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15. 김혁수 

 

[본문_누가복음 24:25-35] 

25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26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27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28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멀리 가는 척하셨다. 29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30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31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33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34모두들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시몬에게 나타나셨다하고 말하고 있었다. 35그래서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일을 이야기하였다.

 

[설교]

0. 들어가며 

-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8 ,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가르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비유의 언어로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자기 부인과 제한에 대해 배웠습니다. 반대자와도 수평적으로 소통하시면서도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인격적인 모습도 배웠습니다. 그럼 오늘은 통합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하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통합은 인간의 전영역, 지정의의 영역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머리만 키우는 강의 아닙니다. 감정만 풍성하게 만드는 콘서트 아닙니다. 강인한 의지를 훈련시키는 해병대 훈련소 아닙니다. 머리와 가슴과 손발 동시에 반응하고 변화됩니다. 그것이 그분의 가르침이 가지는 통합적 요소입니다. 그런 그분의 가르침을 가장 보여주는 본문이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볼까요? 

 

- 글로바 부부와 낯선 사람

오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서만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돌아가신 삼일이 지났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갑니다. 예루살렘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2-3시간 정도 걷는 거리입니다. 제자는 오후에 예루살렘에서 출발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글로바와 그의 아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명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일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학자들의 의견을 따라 글로바 부부가 예루살렘 성에서 빠져나와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이 그들의 뒤를 쫓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에 있었던 엄청난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야기를 해줍니다. 게다가 부활했다는 여인들의 소식도 함께 말해줍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누가복음 24:24) 

 

글로바 부부의 말에 낯선 사람이 반응합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시 읽어볼까요. 

25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26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낯선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만,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전체에서 메시야가 고난을 받은 뒤에 왕의 영광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오늘은 이야기 전체를 자세하게 살펴보지는 않겠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치셨는지에 집중하겠습니다. 가지 요소가 그분의 통합적 가르침에 녹아 있습니다. 

 

1. 성경을 풀다_

- 길에서 성경을 풀다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계관을 바꾸는 지식을 전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모든 내용을 고난받아 죽고 다시 영광에 올라가는 메시야라는 관점에서 풀어주셨습니다. 

27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32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은 열심히 모세의 글과 예언자들의 그리고 구약 성경 전체에서 메시야와 관련된 글들을 인용하시면서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설명했습니까? 그것은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는 , 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사실 엄청난 고난과 아픔을 겪고 나서 후에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새로운 성경 읽기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익숙하던 성경 독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 왕의 자손이 일어나 무너진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울 것이라는 관점이었습니다. 구원자 메시야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전세계를 통치할 여호와 제국 세우는 정치 군사적 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경해석과 역사해석은 확고부동했습니다. 오랜 세계관이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이었습니다. 이걸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이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종교적 의식과 결합한 견고한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경 독법, 성경 해석에 금을 내셨습니다. 성경을 폐기처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새롭게 읽도록 만드신 겁니다. 성경을 새롭게 풀어내셨습니다. 이건 엄청난 지성인만이 있는 일입니다. 기존의 세계관을 뒤흔드는 새로운 성경 해석, 성경 읽기 가르쳐주셨습니다. 

 

- 세계관을 바꾸는 지성의

엠마오로 내려가던 글로바 부부는 엄청난 지식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키는 지식입니다.   

 

예수님의 통합적 가르침에는 이런 막강한 지성의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 전달하는 지성의 능력이 그분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글로바 부부는 성경을 새롭게 있는 눈을 가지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경 전체를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하고 바라볼 있는 관점을 배워야 합니다.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이야기가 어떻게 예수님께로 연결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단순히 에피소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야기의 흐름이 어떻게 예수님께로 향하는지 있는 키워야 합니다. 성경 지식은 그런 면에서 중요합니다. 

 

2. 마음이 뜨거워지다_

- 마음이 뜨거워지다

둘째,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감정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식의 전달에 머물지 않습니다. 다시 글로바 부부의 간증을 들어볼까요. 

 

“32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길에서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 메시야의 실체를 구약 성경 전체에서 밝히 보여 주실 , 그들 마음 감정의 변화 있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랜 의문이 해소되었습니다.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이 감정을 건드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 다시 불붙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따라다녔던 예수님의 실체가 성경을 통해 밝혀지자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던 자신들의 무지와 불신앙에 대한 회개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 것입니다. 감동이 몰려오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붉어 집니다. 

 

-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어제 휴가를 맞아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이라는 에니메이션을 보았습니다. 용과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던 세상에 악의 세력인 드룬 사람들과 용을 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용들의 희생으로 용의 마법이 완성되어 가까스로 사람들을 보호하지만, 사람들은 5개의 나라로 나뉘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싸움이 다시 드룬 되살려서 이제는 모두가 돌이 상황에 놓였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스포가 되니까 배경설명만 드렸습니다. 중간에 저와 딸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간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발 다시 용과 사람들을 되살리는 구원의 반전이 있기를 말입니다. 간절함이 저도 모르게 눈물로 바뀌었습니다. 

 

- 구원과 회복에 대한 갈망 그리고 감동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감동을 받는 ,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는 ,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아주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나와 우리 이웃과 세상의 회복,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고 갈망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에 반응하게 됩니다.  

