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_누가복음 8:4-15] 

4무리가 많이 모여들고, 고을에서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오니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5“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먹기도 하였다. 6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니,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7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 8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배의 열매를 맺었다.” 말씀을 하시고예수께서는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외치셨다.

예수의 제자들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를 그에게 물었다. 10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이다.”

11“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2길가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뒤에 악마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13돌짝밭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동안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설교]

0. 들어가며 

- 예수님의 가르침 시리즈

8월의 시작입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휴가계획 세우는 것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휴가를 떠나야 하는데, 그게 떠오르질 않습니다. 그나마 요사이 도쿄 올림픽 덕분에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끼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인 김제덕 양궁 선수의 우렁찬 화이팅에 갑자기 울컥하기도 하고요, 배드민턴 여자 복식의 김소영 공희용 선수가 일본 팀과의 접전에서 듀스를 여러 차례 만들면서 결국 이기는 장면에서는 초긴장을 느꼈습니다. 어제는 아쉬움 그리고 역전의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 저녁이었죠.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감동이 됩니다. 부디 건강하게 안전하게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7월의 마지막 당부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라는 바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명령을 받고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중 하나가 과연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치셨나 궁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8월에는 예수님의 가르침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 가르침의 방법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핵심은 단어로 표현할 있을 같아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육신적, 인격적, 통합적 방식입니다. 성육신적이라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죠. 인격적이라하면 가르치는 대상과 수평적 소통 속에서 공감하며 가르친다는 의미입니다. 통합적이라는 말은 지식 전달만이 아니라 인격과 전체에 영향을 주는 가르침을 목표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8 4-15절입니다. 

 

1. 대상_많은 사람들(4)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조금 다르게예수님의 평지 설교 싣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 17-49절까지 내용이 나오는데, 내용을 오늘 다루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무리를 이루고,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무리를 이루었다.”(6:17) 

 

모였을까요? 평지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수천명은 모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5천명이나 모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만 5천명이니 여인과 어린이를 포함하면 명이 훨씬 넘었을 겁니다. 그러니 아마 평지에서도 최소 수천에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을 수도 있습니다. 정도가 아니더라도, 백명이 모여도 대단한 아닌가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산상수훈의 축소판의 설교를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평지설교에서는 상당히 구체적인 명령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서 설교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그러나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은, 기초없이 위에다가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물살이 집에 들이치니, 집은 무너져 버렸고, 집의 무너짐이 엄청나다” (누가복음 6:49)

 

그러니까 수백에서 수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시는 것으로 설교의 마지막을 장식한 겁니다.  

 

2) 예수님의 활동(8:1-3) 

그리고 예수님은 여러 마을과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케리소인데요. 마을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의 전령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겁니다. 

 

뒤에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그리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8:1-3)

 

일에 제자들도 참여하고 있고요. 일을 돕기 위해 여인들도 발벗고 나섭니다. 여행 경비를 후원하기 시작합니다. 직접 따라다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3) 어마어마한 무리들(4)

이렇다보니 어느새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고을에서 마을에서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였죠. 그런데 예수님은 더이상 평지 설교 같은 직접적인 율법과 명령을 제시하는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죠. 바로 비유라는 방식입니다. 

 

2. 가지 (4-8)

좋은 밭이 되어라라고 권면하거나 가르치지 않으시고, 아마도 바울이라면 그렇게 했을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여러 종류의 밭을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내용은 너무나 유명하니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좋은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립니다. 더러는 길가에 뿌려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밟거나 하늘의 새에 쪼이게 되어 씨가 죽거나 사라집니다. 어떤 씨는 돌짝밭에 뿌려집니다. 흙이 얕아서 싹이 나는 순간 햇볕에 말라 비틀어져 죽습니다.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뿌려집니다. 싹이나고 자라나지만, 가시 덤불이 성장을 막습니다. 충분한 햇볕을 받지 못해 열매까지는 맺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뿌려집니다. 씨앗은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비유의 해석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당시 씨를 뿌리는 농부라면 대부분 쉽게 이해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현상과 농사 짓는 현실이 그러하기에 쉽게 이해한다는 것이지, 예수님이 이야기를 갑자기 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야기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궁금해서 묻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씨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씨가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사단이 와서 말씀이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아예 빼앗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에 도달하는데 실패합니다. 씨가 돌짝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말씀의 뿌리가 없거나 약해서 시련과 고난이 오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가시덤불은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지만, 일상을 살면서 많은 근심과 걱정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한 걱정과 쾌락에 대한 추구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좋은 밭은 말씀을 듣고 믿음의 뿌리를 내려,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일상의 걱정과 돈벌이의 근심과 쾌락의 유혹을 이겨내어 결국엔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엄밀히 말하면 마지막 좋은 밭의 사람들이 구원받는 사람들이 것입니다. 가시덤불의 사람들이 구원에 도달할지는 약간 미지수입니다. 믿음을 떠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2) 모를

