄인이라고 말하는 줄 알겠죠? 세리들은 동족의 피 같은 돈을 긁어모아 그들을 강제로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추가로 걷은 세금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자들이 바로 세리들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세관을 맡은 세리장, 혹은 세관장이었습니다. 특별히 험한 꼴을 직접 보지 않고도 그는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민족을 배반하였지만, 그 댓가로 큰 부를 누렸습니다.

 

- 부자(2절) 

그래서 2절에서 그를 부자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뽕나무의 진실

- 그동안 우리는 이 뽕나무에 대해 잘 못 알고 있었는데요. 이 뽕나무는 우리가 흔히 보는 키가 작은 오디 열매가 맺히는 2미터 남짓한 뽕나무가 아닙니다. 이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돌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이며 키가 15-16미터까지 자랍니다. 뿌리부터 나무줄기가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올라가기도 쉬웠습니다. 원래 적군을 보는 망대 역할을 하는 나무로 심겨졌습니다. 

 

150센티미터 정도로 예상되는 작은 키를 가진 삭개오 여리고 지방국세청장님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오래부터 우리는 삭개오님의 적극적인 열성에 대해 칭찬하는 설교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마음에 집중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그것도 좋은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포인트를 짚어볼 생각입니다.

 

3) 공개적 죄인 

일단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른 유대인들이 삭개오 세리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7절입니다. 사람들은 세리장인 삭개오를 다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되았는지, 세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어떻게 자신들의 혈세가 고스란히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민족을 배신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죄인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은 로마 군인들을 대상으로 성을 팔았습니다.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동족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두 그룹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가장 큰 죄인들 중의 죄인이었던 것이죠. 

 

4)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했을까요? 왜 그에게 다가갔을까요? 뽕나무에 올라간 사람은 삭개오 뿐일까요? 올라가기 쉽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널려있는 돌무화과나무위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삭개오 뿐이었을까요? 왜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거신 걸까요? 이 질문을 해결해 보려면 전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30절에 보면, 돈많은 관리가 나타나 무엇을 해야 영생,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을 잘 지켰는지 물어보십니다. 그건 아주 잘 지켜왔다고 합니다. 그 부자 관리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제안하십니다. 

 

- 돈 많은 관리의 근심

그러나 이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 부자 관리는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어렵다, 과장법을 사용해서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씀합니다. 

 

-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깜짝 놀라죠. 계명을 잘 지키며 부자로서 사회적으로 덕망있는 관리자, 지도자인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니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_부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18장에 이어서 19장에 삭개오를 주목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부자를 구원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를 구원하십니다. 

삭개오와 부자관원과의 핵심적인 차이는 진정한 회심의 차이입니다. 부자관원은 자신의 돈이 아까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버렸습니다. 이게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자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삭개오의 회심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2. 삭개오의 회심 

1)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모심(6절)

삭개오의 회심의 첫 번째 요소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매우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얼른 내려왔습니다. 어린이가 아닙니다. 청년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장년이겠죠. 그러니까 세리장을 하고 있겠죠. 다 큰 어른이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나무에서 거의 뛰어내리듯이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흥분과 기쁨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맞이하죠. 

“So he hurried and came down and received him joyfully”(ESV)

“in great excitement and joy”(NLT)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인격적 반응이 회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나의 죄인됨을 알고 오직 그분만이 나를 구원할 분임을 믿고 그분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회심에 있어 첫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나의 죄만을 들쑤시는 죄의 고백은 바른 회심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이상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회심은 바른 회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회심의 첫번째는 그분에 대한 기쁨입니다. 

 

2)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는 것(8절)

삭개오의 회심의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자신의 소유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돈이 너무 많다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그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강제적으로 뺏앗은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 그 어머어마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혹이나 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과 대중앞에 공표를 해 버린 겁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분의 가르침에도 호의적이고 적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삭개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신을 처분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3. 회심의 다양한 측면 

1) 회심이란? 

여러분 회심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제가 몇가지 선택지를 드려볼게요. 

- 죄를 인식하는 것 

- 죄를 뉘우치는 것 

-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

-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 

- 죄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는 것 

- 더이상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 선을 행하기 위한 노력하는 것 

 

=> 인식, 감정의 반응을 넘어선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회심이다. 