 

- 가지 원인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부족하신가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성경의 전체 스토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럴 있습니다. 성경의 단편적 에피소드만 가지고는 웅장하고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인식할 없으며 따라서 감동받기도 어렵습니다.  둘째, 감정에 상처를 받아서 그럴 있습니다. 오랫동안 감정의 문을 닫아왔거나 감정을 드러냈을 무시당하거나 모멸감을 느꼈왔거나 하는 경우에 우리는 감정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렇게 되면 감동받기 우리의 몸이 거부합니다.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성향상 감동 받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 전체 스토리 라인을 되새길 필요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의 상처를 심리 상담이나 공동체적 회복 프로그램이나 깊이 있는 기도를 통해 치료받을 필요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감정이 되살아나면, 성경이 예수님을 향해 흐르고 있음에 대해 감동이 찾아옵니다. 물론 때로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면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겠죠. 성령님에 대한 간구도 필요 것입니다. 

 

3.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다_ 

- 밤길 11Km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행동의 즉각적 변화를 낳았습니다. 그들의 의지에 영향 주었다는 것입니다. 33절을 읽어볼까요.

 

 33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엠마로 마을, 자기의 집에서 성경을 풀어주셨던 그분과 함께 식사를 시작할 , 손님의 축복과 빵을 떼시는 장면에서 그들은 손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순간 사라집니다. 그리고 글로바 부부는 예수님이 풀어주신 성경이야기, 그리고 길에서 이야기를 들을 느꼈던 뜨거움에 대해 나눔을 하다가, 밤에 다시 결심을 합니다. 무엇을 결정하죠? ,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말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과 엠마오 마을 사이는 11킬로미터 정도가 됩니다. 다시 돌아가기가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지만, 저녁 무렵에 길을 떠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한국은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그렇게 무섭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그래도 안전한 편입니다. 시애틀에 사는 친구와 대화할 기회가 최근에 있었습니다. 시애틀은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밤에 공원을 거니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말해 주더군요. 이유는 노숙자분들이 공원에 너무 많고, 게다가 마약 거래가 일어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의지와 열정

여러분, 예수님 시대에 밤에 여행을 떠나는 일은 더욱 위험한 일이었을 겁니다. 강도가 많았습니다. 산짐승도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글로바 부부는 길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왜요? 그들이 만난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낙담한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깨달은 지식과 받은 감동을 나누고 싶었던 겁니다. 그들의 의지가 강하게 발동되었습니다. 의지와 열정이 행동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4. 나가며

- 통합적 가르침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통합적입니다.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는 지식 전달하십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세상 회복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의 이야기 우리에게 감동 줍니다.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와 열정을 발동시켜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돕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통합적 성격입니다.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첫째, 과연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는 지식, 구원과 회복에 대한 감동,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의지와 열정, 지정의가 동시에 영향을 받아 우리 존재가 바뀌는 그런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까? 그런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나요? 

 

번째 질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지정의가 통합적으로 영향을 받는 방식의 가르침을 주고 있나요? 예수님을 닮아 인격 전반에 영향을 주는 진리와 감동과 결단 일으키는 가르침을 주고 있나요? 청년들에게, 청소년들에게, 어린이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이런 배움과 가르침이 가득한 공간이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연구하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도입하는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온라인 환경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칠 있는지 실험하고 도전하는 우리 청년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련회가 다가옵니다. 온라인 환경에서 맞이하는 세번째 수련회입니다. 작년에는 캠프식 수련회 대신 구약 개론을 함께 배웠습니다. 초에는 줌을 이용해 온라인 수련회를 열었습니다. 여름 유툽과 줌을 이용해서 나를 찾아가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송청 투어 열려고 합니다. 온라인 수련회가 과연 통합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반영할 있을지는 기대 , 걱정 반입니다. 그럼에도 참여해주셔서 실험과 도전을 함께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의 통합적 가르침에 노출되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는 지식, 감정을 건드리는 감동, 결단과 행동에 이르는 의지와 열정에 노출되어 우리의 존재가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변화되는 경험을 위해 기도합시다. 

 

2.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통합적 가르침을 본받아 전세대를 교육하고 양육하는데, 지혜를 모으고 함께 양질의 프로그램을 개발 혹은 도입하는 일에 노력할 있도록, 그런 기회를 달라고 함께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가르침 혹은 교육에 대해 생각할 , 지식, 정서, 의지 어떤 것에 강조점이 있다고 생객해왔나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감정,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은 우리의 결단과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021. 8. 8. 김혁수 

 

[본문_누가복음 10:25-37]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27그가 대답하였다.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고,  ‘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28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것이다.”

29그런데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이웃이 누구입니까?” 30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31마침 어떤 제사장이 길로 내려가다가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이와 같이레위 사람도 곳에 이르러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가까이 가서,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35다음 , 그는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하였다. 36너는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설교]

0. 들어가며 

- 인격적으로 가르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오늘은 예수님의 가르침 번째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적으로, 인격적으로, 통합적으로 가르치시는 분임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에는 성육신적으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유로 말하시는 행위 자체가 지극히 성육신적임을 확인할 있었습니다. 오늘은 인격적으로 가르치시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을 함께 읽어 볼까요? 

 

1. 적의를 가진 자와의 소통 

- 시험하다(25)

오늘 등장하는 율법학자의 생각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그는 진리를 갈구하는 정직한 질문자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서 예수님의 실체를 폭로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밤늦게 예수님께 찾아와 물었습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요한복음 3:4)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3:15-16)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같은 진실한 질문자에게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답변해주셨습니다. 이런 내용을 소문으로 들은 오늘 본문의 율법학자는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있을까요?”

