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1. 김혁수 

 

[본문_베드로후서 3:8-18] 

8사랑하는 여러분,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주님께는 하루가 같고, 년이 하루 같습니다. 9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10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것입니다.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11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속에서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13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하늘과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있도록 힘쓰십시오. 15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16바울은 모든 편지에서 이런 것을 두고 말하고 있는데, 가운데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거나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것입니다. 17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사실을 미리 알고, 불의한 자들의 유혹에 휩쓸려서 자기의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18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십시오. 이제도 영원한 날까지도 영광이 주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설교]

0. 들어가며 

- 조롱하는 사람들 vs. 무관심한 사람들

1992 10 28, KBS, MBC, SBS, 외신기자들이 마포구 성산동의 건물에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한국 방송사에 길이 남는 황당한 생방송이 진행되었습니다. 다미선교회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휴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장림 목사는 92 10월에 28 휴거된다고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휴거를 기다렸지만, 12시가 지났는데도 모두가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휴거는 없었고, 속은 사람들의 분노와 허탈함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의 조롱 소리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례에 세기말적 종말론이 몰아쳤지만,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휴거니 재림이니 혹은 하나님의 심판 같은 개념들에 대해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관심을 주지 않게 됩니다. 그전에는 관심이 있으니 조롱도 하고 비웃기도 하고 나아가 비난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종교이야기를 꺼내면 한귀로 흘려보냅니다. 관심을 두지 않기로 결심한 보입니다. 

 

- 베드로의 고뇌

 초대교회에서는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중에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을 보며 놀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어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석될 수도 있는데, 때의 제자들이 박해로 죽고, 나이들어 죽고 있는데, 여전히 오시지 않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은 점점 드세지고 설득력을 얻는 같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 마지막 당부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함께 성경을 읽어 볼까요? 

 

1. 그날이 늦어지는 이유

베드로는 그날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가지 설명을 붙입니다. 

 

1) 하나님의 시간 개념(8) 

첫째,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우리의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겁니다. 시편의 90:4절을 인용하고 있는데요. 시간을 만드신 , 영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의 시간 개념과 다르게 생각하실 있다는 점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상대성이론의 아이디어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중력에 의해 시간이 휘어질 있다는 사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움직이게 되면 시간이 멈춘다는 사실 말이죠.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었던 겁니다. 

 

우리의 인식과 하나님의 인식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의 시간 개념에 꿰어 맞추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땡깡과 비슷합니다. 

 

2) 회개와 구원을 위해(9, 15) 

둘째, 그날이 늦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9절과 1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9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15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멈추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라고 심판을 연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한 말씀을 적이 있었는데요. 로마서 2:4절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롬2:4) 

 

사실 저는 내용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되기도 하고 되기도 합니다.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믿는 사람들도 많아지지만 어쩔 없이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지는데, 그럴바에 빨리 오셔서 심판에 넘겨지는 사람이 줄어들게 하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질문에 갇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마도 날이 늦어지는 이유가 이게 다가 아닐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소원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유만으로 그분의 재림이 혹은 심판의 날이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해보입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우리가 그분의 뇌를 들여다 없다는 사실 말이죠.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때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림의 때를 결정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오실 수도 있겠죠. 

 

베드로는 그런 여러 가지 이유들을 설명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가지에 집중했던 거죠. 하나는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열망이었습니다. 저도 오늘은 가지에 집중해서 말씀드리는 좋겠습니다. 

 

2. 도둑같이 vs. 앞당기자

그런데, 재림의 때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크게 가지 신앙 양상을 띄는 같습니다. 하나는도둑같이 신앙입니다. 다른 하나는앞당기자' 신앙입니다. 

 

1) “도둑같이 신앙

먼저, 도둑같이의 신앙이 있습니다. 

 

10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도둑같이의 신앙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와 하나님의 심판의 때는 인간이 파악할 없다는 겁니다.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날짜와 시간을 알지 못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도둑같이 어느 순간 갑자기 임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손에 달렸다고 인정합니다. 문제는 인정이 도를 지나쳐서 우리의 역할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렸다고 하면서 인간적 노력의 포기를 선언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겁니다. 

 

에이, 어차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잖아요. 우리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죠

이렇게 말하는 신앙이 있을 있습니다. 

