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0. 김혁수

 

[본문_창세기 11:27-12:5_새번역]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다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하란은 롯을 낳았다. 28그러나 하란은 그가 태어난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29아브람과 나홀이 아내를 맞아들였다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이고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이다하란은 밀가와 이스가의 아버지이다. 30사래는 임신을 하지 못하여서, 자식이 없었다.

31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하란에게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32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 1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으로 가거라. 2내가 너로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것이다. 3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5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0. 들어가며 

- 통치하시는 하나님?

일반적으로 국가 통치의 근간은 군사력과 경찰력입니다. 힘이 없는데 통치를 수는 없습니다. 최근 한국의 군사력이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4.5세대 전투기를 만들지 않나, SLBM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성공하지 않나, 현무 미사일의 중량과 사거리를 늘려서 정확하게 표적을 맞추는 시험에 성공하지 않나등등 한국의 군사력이 증강하고 있습니다. 군사력이 강해지면 주변국들이 함부로 침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안정되고 현재 권력에 대한 지지가 계속될 있는 겁니다. 경찰력도 마찬가지죠. 외국인들이 우리 한국에 오면 깜짝 놀라는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카페에 노트북과 핸드폰을 놔두고 화장실에 갔다오는 것이 그렇게 놀랍다고 해요. 늦게까지 공원에서 혼자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치안이 전세계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CCTV 영향도 있지만 강한 경찰력이 바탕이 되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의 범인 검거율도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생각할 , 하나님의 군사력과 경찰력을 먼저 떠올리지는 않습니다. 그럴까요? 힘과 무력으로 통치하는 방식은 그분의 통치에서 후순위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힘이 없어서, 군사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시기 때문이죠. 다른 방법이 우선순위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 통치의 방향_회복시키기

지난 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은 회복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분은 에덴의 모습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어색한 단어지만 회복주의자이십니다. 에덴에서의 샬롬, 평화를 다시 회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대리통치자인 사람을 통해 만물과의 평화를 도모하십니다.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회복이 그분의 통치의 방향입니다. 

 

오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 , 그분이 주로 사용하시는 통치의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을 읽어볼까요? 

 

1. 데라를 부르심 

1) 바빌로니아 우르(갈대아 우르)

본문에서 하나님은 데라를 부르십니다. 그럼 데라는 누구인가요? 노아의 아들 기억나시죠? , , 야벳. 첫째 아들 셈의 자손 중에 자녀가 많고 세력을 얻은 사람이 누구죠? 맞습니다. 에벨입니다. 에벨은 아들이 있다고 했죠. 명은 벨렉이고 다른 명은 욕단이라고 했습니다.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바벨론 사건과 벨렉을 연결하기도 합니다. 저는 니므롯과 벨렉이 바빌로니아에서 성과 탑을 만들다가 하나님의 개입을 받아 언어가 혼란스러워져서 세계로 흩어졌다고 조금 상상을 보태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살았던 벨렉의 후손이 바로 데라였습니다. 

 

데라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거대한 줄기 하류에 평야에서 당시 최고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우르는 지금으로 치면 서울의 강남 같은 곳입니다. 미국의 뉴욕 같은 곳입니다. 거대 도시에 최고의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장소죠. 데라는 그곳에서 바빌로니아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24:2). 그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였죠.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따르는 것이 세상 사는 지혜라고 있습니다. 

 

2) 가나안을 향하여 

그러나 하나님은 데라와 그의 맏아들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바빌로니아 우르 땅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부르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꿈에서 나타나셨는지, 아님 어떤 음성이 그의 귀에 들렸는지, 아님 어떤 글씨가 그의 벽에 쓰였는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오랫동안 살아왔던 바빌로니아 우르 땅을 벗어나 상류를 향해 떠납니다. 가나안 땅으로 직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가족과 가축들을 먹여 살리면서 이동하려면 강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그나마 안전했습니다. 

 

3) 데라의 결심과 한계  

데라의 결심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살던 땅을 떠나 이사를 결심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이곳 홍제동에 오랫동안 살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다음 달에 이곳을 떠나 강원도 정선, 태백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제게는 군대가 그런 느낌을 주는 번째 장소였습니다. 논산 훈련소로 가던 때가 아득합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기 위해 열차를 타고 용산, 석계, 의정부, 춘천으로 이동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역마다 정차했는데, 때마다 명의 훈련병들이 하차를 했습니다. 은근히 용산에서, 석계에서, 의정부 역에서 내리기를 그렇게 바랬습니다. 그런데 춘천 보충대에 잠시 입소를 했는데, 거기서 잠시 대기하더니만, 결국 저를 군대 트럭에 태워 강원도 인제 원통의 부대에 내려주더라구요. 거기서도 며칠 있다가 민통선에 아주 가까운 부대에 배치 되는가 싶더니, 이내 민통선 부대로 결국 데려가더라구요.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보였습니다. 군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민통선 안에는 민간인이 못사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다보니 언제든 죽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막막함, 두려움, 후회, 의기소침, 긴장아직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입니다. 

 

평생을 대도시에 살던 데라 가족이 강을 따라 1500km 이동했습니다. 전혀 모르는 땅과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계절의 바뀜이 바빌로니아와 다르다고 느낄 때마다, 사람들의 생김새와 말과 억양이 다르다고 느낄 때마다,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과 긴장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두려움과 막막함 때문에 데라는 하란에 멈췄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의 한계였습니다. 우르를 떠나는 것은 엄청난 용기였지만, 가나안 땅까지 가지 못한 것은 그의 한계였습니다. 