여러분 당시 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독립과 전세계 통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속국 신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왕국을 만들어 전세계를 호령하는 유대제국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일은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로부터 일어난다고 믿고 있었죠. 그런데 지금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주장하면서 심지어는 자기를 믿어야 영생, 영원한 삶을 얻을 있다고 말하는 촌뜨기 선생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겁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가 율법학자임을 알고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요?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읽고 있나요?” 

그러자 율법학자는 대답을 하는데요, 같으면아니 생각이 중요한 아니고 선생님의 생각이 듣고 싶은 겁니다이렇게 예수님을 강하게 압박했을 같은데, 그는 생각보다 허영심이 강한 율법 선생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에 대해 절대 그냥 흘려 보내지 않습니다. 항상 그는 대답하는 위치에 있었거든요. 

 

27그가 대답하였다.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고,  ‘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말이 옳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하고 당황하게 의도를 가진, 그러니까 적의를 가진 똑똑한 지도자의 질문을 그냥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 자기를 옳게 보이다(29) 

뿐이 아닙니다. 율법학자의 태도를 보여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29절입니다. 자기 말이 옳다고 인정을 받고 나니까 이제는 세상의 관심을 받고 있는 당시 슈퍼스타 예수님보다 자신이 훨씬 옳고 대단한 선생이라는 사실을 뽐내고자 다음 질문을 이어갑니다. 그의 질문의 태도는 여전히 진정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율법학자의 이웃은 동료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을 벗어난 다른 인종과 민족은 그의 이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상하게 사마리아 사람들과 어울리고, 죄인들과 이방인들과도 식사를 같이 하는 , 당시 평범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는 도리어 예수님을 가르치고 싶었을 겁니다. 일단 질문을 던지고, 만약 예수님이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으면 줄줄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는 비유를 들어 그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주십니다. 그게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비유입니다. 내용은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게요.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좋은 태도가 아닌 율법학자 아니 적대적이고 위선적인 율법학자와도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뿐만 아니라 매우 적절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클라스입니다. 저라면 벌써 손절하고 쌩까고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아님 기적을 보여줌으로써 꼼짝달싹할 없을 정도로 기겁하게 해서 신적 권위에 놀라 무릎꿇고 싹싹 빌게 만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적의를 가진 자들과도 진실하게 대화해 나가십니다. 이것이 인격적이라는 말의 번째 의미입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과의 수평적 소통, 수평적 대화입니다. 반대자들과도 이렇게 수평적으로 대화하신다면 옹호자나 중립적인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욱 수평적으로 대화하시겠습니까? 

 

=> 반대자와의 수평적 대화

우리가 누군가를 가르칠 , 모든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나를 신뢰하면서 경청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때로는 나를 반대하기 위해, 약점을 찾기 위해, 비평하고 비난하기 위해 말을 기록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때로는 짓궂은 질문이나 나를 무시하는 질문들을 마구 던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격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대화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질문에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천천히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적절한 화법을 구사하기 위해 중심을 잡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반대자와도 수평적 대화, 수평적 소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격적 가르침을 본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2. 공감되는 설명

그럼 이제 인격적 가르침의 번째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공감되는 설명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비유는 자체로 너무 유명해서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비유가 얼마나 율법학자에게 얼마나 공감되는 상황 셋팅이었는지에 집중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여행

먼저, 비유는 예루살렘으로 왕복 여행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도중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매년 예루살렘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전국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일종의 의무였습니다. 그들에게 여행은 영적 여정에 아주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고무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예수님도 지금 여행중이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누가복음 9:5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도 종종 예루살렘을 왔다갔다 했을 겁니다. 그래서 아주 아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혼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렇게 아는 상황을 비유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공감대 형성에 진심이셨습니다. 

 

-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를 알고 계셨고, 그걸 비유의 모티브로 사용하십니다. 율법학자도 충분히 공감가는 내용이었고, 당시 이야기를 듣는 모든 유대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는 어떤 영에 속해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 인자가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여 함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누가복음 9:52-56)

 

예수님이 오시면서 겪었던 일화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미리 사람을 보내 숙박 시설을 잡고 음식을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좋은 분으로 이미 소문이 많이 났었습니다.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한복음 4) 이후에 예수님은 제법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소리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환심을 끌고 싶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요. 사마리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았나요? 그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니까 그런겁니다. 정통 유대인으로 낙인을 찍은 것이지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의 오랜 갈등과 혐오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상황을 오늘 본문의 율법학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공감가는 비유를 사용하신 겁니다. 

 

- 제사장, 레위 사람 그리고 사마리아인 

게다가 율법학자에게 제사장, 레위사람은 너무나 친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항상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존경하고 존중했습니다. 율법 준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 중심 유대교를 유지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일반적인 행동 패턴도 쉽게 이해를 있었습니다. 홀로 여행하는 중에 강도 만나 죽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때마다 시체를 만지거나 거둘 없었습니다. 율법에서는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어 제사의 직분을 감당할 없게 됩니다. 그들의 밥벌이가 위협을 당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곤란한 상황을 만들기가 싫어서 죽은 보이는 사람을 멀찌감치 피해서 다닙니다. 봐도 못본척 그렇게 지나갑니다. 그걸 율법학자는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 공감대 형성

이렇듯 예수님은 율법학자가 쉽게 이해할 있는 상황을 비유로 풀어가십니다. 탁월하게 공감대를 만들어 가신 겁니다. 공감대 형성의 대가이십니다. 아마 사마리안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예수도 정확히 알고 있구만. 나의 이웃은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지, 그들이 종교적 의무를 행하기 위해 어쩔 없이 하는 행동에 대해 이해해주는 , 그들을 변호하는 것이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방법이야.”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듯 율법학자의 기존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십니다. 공감대를 극대화하는 것이죠. 이것이 예수님의 인격적으로 가르친다는 번째 의미입니다. 수평적 소통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함으로 가르침의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상대방을 나의 경험으로 끌고 들여오기 위해 억지로 끌어 당기기 않습니다. 오히려 공동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십니다. 