회심이란 터닝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과 애통만으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 (shub)는 “돌아서다. 되돌아오다. 도로 찾다. 회복하다”의 뜻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 (metanoein) 는 “방향전환”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회심은 죄의 습성과 죄된 방향으로의 진행을 멈추고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 및 진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터닝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죄를 인식하거나 뉘우치는 것을 넘어섭니다. 짐 윌리스, <회심> 에 나오는 정의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회심이 무엇인지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건 바로 돌이킴입니다. “뒤로 돌아 가”입니다. 돈과 안정을 위해 달려가던 삶을 멈추고 뒤돌아서 완전히 다른 방향,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2) 회심의 신비

회심에는 신비로운 요소가 분명있습니다. 회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사회문화적 존재인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마치 속옷처럼 입고 다니던 그 사회적 관습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중생, 곧 회심이 일어나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회심에서 인간의 결단과 결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회심은 돌이켜서 걸어가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로봇이 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방향을 틀고 새로운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입니다. 

 

3) 회심했는가? 

여러분 회심했나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 들이셨나요? 정말 그분이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는 분 맞습니까? 동시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가치에 따라 구체적인 결단이 있었습니까? 예를 들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까?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잘못된 관행과 불의에 대해 먼저 나서서 피해자에게 용서와 보상을 결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회심의 진정성은? 

- 앞으로의 말과 행동에 달렸다. 

저는 안OO 성도의 회심을 믿고 싶습니다. 그가 경험한 예수님에 대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분도 개인적으로야 꽤나 힘든 시기를 보냈겠죠.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겠죠. 그분이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제가 판단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회심이 진심이라면, 그가 진정성있게 회심을 했다면,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그의 말과 행동이 그의 회심의 진정성을 보여주게 될 겁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우리 국가 공동체가 정해놓은 법의 형벌을 담담하게 받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 문화적 교인들의 한계 

이건 안OO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터닝이 없는, ‘돌아서서 감’이 없는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죄의 회개를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에서 해결하면 된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눈물이 나오면 모든 죄가 사라졌다는 생각은 너무 주일학교적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에서 대형캠프에서 다루는 너무나 대중적인 관점입니다. 

죄는 지극히 사회적이며 관계적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는 경우도 태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렇다면 이제 그 받은 은혜를 힘입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게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무릎을 꿇어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쇼가 아니라 진심이 담겨야 합니다. 이렇게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힘도 내가 용서 받았기 때문이며, 용서를 비는 힘도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욱 이상적인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5:23-24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심지어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나올 때, 형제 자매 중에 원한과 원망이 있다고 생각이 들때는 예배드리는 도중에라도 그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한 뒤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회심은 하나님과만의 관계 회복에 제한 혹은 국한 되지 않습니다. 회심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5. 나가며

저는 큰 원리를 알려드린 겁니다. 케바케가 정말 많을 겁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벌써 돌아가셨거나, 연락이 두절인 경우도 있겠죠. 가해와 피해가 교묘하게 섞여 있어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용서구함이나 용서함이 성립되기가 어려운 경우도 다반사겠죠. 그건 함께 고민해봅시다. 무엇이 성경적으로 회심한다는 말인지 그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봅시다. 

 

하지만, 큰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회심은 그분을 기쁘게 맞이하는 겁니다. 회심은 자신의 소유를 베푸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회심은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보상배상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인식과 감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회심은 “돌아서 감”입니다. 

 

*** 기도회 

하나님은 여러분을 진정한 회심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1) 진정한 회심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2) 하나님께 용서받은 그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이제는 나의 잘못에 대해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기도합시다. 

 

*** 참고 도서

짐 윌리스의 [회심]

김영봉 목사의 [숨어있는 하나님]

누가복음 19장 1-10절 

삭개오의 회심

2018. 2. 4. 김혁수 

 

0. 들어가며 

- 안OO 검사

지난 한주 저는 슬프고 부끄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월요일 JTBC 뉴스룸에서 서OO 현직 검사와의 인터뷰 장면이 방송을 탔는데요.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8년전에 성추행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추행한 사람이 바로 유력한 선배 검사였다는 인터뷰였습니다. 

어떻게 기소권과 수사권을 동시에 가진 검사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말인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더욱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던 것은, 성추행으로 지목당한 안OO 전 검찰국장이 한 대형교회에서 세례 간증을 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힘들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했는데, 그 간증을 듣고 사건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서OO 검사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회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회개, 회심, 용서받기 등등의 기독교적 용어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원래 설교해야할 본문을 내려놓고, 한주동안 이 주제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과 묵상을 했습니다. 

오늘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의 회심이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말씀을 읽어볼까요.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삭개오 이야기의 상황 

1) 삭개오는 누구인가? 

