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1. 김혁수

 

[본문_예레미야 12:1-6_현대인의 성경]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논쟁한다고 해도 주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께 가지 물어 보고 싶습니다. 악한 자가 잘되고 정직하지 못한 자가 성공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뿌리를 박고 자라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입술로만 주를 가까이할 마음으로는 주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3여호와여, 주는 나를 아시고 나를 보고 계시며 주를 향하는 마음 자세를 살피고 계십니다. 양을 잡으려고 끌어내듯 악한 자들을 끌어내어 죽일 날을 위해 준비하소서.

4언제까지 땅이 슬퍼하며 들의 모든 초목이 말라야 하겠습니까? 땅에 사는 사람들이 악하므로 짐승과 새들도 전멸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우리가 하는 일을 그는 보지 못한다하고 말합니다.

5여호와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걸어다니는 사람과 함께 달려도 피곤하다면 어떻게 말과 경주를 하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서 비틀거린다면 요단의 숲에서는 어떻게 하겠느냐?

6 형제들과 가족까지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소리를 지른다. 그들이 너에게 좋은 말을 하여도 너는 그들을 믿지 말아라.”

 

0. 들어가며 

- 결승점, 반환점 

만약에 여러분이 마라톤을 뛰는 선수라고 가정해 봅시다. 시계도 안보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죽을 만큼 힘든 시간들을 버티고 끝에 결승점이 보입니다. 팔을 벌리며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결승점이 아니라 반환점이었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심정일까요? 저는 최근에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해를 열심히 달려왔는데, 여전히 끝나지 않는 문제와 사건들의 후폭풍이 계속되었습니다. 결승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반환점이었던 겁니다. 이런 순간에도 우리는 계속 달릴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볼까요? 

 

1. 예레미야와 아나돗 

1) 예레미야의 메세지 

- 예레미야 

분은 남유다 왕국 마지막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BC 627년에 예언 활동을 시작하여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BC 587 어간까지 40년간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시기는 유다의 마지막 정치, 종교 개혁이 있었지만 줄곧 쇠퇴의 길을 걷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조국이 멸망해 가는 과정을 오롯이 경험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그는 조국에 대한 사랑 때문에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별명이 그러하다고 눈물만 흘리는 감성적인 선지자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판입니다. 그는 40년간 줄곧 자신을 반대하고 위협을 가하는 동족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메세지가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으며, 다른 선지자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그의 메시지는 어땠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9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이 나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 10그들도 자기들의 조상이 저지른 죄악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조상이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면서 섬기더니,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도, 내가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다.

11그러므로 주가 말한다. 보아라, 그들이 벗어날 없는 재앙을, 내가 그들에게 내리겠다. 그들이 나에게 도움을 간청해도,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 12 때에 유다의 여러 성읍에 사는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은, 분향하며 섬기던 신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간청하겠지만, 재앙의 날에 신들은 절대로 그들을 구하여 주지 못할 것이다. 전혀 도와줄 없을 것이다. 13유다 사람들아, 너희가 섬기는 신들은 너희가 사는 성읍 수만큼이나 많고, 너희가 바알에게 분향하려고 세운 부끄러운 제단은 예루살렘의 골목길 수만큼이나 많구나!

14 예레미야야, 너는 이런 백성을 보살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너는, 그들을 도와 달라고 나에게 호소하거나 간구하지 말아라. 그들이 재앙을 당할 때에, 네가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예레미야 11:9-14)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줄곧 어려운 일을 시키고 계십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유다의 재앙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지금 진퇴양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속국으로 계속 살기도 싫었습니다. 독립을 하자니 군사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의 도움으로 바벨론에 맞서 싸우자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포기하고 이집트로의 망명을 시도합니다. 사람들은 동요합니다. 그런 상황에도 이들은 하나님을 찾기보다 우상을 따릅니다. 그런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9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이 나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 10그들도 자기들의 조상이 저지른 죄악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조상이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면서 섬기더니,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도, 내가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다.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휴지통에 버렸습니다. 13절에 보면 우상이 성읍마다 하나씩 있습니다. 바알에게 분향하기 위해 세운 제단은 예루사람의 꼬불꼬불한 골목길 숫자보다 많다고 한탄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유다가 부르짖어도,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메시지를 길거리에서 전하니 사람들이 싫어할 밖에 없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것을 그만둘 마음도 없거니와, 여호와라는 자신들의 조상 신은 응답하지도 않겠다고 하니, 짜증이 났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희망적인 메시지가 나와도 성에 차지 않는데, 부정적인 메세지를 매일 길거리에서 쏟아내는 예레미야를 보니 울화통이 치밀어 오릅니다. 