 

3. 포기하지 않는 기준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다가간다고 해서 그분의 기준이 무너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를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이 인격적 가르침의 번째 의미입니다. 

 

- 그대로 행하여라(28)

28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해주시면서, 동시에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대로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세상에 내려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순간에 하나님을 몰라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웃을 사랑한다면, 같은 유대인인 예수님을 굳이 시험하면서 곤경에 빠뜨리려는 이런 비열한 행동과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가 왔습니다. 그가 아는대로 행동할 때가 왔습니다.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37)  

37절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보여주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람을 도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사마리아 사람들이든, 죽음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냐고 물어본 사람이 이웃의 생명을 가벼이 여긴다면 이것은 위선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 소통과 기준

이렇듯 예수님은 그분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웃의 바운더리를 자기 가족, 친족,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이렇듯 원대합니다. 수평적으로 대화하여 소통하고, 상대방의 상황에 공감하며 설명한다고 해서, 기준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지식과 행위에 있어 높은 기준을 유지합니다. 결국엔 그걸 가르치시는 것이지요. 

 

4. 나가며_인격적으로 가르치기 

- 소통과 공감 그리고 기준

인격적 가르침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풀어낼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저는 적의에 반대자와의 수평적인 소통과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공감되는 설명, 그리고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기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때로 우리가 삐딱하게 반응하고 그분의 생각과 뜻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우리와의 수평적인 대화와 소통을 멈추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황을 너무나 아시기 때문에 종종 우리의 경험 속에서 배울 있는 환경을 조성하십니다. 하늘에 글씨를 써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온전함에 대한 기준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에 대해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적 가르침의 태도를 배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위에 차이가 생길수록 수평적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힘듭니다. 서로에게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경험의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기준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기준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배우고 가르치는 존재들입니다. 당장은 배우는 것에 시간이 많이 할애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우리는 누군가를 가르치게 됩니다. 떠올립시다. 수평적 소통과 공감적 설명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기준을 가진 인격적 가르침의 태도를 끝까지 붙들겠다고 말입니다. 유치부, 아동부, 그리고 중고등부 선생님들은 사실을 잊지 말고 교회에서 실천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그분은 우리와 다정하게 수평적으로 대화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황을 아시고 공감하시면서 설명하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가지고 있는 높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기준은 여전히 자리에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인격적 가르침에 우리의 마음을 엽시다.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좋은 선생님이십니다. 사실에 마음을 열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읍시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2. 때로 우리는 자기 한계에 갇혀 위대한 선생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 그저 내가 설정해 놓은 바운더리,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서 넓은 마음으로 자라나도록 많은 사람을 품을 있는  데까지 나아갈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적의에 반대자와 대화하고 소통할 ,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나요?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나요?        

 

2. 성경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중고생들을 인격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 어떤 컨텐츠, 어떤 기술들이 필요할까요? 

 

 

[본문_누가복음 8:4-15] 

4무리가 많이 모여들고, 고을에서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오니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5“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먹기도 하였다. 6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니,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7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 8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배의 열매를 맺었다.” 말씀을 하시고예수께서는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외치셨다.

예수의 제자들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를 그에게 물었다. 10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이다.”

11“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2길가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뒤에 악마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13돌짝밭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동안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설교]

0. 들어가며 

- 예수님의 가르침 시리즈

8월의 시작입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휴가계획 세우는 것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휴가를 떠나야 하는데, 그게 떠오르질 않습니다. 그나마 요사이 도쿄 올림픽 덕분에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끼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인 김제덕 양궁 선수의 우렁찬 화이팅에 갑자기 울컥하기도 하고요, 배드민턴 여자 복식의 김소영 공희용 선수가 일본 팀과의 접전에서 듀스를 여러 차례 만들면서 결국 이기는 장면에서는 초긴장을 느꼈습니다. 어제는 아쉬움 그리고 역전의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 저녁이었죠.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감동이 됩니다. 부디 건강하게 안전하게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7월의 마지막 당부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라는 바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명령을 받고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중 하나가 과연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치셨나 궁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8월에는 예수님의 가르침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 가르침의 방법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핵심은 단어로 표현할 있을 같아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방식입니다. 성육신적이라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죠. 인격적이라하면 가르치는 대상과 수평적 소통 속에서 공감하며 가르친다는 의미입니다. 통합적이라는 말은 지식 전달만이 아니라 인격과 전체에 영향을 주는 가르침을 목표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8 4-15절입니다. 