 

2. 아브람을 부르심 

1)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번째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데라와 아브람이 하란에서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지는 하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가나안이었습니다. 바빌로이나 우르에서 데라와 아브람은 그분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란에 멈췄습니다. 여정이 힘들었겠죠. 계속되는 이동과 이주가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데라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이제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2) 부르심의 목적_()복의 근원 

그런데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추측해 보면, 원래 데라와 아브람을 바빌로이나 우르에서 부르실 때도 목적을 갖고 부르셨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도 없이 그냥 고향을 떠나라고 말했을 같지가 않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내가 너로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것이다. 3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목적은 분명합니다. 아브람이 복의 근원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새로운 땅을 주고 민족을 이루게 해서 세계에 복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여러분, 계획은 무엇과 닮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에덴의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닮았습니다. 에덴이라는 땅을 주십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을 돌보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유사한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의 근원 방향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과 동일합니다. 바로회복의 시작점이라는 겁니다. 복의 근원은 회복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다시 원래의 에덴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일의 근원인 것이죠. 그게 복입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명예가 아닙니다. 즐거움이 아닙니다. 에덴의 비전의 회복 이것이 입니다. 

 

-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이 아닌 예루살렘 산지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성과 지구라트라는 거대한 신전이 회복의 근원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물이 귀한 가나안 산지, 예루살렘 산지가 새로운 회복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 주류에서 비주류로 

이것은 당시 주류에서 비주류로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도시와 성이 아니라 산지와 돌산이 새로운 회복의 근원이 됩니다. 거대한 강들 사이에 펼쳐진 비옥한 초승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아니라 산들 사이의 여러 군락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들의 소박한 문화에서 회복의 근원이 다시 싹트는 겁니다. 마치 거대한 로마 제국의 심장이나 사람들이 매년 모여 예배드리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작은 시골 마을 나사렛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 변방의 새로운 발견 

우리는 변방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작은 움직임에 주목하게 됩니다. 거대한 바빌로니아 우르의 사람들은 가나안으로 떠나는 데라 가족에게 어떤 관심도 없었습니다. 강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던 하란의 사람들도 아브람과 롯이 가나안으로 떠나는 것에 어떤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저 경쟁자 명이 사라진 것에 기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당 판교의 개발 사업에 뛰어들 경쟁자 명이 사라지면 자신들의 이익이 커질 것을 즐거워하는 투자자, 개발자들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고향을 등지는 데라와 아브람을 눈여겨 보십니다. 거대한 도시 문화를 버리고 험난한 생활로 들어가는 그들을 주목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에덴같은 풍족한 땅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회복의 근원으로 새로운 변방을 보셨던 것입니다. 

 

3) 옮겨다니는 회복의 근원 

역사적으로 회복의 근원은 지역을 계속 옮겨다녔습니다. 최초의 지성소였던 에덴, 노아의 방주가 멈췄던 아라랏 , 아브라함이 거처를 정한 헤브론과 예루살렘, 요셉이 총리로 일했던 이집트, 다니엘의 페르시아, 예수님이 나고 자란 나사렛, 바울과 바나바의 수리아의 안디옥, 수많은 감독을 낳은 로마와 비잔틴 제국. 솔직히 하나님은 작은 변방의 나라와 민족을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거대한 제국을 활용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변방만 사용하고 제국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가두는 행위입니다. 반대도 말이 안되죠. 제국만 사용하시고 변방의 민족은 업신여기신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회복의 근원은 가나안의 산지 헤브론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3. 부르심

1) 통치 방법

그러니 우리는 가지 결론에 도달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향은 회복이며 회복의 통치를 실천하기 위해 행하시는 번째는 바로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대리인을 부르시는 겁니다. 제사장 역할을 하는, 회복의 근원으로서 기능하는 사람을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심으로 통치를 시작하십니다. 

 

2) 직접 통치 vs. 대리 통치 

저는 언제나 지점에서 고민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 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부르시냔 말입니다. 당신의 말을 무조건 듣는 천군 천사를 활용하셔서 직접 개입하시고 직접 명령하시고 직접 판단하시고 심판하시지, 명령을 들을 수도 있고 듣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을 부르시냔 말입니다. 직접 통치하지 않으시고 대리 통치를 고집하시는 이유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가끔 짜증이 나려고 하기도 합니다. 시점에서 제가 말할 있는 것은 대리 통치 방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의 등장이 좋은 그림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말이죠. 

 

3) 은혜, 권한 부여, 그리고 약속 

부르심은 은혜로 시작하는 행동입니다. 노아건, 데라건, 아브람이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렇게 부름받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권한을 부여하시죠. 세상을 돌보고 다스릴 있는 권한입니다. 회복의 근원으로서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속을 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회복의 근원으로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시고 동시에 그렇게 하지 못하면 어떤 불행이 찾아오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상호 약속을 하십니다. “우리 해보자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렇게 그분의 부르심의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4. 나가며 

-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설교를 듣고 계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분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그분의 원대한 세계 통치의 동역자가 되게 하십니다. 힘과 무력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과 인격적 감화력으로 세상을 돌보고 다스리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과 희생과 인격적 감화력의 최선봉은 바로 예수님이시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면서 우리도 그런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군사력과 경찰력이 아닌 사랑과 희생과 인격적 감화력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하나님의 통치 방식과 세상의 통치 방식의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은 힘과 무력으로 통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심으로 통치를 시작하십니다. 회복의 근원이 되도록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겠다는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때로 내가 편하게 생각하던 곳과 환경을 떠나 새로운 , 익숙하지 않은 , 변방으로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어디로 부르고 계신다고 느껴지시나요?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하나님이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데라와 아브람을 부르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바빌로니아 우르에서는 목적을 이룰 없다고 판단하신 걸까요?      

 

2. 하나님은 나를 어디로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곳은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 곳인가요? 