 

2) 듣기 싫어하는 동향인

그런데 예레미야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사실은 단순히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를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예레미야를 알고 그와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던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모의한다는 소문과 위협을 들었을 ,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21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나돗 사람들을 두고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의 목숨을 노려서 이르기를너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아라.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계속하다가는 우리 손에 죽을 알아라한다.”(예레미야 11:21)

 

자신의 메세지가 사람들의 마음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조금 이해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냉혹했습니다. 고향 친구들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에게 협박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 예언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합니다. 더이상 듣기 싫은 소리를 그만 두라고 합니다. 

 

2. 예레미야의 질문 

1) 인생의 딜레마 

- 어떻게 악인은 번성하고 의인은 고통받는가? 

예레미야는 이제 예루살렘의 길바닥에 털썩 주저 앉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온갖 생각들이 몰려 옵니다. 이제 수많은 의문들을 가지고 기도 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들어볼까요?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악인은 번성하고 의인은 고통받는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오랫동안 던져왔던 질문입니다. 정의로운 형벌이 주어지지 않는가? 공평한 처벌이 벌어지지 않는가?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형통하고 반역하고 배신한 사람들이 평안해 보이는지 예레미야는 미치도록 궁금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자신은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들 멋대로 지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민족적 재앙 앞에서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있습니다. 

 

2) 악인에 대한 처분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악인들로 인해 의인들이 죽어나갑니다. 악인들로 인해 민족의 산과 들이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악인들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고 가축이 죽어나가고 농작물이 말라갑니다. 이제 악인을 처단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마음이 때가 얼마나 많습니다. 악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낮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어기는 사람들 때문에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되어 결국 일반 대중이 죽어나갑니다. 강간범, 살해범에 대한 법의 처벌이 솜방망이 같이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형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댓글로 도배합니다. 

 

어제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한국 드라마지옥 이런 소재로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은 죄인들에게 벌주고 지옥으로 데려가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신으로 모시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죄인들을 공개처형하는 지옥의 사자들에 대해 종교적 열정을 갖다 바칩니다. 그렇게 심플하게 해소되길 바랬습니다. 사람들은 명확한 것을 원합니다.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 명확한 선이 있기를 바랍니다. 애매한 , 모호한 것을 싫어합니다. 초월적인 누군가가 등장해서 선악을 분명히 가르고 선에 대해서는 상을, 악에 대해서는 벌을 주기를 바랍니다. 역설과 

딜레마를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3. 말과 함께 달리기 

1) 역설 인내 

이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다시 읽어 볼까요? 

 

5여호와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걸어다니는 사람과 함께 달려도 피곤하다면 어떻게 말과 경주를 하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서 비틀거린다면 요단의 숲에서는 어떻게 하겠느냐?

6 형제들과 가족까지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소리를 지른다. 그들이 너에게 좋은 말을 하여도 너는 그들을 믿지 말아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지금 상황은 걸어다니는 사람과 함께 달리는 것으로 보고 계십니다. 현재 예레미야가 겪고 있는 딜레마와 역설은 물론 힘든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일상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들이 번성하면서 의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오랫동안 벌어져 왔던 인류 역사의 보편적인 상황이라고 하시는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했던 순간부터 이런 역설과 모순이 보편적이 되어 왔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겪어내야 역설과 딜레마는 마치 말과 함께 달리는 수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역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십니다. 말과 경주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하십니다. 천천히 시속 4KM 걷거나 달리는 것이 아니라, 시속 20KM이상으로 달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겁니다. 때에는 더욱 혼란스러울 겁니다. 더욱 고통스러울 겁니다. 

 

실제 그런 순간이 나중에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그건 최종적 심판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벨론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예레미야는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을 했기로서니 더욱 포악한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분별이 어려웠습니다. 

