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4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니,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입니다.

 

4 “내가 그들의 반역하는 병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하겠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이제는 다 풀렸다.5 내가 이스라엘 위에 이슬처럼 내릴 것이니, 이스라엘이 나리꽃처럼 피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뿌리를 내릴 것이다.6 그 나무에서 가지들이 새로 뻗고, 올리브 나무처럼 아름다워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향기롭게 될 것이다.7 그들이 다시 내 그늘 밑에 살면서,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거둘 것이다. 포도나무처럼 꽃이 피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유명해질 것이다.8 에브라임이 고백할 것이다. ‘나는 이제 우상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응답할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 주마.’ 나는 무성한 잣나무와 같으니, 너는 필요한 생명의 열매를 나에게서 언제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NIV

I will heal their waywardness and love them freely, for my anger has turned away from them(4절).

 

주석

5절.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야웨는, 여름의 건기 동안 유일하게 꽃과 나무에 필요한 수분을 공급하는 이슬에 비유된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반역은 죄다. 동시에 병적 현상이기도 하다. 

한번 하나님께 반역했더니, 사람들이 반역하는 것을 너무 쉽게 여기게 된다.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 반역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으로 옮긴다. 

영혼에 병이 옮았다. 

사탄이 심어준 교만과 욕망의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 

한 명의 병은 그 사람만 치유되면 해결된다. 

그러나 전염병은 무섭게도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때로는 사회 문화 구조도 바꿔버린다. 

코로나가 그랬다. 

모두가 마스크를 썼고, 온라인 수업과 모임이 표준이 되었다. 

한 사람의 반역은 그 사람의 회개로 해소된다. 

사회 문화 구조가 그 사람의 반역을 반역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모인 반역으로 형성된 새로운 사회 문화 구조는 시스템이 되고, 그 시스템이 자체 역동을 가지고 움직인다. 

반역이 시스템이 되면 그건 반역이 아니라 혁명이요, 칭송의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많은 사람의 반역, 특히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반역은 더 이상 반역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당하는 하나님만 고통을 받으신다. 

사람들은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께 반역이 되는 것이다. 

영혼에 뿌리 내린 병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결국 사회 문화 전반에 퍼진 병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그 병으로부터 회복되기를 바라신다. 

반역의 죄로부터 돌아온다.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이런 날이 오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바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문화가 팽배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저주한다. 

하나님은 공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나, 하나님을 대변해야 할 교회와 기독인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했다. 

왜곡된 하나님이 드러나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심지어는 저주한다.

크게 보면 반역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옳게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둘째, 왜곡되게 보여지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이 둘 다 반역이지만, 수준이 다르다. 

 

첫째가 진짜 반역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와 사랑을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하셨다.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불기둥/구름기둥으로 보호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다. 

율법과 규정을 통해 공의로운 사회상을 보여주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따랐다. 

신약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하셨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의 욕심을 따랐다. 

이것이 진짜 반역이며, 이스라엘과 교회가 지은 죄악이다. 

 

둘째는 잘 몰라서 행하는 반역이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른다. 

그저 무속 신앙의 여러 신들 중 하나라고 여긴다. 

돈과 성공을 위해 도움을 주는 신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공의롭지도 않고 그렇게 사랑이 많지도 않다. 

자기 사람들만 챙기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신이라고 여긴다. 

교회와 교인들이 만들어낸 왜곡된 하나님 상의 결과다. 

그러니 하나님을 저주한다. 

비기독인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정서다.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일까? 

첫째 반역을 저지른 이스라엘과 교회에 잘못이 있다. 

그들이 옳게 하나님을 드러내야 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반역하지 말아야 했다. 

 

이제 방법은 하나다. 

반역의 습관과 정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비판 정신과 순종의 태도에 조화를 맞추는 것이다. 

구조와 문화로 들어와 있는 반역의 정신을 비판하되, 

그 비판 정신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다시 불순종하는 반역의 죄로 나아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비판 정신의 한계를 세우라. 

순종의 태도를 배우라. 

하나님 말씀과 뜻에 대해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배우라. 

비판과 순종의 역설을 몸으로 체득하라. 

 

[오늘의 기도]

예수님, 

정말 어려운 것을 생각했습니다. 

비판도 하고 순종도 해야 한답니다. 