2021. 10. 3. 김혁수

 

[본문_창세기 11:1-9_새번역]

1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2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시날  들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대신에 벽돌을 쓰고, 대신에 역청을 썼다. 4그들은 말하였다. “, 도시를 세우고, 안에 탑을 쌓고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5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주님께서 거기에서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땅에 흩으셨다.

 

[본문_창세기 11:1-9_현대인의 성경]

1처음에 세상은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2그런데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바빌로니아에 있는 평야 이르러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3그들은, 벽돌을 만들어 단단하게 굽자하고 서로 말하며 대신 벽돌을 사용하고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하였다.

4그들은 , 성을 건축하고 하늘에 닿을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떨치고 우리가 사방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하고 외쳤다.

5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쌓는 성과 탑을 보시려고 내려오셔서

6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들은 민족이며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여호와께서 그들을 세상에 흩어 버리시므로 그들은 쌓던 일을 중단하였다.

9여호와께서 거기서 세상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에 곳을 ‘바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0. 들어가며 

- 시리즈 소개

지난 9 동안은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묵상해보았습니다. 10월은 통치의 하나님으로 묵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해 놓고 멀리 하늘 높이 앉아계시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나 관찰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혹은 관찰도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휴양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대리자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려고 하셨는데, 대리자의 반역으로 실패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통치가 멈춘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통치는 어떤 성격인지, 정체를 함께 파악하고 묵상하는 10 달이 되길 바랍니다. 

 

- 몽골 룬솜

15년전부터 우리 나라는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몽골 룬솜 지역에 나무를 심어 왔습니다. 몽골 고유 수종인 비술나무, 성장이 빠른 포플러 등을 심어왔습니다. 지금은 10미터가 넘는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서 사막화를 막고, 황사를 방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는 625전쟁으로 전국토가 벌거숭이 산으로 볼품없었습니다. 그러나 식목일 지정하고 매년 전국민이 나서서 나무심기를 실천해서 지금은 아름다운 산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이런 자연 돌봄의 경험을 살려 몽골 룬솜의 사막화를 막았던 것이죠. 이런 것이 세상 돌봄 통치의 측면이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통치의 방향을 회복으로 삼으셨습니다. 창조 당시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그분은 타락한 세상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조치들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그분의 통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 보겠습니다. 

 

1. 시날 평야(2)

1) 메소포타미아 문화 

오늘 등장하는 지역에 대해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날 평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하구에 펼쳐진 드넓은 평야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살펴보니 분명하게 바빌로니아에 있는 평야라고 적혀 있습니다. 강의 하구에 고대로부터 유명한 도시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고대 바빌론이었죠. 

 

2) 니므롯과 벨렉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함을 보시고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의인이었던 노아,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대홍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부터 세상의 많은 민족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 , 야벳의 자손들이 각자 세상으로 흩어져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 그것이 창세기 10장까지 나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주목해 봐야 인물 둘이 있습니다. 명은 용맹무쌍한 당시의 장수 니므롯입니다. 그에 대한 성경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8구스는  니므롯을 낳았다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이다. 9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사냥꾼이었다. 그래서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니므롯과 같은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10그가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시날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이다. 11그는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가서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를 세우고, 12니느웨와 갈라 사이에는 레센을 세웠는데, 그것은 아주 성이다.(창세기 10:8-12)

 

힘이 사냥꾼은 당시의 가장 돈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렵, 채집, 농사가 공존하는  시스템에서 가장 고급스런 고기들을 잡아 있는 사람이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힘도 세고 짐승을 죽이는 능력도 탁월한 그는 지극히 공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함의 자손인 니므롯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성을 지었는데요, 지역이 어디라구요?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날 평야, 바빌론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갔다고 적혀 있는데요. 아마도 바빌론 성과 탑을 쌓다가 하나님이 언어를 혼란케 하시니 지역으로 떠날 , 바로 앗시리아나 니느웨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니므롯은 고대 세계의 엄청난 영향을 여러 민족들의 시조였습니다. 

 

, 우리가 살펴보아야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벨렉입니다. 다음을 읽어볼까요? 

 

25 에벨은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해서 벨렉이라고 하였다벨렉의 아우 이름은 욕단이다.(창세기 10:25)

 

그렇습니다. 이제는 노아의 맏아들 셈의 자손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셈은 에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다.” 이렇게 창세기 10 21절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에벨의 자손들이 크게 번성했던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에벨의 자녀가 명이 등장하는데, 명의 이름이 벨렉입니다. 뜻은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입니다. 아마도 벨렉이 활동하던 시기에 바벨탑 사건이 있었고, 니므롯과 벨렉은 깊이 연관되어 있어 보입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족인 니므롯과 족인 벨렉은 시날 평지에서 서로의 세력을 규합하여 바빌로니아 성과 탑을 지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저는 가능성을 전제로 오늘 설교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2. 성과 탑을 쌓는 이유(4) 

원래 이들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니므롯과 벨렉은 바빌로니아 지역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서로 대화가 통했던 같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비전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지역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 구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견고한 성과 신비롭고 성스러운 탑을 지을 계획을 세웁니다. 이런 구조물들을 만들려고 했을까요?

 

1) 이름을 떨치자

첫째로,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고 싶었습니다.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4그들은 말하였다. “, 도시를 세우고, 안에 탑을 쌓고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니므롯과 벨렉의 태도는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고 싶어했던 아담과 하와를 닮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자신들의 영광스런 이름을 듣고 칭송하기를 바랬습니다. 대신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흙대신 역청을 만들었습니다. 견고한 건축물을 빠르게 효율적으로 만드는 필요한 재료들이었습니다. 건축을 위한 돌을 떠오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듭니다. 그러나 규격이 같은 벽돌을 만들 있다면 작업 속도도 올라가고 건물의 내구성도 높아집니다. 이러한 건축기술의 발견은 이들로 하여금 상상도 못한 일을 꾸미게 만들었던 겁니다. 바로 스스로가 신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특히 니므롯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듣던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사냥을 하면 못잡는 동물이 없습니다. 사냥의 , 니므롯입니다. 대한민국에 3 신이 있다고 하죠. 장사의 백종원, 강아지의 강형욱, 육아의 오은영. 이런 것처럼 고대 세계의 사냥의 신은 니므롯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더욱 널리널리 알리고 싶었던 것이죠. 유툽 구독자 100만명을 넘어 1억명, 10억명을 달성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2) 흩어지지 말자

둘째, 그들은 흩어지지 않기 원했습니다. 다시 4절을 읽어보죠. 