 

1. 대상_많은 사람들(4)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조금 다르게예수님의 평지 설교 싣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 17-49절까지 내용이 나오는데, 내용을 오늘 다루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무리를 이루고,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무리를 이루었다.”(6:17) 

 

모였을까요? 평지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수천명은 모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5천명이나 모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만 5천명이니 여인과 어린이를 포함하면 명이 훨씬 넘었을 겁니다. 그러니 아마 평지에서도 최소 수천에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을 수도 있습니다. 정도가 아니더라도, 백명이 모여도 대단한 아닌가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산상수훈의 축소판의 설교를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평지설교에서는 상당히 구체적인 명령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서 설교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그러나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은, 기초없이 위에다가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물살이 집에 들이치니, 집은 무너져 버렸고, 집의 무너짐이 엄청나다” (누가복음 6:49)

 

그러니까 수백에서 수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시는 것으로 설교의 마지막을 장식한 겁니다.  

 

2) 예수님의 활동(8:1-3) 

그리고 예수님은 여러 마을과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케리소인데요. 마을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의 전령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겁니다. 

 

뒤에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그리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8:1-3)

 

일에 제자들도 참여하고 있고요. 일을 돕기 위해 여인들도 발벗고 나섭니다. 여행 경비를 후원하기 시작합니다. 직접 따라다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3) 어마어마한 무리들(4)

이렇다보니 어느새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고을에서 마을에서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였죠. 그런데 예수님은 더이상 평지 설교 같은 직접적인 율법과 명령을 제시하는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죠. 바로 비유라는 방식입니다. 

 

2. 가지 (4-8)

좋은 밭이 되어라라고 권면하거나 가르치지 않으시고, 아마도 바울이라면 그렇게 했을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여러 종류의 밭을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내용은 너무나 유명하니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좋은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립니다. 더러는 길가에 뿌려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밟거나 하늘의 새에 쪼이게 되어 씨가 죽거나 사라집니다. 어떤 씨는 돌짝밭에 뿌려집니다. 흙이 얕아서 싹이 나는 순간 햇볕에 말라 비틀어져 죽습니다.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뿌려집니다. 싹이나고 자라나지만, 가시 덤불이 성장을 막습니다. 충분한 햇볕을 받지 못해 열매까지는 맺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뿌려집니다. 씨앗은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비유의 해석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당시 씨를 뿌리는 농부라면 대부분 쉽게 이해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현상과 농사 짓는 현실이 그러하기에 쉽게 이해한다는 것이지, 예수님이 이야기를 갑자기 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야기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궁금해서 묻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씨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씨가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사단이 와서 말씀이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아예 빼앗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에 도달하는데 실패합니다. 씨가 돌짝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말씀의 뿌리가 없거나 약해서 시련과 고난이 오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가시덤불은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지만, 일상을 살면서 많은 근심과 걱정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한 걱정과 쾌락에 대한 추구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좋은 밭은 말씀을 듣고 믿음의 뿌리를 내려,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일상의 걱정과 돈벌이의 근심과 쾌락의 유혹을 이겨내어 결국엔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엄밀히 말하면 마지막 좋은 밭의 사람들이 구원받는 사람들이 것입니다. 가시덤불의 사람들이 구원에 도달할지는 약간 미지수입니다. 믿음을 떠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2) 모를

처음에 비유를 들었을 여러 마을에서 찾아온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해 봅시다. 평소에 많이 보던 내용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씨앗을 뿌리는 행위야 모두가 번쯤은 경험해 봤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는지는 이해가 안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3) 숙명론 vs 자기 결정론

말씀을 듣고서 이런 질문이 있을 겁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밭을 개간해서 뿌릴 생각은 않고 아무데나 뿌리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같은 땅에다가 씨를 뿌린 사람이 잘못이라는 의견입니다. 숙명적으로 정해진 밭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 방치한 농부의 잘못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숙명론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칠 나오는 현상에 대한 겁니다. 현상을 보니 이러저러한 반응이 나오는데, 현상의 이유가 4가지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이런 관찰을 했을까요? 그건 이미 평지 설교를 마치고 어마어마한 사람들 중에 실제로 열매를 맺는 믿음을 갖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 소수임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미 언급해 드렸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재정으로 지원하는 여인들은 예수님의 선포를 믿고 그에 따른 헌신과 기여를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좋은 밭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평지 설교를 듣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3/4 그런 같습니다.

 

오늘 비유는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봐도 좋습니다. 평지 설교의 마지막에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강력한 비유로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열매맺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가지 밭의 비유를 하심으로써 다시 찾아온 무리들에게 새롭게 다가가는 겁니다. 어려운 윤리를 말하기보다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씨앗뿌리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친숙함과 의문 동시에 갖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3. 제자와 무리(10)

1) 비밀을 알도록 허락된 사람들 

비유를 처음 들었던 당시의 수많은 무리들은 대단히 당황했을 겁니다. 비유를 말해 놓고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해했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도 무슨 말인지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따로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따로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 주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 감춰져 있는 비밀 

하나님 나라는 비밀스런 요소가 있습니다. 특히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에는 더욱더 비밀스러웠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예수님의 선포는 매우 인상적이었죠. 예수님이 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아 버렸잖아요.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는 전통적인 통치자에 의해 형성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들처럼 숱한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대량살상해서 만드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라였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 매우 비밀스런 과정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무나 알게 수는 없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지는 비밀이었습니다. 