비판 정신으로 구조적 반역의 죄를 밝혀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태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비판만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도 되지 않게 하소서. 

문제가 무엇인지 비판할 수 있되,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제가 구현할 수 없는 이상이라는 사실도 잘 압니다. 

그러기에 기도합니다.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셔서 비판 정신을 유지하되, 순종의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어려우니 도움을 강청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2월 01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바로에게로 가서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하고, 그에게 이르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할 수 있게 하여라.

2 네가 그들을 보내지 않으면, 나는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벌하겠다.

3 강에는 개구리들이 득실거리고, 위로 올라와서, 너의 궁궐과 너의 침실에도 들어가고, 침대로도 올라가고, 너의 신하와 백성의 집에도 들어가고, 너의 화덕과 반죽하는 그릇에도 들어갈 것이다.

4 또한 그 개구리들은 너와 너의 백성과 너의 모든 신하의 몸에도 뛰어오를 것이다' 하여라."

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에게 이르기를, 지팡이를 들고 강과 운하와 늪 쪽으로 손을 내밀어서, 개구리들이 이집트 땅 위로 올라오게 하라고 하여라."

6 아론이 이집트의 물 위에다가 그의 팔을 내미니, 개구리들이 올라와서 이집트 땅을 뒤덮었다.

7 그러나 술객들도 자기들의 술법으로 그와 똑같이 하여, 개구리들이 이집트 땅 위로 올라오게 하였다.

8 그 때에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 부탁하였다. "너희는 주께 기도하여, 개구리들이 나와 나의 백성에게서 물러가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너희 백성이 주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너희를 보내 주겠다."

9 모세가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언제쯤 이 개구리들이 임금님과 임금님의 궁궐에서 물러가서, 오로지 강에서만 살게 하여, 임금님과 임금님의 신하들과 임금님의 백성이 이 재앙을 피할 수 있게 기도하면 좋겠습니까?"

10 바로가 대답하였다. "내일이다." 모세가 말하였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 우리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드리겠습니다.

11 이제 개구리들이 임금님과 임금님의 궁궐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서 물러가고, 오직 강에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12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서 물러나왔다. 모세가, 주님께서 바로에게 보내신 개구리를 없애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니,

13 주님께서 모세가 간구한 대로 들어 주셔서, 집과 뜰과 밭에 있던 개구리들이 다 죽었다.

14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 무더기로 쌓아 놓으니, 그 악취가 온 땅에 가득하였다.

15 바로는 한숨을 돌리게 되자,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또 고집을 부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석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벌함(2-4절) 개구리가 썩어가는 고기로 메워진 물과 기슭을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헤케트(Heqet) 여신이 개구리로서 해산을 도와준다고 생각했으나, 이것이 어떻게 그녀에 대한 승리로 여겨졌는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집트 마술사들은 재앙을 제거할 수 없었으며 그것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IVP 배경주석). 

 

‘나의 백성을 보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바로가 거절하자, 이집트 온 땅이 개구리로 뒤덮입니다(1-6절). 그러자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개구리를 물러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그 조건으로 백성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합니다(8절). 바로의 요구에 응한 모세는, 주님께 기도하여 개구리를 제거합니다(9-14절). 그러나 바로는 또 고집을 부리고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15절).

 

이로운 것으로 생각되었던 개구리도 이집트 온 땅을 뒤덮자 재앙이 되었습니다. 바로는 처음으로 재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모세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합니다. 줄곧 예고된 바로의 고집과 상관없이, 주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단순히 물러가리라는 예상과 달리, 특정 시간에 개구리의 떼죽음과 심한 악취라는 결과로 주님의 주권을 나타내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어떤 분으로 다가옵니까? 그리고 바로처럼 주님께 변덕스러운 부분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파라오의 술사들은 똑같은 마술을 부릴 것이 아니라 개구리를 없애는 마술을 부렸어야 했다. 

이 점이 어이가 없다. 

안그래도 징그럽고 무서운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가중시킨다. 

똑같은 장면을 연출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듯 싶다. 

‘모세와 아론이 하니 우리도 똑같이 해야지!’ 하는 것 같다. 

비교할 게 아니라 해결해야 할 상황이다. 

어차피 마술을 부린다면 문제 해결을 위한 마술을 부렸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의 심리가 이해될만 하다. 