 

4그들은 말하였다. “, 도시를 세우고, 안에 탑을 쌓고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우리는 바벨탑 사건 하면, 무턱대고 높고 높은 탑을 건설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도시를 건설하고 안에 탑을 쌓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시의 도시란 성을 중심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니까 견고한 성을 짓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 거대한 도시를 만들고, 중심에 2 롯데월드같은 타워, 당시엔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주위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모여 있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특히 견고한 성을 쌓고 시날 평지의 아주 멀리까지 내다볼 있는 탑을 쌓으면 어떤 위협도 미리 알아차리고 방어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심판도 대비할 있습니다. 아무리 홍수가 와도 버틸 수가 있습니다. 하늘까지 닿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있다면, 그들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생명을 보전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성과 신전 탑을 세운 것입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니므롯과 벨렉을 칭송하고 그들이 높은 신전 꼭대기에 앉아 세상을 호령한다면 그들은 결국 신이 되어가는 겁니다.  

 

3. 하나님의 원래 계획 

1) 사람을 통한 세계 돌봄 통치 

여러분, 이런 계획과 행동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세계 돌봄 통치를 실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지 그들이 원탑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니므롯과 벨렉은 거대한 성과 탑을 지어 자신들이 신이되어 자신들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를 계획이었습니다. 

 

2) 사람을 통한 만물과의 평화

게다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만물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길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원래 계획이었죠. 아담과 하와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세상의 다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대하셨던 것이 바로 이런 역할이었죠. 하지만 니므롯과 벨렉은 세상으로 퍼져나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드러내기는 커녕 사람들을 모아서 고립시키고 자연 만물은 자신들의 생존과 쾌락을 위한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립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해서 에덴 성전에서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노아와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은 세상 돌봄의 대리 통치를 기대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동물들을 데리고 오시는 장면은 흡사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기 위해 데리고 오시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노아와 가족 그리고 후손들은 세계 돌봄 통치를 다시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걸 기대한 것이죠. 

 

그런데 다시 허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니므롯과 벨렉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그들 스스로 안전을 도모하고 다른 민족과 경쟁하기 위해 성과 탑을 짓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제 사람들은 세상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건축 공사의 노예가 되어갑니다.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아상이 변해버립니다. 

 

4. 하나님의 조치/통치(5-8)

오늘 주제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고장난 세상을 하나님은 다시 고치고 회복시키기 위해 세상에 개입하시고 조치를 취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고치고 회복하는 .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이었습니다. 자기 멋대로 하는 독재가 아닙니다. 기존 질서 유지에 집착하는 기득권자들의 보수주의도 아닙니다.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혈안이 되어 있는 진보주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원래 계획과 의도로 회복시키기 위해 개입하시고 조치를 취하시는 회복주의자이십니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회복하고 계시나요? 

 

1) 강림

먼저, 세상에 내려오십니다. 

 

5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삼위 하나님은 세상으로 내려오십니다. 하늘에서 없어서가 아닙니다. 직접 강림하여 개입하시기 위함입니다. 

 

2) 회의

둘째, 회의를 하십니다. 원인을 분석하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판단하십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이야 인간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였습니다만 그런 생각이 가능하게 만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쓰니 그들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정을 하시죠. 말을 뒤섞기로 말입니다. 

 

3) 흩어버리기

그렇게 되니 결국 그들은 성곽 공사와 성전탑 공사를 마치기도 전에 서로 말이 안통해 공사를 중단하고 맙니다. 그리고 서로 어색했는지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흩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원래 계획이 다시 가동되도록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세상에 퍼져서 세상을 위한 돌봄 통치로 나아가도록 재배치하셨습니다. 니므롯이라는 최고의 권력자요 유명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체하는 현실의 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5. 나가며 

- 하나님의 통치_회복시키기 

하나님의 통치는 결코 독재가 아닙니다. 하나님 맘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존 질서를 지키는데 올인하시는 극우보수주의자도 아니십니다. 그렇다고 사회질서 전복 자체에 목숨건 극단적 진보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분은 원래의 계획과 의도가 다시 구현되도록, 아름다웠던 에덴의 꿈과 비전이 다시 회복되도록 개입하시고 조치를 취하십니다. 이것이 그분 통치의 방향입니다. 회복시키기가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역사를 통해 회복의 방향을 결코 놓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노아를 부를 때도, 아브람을 부를 때도, 모세와 이스라엘을 부를 때도, 다윗과 솔로몬을 부를 때도,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부를 때도 하나님은 원래의 계획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결국 당신 스스로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회복을 위해 당신 스스로 희생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하나님의 통치는 세상의 통치와 지향성이 다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신이 되길 원하고 신놀이를 영원토록 안전하게 하기 위해 권력을 강화하고 강압하고 억누릅니다. 통제합니다. 보호해준다는 미명으로 백성의 자유를 억압하고 제한합니다. 강력한 상징을 사용해 사람들의 정신과 혼을 홀딱 빼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세계 돌봄 통치의 회복을 바라십니다. 대리통치자인 사람들을 통해 세상 만물과의 평화를 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향에 더욱 공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통치와 조치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창조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에서 사람들의 역할을 다시 회복시기 위해 세상에 개입하시고 조치를 취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려봅시다. 그분은 여전히 통치하십니다. 통치의 방향은 회복입니다. 그분의 통치에 대해 오해했다면 우리의 생각을 바꿔달라는 기도를 드립시다. 

