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8월 07일 월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모든 계명들을 낱낱이 마음에 새기면, 내가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9 이스라엘아,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님은, 도움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

10 아론의 집이여,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님은 도움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

11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님은, 도움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

 

12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여 주셔서 복을 주시고,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며,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신다.

13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니, 낮은 사람, 높은 사람, 구별하지 않고 복을 주신다.

14 주님께서 너희를 번창하게 하여 주시고, 너희의 자손을 번창하게 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15 너희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에게서 복을 받은 사람이다.

 

16 하늘은 주님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다.

17 죽은 사람은 주님을 찬양하지 못한다. 침묵의 세계로 내려간 사람은 어느 누구도 주님을 찬양하지 못한다.

18 그러나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할렐루야.

 

The Message

The heaven of heavens is for God,

but he put us in charge of the earth(16절).

 

[오늘의 묵상]

시인은 계속 반복한다. 

주님은 도움이 되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큰 도움이시다. 

환난이 오고, 슬픔이 오고, 괴로움이 찾아 올 때, 그분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시다. 

사단의 공격이 찾아오고, 환경의 어려움이 다가오고, 무거운 피곤함이 몰려와도 그분은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 

시인은 주님을 의지하라고 말한다. 

이런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자연히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가 증명해야 한다. 

자신의 경험도 추가되어야 한다. 

한 두 번의 사건으로 이런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오랜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며,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은혜를 돌아보며 생겨난 인식이다. 

 

시인이 두 번째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첫째는 보호였다며, 둘째는 복이다. 

첫째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전제로 하는 부정적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면, 

둘째는 미래 비전과 소망을 전제로 하는 긍정적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보호와 함께 복을 주신다. 

시인은 번창이 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번성하는 것, 번창하는 것, 가정과 기업과 자손이 번창하는 것은 분명 복이 맞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복은 아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시를 읽다보면 기업인들은 아마도 자신의 기업이 잘 되고 번창하고 성공하는 것을 복이라고 말할 것이다. 

맞다. 그것도 복이다. 

다만, 진정한 복은 아니다. 

그 기업을 통해 삼위 하나님의 연합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복이다. 

 

보호와 번창의 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요청되는 영성은 십자가를 경험하면서 찬양하는 영성이다. 

예수님은 사실 보호받지 못했다. 

번창의 복을 누리지도 못했다. 

도리어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 

죽음의 길을 갔다. 

그럼에도 그분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모든 뜻이 하나님께 달렸다 한다. 

욥은 자신의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원망을 인내하셨다. 

그리고 욥도 자신의 상황을 견뎠다. 

보호와 번창은 어쩌면 결과론일 수 있다. 

모든 순간, 모든 사안에 대해 동일한 보호와 번창의 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그건 비현실적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는다. 

때로는 보호막이 사라진 것 같고, 때로는 실패의 연속으로 자신의 꿈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결말은 아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충분히 찬양받으실 만한 결말을 제공하신다. 

인내가 필요하다. 

 

 

[오늘의 기도]

매 순간 기분 좋을 수는 없습니다. 

매 순간 즐거움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슬프고, 고되고, 짜증나고, 지루하고, 격앙됩니다. 

그러나 종종 찾아오는 주님의 위로와 보호하심과 축복해 주심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월요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코 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신경써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회피하지 않게 하시고,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주님을 경외함으로 일에 몰두하게 하소서. 

일은 사람을 돌보고 살립니다. 

그러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적극적으로 열정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소서. 

그 깨달음 속에서 주님의 보호하심과 번창케 하심을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2월 24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7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 하나님은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18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대열을 지어 이집트 땅에서 올라왔다.

19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 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20 그들은 숙곳을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장막을 쳤다.

21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 길을 비추어 주셨다.

22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주석

블레셋을 지나는 길(17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시려는 의지를 알리셨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안전을 염려하셨기에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좀 더 멀지만 안전한 길로 안내하셨다(IVP 성경주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름길인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 이유는 전쟁을 할 경우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갈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17-18절). 모세는 요셉의 유언대로 그의 유골을 가지고 나옵니다(19절). 주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들 앞에서 인도하십니다(21-22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17-18절). 잘 보이지 않는 기적이 있다면, 노약자가 포함된 200만 명 이상의 무리가 노숙하며 광야 길로 문제없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낮의 더위는 구름 기둥이, 밤의 추위는 불기둥이 막아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동행하십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묵상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200만명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어떤 모습인가? 

모든 백성을 동시에 보호하는 조치는 과연 가능한가? 