아론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순간부터 술사들은 죽음의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히브리 민족의 신의 부르심을 입은 두 사자의 등장은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파라오의 눈 밖에 나면 그들은 죽음 목숨이다. 

이제까지 탄탄대로였다. 물론 그 동안도 숱한 경쟁이 있어온 건 사실이었다. 

내부 경쟁, 그 안에서 살아남았고, 이제 파라오 곁에서 그의 통치를 도와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 파라오의 신적 권위를 내외에 알리면 되는 일이었다. 

다양한 술법들을 통해 때로는 파라오까지도 이들을 칭찬하고 높여 주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지팡이 마술을 부리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지팡이를 땅에 놓으니 뱀이 되는 마술. 

지팡이를 물로 향하니 나일강이 피가 되는 마술. 

지팡이를 강, 운하, 늪을 향하니 개구리들이 득실되는 마술. 

술사들에겐 지팡이 마술을 부리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에게 지면 그들의 명성도 끝이다. 

파라오의 신뢰를 잃으면 궁에서 떠나야 할 지도 모른다. 

 

아론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면, 자신들의 지팡이로 뱀을 잡는 독수리가 되게 했으면 좋았으련만… 

피가 된 나일강을 보았다면, 다시 피를 물로 바꾸었으면 좋았으련만… 

개구리가 침실까지 득실댄다면, 다시 물과 늪으로 돌려보내면 좋았으련만… 

그들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며 그저 자신들의 능력을 뽐낼 뿐이었다. 

분별력이 부족하다.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저 경쟁 상대가 별 볼일 없다고 증명해 내야 한다. 

그저 경쟁 상대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 강박이 분별을 막는다. 

 

혹여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파라오도 술사들의 어이없는 행동에 짜증이 올라오나 보다. 

모세와 아론에게 개구리를 물리라고 부탁한다. 

술사들에게도 분명히 명령하지 않았을까? 

“애정하는 이집트의 여러 술사들이여, 이제 개구리는 그만 만드시오. 개구리를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주시오”

그러나 술사들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들은 개구리를 없애지 못했다. 

강을 맑게 하지도 못했고, 아론 지팡이 뱀을 죽이지도 못했다. 

모세와 아론의 신이 한 수 위였다. 

이제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모세와 아론에게 부탁하는 수 밖에… 

“이제 그만 하시오. 내 그대들의 청을 들어 주겠오. 히브리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줄테니, 이 지긋지긋한 개구리 좀 치워주시오. 제발 내 침실로 들어오지 않게 해 주시오. 내 아내와 아이들의 비명이 끊이질 않고 있소. 시녀들의 까무러치는 비명에 정신이 혼미하오.” 

 

그런데 이 대화가 재밌게 흘러간다. 

모세가 이렇게 묻는다. 

“언제쯤 개구리를 물릴까요?” 

파라오가 답한다. 

“내일이다.”
엥! 이게 무슨 말인가? 지금 당장이라고 해야지, 왜 내일이라고 하는가? 파라오의 정신이 나갔나? 

당장이라도 개구리들이 궁에서 빠져나가 원래 있던 곳으로 가야지 왜 내일이라고 말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이렇게 수많은 개구리들을 물릴려면 최소한 하루 정도의 시간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술사들이 날을 잡아 준 걸까? 

하루라도 빨리 없애는 것이 좋을 텐데, 그게 당연한 심사일 텐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모세가 그렇게 질문한 의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면 언제든 하실 수 있음을 파라오에게 알려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이집트의 헤케트 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10절).

 

그 헤케트, 개구리 신들은 몰살 당한다. 

파라오의 바람과 예상을 뒤엎는다. 

파라오는 개구리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길 바랬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구리를 집과 뜰과 밭에서 죽게 하셨다. 

수천, 수만 마리의 개구리가 이집트 전역에서 죽어버렸다. 

사람들이 한 곳에 모았는데, 뜨거운 날씨에 금방 썩는다. 

냄새가 진동한다. 개구리 썩은 냄새. 

더이상 이집트에서 헤케트 신을 떠올리기도 싫다. 

다산의 상징으로 풍요를 약속했던 헤케트, 개구리 신, 그 이름만 들어도 냄새가 올라온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밥도 먹을 수 없다.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 묻을 수도 없다. 너무 많아서 말이다. 