 

2. 하나님은 사람들과 세상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죠. 온전한 회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원래의 사람에게 주셨던 정체성과 역할을 다시 부여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돌봄 통치의 대리 통치자이며,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사실을 우리 존재에 각인하여 우리의 일차적 소명으로 삼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 우리 마음에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나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2.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은멋대로, 현상유지, 사회 전복 아니라 회복입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 회복되어야 부분은 무엇인가요? 

 

 

 

 

 

2021. 9. 26. 김혁수

 

[본문_창세기 2:15-17_새번역]

15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16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0. 들어가며 

- 런닝화의 딜레마_반발력 vs. 쿠션닝

최근 달리기에 점점 진심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4킬로미터씩 달리고요, 주말에는 10킬로미터를 달리고 있습니다. 열심히 달리다 보니까 런닝화에 관심이 쏠리더라구요. 어젯밤에 유투브 선생님들을 찾아봤습니다. 어떤 런닝화가 좋은지 여러 선생님들이 알려주시더라구요. 그런데 런닝화에도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탄성 반발력이 좋은면 쿠셔닝이 떨어지고, 쿠셔닝이 좋으면 반발력이 떨어지는 딜레마가 있더라구요. 다를 완벽하게 잡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어쨌든 저는 런닝화를 구입할 예정입니다. 

 

- 인생의 딜레마_일관성 vs. 유연성

그런데, 이런 종류에 딜레마는 우리 인생 곳곳에 존재합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볼게요. 어떤 사람이 일관성을 중시하고 엄격하게 일관성을 고수하려고 하면, 유연성/융통성이 부족해집니다. 반대로 유연성/융통성을 중시하여 상황에 따라 변화를 주려고 하면, 일관성과 성실성이 부족해집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딜레마죠. 다를 완벽하게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쩔 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죠. 중간 어디쯤에 나의 위치를 잡는 거죠. MBTI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I E, N S, T F, P J, 모든 성향지표들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쩔 없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의 다른 면이 단점이 되죠. 

 

하나님의 창조에도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딜레마인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확인해 보면 좋겠습니다. 

 

1. 창조의 딜레마 

1) 대리통치자를 둘지 말지?

번째 딜레마는 대리통치자를 둘지 말지 였을 것입니다. 이건 순전히 저의 추측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이 아름답게 만들어진 것을 보시고, 정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관리를 하나님 당신이 직접 하실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맡길지 고민을 하셨던 같습니다. 물론 그분이 모든 것을 직접 관리하실 있었을 겁니다.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직접 짓고, 모든 동식물의 행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일들을 그분이 몸소 직접 하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대리통치지를 두는 것이 좋은 세상이라고 판단하신 같습니다. 그분이 혼자서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관여하고 통제하고 규제하는 것보다 대리 통지자를 두어 세상을 맡기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하신 같습니다. 하나님은 첫번째 딜레마를 이렇게 풀어내셨습니다. 

 

2) 대리통치자의 권한과 책임? 

번째 딜레마는 대리통치자의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어디다가 것인가하는 점이었습니다.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에덴 동산에만 국한 시킬 것인지 아니면 세계에 걸쳐 영향을 주게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리한다고 , 그가 무엇까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죠. 생명나무의 열매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것인지 것인지 등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느냐에 따라 대리 통치자의 위상이 달라지는 거죠. 나라를 대표하여 타국의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죠. 영사가 있고 대사가 있고 특사가 있습니다. 각각이 다른 정도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나라를 대표하지요. 

 

결국 하나님은 모든 권한과 책임을 아담에게 넘깁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어갈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있게 하였습니다. 이건 엄청난 권한입니다. 

 

여러분, 아시죠? 에덴 동산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나무의 열매들이 있었습니다. 생명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대표적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니, 다른 나무도 갖가지 이름이 있었을 같습니다. 지혜를 주는 나무의 열매, 용기를 주는 나무의 열매, 사랑을 더하는 나무의 열매 등등상상할 있는 아주 다양한 나무의 열매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있도록 하셨습니다. 가장 강력한 나무의 열매가 바로 생명나무의 열매였습니다. 영원한 삶을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열매였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쫓으실 ,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든 나무가 바로 생명나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반역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언제든지 먹을 있었습니다. 다른 나무의 열매도 언제든지 먹을 있었습니다. 지혜, 용기, 사랑, 리더십, 절제 등등의 열매도 먹을 있었을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권한과 책임의 범위였습니다. 어마어마한 권한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세상의 돌봄 통치자의 자리를 주신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결정이었고요, 창조의 딜레마 번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었습니다. 

 

창조의 딜레마 가지를 하나님은 담대하게 풀어내셨습니다. 대리통치자를 두는 것이 더욱 좋은 세상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리통치자에게 거의 무한에 가까운 권한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답하셨습니다. 한가지만 금지하셨던 것이죠.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는 명령이었죠. 그건 조금 있다가 다루도록 하고요. 우선 다시 기억할 내용이 있습니다. 

