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3. 김혁수

 

[본문_마가복음 2:13-17_새번역]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다. 무리가 모두 예수께로 나아오니, 그가 그들을 가르치셨다. 14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레위는 일어나서예수를 따라갔다.

15  예수께서 그의 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따라왔던 것이다. 16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17예수께서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0. 들어가며 

- TV 토론

3 9일은 대한민국 20 대통령 선거 투표일입니다. 이제 45일이 남았습니다. 다음 5년을 이끌고 대한민국의 리더를 뽑는 대통령 선거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다들 투표권을 가지고 계시니 관심 갖고 보시게 같습니다. 어느 후보에게 여러분의 소중한 표를 줄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럴 필요한 것이 후보들의 토론일 겁니다. 서로 날카롭게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비슷한 점과 차이점을 보게 되고, 나의 생각과 맞는 후보가 누군지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후보자 토론회가 거의 열리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말과 논리가 부딪히는 토론의 현장에서 생각의 그대로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론만 한다고 훌륭한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서로간의 생각의 차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있다는 측면에서 후보자들의 TV 토론은 여러 차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토론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분이셨습니다. 논쟁의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는데요, 일부러 논쟁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논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주 지혜로운 말씀으로 상대방을 꼼짝못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매서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대응하시는 예수님이 그려집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1. 레위를 부르시는 예수님 

- 바닷가(호숫가) 산책 

오늘도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때로 호수가 너무 커서 바다라고 불리는 그곳을 걷고 계십니다.  바닷가 혹은 호숫가를 걷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시야는 트이고 바람은 이색적이죠. 반복해서 다가오는 물결은 자연 그대로의 ASMR입니다. 저도 일산 호수, 마장 호수, 산정 호수 등의 호수 주변을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최근에도 가족들과 포천의 산정 호수에 다녀왔는데요, 영하 14도까지 떨어지는 강추위 속에서 가족이 비니와 목도리 핫팩을 장착하고 호숫가를 걸어다녔습니다. 꽁꽁 호수 중심에서 오랫만에 얼음 썰매를 탔는데요, 그것도 즐겁더라구요. 

 

예수님께서 걸으신 갈릴리 호수야 얼음을 찾아 없는 곳이겠죠. 호수를 걸어가시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예수님은 이제 연예인에 가깝습니다. 가는 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여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싶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찾아옵니다. 

 

-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태) 

사람들이 가기 꺼리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가버나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가버나움을 지나는 여행객이나 상인들의 세금을 걷는 세관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경계로 서쪽 갈릴리 지역은 셰례 요한을 죽인 헤롯 안디바가 분봉왕으로 다스리고 있었고, 동쪽 지역은 빌립이 분봉왕으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사이에 중요한 교통의 요지가 가버나움이었고, 지역을 통과하던 사람들은 통행세를 내야 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치던 일을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민족의 고혈을 뽑아 로마 제국에게 바치는 세리들을 죄인이라고 무시했습니다. 창녀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라고 것이죠. 예수님이 세관 가까이 가시는 것을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도 세금을 내시려나 싶었을 겁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세관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다가오는 예수님은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꼈을 겁니다. 레위도 비슷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세관에는 돈이 많으며, 유대인들은 세관원의 앞잡이인 레위와 같은 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뒤따르는 무리가 수백명이 넘었습니다. 무서운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폭동이라도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 레위(마태) 회심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서 사무를 보고 있는 레위에게도 다가가십니다. 사무를 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상황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말을 거시는 겁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건 충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미움받던 그래서 언제든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레위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정말 충격인 것은, 마디에 머리 좋은 세리 레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무리들과 어울려서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원래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기로 유명했습니다. 밥도 같이 먹지 않습니다. 아니 몸에 닿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다른 제자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간 겁니다. 

 

누가는 상황을 이렇게 썼습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누가복음 5:28) 

그렇습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세금 장부들도 남겨두었습니다. 장부만큼 중요한 것이 어딨겠습니까? 그의 생명 줄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미래가 장부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깔끔하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세리 일을 그만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더이상 비판과 미움, 질타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무거운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디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을 있었던 겁니다. 

 

2. 바리새인들의 시비

- 레위 마태의 잔치 

따라가는 동시에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마가복음에는 레위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는지, 아님 예수님이 레위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는지가 명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많은 세리와 밖의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서, 그들과 자리에서 앉아서 먹고 있었다”(누가복음 5:29) 

확실히 레위는 세리로서 돈을 많이 벌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잔치를 열었습니다. 자신 같은 세리들을 초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멀리했던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으며, 자기 집과 마당에 자리를 마련해 많은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죠. 당시 잔치에는 포두주와 빵과 고기가 있었을 겁니다. 모두들 즐겁게 웃으면서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 바리새인들의 시비 

예수님을 따라왔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불러 놓고 시비를 겁니다. 

 

16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하시는 거요?”(누가복음 5:30) 

 

누가가 불평이라는 단어를 것이 보이시나요?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자신들이 그렇게 정죄하고 싫어하던 세리들과 여러 죄인들이 함께 모여서 이렇게 웃고 떠들고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 화가 났습니다. 율법을 안다는 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으로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다는 분이, 어찌  죄인들과 어울릴 있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지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집에 어떤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엘리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잔치에는 그들은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초대해도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구요? 레위는 죄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말할 , 소리의 크기는 어땠을까요? “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이렇게 말할 , 모기소리 만큼 작게 말했을까요? 아님 중간 소리 크기로 말했을까요? 아님 그곳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을 있을만큼 소리로 말했을까요? 성경에 답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제법 소리로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잔치 자리는 원래 시끌벅적합니다. 술이 들어가고 맛난 음식이 있으면 당연히 목소리가 커지고 웅성웅성거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레위의 집에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겠죠. 제자들도 예수님 근처에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집안과 마당에 여러 죄인들이 앉아 있었겠죠. 밖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습을 보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하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말했을 겁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겠지만, 제법 소리로 말했을 같습니다. 