 

육체적 달리기가 아니라 정신적, 지성적 달리기입니다. 숨을 헐떡이며 10km, 20km, 40km 뛴다고 , 중간중간에 나오는 장애물과 언덕을 넘어설 , 끝난 같은데 아직도 많이 남았을 , 달리는 것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지적으로도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가진 상식과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을 , 역설, 모순, 딜레마에 빠져 출구가 없어 보일 , 문제가 꼬이고 꼬여 실타래처럼 뭉쳐 있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 한숨은 깊어지고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을 , 때가 정신적 달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말과 함께 경주하는 순간이지요. 

 

2) 소명의  

하나님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소명의 삶을 살라고 요청하시고 있습니다. 100%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선명한 경계를 긋지 못하더라도, 모순과 역설과 딜레마가 극에 달한다 하더라도, 예레이먀에게 주신 소명을 삶을 끝까지 살아내라고 요청하시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고향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고, 동료 예언자들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뺨을 때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메시지가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들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예레미야나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이런 삶을 살았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찌질하고 괴팍한 삶을 살았습니다. 소명을 끝까지 감당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말과 경주할 정도로 힘에 지나도록 달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삶이었습니다.  

 

4. 나가며 

- 온전함을 향하여

무엇이 온전함입니까? 역설과 모순과 딜레마를 해결하고 깔끔하고 선을 긋고 사는 삶이 온전함입니까?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같습니다. 오히려 역설, 모순, 딜레마를 하나님의 신비와 섭리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삶을 끝까지 인내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온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느리게 한가로이 걷기, 평소에 걷는 속도로 걷기, 빠르게 걷기, 천천히 달리기, 장거리 달리기, 400미터 달리기, 100미터 달리기여러 가지 속도의 걷기와 달리기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너무 강렬한 역설과 모순과 딜레마 앞에서도 하나님의 소명의 길을 뛰어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말과 함께 경주하는 순간일 겁니다. 

 

K드라마 지옥은 신과 인간의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상당히 불편하고 스트레스로 가득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깨닫게 되었습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번 주도 숱한 질문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길을 걸어가는 때로는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많아질 있습니다. 때로는 불만이 올라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할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질문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의문이나 불만이 있나요? 솔직하게 아뢰는 기도를 드립시다. 

 

2.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정신적인 극한 상황에서도 달려나갈 것을 요청하기도 하십니다. 평소에 걷고 달리던 속도가 아니라 때로는 말과 함께 달려야 하는 상황도 있는 겁니다. 혹시 지금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끝까지 달릴 있도록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나의 인생의 여정에서 말과 경주할 정도로 전속력으로 달려 적이 있나요? 무슨 , 어떤 목표 때문에 렇게 달렸나요?     

 

2. 하나님에게 가지는 나의 인생 최대의 질문은 무엇인가요? 질문은 언제부터 가지게 되었나요?     

2021. 12. 5. 김혁수

 

[본문_마태복음 1:1-17_새번역]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이삭은 야곱을 낳고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헤스론은 람을 낳고, 4람은 아미나답을 낳고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나손은 살몬을 낳고, 5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오벳은 이새를 낳고, 6이새는 다윗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아비야는 아삽을 낳고, 8아삽은 여호사밧을 낳고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웃시야는 요담을 낳고요담은 아하스를 낳고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므낫세는 아모스를 낳고아모스는 요시야를 낳고, 11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무렵에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12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아비훗은 엘리야김을 낳고엘리야김은 아소르를 낳고, 14아소르는 사독을 낳고사독은 아킴을 낳고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맛단은 야곱을 낳고, 16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17그러므로 모든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에 끌려갈 때까지 열네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이다.

 

0. 들어가며 

- 성육신(Incarnation) 시리즈 

벌써 12월입니다. 2021 해를 결산하는 달입니다. 우연히 신문 칼럼을 읽다가 장훈 중앙대 교수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2월은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한해를 결산하는 시간이다. 정치 사회를 중심으로 보자면, 올해 연말결산은 이런 숫자들로 요약된다. 80%. 558조원. 7538. 16 시간. 428000만원. 앞의 숫자가 걱정과 우려의 수치라면, 16 시간과 428000만원은 희망의 숫자이다.”