 

3) 비밀이 폭로되기 전까지

비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일어나면 전세계에 온전히 폭로될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숨겨져야 했습니다. 알린다고 해서 알아들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없는 상황에서 화를 내며 모르냐고 꾸중하는 것은 가르침의 태도가 아닙니다. 비밀이 폭로되기 전까지는 그들이 알아들 있을 정도로만 설명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겁니다. 그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겁니다. 여기에 성육신적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4. 비유로 가르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에게 친숙한 언어를 통해 그들이 내용에 쉽게 도달하도록 그림 언어를 사용하신 겁니다. 윤리적 명령이나 율법적 규정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능하면 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을 사용해서 그들이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셨다고 , 우리는 가지 알아야 사항이 있습니다. 

 

1) 언어

첫째는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언어를 쓰셨다는 겁니다. 아람어, 히브리어를 쓰셨습니다. 씨와 밭의 종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단어들이요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굳이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그저 그분의 방식으로 표현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의 언어 쓰시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자신들의 경험에 갇혀 있습니다. 

 

한국어의 특징에 대해서 많은 외국인분들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의성어 의태어 쓰는 것에 대해 그렇게 놀라하더라구요. BTS 노랫말 중에소복소복 들어가는 노래가 있나봐요. 외국인들이 소복소복을 어떻게 영어로 해석해야 하는지 난감해 하면서 한국어의 의태어에 대해 아름답다고까지 평가하더라구요. 소복소복을 falling falling 으로 번역했어요. 그러나 눈이 적당량으로 쌓여가는 모습을 담은 소복소복의 의미와 말의 반복에서 오는 아름다움은 다른 언어로 표현이 안된다고 합니다. 색깔도 그렇죠. 우리는 푸르스름하다, 푸르다, 파랗다. 샛파랗다 등등 가능하면 색상의 채도에 따라서도 이름을 붙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어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죠. 

 

예수님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기로 결정하신 자체가 성육신적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언어로 포착할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히브리어로도 헬라어로도 그분의 존재를 담아낼 없습니다. 그분의 뜻과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의도를 온전히 담아낼 있는 언어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분이 인간의 언어를 쓰시지 않는 인간은 그분의 뜻에 도달할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언어적으로 성육신적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2) 이해

둘째,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들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셨습니다. 완벽한 이해는 어차피 도달할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조차도 항상 어리둥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 속에서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방식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이해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 최대한 활용하십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당시 농부의 일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셨습니다. 

 

아웃백 같은 패밀리레스토랑들이 처음 생겼을 , 놀랐던 것은 서빙보는 분들이 테이블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들은 손님들의 눈높이 자신들의 눈을 맞추었습니다. 비지니스적으로 히트를 쳤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사람의 경험과 상황을 최대한 고려해야 합니다. 속에서 내용도 방식도 도출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주의 창조자되신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들의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알고 그들과 공감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직접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해를 위한 성육신. 이것이 예수님의 삶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3) 한계 

셋째, 예수님의 비유로 가르치심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것은 예수님의 언어와 이해를 위한 노력해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계가 있다 겁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런 예수님의 성육신적 태도와 내용에 마음을 열지 않으면 어쩔 없다는 점입니다. 자기 마음을 길가, 돌짝, 가시덤불로 방치한다면 예수님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지 못하시기로 결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억지로 길가에서 돌짝밭으로, 가시덤불로, 좋은 밭으로 바꾸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력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라 억지로 기계를 들여와서 마음의 밭을 갈아 엎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마음 밭의 최종 결정은 인간들의 허용입니다. 사람들의 의지 필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래서 하나님과 사단의 오랜 전투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성육신적인줄 아십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스스로 그들의 마음을 좋은밭이 되고자 결정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힘과 능력의 100% 쓰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마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죽기까지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힘을 것입니다. 한계를 최대한 가지고 가시려는 그분의 노력이 지극히 성육신적입니다. 

 

4) 성육신적 가르침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시고, 사람들의 경험을 활용하셔서 이해를 도모하시고, 모든 인간적 한계를 안고서 노력하신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지는 성육신적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분의 성육신은 이렇게 그분의 가르침에서 아주 보여집니다. 

 

5. 나가며

1) 예수님의 성육신을 사랑하기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성육신을 사랑할 있겠습니까! 그분의 낮아지심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사랑할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몸과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신 것에는 감사하지만, 그것 자체를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너무 약해지셨거든요. 너무 자기를 낮추셨거든요. 너무 자기 부인을 많이 하셨거든요. 우리는 이런 그분의 태도를 사랑하기가 어려울 있습니다. 왜냐구요. 사랑하면 따라해야 하거든요. 감사는 그냥 표현하기만 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이렇게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과 동일시하고픈 마음이 듭니다. 따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2) 성육신을 따라하기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성육신에 감사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고 따라하시겠습니까? 이것이 가르치는 자의 숙명과도 같은 태도입니다. 우리는 평생 배우거나 가르치거나 하며 살아갑니다. 어렸을 때는 배우는 일이 많다면 나이가 들면 점점 가르치는 일이 많아집니다. 그렇다고 배우는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또한 가르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가르침에서 중요한 태도가 무엇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닮을 우리는 가르칠 있습니다. 가르치는 대상의 언어와 경험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강제하지 않고 그들이 반응할 때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적 가르침을 따라하는 자들의 태도입니다.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있거나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게 모든 교사나 어른 분들께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적 가르침을 사랑하고 따라합시다. 

 

 

[함께 기도하기]

1. 나의 마음은 어떤 밭인지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길가입니까, 돌짝밭입까, 가시덤불입니까, 아니면 좋은 밭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있나요? 새싹이 자라고 있나요? 줄기가 자라고 열매를 맺고 있나요?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를 드립시다. 조용히 기도를 드려봅니다.    