구름기둥은 단순히 기둥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기둥을 중심으로 하늘에 구름이 가득할 것이다. 

그래야 몇 십킬로미터로 줄 서 있는 백성들을 돌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름기둥은 상대적으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불기둥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불기둥은 높이 올라 꼭대기에는 마치 태양 같은 빛과 열을 내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멀리 있는 백성들에게도 빛과 열이 미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일대가 환한 대낮같다. 

야생동물들도 함부로 접근하기 어렵다. 

 

그런데 밤낮 이렇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돕고 계신다면, 

그래서 밤낮 행군하고 있다면, 

그들은 잠은 어떻게 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었을까? 

아이들은 어떻게 행군하고 있었을까? 

가축들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나귀나 낙타같은 동물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낮과 밤이 혼란해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정신건강까지 위태롭다. 

 

물론 가능한 빨리 이집트 땅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언제 이집트의 정예 병사, 정규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속히 이집트 영토를 벗어나 이스라엘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행군 속도는 느릴 수 밖에 없다. 

장정들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약자, 병자, 장애인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한다. 

최대한 그들의 편의를 도모해야 장거리 행군을 마칠 수 있다. 

속도가 필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모두를 위한 속도가 필요하다. 

낮에도 쉬어야 한다. 밤에도 행군해야 한다. 

각자의 체력에 맞춰 쉼과 행군을 반복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가는 방향을 안내한다. 

이 두 기둥은 단순히 햇볕을 막아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역할 이상을 한다. 

먼 곳에 있는 백성들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행군의 목표지점을 알려준다. 

조금 늦게 가도 된다. 

쉬었다 가도 된다. 

안심이 된다. 

항상 언제나 저 멀리에 기둥이 보이고 그 위에는 구름으로, 발광체로 표지판이 있다. 

신기한 경험이다. 

아이들은 이 놀라운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길다란 행군 행렬도 놀라운데, 그 앞에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다. 

지난 10가지 재앙이 사실 초현실적이었다. 

 

보호와 방향. 

옷과 신발 텐트, 그리고  나침반. 

장거리 행군에 꼭 필요한 요소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대신하고 있다. 

보호와 방향을 병행하는 기둥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 사랑, 능력을 경험한다. 

 

성경저자는 하나님의 염려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전쟁으로 인해 중도포기할 것을 염려하셨다. 

목이 곧은 백성 이스라엘. 

언제든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이스라엘.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그들을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더 충분히 신뢰하는 순간까지 염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노심초사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하고 걱정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오래참으시며 많은 은혜를 베푸신다. 

지적인 깨달음을 더하시고, 정서적 안정감을 주신다.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고 간구와 기도에 대해 특별한 응답을 주시기도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면서 천천히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시고, 

그 방향으로 인도하신다. 

 

자유를 말하면서 보호하지 않으면 약자들은 뒤쳐진다. 

자원과 네트워크가 풍부한 사람과 이제 막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자유 경쟁으로 내몰면 당연히 전자가 승리할 것이다. 

성장할 수 있도록 경쟁 생태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인큐베이팅 해야 한다. 

자원과 네트워크가 부족한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게 안되면 출산률은 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배려와 염려를 배워야 할 이유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 청년부 수련회가 있습니다. 

청년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의 배려를 경험하게 하소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청년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소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청년들이 되게 하소서. 

 

고통받는 이 세대 약자들을 돌보소서. 

보호종료 아동, 청소년, 청년들을 보호하소서.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소서. 

외국인 노동자의 삶도 살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냇가에 심은 나무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 14:15-31_홍해를 건너다  (1) 2023.02.28
출 14:1-14_바로의 병거  (1) 2023.02.25
출 13:11-16_어린양의 대속  (0) 2023.02.23
출 13:1-10_무교절 예식  (0) 2023.02.22
출 12:43-51_유월절 규례  (0) 2023.02.21

2018. 1. 28. 

 

0. 들어가며 

- 혜율이를 잃어버리다.

집 근처에는 제법 큰 공원이 있습니다. 중산마을에 있다해서 중산공원인데요. 트랙도 있고 인조 잔디 축구장도 있어서 많은 주민들이 이용합니다. 특히 아침저녁으로 무료 에어로빅 강좌가 열리는데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에어로빅 강사를 따라 춤을 춥니다. 