- 여리고의 세관장(1-2절) 

여리고는 국경도시였습니다. 구약에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에 처음 들어가는데, 그 첫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신약에도 베레아 지역과 유대 지역의 중간 도시였습니다. 국경을 넘어설 때 받는 관세나 판매세 등을 걷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여리고는 지금으로 말하면, 인천공항 세관 같은 곳이겠죠.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지역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헤롯대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죠.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따뜻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연평균 온도가 18도인 반면에 여리고는 연평균 온도가 25도입니다. 요사이 처럼 추운 날에는 제주도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 따뜻한 남쪽 나라... 헤롯에게 여리고가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역량도 많고 따라서 세금도 많이 걷히고 있었겠죠. 당시 로마는 세관장에게 입찰을 주었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세금을 걷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세금 공무원의 자격을 준 겁니다. 월급은 따로 없었습니다. 세금을 걷어서 자기 월급을 만들면 되는 구조였습니다.

 

이쯤되면 왜 사람들이 세리들을 성매매여인들과 함께 죄인이라고 말하는 줄 알겠죠? 세리들은 동족의 피 같은 돈을 긁어모아 그들을 강제로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추가로 걷은 세금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자들이 바로 세리들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세관을 맡은 세리장, 혹은 세관장이었습니다. 특별히 험한 꼴을 직접 보지 않고도 그는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민족을 배반하였지만, 그 댓가로 큰 부를 누렸습니다.

 

- 부자(2절) 

그래서 2절에서 그를 부자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뽕나무의 진실

그동안 우리는 이 뽕나무에 대해 잘 못 알고 있었는데요. 이 뽕나무는 우리가 흔히 보는 키가 작은 오디 열매가 맺히는 2미터 남짓한 뽕나무가 아닙니다. 이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돌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이며 키가 15-16미터까지 자랍니다. 뿌리부터 나무줄기가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올라가기도 쉬웠습니다. 원래 적군을 보는 망대 역할을 하는 나무로 심겨졌습니다. 

 

150센티미터 정도로 예상되는 작은 키를 가진 삭개오 여리고 지방국세청장님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오래부터 우리는 삭개오님의 적극적인 열성에 대해 칭찬하는 설교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마음에 집중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그것도 좋은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포인트를 짚어볼 생각입니다.

 

3) 공개적 죄인 

일단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른 유대인들이 삭개오 세리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7절입니다. 사람들은 세리장인 삭개오를 다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되았는지, 세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어떻게 자신들의 혈세가 고스란히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민족을 배신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죄인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은 로마 군인들을 대상으로 성을 팔았습니다.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동족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두 그룹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가장 큰 죄인들 중의 죄인이었던 것이죠. 

 

4)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삭개오를 주목했을까요? 왜 그에게 다가갔을까요? 뽕나무에 올라간 사람은 삭개오 뿐일까요? 올라가기 쉽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널려있는 돌무화과나무위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삭개오 뿐이었을까요? 왜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거신 걸까요? 이 질문을 해결해 보려면 전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30절에 보면, 돈많은 관리가 나타나 무엇을 해야 영생,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을 잘 지켰는지 물어보십니다. 그건 아주 잘 지켜왔다고 합니다. 그 부자 관리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제안하십니다. 

 

- 돈 많은 관리의 근심

그러나 이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 부자 관리는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어렵다, 과장법을 사용해서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씀합니다. 

 

-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깜짝 놀라죠. 계명을 잘 지키며 부자로서 사회적으로 덕망있는 관리자, 지도자인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니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_부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18장에 이어서 19장에 삭개오를 주목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부자를 구원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를 구원하십니다. 

삭개오와 부자관원과의 핵심적인 차이는 진정한 회심의 차이입니다. 부자관원은 자신의 돈이 아까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버렸습니다. 이게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자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삭개오의 회심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2. 삭개오의 회심 

1)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모심(6절)

삭개오의 회심의 첫번째 요소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매우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얼른 내려왔습니다. 어린이가 아닙니다. 청년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장년이겠죠. 그러니까 세리장을 하고 있겠죠. 다 큰 어른이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나무에서 거의 뛰어내리듯이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흥분과 기쁨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맞이하죠. 

“So he hurried and came down and received him joyfully”(ESV)
“in great excitement and joy”(NLT)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인격적 반응이 회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나의 죄인됨을 알고 오직 그분만이 나를 구원할 분임을 믿고 그분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회심에 있어 첫 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나의 죄만을 들쑤시는 죄의 고백은 바른 회심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분이 없는 회심, 즉 이상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회심은 바른 회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회심의 첫번째는 그분에 대한 기쁨입니다. 