 

2. 예수님의 성육신적 가르침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분이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경험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의 한계 속에서 가르치신 성육신적 가르침을 따라갈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배우고 가르치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분의 가르침의 방식을 배울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분이 느끼셨던 가르침의 한계는 무엇이었나요?       

 

2. 우리는 우리의 마음 밭을 개간할 있을까요? 어떻게 좋은 밭이 있을까요? 

2021. 7. 25. 김혁수 

 

[본문_디모데후서 4:1-8] 

1나는 하나님 앞과,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2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3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6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Chapter 4

1 I solemnly urge you in the presence of God and Christ Jesus, who will someday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when he comes to set up his Kingdom: 2 Preach the word of God. Be prepared, whether the time is favorable or not. Patiently correct, rebuke, and encourage your people with good teaching. 

3 For a time is coming when people will no longer listen to sound and wholesome teaching. They will follow their own desires and will look for teachers who will tell them whatever their itching ears want to hear. 4 They will reject the truth and chase after myths. 

5 But you should keep a clear mind in every situation. Don’t be afraid of suffering for the Lord. Work at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nd fully carry out the ministry God has given you. 

6 As for me, my life has already been poured out as an offering to God. The time of my death is near. 7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and I have remained faithful. 8 And now the prize awaits me—the crown of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the righteous Judge, will give me on the day of his return. And the prize is not just for me but for all who eagerly look forward to his appearing. 

 

 Tyndale House Publishers, Holy Bible: New Living Translation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2015), 딤후 4.

 

 

[설교]

0. 들어가며 

- 레디 플레이어  

어제 딸과 영화 편을 보았습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어디 나가기도 그렇고, 딸도 심심해하는 같아서 영화를 봤는데요,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영화입니다. 집에 계시다면 검색해보세요. 

 

요사이 유행하고 있는 가상 현실, 소위 메타버스를 다룬 영화입니다. 코로나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요. 마치 코로나를 통해 비약적으로 비대해진 온라인 세상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는 , 가상 현실 아바타의 생활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VR 고글을 쓰고, 프로그램 반응형 수트를 입고 일상의 대부분을 가상 현실 세계인 오아시스에서 보냅니다. 가상 현실은 더이상 가상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현실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가상 현실은 미래의 현실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측면인데요, 성경의 장절이 가상 현실로 들어가는 코드가 되어 언제든지 성경의 세계로 들어갔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누르면 1세기 로마와 로마 감옥 속에 갇힌 바울, 그리고 바울의 편지가 도착한 에베소 교회와 편지를 읽는 디모데의 장면으로 이동하는 것이죠. 성경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측면인데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관을 뚫고 나가기는 점점 어려워지겠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선호하는 세계 속에 매몰되어 나오려고 하지 않을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각자의 세계에 갇혀 전혀 배우려고 하지 않는, 그래서 가르침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할 같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당부 시리즈 마지막 시간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당부를 들으면서 메타버스에 익숙해질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있는지 함께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 

 

1. 엄중함

1) 꼰대 바울 

오늘 말씀을 처음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꼰대 바울이었습니다. 왜냐구요. 1절을 읽어볼까요? 

 

1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구절을 읽을 때는 심각하게 목소리를 굵게 만들어서 말해야 합니다. 바울의 표정과 말투를 상상해봅시다. 그렇습니다. 전형적인 꼰대 모습입니다. ‘진리 안에 머물라라고 한다든지, 성경의 중요성을 역설한다든지,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엄숙하게 명령한다든지이런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단어를 쓰면서 무게 잡고 명령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아마 그래서 여러분 중에 일부는 바울을 싫어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꼰대를 정말 상대하기 싫지만, 꼰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꼰대에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들을 들어줄 만큼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없겠지만, 간혹 정말 배울만한 컨텐츠 진정성을 가진 꼰대라면 번쯤 기울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울이 그런 꼰대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배울만한 컨텐츠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삶에 진정성이 묻어 있습니다. 그냥 꼰대가 아닙니다. 

 

2) 누구 앞에 있는가

그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엄중하고 무겁게 명령을 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는 하나님 ,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 그리고 재림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할 가장 엄중하고 무겁고 핵심적인 존재와 사건들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재림, 그리고 심판바울은 지금 앞으로 닥칠 일들을 떠올리고 있는 겁니다. 과거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뤄놓은 인류 구원의 역사도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할 , 무거움과 긴박성과 엄중함을 떠올리며 가장 확신에 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엄중함은 단순히 그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엄중함은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있기 떄문에 나오는 입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존재도 존재지만, 바울은 그분들이 하실 일들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심판자이기도 하십니다. 다시 오셔서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 인류는 앞에서 마지막 정산 혹은 심판을 받게 것입니다. 바울은 미래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의 명령어를 입밖으로 꺼냅니다. 

 

2. 말씀을 선포하라 

1)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그렇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19-20)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나, 바울이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이나 지극히 유사합니다. 

 

2) 케리소 

그런데 약간 다른 점도 포착됩니다. 그것은 바로 케리소라는 단어가 가진 원래 때문에 일어납니다. 바울은 말씀을 선포하라고 , 케리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왕의 전령이 사람들에게 정책이나 입장 등을 선포할 쓰는 단어입니다. 전령은 왕의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습니다. 사람들은 전령을 왕의 대리자라고 생각하고 전령의 말은 왕의 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공표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라 가까이 왔다이런 것이 바로 케리소입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케리소해왔습니다. 이제 누구에게도 명령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디모데에게도 케리소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의 핵심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 끌고 들어왔음을 케리소하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따르면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케리소하라는 겁니다. 