하루는 7살 짜리 큰 딸, 혜율이와 저희 부부가 어둑어둑한 저녁에 산책하러 갔습니다. 한살 짜리 혜강이를 유모차에 태우려고 이것저것 하던 사이에 음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혜율이가 에어로빅 하는데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보이지가 않는 거예요. 몇번 불러봤지만,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그 주변을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있는게 좋은가. 뛰어 다니는 게 좋은가?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정말 1분이 1시간 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0분정도 흘렀을까요? 아내 전화벨이 울립니다. 모르는 전화번호였어요. 한 여성분이 전화를 걸어 울고 있던 혜율이를 바꿔주었습니다. 다행히 혜율이가 엄마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던 겁니다. 십년감수 이럴 때 쓰는 말이죠. 

 

혜율이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서 배워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안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혼을 냅니다. 엄하게 꾸짖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때로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 소방관, 군인_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과 생명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주는 분들에 대한 삶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소방관들의 보호장비를 개인이 사서 착용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건 국가가 나서서 최고의 제품을 공급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생명을 지키고 안전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좀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예수님의 기도_제자들을 지켜주소서. 

요한복음 17장의 전체 내용을 압축하면 하나의 동사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바로 KEEP 입니다. 지켜달라는 그분의 기도가 11절과 15절에 분명히 등장합니다. 혜율이가 없어지고 몇분이 지나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달렸습니다. 주님 혜율이를 지켜주세요.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지켜주세요. 

 

1. Keep 동사의 전제_세상(11절, 15절)

- 지켜달다는 말이 전제로 놓고 있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입니다. 

11절에 보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켜달라’, ‘보호해달라’라는 기도가 작동하게 된 근원적인 상황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 남겨져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 부활하셔서 승천하게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상에 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고 세상에 남아서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속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 데려감을 당하는자 vs 남겨둠을 당하는 자_참고도서

마태복음 24:40-41, 이 본문은 마지막 날 있을 일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온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두 사람이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누가 구원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일반적으로는 데려가는 것이 구원받는 사람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 노아의 홍수와 유사성을 밝히면서 이 구절을 설명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은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다. 

나) 버려둔다의 단어는 단순히 남는다의 leave 동사로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서 아피에미(φίημι)는 ‘떠난다. 용서한다. 풀어준다. 허용한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부정적 의미보다 긍정적 의미로 볼 여지가 크다. 

다) 데려간다의 의미는 “재판에 회부된다”라는 뜻, 성경배경주석에 잘 설명되어 있다.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라) 병행구절 눅17:37, “주검이 있는 곳에는 또한 독수리들이 모여들 것이다”라고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심. 이는 독수리들이 모이는 곳에 죽어버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 즉 데려감을 당하는 자들의 장소는 독수리를 관찰하면 된다는 뜻.

 

여러가지로 볼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종말에 구원받는 사람은 세상에 남는자입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저주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 해석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건전한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 새롭게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미래 버전이 탄생할 겁니다. 

 

-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개념_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 

여러분!! 이 세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새로워질 뿐입니다. 사라지는 게 아니고 변형되는 겁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영혼들이 떠다니며 노래하는 세상이 아니라, 육체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일도 하며 춤도 추는 세상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주기도문에 잘 드러납니다. 그 나라는 이 땅에 임합니다. 

 

일상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우주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세워질 겁니다. 지구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수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일상과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게 중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에 대한 태도인 겁니다. 

 

- 중간기의 세상은 위험하다. 

그런데 이 남은 자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뤄지기 전까지의 남은 자들에게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중간기의 세상은 위험합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왕의 대관식이 성대하게 전세계적으로 전우주적으로 일어나기 전까지의 세상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사우론과 사루만, 우르크하이와 오크들이 반지원정대를 공격하고 세상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2. 무엇으로부터 지키는가?_악한 자에게서(15절) 

예수님은 악한 자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럼 악한자는 누구를 의미하는 걸까요? 

1) 사단 

첫번째는 사단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예민하게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 하신 이후에 예수님을 시험한 사단은 아주 달콤한 존재였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제안들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했죠.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해봐라. 무릎을 꿇고 절을 해봐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봐라. 돈, 권력, 명예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죠.지금은 고인이 되신 헨리 나우웬은 영성에 대한 책을 많이 내셨는데요. 그중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예수님이 이겨내신 사단의 시험을 상황부합의 시험, 권력확보의 시험, 이목집중의 시험이라고 정의내렸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적합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 힘을 키워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욕망,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이런 욕망은 세상의 길이라고, 무한히 상향성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귀신들이 종종 나타나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사단의 전략에 맞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영광받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숨기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종종 등장합니다. 