 

2. 에덴의 기능 

1) 세계 돌봄 통치의 중심지 

에덴의 가지 기능과 관련된 내용인데요.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에덴의 번째 기능은 혹은 역할은 무엇인가요? 맞습니다. 세계 돌봄 통치의 중심지로서 에덴의 역할이 있습니다. 에덴으로부터 세계를 돌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모든 동물들의 이름이 지어지고 분류가 되고 관계가 설정됩니다. 각각의 개성에 맞게 세상에 흩어져 살아갑니다. 앞으로 태어날 인류의 삶은 에덴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개의 강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돌봄을 받게 되는 거지요. 돌봄 통치의 주체가 바로 대리 통치자로 지목된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2) 지성소  

에덴의 번째 역할은 무엇인가요? 지난 주에 우리가 다루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전의 지성소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공간이 바로 에덴이었습니다. 아담은 에덴 지성소를 섬기는 대제사장 격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에덴의 가지 기능을 살펴 보아야, 하나님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의 명령을 내리셨는지 조금 이해를 있게 됩니다. 

 

3. 명령_선악과의 딜레마

1) 최고 통치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첫째, 최고 통치자와 대리 통치자 사이에 차이를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세계 돌봄 통치를 하는 데에 있어 사람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체계화시킬 있는 권한이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열매를 먹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매는 돌봄 통치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것입니다. 자칫하다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극이 세계 돌봄 통치에 관해서는 사라지게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안전장치였습니다. 최종적인 선악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사람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임을 사람들이 계속 인정하도록 돕는 안전장치였습니다. 바로 동산 중앙에 있어 매일 보게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던 거죠. 

 

2) 지성소의 보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둘째,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지성소를 보존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중의 성전, 지성소였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지성소의 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계시다는 말의 의미는 최종적 선악의 판단은 하나님에게 있으며, 고유한 권한은 침해받을 없고, 따라서 제사장은 하나님의 선악 판단을 세상에 알리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한다는 겁니다. 에덴 지성소에서 계속 일어나야 하는 일이 바로 이런 중재와 화해의 역동이었습니다. 지성소의 역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선악의 최종적 판단은 하나님께만 있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그걸 온전히 인정해야 했구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을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셨습니다. 그걸 먹는 것은 에덴 지성소를 더럽히는 행위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선악과를 먹는 것에 하나님이 그리도 엄중한 벌을 내리시는지 우리는 조금 이해할 있습니다. 사람의 반역을 통해 세계 돌봄 통치의 질서가 망가져버립니다. 사람의 반역을 통해 에덴 지성소가 더렵혀지고 기능이 멈춰버립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좋지 않은 세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사람에게 걸었던 기대가 순식간에 무너져버리는 겁니다. 

 

4. 나가며

- 딜레마 이해하기

저의 오늘 설명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에덴과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계획에 비추어 , 창조의 딜레마와 선악과의 딜레마 조금 이해할 있습니다. 단순히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비추어 ,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대리 통치자이며 대제사장인 하나님의 형상, 사람을 두어 세계 돌봄 통치와 세상 화해중재를 맡기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욱 좋은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의 딜레마, 선악과의 딜레마에 많은 분들이 헷갈려하고 힘들어합니다.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겠죠. 저는 오늘 하나님 편에서 한번 설명해 보았습니다. 바라기는, 100%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분이 그리는 세상에 대한 그림에 대해 조금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가고 그래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분은 몰래 숨어서 사람들이 죄를 짓는지 안짓는지를 보는 경찰 아닙니다. 덫을 놓고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냥꾼 아닙니다. 지은 사람을 정죄하고 형량을 매기는 재판관 아닙니다. 가장 아름답고 보기 좋은 세상을 창작한 예술가 가깝습니다. 균형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예술가입니다. 창조자는 창조자로서, 사람은 대리통치자와 제사장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운 균형이 계속 유지되길 바라는 예술가입니다. 

 

9 ,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세상의 질서를 만드시고, 작품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작품 걸작품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인데, 사람에게는 특별한 역할을 맡기셨죠. 바로 대리통치자, 대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처음 그렸던 세상에 대한 아름답고 보기 좋은 그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앞에 머물러 있으시길 바랍니다. 10, 20, 30, 조용히 침묵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신 그림 앞에 머물러 있어 보는 겁니다. 마치 갤러리 그림 전시회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분이 그리신 그림을 응시해보는 겁니다. 

 

이번 , 하나님의 창조의 그림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따뜻해지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창조의 하나님을 불러 봅시다. 창조의 하나님을 되뇌여 봅시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창조할 , 물질만 창조하고 손을 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만물을 돌볼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만물과 소통하고 평화를 유지하길 원하셨습니다. 대리통치자, 대제사장 사람의 역할이었습니다. 이런 그림을 다시 상상하면서 창조의 하나님을 불러 봅시다. 

 

2. 혹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면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대해 여전히 의심이 든다면 그런지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시간을 가집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창세기를 읽으며 들었던 의문은 무엇이었나요? 어떻게 해결이 되었나요? 아직 해결이 안된 지점은 무엇인가요?    

 

2.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고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오늘 설교를 통해서 부분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내용은 무엇인가요? 

2021. 9. 19. 김혁수

 

[본문_창세기 2:14-19_새번역]

14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서, 낮과 밤을 가르고, 계절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15 하늘 창공에 있는 빛나는 것들은 땅을 환히 비추어라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16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고, 가운데서 빛으로는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으로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별들도 만드셨다. 17하나님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두시고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시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0. 들어가며 

- 나는 누구인가? 

최근에 알지 못하는 분들과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모임이건 서로 모르는 상황에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기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갔습니다. 여러분에게 1시간 동안 자기 소개를 하라고 하면 어떻게 소개할래요? 이름, 나이, 사는 아주 기본적인 정보를 공유하는 것으로는 1시간을 채울 수는 없을 겁니다. 개인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훑습니다. 어디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합니다. 때로는 그걸로도 1시간을 채우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 싫어하는 것을 나눕니다. 때로는 자신의 성격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MBTI, 애니어그램 등의 성격, 성향에 대한 지표들을 활용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나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나는 누구인가?” 문장으로 대답하려고 하면, 이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너무 많은 정보 때문에 어떤 것이 나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는 정체성인지 집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세포들의 복합적 유기체다. 