 

2) “앞당기자 신앙

도둑같이 신앙과 조금 다른 신앙이 있습니다. 바로앞당기자 신앙입니다. 

 

11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날을 앞당기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소리를 내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재림의 때를, 심판의 때를 앞당길 있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예스, 그럼요. 우리가 앞당길 있습니다. 단순히 기다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때를 앞당길 있습니다이렇게 대답할 확률이 더욱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으면 그날은 오게 겁니다. 그날이 오게 되는 조건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베드로가 제시하는 것은구원받는 사람들의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144,000명의 수와 관련이 있을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 24:14)

 

이렇게 성경은 앞당기자의 신앙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이 생각하신 조건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날과 시를 정하실 때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충족하는지 최종적으로 살피실 겁니다. 조건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겸손하게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최종 결정은 그분이 하시라고 그분의 왕되심을 인정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인간의 조급성과 성경 해석의 편협함이 시한부 종말론을 만들거나 혹은 재림을 위한 선교 목표를 정해서 자신의 부르심 이상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는 거죠. 이게 앞당기자 신앙의 부작용입니다. 

 

도둑같이 신앙이나 앞당기자 신앙이나 부작용이 찾아올 있습니다. 나태하게 기다리기만 한다거나 조급하게 행동주의에 빠진다거나 있는 거죠. 그럼 베드로가 생각하는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은 무엇인가요?  

 

3. 현재를 위한 베드로의 권면

- 관심의 변화_미래에서 현실로

첫째, 우리의 관심을 미래에서 현실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베드로야 말로 누군가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부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를 찾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아침밥을 먹이시고, 산책을 하기 시작하시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번이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죠. , 예수님은 베드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려주십니다. 어떻게 죽게 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가 뒤를 돌아다보면서 요한의 미래와 죽음은 어떻게 되는지 물은 겁니다( 21:21).  베드로는 누군가의 미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질문은 하는 모습이 그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는 미래 자체보다 현실을 중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1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14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날과 시는 우리가 없습니다. 최종결정은 그분이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현실 세계 속에서 거룩한 행실, 경건한 ,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도록 힘써야 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현실에서 힘을 쓰는 겁니다. 미래를 예측하며 그날을 계산하는 힘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죠. 성령님을 의지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겁니다. 실패하더라도 노력하는 겁니다.  

 

- 인내와 열정

둘째, 인내와 열정입니다.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라는 말이죠. 수많은 조롱이 있고, 심지어는 무관심이 팽배해져서 우리의 믿음이 약해질 , 재림의 때를 믿고 인내하라는 겁니다. 동시에 앞당기기 위해 열정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준에서 시기를 앞당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라고 권면하고 있죠. 

 

기디리고 앞당기기, 인내와 열정, 개념이 붙어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인내는 소극적으로 참는 것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부동자세로 오래 버티는 것을 상상하게 합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디는 것을 그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내에 멈추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앞당기기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진취적으로 뭔가를 계획하고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하라는 거죠. 역동성이 넘칩니다. 창의적인 생각들이 마구마구 쏟아집니다. 

 

인내는 열정을 만나고 열정은 인내를 만나야 열매를 맺습니다. 열정없는 소극적 인내는 자칫 나태한 회피 혹은 도피로 있습니다. 인내 없는 극단적 열정은 열광주의, 분파주의, 인간 중심 주의, 세속주의로 있습니다. 둘의 극단을 벗어나야 합니다. 인내와 열정이 만나야만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 생활을 있습니다. 

 

4. 나가며 

- 앞당기기

요사이 청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청년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때와는 달리 혹시 너무 미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실 미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미래,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의 날에 대한 관심이런 미래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너무 줄어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조롱을 우리도 모르게 내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렇게도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청년부는 인내와 열정 중에 어느 것이 부족할까? 아마도 열정이 조금 부족해보였습니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과 역할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사명과 역할을 우리는 쉽게 망각하고, 현실의 문제로 덮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내는 잘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이 약할 있다고 봤어요. 혹여 우리가 열정이 부족한 것이 맞다면, 우리에게 날을 앞당기기 위한 열정을 갖게 달다고 기도해야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가 우리의 뇌리와 마음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지치지 않는 인내와 열정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고 앞당기는 일에 헌신할 있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의 조롱과 무관심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나요?     

 

2. 우리 공동체가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노력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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