 

사단은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시험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들이 가진 내밀한 욕구들을 끄집어 내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유혹합니다. 제자들의 능력을 드러내어 자신들의 목표에 빨리 도달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자극할 겁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빨리 상황을 호전시키는 데만 혈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단은 교묘하게 우리의 은밀한 욕망을 자극합니다.

 

이 사단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주기도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악에서 구원하소서~~ 

 

2) 대제사장을 비롯한 성전 중심 유대교인들

둘째는 성전 중심의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사단이 조정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사단의 졸개들이라고도 하죠. 대표적인 것이 성전중심으로 사리사욕을 취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2번이나 성전을 뒤엎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역 1년차일때 뒤엎은 사건이 나오고요(요2:13-22). 나머지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는 사역 3년차때 뒤엎은 사건이 나옵니다. 전세계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옵니다. 일생에 한번 와서 제사드리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습니다. 참된 용서는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로만 이뤄진다고 믿었죠. 그러니 성전은 최고의 종교, 관광 상품이었습니다. 기득권이 어마어마했죠. 자릿세도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모든 돈이 성전의 최고 권력자들에게 들어갔죠. 성전 제사장들과 사두개인이 그들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서 멸망한 AD 70년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최고의 종교적 상징이자, 최고의 돈벌이 수단이었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지속적으로 예수믿는 사람들을 압박한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여전히 종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교회세습의 본질은 돈과 권력의 종교적 카르텔의 보호입니다. 유력한 목사 중심으로 돈과 권력이 집중됩니다. 단지 그 목사 한 개인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장로 권사 집사들이 일종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 됩니다. 그러니 가장 안전한 사람을 후임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세습을 버젓이 하는 것은 자신들이 종교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3) 바리새인을 비롯한 회당 중심 유대교인들 

그런데 성전 수호자들만 악한 게 아니었습니다. 세번째가 있는데요.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히며 신학논쟁을 펼쳤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존경받는 유대 지도자들입니다. 율법 준수에 탁월했습니다. 유대교 경전인 토라, 즉 모세 오경을 다 외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을 쫓아다니며 바울의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세계 곳곳에 회당이 있었는데, 곳곳마다 가서 그리스도인들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대교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도 악한 자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를 하라 하지 말라의 종교로 격하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 교육을 받아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도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켜서 종교적 행위에 가둬두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은 의무라기 보다는 즐거움이요 특혜죠. 주일예배도 특권입니다. 기도도 특권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모든 종교적 행위를 의무로 느끼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의미가 빠진 형식은 의무감만 남깁니다. 특권이 특권되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을 강요하기 이전에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대화하는 시간, 충분히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형식파괴자는 아닙니다. 다만 형식을 강요하기 전에 그 의미에 대해 오랜 시간 배우고 깨닫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4) 로마 

마지막으로 누가 악한 자입니까? 당시 절대권력 절대반지를 가지고 있었던 절대 제국 로마가 악한 자입니다. 황제숭배를 강요합니다. 여러 신들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만, 황제숭배는 필수였습니다. 네로 황제부터 시작한 로마의 박해는 도미티안 황제 시대가 되면 극에 달합니다. 요한복음이 AD80년대 중후반에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33년에서 85년까지 약 50년간 요한은 로마의 다양한 박해를 경험했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고,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끓는 기름에 튀겨졌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싫어하는 권력과 국가가 있습니다. 지금도 순교의 현장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합니다.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과격한 행동이 그리스도인들을 타겟으로 이뤄집니다. 교회가 불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탄압과 박해는 대체로 종교 그 자체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이유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극단성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건 기독교 극단주의자들도 유사하게 행동합니다. 정상적이고 온건한 종교인들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현대의 로마는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누구는 공산주의라고 부릅니다. 누구는 이슬람국가라고 합니다. 누구는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누구는 국가제도 그 자체라고 합니다. 

저는 자신의 신념을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것을 로마라고 부르겠습니다. 

극단주의자들, 그것이 종교든, 물질이든, 사상이든, 국가든 극단주의자들 그들이 로마요, 악한 자들입니다. 

그런자들이 폭력을 부르고 살인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런 악한 자들로부터 육체와 정신과 정서와 마음을 지켜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3. 나가며

- 세상에 남겨두신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살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기도는 악한 자에게서 제자들을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단의 유혹, 돈, 권력, 명예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종교 기득권자의 기독교 장악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종교적 행위에 가둬두려는 신학적 이단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로마로 상징되는 극단주의자의 박해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교회 즉 성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