나는 엄마아빠의 아들이다 

나는 지구인이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INFJ이다. 

나는 박유진의 남편, 혜율, 혜강의 아빠다. 

나는 목사다. 

나는 이성적인 존재다. 

나는 사랑받는 존재다. 

 

맞는 말인데, 어떤 정의가 가장 본질적인 답이 될까요? 여러분도 한번 여러 개의 문장을 보시고, 중에 가장 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장을 골라보세요. 

 

오늘은 그동안 여러분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 하나가 있는 사실입니다. 바로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전이요, 제사장입니다. 어떻게 이런 대답을 있게 되는지 성경을 통해 살펴봅시다. 함께 본문을 읽어볼까요? 

 

1. 성전으로서의 창조 

1) 성경의 통일성 

성경은 구약과 신약 합해서 66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구전되던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최종 성경이 편집되까지는 2-3천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적중에 기적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 공부할 출석하던 한인교회의 서정곤 목사님은 종종 기적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로 갖가지 기적을 바라지만, 진정한 기적은 성경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서 지금까지 전세계 사람들이 읽을 있게 성경이 기적 중에 기적이라는 것이죠. 

 

구약과 신약 66권의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핵심 주제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우주의 하나님,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책을 구성하셨다면, 책은 일관되고 통일된 관점이 있을 라고 믿는 거죠.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동일하다는 확신 때문에 더욱 강화되는 믿음입니다. 

 

누구는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누구는 언약이라고 합니다. 누구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학자들마다 조금씩 강조점을 달리해서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갑니다. 여러분은 성경 66권의 핵심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2) 새로운 신학적 통찰의 충격 

21 전에 이야기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단체의 간사가 되었습니다. 사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신학에 대해서는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도 몰랐습니다. 대학에서 라틴어 수업을 들었는데, 겨우 낙제를 면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독학으로 공부하려고 했지만, 책값만 버렸습니다. 무수한 설교를 들었지만, 사실 성경 전체를 꿰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단편적인 지식들이 머릿속을 휘집고 다녔었죠. 다만,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복음의 소식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봤기 때문에, 저도 그런 소망을 가지고 선교단체의 간사가 것이죠. 성경 스토리는 대충 알았습니다. 그러나 통일성 있는 주제가 무엇인지 확신하기는 어려웠습니다. 

 

, 전국의 간사님들이 모이는 수련회에서, 강사 분이 성전신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했는데요, 사실 저를 위한 강의는 아니었고, 저보다 기수 위의 간사님들을 위한 과목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너무 궁금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선배 간사님들에게 그게 무슨 내용인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핵심 정보를 얻었죠. 바로 구약과 신약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개념으로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구약의 창조이야기도 단순히 세계 만물의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창조라는 사실이었죠. 깜짝 놀랐습니다. 전에는 번도 그렇게 생각해 적이 없었거든요. 

 

뒤에 [성전신학]이라는 책이 2004년에 나왔습니다. G. K. 비일이라는 학자가 책인데, 그분의 책이 저의 관점을 열어 주었습니다. 책소개를 드리고 싶네요.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과학적, 물리적 의미의 세상 창조가 아니었습니다. 창조에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3) 성전으로서의 창조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로,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창조는 하나님이 머무실 성전의 공사입니다. 빛을 만들고, 하늘과 땅을 만들고, 육지와 바다를 만들고, 광활한 공간에 해달별을 만들어 배치하고, 물고기와 새를 만들고, 육지 동물들을 만들어 채우십니다. 이것은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종교적 신학적 배치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만드신 것입니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없는 시공간을 하나님께서 질서를 부여하시고 디자인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편안하게 지내실 공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편하게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맞습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2. 성전으로서의 에덴 

1) 혼란을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1:1-2)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창세기 1 1-2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하나님의 영은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사실 1-2절의 해석은 그야말로 혼란 자체입니다. 1절이 1-2장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표제어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세상을 만드셨는데, 아직 질서가 잡힌 세상이 아니라 혼돈스럽고 공허한 세상, 어둠이 깊음 위에 있는 세상을 일단 만들었다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시작되는 것이죠. 혼란함과 공허함, 그리고 어둠이 가득한 곳에 하나님께서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무엇부터 시작하시죠? 그렇습니다. 빛을 창조하십니다. 사실 하나님 스스로가 빛이시죠. 빛의 상징은 성경 전체에 하나님을 향해 사용됩니다. 강렬한 불과 빛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하죠. 모세에게 보이신 하나님은 강렬한 불꽃으로 등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끄실 때도, 거대한 불기둥으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시죠.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사울은 너무나 환한 빛을 보고 눈이 멀고 말았죠.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에는 빛이신 그분으로 인해 밤이 없다고 합니다. 

 

빛을 통해 세상의 기본 구조를 만드십니다. 빛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죠. 빛이 없이는, 시공간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가시광선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빛이 시공간이라는 질서를 부여합니다. 빛이 있으니 세상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속성과 너무나도 닮은 하나의 물리적 존재를 제시하라고 하면 그건 틀림없이 빛일 겁니다. 더이상 땅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질서가 잡힙니다. 뒤에 그분은 공간을 구분하십니다. 물을 둘로 구분하셔서 하늘과 바다라는 고대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규모와 크기를 상상할 없는 공간을 만드십니다. 하늘도 그렇고 바다도 그렇고 그들에겐 미지의 공간입니다. 바다를 육지와 바다로 다시 구분하십니다. 공간이 계속 구획되는 것이 보이시죠? 혼란스럽던 공간이 이제 빛으로 드러나면서 하늘과 바다로 구분되고, 뒤에 바다라는 두려움과 혼란의 공간이 다시 육지와 조금 작은 바다로 구분됩니다. 