파라오는 모든 신하들을 동원해서 개구리 처리사업을 명령한다.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도 며칠 동안 해야 할 양이다. 

 

파라오가 가진 모든 힘, 자원, 사람, 돈…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재앙을 막거나 누그러뜨리거나 해결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만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순종하겠는가? 발버둥치겠는가? 

지금까지 먹혔던 방법들이 다 막힌다. 

순종하겠는가? 발버둥치겠는가?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저만의 술사에 의지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저만의 삶의 비법에 의존하여 당신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눈을 열어 주세요. 

시야를 밝혀 주세요.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소서. 

발버둥치며 헤쳐나오려는 노력, 그 노력이 당신에 대한 순종을 막지 않게 해 주세요. 

감당해야 할 수많은 일들 앞에 제 방식과 제 계획과 제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과 타임라인과 은총으로 다가가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12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41솔로몬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과 그의 지혜는 모두 '솔로몬 왕의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42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43솔로몬은 죽어서,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에 묻혔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1온 이스라엘이 르호보암을 왕으로 세우려고 세겜에 모였으므로, 르호보암도 세겜으로 갔다.

2느밧의 아들 여로보암도 이 소문을 들었다. (그 때에 그는 솔로몬 왕을 피하여 이집트로 가서 있었다.) 이집트에서

3사람들이 여로보암을 불러내니, 그가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과 함께 르호보암에게로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4"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습니다. 이제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워 주신 중노동과 그가 우리에게 메워 주신 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

5르호보암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돌아갔다가, 사흘 뒤에 나에게로 다시 오도록 하시오." 이 말을 듣고서, 백성들은 돌아갔다.

6르호보암 왕은 부왕 솔로몬이 살아 있을 때에, 부왕을 섬긴 원로들과 상의하였다. "이 백성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경들의 충고를 듣고 싶소."

7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 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8원로들이 이렇게 충고하였지만, 그는 원로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기와 함께 자란, 자기를 받드는 젊은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9그들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나에게, 부왕께서 메워 주신 멍에를 가볍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소. 이 백성에게 내가 어떤 말로 대답하여야 할지, 그대들의 충고를 듣고 싶소."

10왕과 함께 자란 젊은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은,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메우신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임금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내 새끼 손가락 하나가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

11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러나 나는 이제 너희에게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겠다. 내 아버지는 너희를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너희를 쇠 채찍으로 치겠다' 하고 말씀하십시오."

12왕이 백성에게 사흘 뒤에 다시 오라고 하였으므로, 여로보암과 온 백성은 사흘째 되는 날에 르호보암 앞에 나아왔다.

13왕은 원로들의 충고는 무시하고, 백성에게 가혹한 말로 대답하였다.

14그는 젊은이들의 충고대로 백성에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소.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당신들에게 메우겠소. 내 아버지는 당신들을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당신들을 쇠 채찍으로 치겠소."

15왕이 이렇게 백성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일을 그렇게 뒤틀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실로 사람 아히야를 시켜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16온 이스라엘은, 왕이 자기들의 요구를 전혀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왕에게 외쳤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받을 몫이 무엇인가? 이새의 아들에게서는 받을 유산이 없다. 이스라엘아, 저마다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아, 이제 너는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그런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저마다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갔다.

17그러나 유다의 여러 성읍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은, 르호보암의 통치 아래에 남아 있었다.

18르호보암 왕이 강제노동 감독관 아도니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니, 온 이스라엘이 모여서, 그를 돌로 쳐죽였다. 그러자 르호보암 왕은 급히 수레에 올라서서,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다.

19이렇게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에 반역하여서, 오늘에 이르렀다.

20이 무렵에 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로보암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람을 보내어 그를 총회로 불러 왔으며, 그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유다 지파만 제외하고는, 어느 지파도 다윗 가문을 따르지 않았다.


1. 분열의 역사 

 

분열의 역사의 시작이다. 

솔로몬의 죄악은 우상숭배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는 아스다롯과 그모스와 밀곰에게 절을 했으며, 하나님의 법도와 명령을 어겼다. 

그의 통치 기간을 약 40년으로 잡곤 하는데, 그중 절반 이상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아주 직접적으로 그의 죄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후회와 죄책감이 아니다. 

회개는 “돌아서서 가기”이다. 자기가 가던 방향을 틀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회개다.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인격적인 반응이며 구체적인 행동의 문제다. 