 

2)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는 것(8절)

삭개오의 회심의 두번째 요소는 바로 자신의 소유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돈이 너무 많다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그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강제적으로 뺏앗은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 그 어머어마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혹이나 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과 대중앞에 공표를 해 버린 겁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분의 가르침에도 호의적이고 적극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삭개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신을 처분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3. 회심의 다양한 측면 

1) 회심이란? 

여러분 회심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제가 몇가지 선택지를 드려볼게요. 

- 죄를 인식하는 것 

- 죄를 뉘우치는 것 

-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

-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 

- 죄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는 것 

- 더이상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 선을 행하기 위한 노력하는 것 

 

=> 인식, 감정의 반응을 넘어선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회심이다. 

회심이란 터닝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과 애통만으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 (shub)는 “돌아서다. 되돌아오다. 도로 찾다. 회복하다”의 뜻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 (metanoein) 는 “방향전환”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회심은 죄의 습성과 죄된 방향으로의 진행을 멈추고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 및 진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터닝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죄를 인식하거나 뉘우치는 것을 넘어섭니다. 짐 윌리스, <회심> 에 나오는 정의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회심이 무엇인지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건 바로 돌이킴입니다. “뒤로 돌아 가”입니다. 돈과 안정을 위해 달려가던 삶을 멈추고 뒤돌아서 완전히 다른 방향,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2) 회심의 신비

회심에는 신비로운 요소가 분명있습니다. 회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사회문화적 존재인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마치 속옷처럼 입고 다니던 그 사회적 관습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중생, 곧 회심이 일어나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회심에서 인간의 결단과 결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회심은 돌이켜서 걸어가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로봇이 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방향을 틀고 새로운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입니다. 

 

3) 회심했는가? 

여러분 회심했나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 들이셨나요? 정말 그분이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는 분 맞습니까? 동시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가치에 따라 구체적인 결단이 있었습니까? 예를 들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까?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잘못된 관행과 불의에 대해 먼저 나서서 피해자에게 용서와 보상을 결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회심의 진정성은? 

- 앞으로의 말과 행동에 달렸다. 

저는 안OO 성도의 회심을 믿고 싶습니다. 그가 경험한 예수님에 대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분도 개인적으로야 꽤나 힘든 시기를 보냈겠죠.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겠죠. 그분이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제가 판단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회심이 진심이라면, 그가 진정성있게 회심을 했다면,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그의 말과 행동이 그의 회심의 진정성을 보여주게 될 겁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우리 국가 공동체가 정해놓은 법의 형벌을 담담하게 받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 문화적 교인들의 한계 

이건 안OO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터닝이 없는, ‘돌아서서 감’이 없는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죄의 회개를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에서 해결하면 된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회심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눈물이 나오면 모든 죄가 사라졌다는 생각은 너무 주일학교적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에서 대형캠프에서 다루는 너무나 대중적인 관점입니다. 

죄는 지극히 사회적이며 관계적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는 경우도 태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렇다면 이제 그 받은 은혜를 힘입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게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무릎을 꿇어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쇼가 아니라 진심이 담겨야 합니다. 이렇게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힘도 내가 용서 받았기 때문이며, 용서를 비는 힘도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욱 이상적인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5:23-24_“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심지어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나올 때, 형제 자매 중에 원한과 원망이 있다고 생각이 들때는 예배드리는 도중에라도 그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한 뒤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회심은 하나님과만의 관계 회복에 제한 혹은 국한 되지 않습니다. 회심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5. 나가며

저는 큰 원리를 알려드린 겁니다. 케바케가 정말 많을 겁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벌써 돌아가셨거나, 연락이 두절인 경우도 있겠죠. 가해와 피해가 교묘하게 섞여 있어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용서구함이나 용서함이 성립되기가 어려운 경우도 다반사겠죠. 그건 함께 고민해봅시다. 무엇이 성경적으로 회심한다는 말인지 그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봅시다. 

 

하지만, 큰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회심은 그분을 기쁘게 맞이하는 겁니다. 회심은 자신의 소유를 베푸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회심ㄴ은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보상배상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인식과 감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회심은 “돌아서 감”입니다. 

 

 

*** 참고 도서

짐 윌리스, [회심] 

김영봉 목사, [숨어있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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