 

구분된 공간에 하나님은 각종 장식물로 채우시고 데코레이션을 하십니다. 빛과 어둠을 담당하는 해달별을 집어 넣으시죠. 하늘에는 , 바다에는 물고기를 넣으십니다. 그리고 육지에는 동물들을 넣으시죠. 이렇게 공간을 채우십니다. 어느덧 혼란스럽고 비어 있던 초기 세상이 질서가 잡히고 채워지게 되는 겁니다. 왜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자연 성전의 의미입니다. 

 

2) 에덴 성전에서 휴식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은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지성소를 만드시기로 결정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에덴입니다. 여러분, 성전 구조에서 하나님이 직접 제사장을 만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곳이 어디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지성소라는 곳이에요. 우리가 성전과 회막의 구조를 공부해야 한다면 이런 구조물들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일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고, 그룹이라고 불리는 날개달린 동물이 지키고 있는 , 대제사장이 일년에 번만 들어갈 있는 , 만약 대제사장이 죄가 있으면 들어가자 마자 죽는 , 그래서 방울 달린 밧줄을 매고 들어가는 ,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지성소 밖에서 끌어낼 밖에 없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바로 그곳 지성소가 원래는 어디였다고요? 그렇습니다. 에덴이라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바로 에덴에서 쉬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3) 에덴 성전의 돌봄 통치

우리는 에덴을 통해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강들을 통해 에덴에서의 통치가 세상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런데 통치는 어떤 통치라고 했나요? 맞습니다. 돌봄 통치라고 말씀드렸죠. 

 

돌봄 통치의 본질이 오늘 성전신학에서 밝혀집니다. 여러분, 그저 사람과 동물의 복지를 높이는 것이 돌봄 통치의 본질이 아닙니다. 에덴의 본질이 하나님의 지성소라면, 지성소에서 뻗어져 나오는 강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과의 관계 상징합니다. 돌봄 통치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요, 그분의 임재 속의 연합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인권이나 동물권의 문제는 아니죠. 그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요, 회복된 관계에서 오는 임재 속의 연합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막이나 성전의 기능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인된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화평 평화를 누리게 되죠. 그리고 그분의 임재 속에 거하게 되는 겁니다.

 

3. 성전 제사장으로서의 아담

1) 아담, 새롭게 보기 

그렇다면 에덴 성전의 대리 통치자였던 아담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대제사장 겁니다. 자연 성전의 에덴 지성소의 아담 대제사장 있었던 겁니다. 아담은 단순히 인류의 조상으로서만 기능하지 않습니다. 유전학적으로 모든 인류의 공통 조상으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 받아 세상 만물을 돌보는 역할의 대리 통치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만물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어주며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 샬롬의 관계를 유지해 주는 대제사장입니다. 

 

2)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제사장

고대 팔레스타인 주변 지역의 신화들을 살펴보면 이런 개념들이 많이 사용됩니다. 신의 형상은 신을 대리하며 신과 세상을 중재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주는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말입니다. 

 

26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27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 26-27)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이미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른 피조물과도 다릅니다. 하나님도 닮았고, 다른 피조물과도 닮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니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 대제사장의 역할을 있는 겁니다. 

 

3) 제사장의 돌봄 통치

여러분, 제사장이 자신의 역할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분명히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고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자연 성전에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게 되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서로 깊은 사랑의 관계로 남게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역할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피조물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어렵고 하나님이 껄끄럽고 같이 있기 부담스럽게 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그분에게 합당하게 돌려져야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없게 됩니다. 화목한 관계, 평화로운 관계가 깨어집니다. 제사장의 역할이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제사장의 돌봄 통치는 그렇게 하나님과 다른 인간과 피조물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계속 유지하도록 돕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4. 나가며_성전&제사장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아담의 제사장 역할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수됩니다. 

 

5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것이다.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6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것이다.’ 너는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출애굽기 19:5-6)

 

그리고 신약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인들, 저와 여러분에게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면 충격은 밖에 없습니다. 

 

16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 16-17)

 

그렇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자연 성전, 에덴 지성소가 아닙니다. 광야 시절 회막이나 솔로몬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 몸과 마음 속에 계십니다. 이것이 둘째 아담으로 불리시는 예수님, 대제사장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기도 하면서, 예수님을 닮아 제사장의 역할도 같이 감당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와야 구약과 신약의 일관된 주제의식이 드러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예수님을 따라 세상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제사장입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이렇게 달라집니다. 나의 정체성은 나의 좋고 나쁨으로 이뤄진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만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게 부여하신 목적과 계획 나의 정체성이 됩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고, 하나님 나라의 돌봄 통치를 실행하는 제사장이다.” 

조금 문장이긴 하지만 우리 마음과 기억 속에 각인되길 축복합니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를 맞아 가족 친지와 행복한 시간들 보내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남는 시간, 넷플릭스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한번쯤은 나는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추석 연휴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창조의 하나님을 불러 봅시다. 창조의 하나님을 되뇌여 봅시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창조할 , 물질만 창조한 것이 아니라 물질세계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자연 성전과 에덴 지성소를 창조하신 겁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연 성전과 에덴 지성소를 상상해 봅시다. 

 

2.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제 그리스도인들 명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제사장입니다. 정체성이 우리 몸과 마음에 각인되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이며,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고, 하나님 나라의 돌봄 통치를 실행하는 제사장이다.” 라는 자기 정체성이 확고해지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에덴 동산이 단순히 정원이 아니고 세계 돌봄 통치의 중심지이며 동시에 자연 성전의 지성소라는 말씀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2.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고, 하나님 나라의 돌봄 통치를 실행하는 제사장이다.” 라는 문장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는다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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