처음에 비유를 들었을 여러 마을에서 찾아온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해 봅시다. 평소에 많이 보던 내용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씨앗을 뿌리는 행위야 모두가 번쯤은 경험해 봤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는지는 이해가 안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3) 숙명론 vs 자기 결정론

말씀을 듣고서 이런 질문이 있을 겁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밭을 개간해서 뿌릴 생각은 않고 아무데나 뿌리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같은 땅에다가 씨를 뿌린 사람이 잘못이라는 의견입니다. 숙명적으로 정해진 밭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 방치한 농부의 잘못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숙명론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칠 나오는 현상에 대한 겁니다. 현상을 보니 이러저러한 반응이 나오는데, 현상의 이유가 4가지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이런 관찰을 했을까요? 그건 이미 평지 설교를 마치고 어마어마한 사람들 중에 실제로 열매를 맺는 믿음을 갖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 소수임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미 언급해 드렸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재정으로 지원하는 여인들은 예수님의 선포를 믿고 그에 따른 헌신과 기여를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좋은 밭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평지 설교를 듣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3/4 그런 같습니다.

 

오늘 비유는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봐도 좋습니다. 평지 설교의 마지막에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강력한 비유로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열매맺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가지 밭의 비유를 하심으로써 다시 찾아온 무리들에게 새롭게 다가가는 겁니다. 어려운 윤리를 말하기보다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씨앗뿌리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친숙함과 의문 동시에 갖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3. 제자와 무리(10)

1) 비밀을 알도록 허락된 사람들 

비유를 처음 들었던 당시의 수많은 무리들은 대단히 당황했을 겁니다. 비유를 말해 놓고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해했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도 무슨 말인지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따로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따로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 주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 감춰져 있는 비밀 

하나님 나라는 비밀스런 요소가 있습니다. 특히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에는 더욱더 비밀스러웠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예수님의 선포는 매우 인상적이었죠. 예수님이 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아 버렸잖아요.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는 전통적인 통치자에 의해 형성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들처럼 숱한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대량살상해서 만드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라였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 매우 비밀스런 과정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무나 알게 수는 없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지는 비밀이었습니다. 

 

3) 비밀이 폭로되기 전까지

비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일어나면 전세계에 온전히 폭로될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숨겨져야 했습니다. 알린다고 해서 알아들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없는 상황에서 화를 내며 모르냐고 꾸중하는 것은 가르침의 태도가 아닙니다. 비밀이 폭로되기 전까지는 그들이 알아들 있을 정도로만 설명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겁니다. 그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겁니다. 여기에 성육신적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4. 비유로 가르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에게 친숙한 언어를 통해 그들이 내용에 쉽게 도달하도록 그림 언어를 사용하신 겁니다. 윤리적 명령이나 율법적 규정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능하면 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을 사용해서 그들이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셨다고 , 우리는 가지 알아야 사항이 있습니다. 

 

1) 언어

첫째는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언어를 쓰셨다는 겁니다. 아람어, 히브리어를 쓰셨습니다. 씨와 밭의 종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단어들이요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굳이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그저 그분의 방식으로 표현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의 언어 쓰시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자신들의 경험에 갇혀 있습니다. 

 

한국어의 특징에 대해서 많은 외국인분들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의성어 의태어 쓰는 것에 대해 그렇게 놀라하더라구요. BTS 노랫말 중에소복소복 들어가는 노래가 있나봐요. 외국인들이 소복소복을 어떻게 영어로 해석해야 하는지 난감해 하면서 한국어의 의태어에 대해 아름답다고까지 평가하더라구요. 소복소복을 falling falling 으로 번역했어요. 그러나 눈이 적당량으로 쌓여가는 모습을 담은 소복소복의 의미와 말의 반복에서 오는 아름다움은 다른 언어로 표현이 안된다고 합니다. 색깔도 그렇죠. 우리는 푸르스름하다, 푸르다, 파랗다. 샛파랗다 등등 가능하면 색상의 채도에 따라서도 이름을 붙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어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죠. 