 

선포는 모두가 알아야 공적 사실입니다. 단독 보도, 속보와도 같은 겁니다. 나라가 독립되었다고 공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올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라고 알리는 일본 국왕의 선포와 같습니다. 남북한이 통일한국이 되었다는 소식은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왔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기만하면 나라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언론에 뿌려야 합니다. SNS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케리소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시즌을 타지 않습니다. 계절에 따라 할지 말지를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왕의 전령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3)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그러나 바울은 케리소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성경의 유익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 가지고 있습니다.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선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탁월함 길러줍니다. 이런 성경을 계속 가르치고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살짝 꼰대같은 느낌이 나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같이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가르치고,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라 등의 단어들입니다. 혼날 쓰는 단어들이잖아요.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현저한 차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는 책이 많지도 않았고,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투브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성경이 있었으며, 그마저도 읽을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성경을 해석하고 해설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도 소수였으며,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의 말씀이 가르쳐져야 했습니다. 그러니 소수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요? 지금은 오히려 반대죠. 너무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공중에 다닙니다. 유툽을 열면 수많은 목사님들이, 설교가들이, 성경교사들이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꼰대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죠. 그렇지만, 그렇게 너무 많은 지식들과 해석이 난무하기 때문에, 도리어 건강한 가르침과 건강한 책망과 건강한 경계와 건강한 권면이 더욱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단편적인 정보와 지식 전달을 넘어서서 통합적이고 인격적이고 성육신적인 가르침과 책망과 주의를 주는 것과 권면을 하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기준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기준에 어긋나 있는 성도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어긋나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주의를 니다. 그리고 기준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함께 권면 합니다. 

 

어떻게요? 성육신적이고 인격적이고 통합적으로 말이죠. 전달하는 방식도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용 아니라 내용에 걸맞는 가르침의 방식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걸 성육신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통합적으로 실천하셨습니다. 그것도 함께 가르쳐지는 겁니다. 이게 건강한 가르침입니다. 

 

3.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이다. 

1) 개의 동사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는 것에 진심일까요? 동사를 개나 사용하면서 가르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 책망하라, 경계하라, 권면하라 등의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이렇게 엄중하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3-4절입니다. 

 

3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2) 듣고 싶은 것만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방금 말씀드렸던 건강한 가르침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선생님을 쫓아 다니게 것입니다. 자신들의 귀에 듣기 좋은 가르침만 들으려고 것입니다.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소설같은 꾸며진 이야기만을 좋아하게 것입니다. 벌써 2천년 전에 바울은 이런 현상을 보고 있었고, 심해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던 겁니다. 

 

3) 자동 추천 기능 

정말 어떻게 이렇게 떨어집니까! 현대 사회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세상입니다. 그걸 더욱 가속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자동추천기능입니다. 더욱 정교화된 인공지능 기술이 우리가 선택했던 사항들을 보고 무엇을 좋아할지 통계적으로 판단해서 우리에게 계속 추천해줍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검색하지 않는한 유툽과 각종 SNS들은 내가 좋아할만한 내용들만 계속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점점 한쪽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종합적으로 사고할 없게 되고, 편향적이고 당파적인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이죠. 소위 일베니 메갈이니 하는 그룹들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렇습니다.

 

부담이 되고, 껄끄러운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래 걸리고 장기적으로 연마해야 지식이나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거나 삶의 전반에 영향을 주는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내용만 계속 배우다 보면 그분야에 전문가는 있을지 모르나 통합적 진리에서는 점점 멀어져서 극단적 자기 세계에 갇히기도 하는 겁니다. 

 

4)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이러니 바울의 오늘 엄중한 명령은 우리가 여러 차례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정말로 꾸중도 듣고, 주의도 듣고, 권면도 받고 설득도 당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는가? 단순히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통합적인 진리를 배우고 익히고 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관점을 성경의 관점으로 계속 비춰보고 있는가? 성경의 관점으로 구석구석을 점검하고 있는가? 과연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4. 나가며

- 10분의 1

사랑하는 여러분, 가르침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가르침은 더욱더 힘듭니다. 가장 힘든 것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2 디모데를 계속 배출해야 하는 곳입니다. 여전히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면서 책망과 경계와 권면을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청년들 중에 2 디모데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임사역자, 선교사, 목사가 필요는 없겠지만, 10 , 혹은 20 중에 명은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에서 좋은 직장인이 되는 ,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무 귀하고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다만, 2 디모데도 나와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책망하고 주의를 주고 권면하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운 일이죠. 이해가 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정말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게 족쇄가 되어서 스스로가 위선자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하나님께서 일로 부르시는 사람이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당부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진리 안에 머물러라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쳐라. 죽음을 기다리는 바울이 마지막 호소와 당부가 우리 마음에도 남아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길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

1. 바울의 마지막 당부가 우리 뇌리와 마음에 남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진리에 머물라.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라. 그의 마지막 진심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기도합시다.    

 

2. 성경을 가르치고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는 2 디모데가 나오길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개인의 결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대하고 기도해야 일입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바울이 엄중하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토록 무겁게 말하고 있나요?      

 

2.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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