솔로몬은 그 회개를 할 수 없었다. 

이방 여인, 외국 여인들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찢어놓으시기로 결정하셨다. 

한 명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주었더니 그 권력은 그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고 부패하게 만들었다. 

다윗은 죄를 지었으나 회개하였고, 다시 돌아와 겸손하게 주님을 따랐지만, 솔로몬은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셔야만 했다. 

에덴에서의 어긋남, 바빌로니아에서의 어긋남, 사사시대의 수많은 어긋남, 그리고 예루살렘의 솔로몬의 어긋남을 쭉 봐오셨다. 

사람에게 소망을 두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실만 한데, 다시 개입하신다. 

그냥 버려두면 될 일을, 그냥 방치하면 될 일을, 그러면 자연스레 서로 죽이다 멸망할 일을, 굳이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이스라엘 나라를 둘로 나누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10개 지파의 통치권을 여로보암에게 넘기기로 결정하신다. 

 

 

2. 누구 말을 들을 것인가?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 

솔로몬은 건축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함 뒤에는 수많은 노동력을 제공했던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있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마자 처음으로 듣는 백성들의 요청은 그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여로보암의 입에서 이 질문이 던져지자 왕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사실 여로보암이 반역을 일으켜 이집트에 도망갔던 민족배반자임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그가 백성의 대표로 말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 때부터 르호보암은 눈치를 챘어야했다. 

백성들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말이다. 저 멀리 이집트에 있었던 여로보암을 불러내어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대표, 대변인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벌써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왕은 이 반란의 조짐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렇게 지혜롭지 못했다. 

 

일단 그는 자문을 구한다. 

솔로몬 시절부터 정치를 해왔던 장로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그들의 조언은 마치 예수님의 정신을 상기시킨다. 

 

7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 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백성의 종이 되어 섬기면, 백성들도 왕을 섬기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이러셨다. 

그는 섬기러 오셨다. 

우주 최고의 권한과 능력을 지니신 분, 그분이 인간을 섬기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세상 권력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온전한 인격으로 살아가도록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랬더니 온 인류가 그분을 주님으로 섬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섬김의 리더십이다. 

 

장로들은 이 진리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솔로몬 시대를 지나면서 그 공과를 잘 알았던 장로들은 솔로몬 말년의 모습을 거울 삼아 충고를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장로들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의견을 듣는다. 

르호보암의 친구들의 의견은 과격하다. 

추측컨대, 그들은 장로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자기들은 누릴 것 다 누리고, 이제 새롭게 정치를 해 나가야 하는 우리들은 자기들 뒤꽁무니만 쫓아 다니라고…’

훨씬 더 강력한 노역을 시킬 것을 주문했다. 

결국 르호보암은 장로들이 아니라 친구들의 말을 들었다. 

 

누구 말을 들을 것인가? 

현실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에 가까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생각을 닮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순히 성경 말씀을 반복하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상황과 환경에 맞게 적절한 말씀을 생각해 낸다. 

지혜롭게 적용하고 조언한다. 

그런 말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말. 

예수님의 정신이 담긴 말. 

그런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한다.

이것이 지도자라면, 리더라면 꼭 필요한 자질이다. 

분별력 그리고 순종. 

 

 

헨리 나우웬, 분별력, 2016, 포이에마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2735472 

 

분별은 인생의 중대한 시점에 단 한번 내리는 의사결정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오늘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자 평생토록 헌신하는 것. 그것이 분별이다. (p.11)

 

영성 생활은 귀가 멀어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삶에서 듣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참여하는 여러 활동, 시간을 잡아먹는 여러 가지 일, 우리를 둘러싼 많은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뜻을 알려줄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왕상 19:12)를 듣기 어렵게 한다.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과 우리들 가운데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여호와이니”하고 단순하게 자신을 계시하지도 않으시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 인생에 적극 개입하지도 않으신다. 우리 하나님은 돌보시고 치유하시고 인도하시고 가리키시고 요구하시고 맞서게 하시고 바로잡으시는 분이다. 분별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임재에 주목하고, 격려하시고 지시하시고 지도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p.38-39)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바를 이해하고,일상생활에서 감지하기 어려운 미묘한  표징을 읽어내며, 우리 인생에서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꿰뚫어보는 통찰을 '분별'이라 정의하고 이 분별을 훈련하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소명과 사명을 이룰 수 있다.