 

잔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집니다. 갑뿐싸가 거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와서 일종의 깽판을 놓는 겁니다. 레위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초대한 것이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초대한 것이 아니거든요. 제자들도 순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레위 집에 예수님이 초대받아 가신다고 때부터 뭔가 께림직했거든요. 자신들도 세리들을 싫어했습니다. 제자로 부름받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레위를 제자로 삼으실 흠칫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이 싫어하던 세리를 제자로 삼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죠. 그래도 자신의 스승이 그렇게 하신다니 속으로는 약간 불편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잔치는 솔직히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 모두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세리와 죄인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질문을 하자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분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찍히는 것은 여러 모로 불편한 일입니다. 

 

- 예수님의 답변 

분위기가 싸해지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모두들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았습니다. 먹던 고기와 음식을 꿀꺽 삼켰습니다. 떠들썩하던 집안이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분명하게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나는 의인을 부르러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누가복음 5:32) 

 

여러분, 말씀은 여러 모로 불편한 말씀이라는 것이 보이시나요? 첫째로 바리새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펼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위한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감정이 상했습니다. 지난 번에는 사하는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고 하면서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했는데, 때는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던 정도 였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이 상당히 거슬리는 지경에 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만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잔치에 참여한 세리들을 비롯한 소위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사는 사람들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쨌든 예수님도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먹고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던 그분이 어찌되었든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평안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평소에 가진 생각에 틈을 내고 때로는 깨뜨리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인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 꿈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행동과 말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는 입니다. 돌이켜 회개하는 죄인들이 모여 잔치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할 들어갈 있는 곳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리들도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들어갈 있는 곳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불편합니다. 회개는 언제나 불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바리새인들도 회개해야 했고, 세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소한 세리 레위 마태는 회개했습니다. 회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약 성경의 처음 책인 마태복음을 저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조사관으로 심판관으로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길 없는 사회적 위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우리는 회개해야 죄인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던,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건 간에 우리는 회개해야 하는 죄인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분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 병자들을 초대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자리엔 평범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모두가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레위 마태 있었던 겁니다. 저와 여러분의 자리도 분명히 있습니다. 

 

3. 하나님 나라와 논쟁 

- 논쟁은 필요한가?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부터 바리새인들과 본격적으로 논쟁하기 시작하십니다. 오늘은 죄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 반론을 펴셨습니다. 앞으로 금식 논쟁, 안식일 논쟁을 펴치실 예정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낼 있어야 하는 아닌가요? 기독인은 평화를 지향하면서 논쟁을 피해야 하는 아닌가요?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로마서 12:18)

 

사도 바울의 말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절대로 논쟁을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에 명입니다. 가능하면 말싸움, 논리싸움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제가 철학을 전공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철학은 항상 논리 대결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대결, 논리의 대결에서 지식과 논리가 뚜렷한 사람들이 항상 유리했습니다. 논쟁을 피하려는 성향의 같은 사람들은 아무말도 못하고 듣기만 하다가 시간이 가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해야 말을 분명하게 하시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분명하게 대응하시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허허 웃으면서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잔치의 분위기를 망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 용납과 논쟁 

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처음부터 싸우려고 논쟁한 것은 아니라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내쫓았습니다.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약자와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행동이 있자 그때서야 예수님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은 논쟁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논쟁을 기획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실행하다보니 어쩔 없이 논쟁을 하게 것이라는 말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논쟁에서 시작해서 행동으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시작해서 논쟁으로 겁니다. 행동은 능동적, 건설적, 긍정적 표현입니다. 논쟁은 수동적, 변론적, 부정적 표현입니다. 죄인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식사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니 그제서야 논쟁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원리를 실천하자 그제서야 비난과 비판이 쏟아지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순서였습니다. 용납이 먼저, 논쟁이 나중입니다. 실천이 먼저, 변호가 나중입니다. 선포가 먼저, 대결이 나중입니다. 예수님에게 순서는 분명해보입니다. 

 

4. 나가며 

- 구원과 회복을 위한 논쟁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바리새인, 율법학자들과 대결하시는 장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논쟁이 벌어진 곳은 예수님이 죄인들, 병자들을 용납하시고 그들과 어울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장면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과 싸우시는 겁니다.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병자들을 고치고, 사회적 약자들을 회복시키는 장면에서 그것을 방해하고 비난하는 자들과 싸우시는 겁니다. 저는 예수님의 방식을 옹호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정말 사람들을 사랑하셨던 겁니다. 그들의 구원과 회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과 회복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일을 위해 여전히 헌신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을 방해하는 사단과 하수인들을 대적하시고 그들과 논쟁하시는 것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번 주도 함께 생각하고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삶의 현장에 찾아오십니다. 벗어나고 싶은 일상의 현장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그런 초대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었나요? 그분을 따라 갔나요? 아님 주저하고 있었나요?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논쟁하고 싸우는 것을 회피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위해 싸우시는 그분을 경험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나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여전히 싸우시는 그분을 깊이 알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세리 레위(마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당시 세리로서 느꼈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특별히 예수님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에게 나가올 , 그는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졌을까요?   

 

2. 예수님은 사람들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서는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주제로 논쟁(말싸움) 하게 되나요? 예수님과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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