 

예수님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기로 결정하신 자체가 성육신적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언어로 포착할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히브리어로도 헬라어로도 그분의 존재를 담아낼 없습니다. 그분의 뜻과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의도를 온전히 담아낼 있는 언어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분이 인간의 언어를 쓰시지 않는 인간은 그분의 뜻에 도달할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언어적으로 성육신적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2) 이해

둘째,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들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셨습니다. 완벽한 이해는 어차피 도달할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조차도 항상 어리둥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 속에서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방식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이해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 최대한 활용하십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당시 농부의 일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셨습니다. 

 

아웃백 같은 패밀리레스토랑들이 처음 생겼을 , 놀랐던 것은 서빙보는 분들이 테이블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들은 손님들의 눈높이 자신들의 눈을 맞추었습니다. 비지니스적으로 히트를 쳤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사람의 경험과 상황을 최대한 고려해야 합니다. 속에서 내용도 방식도 도출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주의 창조자되신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들의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알고 그들과 공감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직접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해를 위한 성육신. 이것이 예수님의 삶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3) 한계 

셋째, 예수님의 비유로 가르치심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것은 예수님의 언어와 이해를 위한 노력해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계가 있다 겁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런 예수님의 성육신적 태도와 내용에 마음을 열지 않으면 어쩔 없다는 점입니다. 자기 마음을 길가, 돌짝, 가시덤불로 방치한다면 예수님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지 못하시기로 결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억지로 길가에서 돌짝밭으로, 가시덤불로, 좋은 밭으로 바꾸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력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라 억지로 기계를 들여와서 마음의 밭을 갈아 엎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마음 밭의 최종 결정은 인간들의 허용입니다. 사람들의 의지 필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래서 하나님과 사단의 오랜 전투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성육신적인줄 아십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스스로 그들의 마음을 좋은밭이 되고자 결정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힘과 능력의 100% 쓰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마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죽기까지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힘을 것입니다. 한계를 최대한 가지고 가시려는 그분의 노력이 지극히 성육신적입니다. 

 

4) 성육신적 가르침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시고, 사람들의 경험을 활용하셔서 이해를 도모하시고, 모든 인간적 한계를 안고서 노력하신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지는 성육신적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분의 성육신은 이렇게 그분의 가르침에서 아주 보여집니다. 

 

5. 나가며

1) 예수님의 성육신을 사랑하기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성육신을 사랑할 있겠습니까! 그분의 낮아지심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사랑할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몸과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신 것에는 감사하지만, 그것 자체를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너무 약해지셨거든요. 너무 자기를 낮추셨거든요. 너무 자기 부인을 많이 하셨거든요. 우리는 이런 그분의 태도를 사랑하기가 어려울 있습니다. 왜냐구요. 사랑하면 따라해야 하거든요. 감사는 그냥 표현하기만 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이렇게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과 동일시하고픈 마음이 듭니다. 따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2) 성육신을 따라하기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성육신에 감사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고 따라하시겠습니까? 이것이 가르치는 자의 숙명과도 같은 태도입니다. 우리는 평생 배우거나 가르치거나 하며 살아갑니다. 어렸을 때는 배우는 일이 많다면 나이가 들면 점점 가르치는 일이 많아집니다. 그렇다고 배우는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또한 가르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가르침에서 중요한 태도가 무엇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닮을 우리는 가르칠 있습니다. 가르치는 대상의 언어와 경험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강제하지 않고 그들이 반응할 때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적 가르침을 따라하는 자들의 태도입니다.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있거나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게 모든 교사나 어른 분들께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적 가르침을 사랑하고 따라합시다. 

 

 

[함께 기도하기]

1. 나의 마음은 어떤 밭인지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길가입니까, 돌짝밭입까, 가시덤불입니까, 아니면 좋은 밭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있나요? 새싹이 자라고 있나요? 줄기가 자라고 열매를 맺고 있나요?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를 드립시다. 조용히 기도를 드려봅니다.    

 

2. 예수님의 성육신적 가르침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분이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경험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의 한계 속에서 가르치신 성육신적 가르침을 따라갈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배우고 가르치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분의 가르침의 방식을 배울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분이 느끼셨던 가르침의 한계는 무엇이었나요?       

 

2. 우리는 우리의 마음 밭을 개간할 있을까요? 어떻게 좋은 밭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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