참 지혜의 근본되신 주님, 

저에게 일상의 여러 현상, 사건, 만남,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수많은 선택 앞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작은 음성에도 귀기울이고, 당신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도록 도와주소서. 

제 심장에도 귀를 만드셔서 심장으로 전해지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세요. 

오늘도 귀를 열고, 세워서 주님의 음성을 듣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5. 23.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2:1-17]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당신은 거기 있든지, 발치에 앉든지 하오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6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여러분이 받드는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라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하신 분이 또한살인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설교]
0.
들어가며
역시 야고보서는 난해합니다. 때로 성경 저자가 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지 관점으로, 딜레마 혹은 트릴레마 없이 평이하게 이해되는 글로 적혀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 말이죠. 

 

바울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야고보의 글은 너무 단도직입적입니다.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서 보이는 신학적 진술, 그리고 토대 위에 설계된 생활 윤리, 공동체 윤리이렇게 집을 지어가야 이해가 그나마 쉬울 텐데, 야고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시험에 인내하라, 분노하지 말고 조심하라, 그리고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서 같기도 하고, 규정집 같기도 하고, 여튼 신학이 정확히 노출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고 어떤 토대에서 말하는지 흐릿해서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문맥도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자유를 주는 율법같은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적용되는 상황에서도 율법의 기능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언급이 빨리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의 초기 지도자 야고보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특별한 갈등과 긴장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둘을 통합해서 조화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한번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차별 노노

확실히 야고보서는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편지입니다. 공동체 내외부의 위기를 겪고 있음을 초대 교회 지도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박해와 같은 외부의 핍박과 시련을 인내하라고 편지의 1장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의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분노의 말을 삼가며 성경 말씀을 실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의 말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야고보는 그걸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가 눈여겨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동체내에 존재하는 차별입니다. 2-4절을 읽어봅시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야고보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비슷한 경우가 발생했음을 우리는 충분히 추측할 있습니다. 왜냐면, 당시에 편지를 쓴다는 것은 오늘날 이메일을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비용도 많이 드는 일입니다. 필요한 내용만 넣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예를 들었다는 것은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 모범 되신 예수 그리스도 

기독 공동체에 암암리에 녹아 있는 차별을 보았습니다. 야고보는 그냥 넘어갈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원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차별이 사라져야 했습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놓인 차별의 간극을 메워야 했죠. 야고보가 사용한 논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차별해야 하지 않아야 하는 번째 이유는, 야고보의 형제 자매가 우리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영광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자/빈자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경험한 예수님에 관한 충격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을 뽑았습니다.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더니 갑자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원래 이런 소문은 삽시간에 번지잖아요.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먹을 시간조차 없습니다. 밀려오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자리에 앉히고 순서를 정해서 병도 고쳐 주시고, 귀신도 내쫓으십니다. 그런데 너무 갑자기 인기를 얻으니 사람들의 시기 어린 가짜 뉴스가 돌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것입니다. 혹은 악한 귀신이 들려서 귀신이 벌이는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런 소문이 누구의 귀에 들어갔냐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가족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형님을 찾으러 갑시다. 가서 더이상 외부활동을 하지 않도록 집에 가둬둡시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갔고, 결국 어머니와 동생들, 특히 야고보를 필두로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그냥 가까이 오기엔 불가능해보였죠.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지난 30 동안 함께 보냈던 형님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 33-35)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알았습니다. 예수님에겐 혈통/혈육 조차도 특혜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이 많은 사람과 없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인들을 선대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친가족이라고 해도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그의 동생 야고보는 보았던 거죠. 충격적인 예수님의 말에 당시에는 분개했지만, 나중에는 알게 되었죠. 그분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사람들의 외모, 외형, 권력과 돈의 유무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적을 있었던 겁니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본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남자건 여자건, 부자건 빈자건 간에 공평하게 대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입니다. 최근 서울시장, 부사시장 보궐선거 이후에 남녀의 성갈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십대 남자들이 대거 국민의힘을 지지하게 되면서 이유에 대해 궁금함이 많이 커졌습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염려가 되는 부분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과 감정의 골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베, 메갈 등의 단어가 서로를 향한 혐오를 드러냅니다. 

 

3. 인생역전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차별하지 말아야 번째 이유도 적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세상을 다스리면서, 혹은 개입하시면서 사용했던 방식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빈자를 택해서 믿음의 부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게 아이러니 한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능력있고 부유한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시기 보다는 볼일 없어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입니다. 

 

여러분, 부자들은 쉽게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곤 합니다.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 빈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운영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많은 결정을 내려왔고, 많은 일들을 왔습니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보수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애적입니다. 어쩔 없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그렇게 밖에 없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죠. 생각의 메커니즘, 행동의 방식이 고착화됩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하게 됩니다. 부자의 논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참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 나라는 빈자들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고 관리하고 경영하는 권리가 생긴 것이죠. 부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권리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업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실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바울이 빌레몬서에 드라마틱하게 등장합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의 돈에 손해를 입히고 도망자가 됩니다. 우연히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되죠. 그리고 바울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그럼에도 노예 도망자의 신분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죠.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대하라고 말이죠. 나중에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어 바울의 편지를 모아 정경화 하는 과정 속에서 빌레몬서를 신약 성경에 포함시키게 되죠. 

 

야고보는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생역전의 드라마가 곳곳에 넘쳐납니다. 그러니 결코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참고)  서종현 선교사의 삶과 사역

https://www.youtube.com/watch?v=yv6mgVT0sLM

http://www.gospe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1

 

 

4. 율법 순종

번째 이유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생각보다 치밀합니다. 논거들을 가지나 드는 것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차별하지 말아야 번째 이유는, 율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8-12절입니다.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한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그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율법의 주요 강령은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으뜸가는 율법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와 빈자를 구별해서 다르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죠.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혼자 산다면 굳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하나님께 시기에 맞춰 예배하고 찬양하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적, 사회적 존재이기에 법이 필요하고, 법과 규정은 개인과 공동체를 자유하게 합니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있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해하지 않을 있는 자유까지 포괄하죠. 죄를 짓지 않을 있는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대로 하면, 자유를 얻을 없습니다. 욕구대로 하면, 이웃 아니라, 가족과 자기 자신조차도 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니 법은 포괄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와 사람들을 용서하고 은혜가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가져다 주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죄인을 용서한다해도, 여전히 율법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나요?  율법도 그렇습니다. 물론 억압과 부자유의 율법이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주는 율법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율법이 바로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같은 것이죠. 

 

저는 사실 순종하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습니다. 순종은 비판적인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변명같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가 드니까 율법에 순종하라는 말의 중요성을 점점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지성은 한계를 가집니다. 정보는 쌓이고 게다가 방대해집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해를 최신의 지식으로 하려고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는 늙고 지력은 줄어듭니다. 이상 혁신적인 생각을 받아들이는 한계를 느낍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절대 불변의 말씀에 귀의하고 싶어 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 육체는 젊고 생각이 싱싱하기에 무엇이든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할 있다고 믿으시죠?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때로는 필요합니다. 젊은 자기만의 생각을 갖는 , 포스트모던 시대에 주체적인 신앙의 자아를 형성하는 , 너무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일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순종의 의미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우리 나름 각자의 방식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5. 나가며_차별하지 않는 공동체 

야고보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 공동체가 빈부의 차이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하게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 율법이 이웃 사랑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공동체를 꿈꿔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단순히 개인 윤리의 책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책입니다. 차별이 없는 공동체가 되도록 지속적인 리플렉션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를 계속해서 돌아보고 잘못한 것은 뉘우치고, 잘하는 것은 더욱 잘하도록 격려하며, 부족한 것은 서로 채워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개인도 일기를 쓰지만 공동체도 그렇게 일기를 내려가야 합니다. 

 

부자와 빈자가 차별받지 않는 공동체, 남녀가 차별대우 받지 않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있을까요? 

이건 혼자의 고민, 혼자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의 고민,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것입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우리 공동체의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면 어떨까 논의 중에 있습니다.  급한 재정적 필요가 있는 분들은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공동체 모두가 함께 기금을 마련해서 돕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주도 오늘의 말씀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나 차별의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고, 제거할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2. 우리 주변에 고난 받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도울 있는 우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차별 대우를 받은 적은 없었나요? 때의 마음은 어떠했나요?  

 

2. 나와 우리 공동체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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