 

여기서 80% 코로나 백신 접종률입니다. 558조는 올해 한국 정부의 예산 총액입니다. 7538회는 3-6 사이에 극단적 선택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소방청이 구조 출동했던 횟수라고 하네요. 그럼 16 시간은 뭘까요? 그렇습니다. 네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시청 시간이랍니다. 11 중순 집계 기준이라는데, 아마 많이 봤겠죠. 그럼 마지막 42 8000만원은 어떤 돈일까요? 그건 BTS러브 유어셀프라는 곡으로 아동, 청소년 폭력이 없는 세상을 위한 캠페인으로 모은 금액이랍니다. 엄청난 돈이긴 한데, 아내에게 물어보니 세계적인 캠페인 치고는 적다고 말하더라구요. 

 

이렇게 해는 코로나로 우울한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와중에도 희망의 메시지를 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빛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징어 게임, BTS 비롯한 K-culture 우리에게 작은 기대와 희망을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희망과 소망은 바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우리는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에도 사실은 여전히 무한한 희망의 메시지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성육신 시리즈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성육신을 복음서의 저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면서 절망과 좌절의 시기에 희망을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읽어볼까요. 

 

1.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성육신 

1) 마태

- 유대인의 구원자, , 언약의 성취자

먼저, 마태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유대인의 구원자, , 그리고 예언의 성취자 보았습니다. 어떤 책이든 문장, 문단, 그리고 장이 중요합니다.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앞에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따라 전체 글의 방향성이 정해집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복음서의 부분을 비교/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보다 재밌는 사실을 발견하게 것입니다. 

 

마태복음 1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그렇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복음서를 작성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먼저 꺼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에 대해 책을 읽는 모두가 가장 먼저 알도록 글을 배치한 것입니다. 마태는 유대인이었구요,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가장 어필할 있는 문장을 선택했습니다. 바로 유대인의 시조인 아브라함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 왕을 거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정통 유대인임을 밝히고, 그를 오랫동안 내려온 민족의 예언을 성취한 사람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깊이 다뤄봅시다. 

 

2) 마가 

-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자 개시자

그럼 마가는 어떻게 그의 책을 시작하는지 살펴봅시다. 

 

마가복음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15“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급선무로 둡니다. 그리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신 사역에 집중합니다. 마가복음 1 14-15절이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어떤 복음을 선포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특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아주 가까이 왔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등장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임을 알립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가능하면 빨리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 그분이 시작한 하나님 나라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마가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자요 개시자로 보고 있습니다. 마태와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을 있습니다. 

 

3) 누가

- 만인을 위한 평화의

그렇다면 누가는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요? 점점 재밌어지지 않습니까? 저자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에 대해 조금씩 다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개의 복음서가 권의 성경책 안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다를 있다는 점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입니다. 읽어볼까요?

 

누가복음 1 

1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2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대로 엮어냈습니다. 3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는 로마의 총독에 버금가는 지위와 권력을 가진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데오빌로가 정확히 누군지는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만 각하라는 표현을 것을 미루어 , 상당히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할 있습니다. 누가는 이방인의 지도자에게 편지를 써서 예수님이 만인을 위한 평화의 임을 설명합니다. 의사인 누가는 가능한 역사적 사실 그대로 쓰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영향 주었는지를 알려줍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까지도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실제의 삶과 사역은 만인을 위한 평화의 왕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영향력있는 지도자였던 데오빌로도 그런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가는 다시 예수님을 만인을 위한 평화의 왕으로 설명하면서 데오빌로로 하여금 확신을 갖도록 만들고 싶었던 같습니다. 

 

4) 요한 

- 우주의 왕이자 하나님

이제 요한이 남았네요. 요한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우주의 왕이자 하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요한복음 1 

1태초에말씀 계셨다.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 하나님이셨다. 2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창조된 것은 4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다른 복음서와 완전히 다르죠. 마태가 유대인의 족보로 시작했고, 마가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시작임을 드러냈고, 누가가 만인을 위한 예수님으로 설명했다면,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묘사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의 관점입니다. 스케일이 다르죠. 철학적이고 직관적이며 신학적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마태복음이 유대 예언의 성취 보고서라면,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짧은 노트들의 모음집이고, 누가복음은 역사적인 위인 전기에 가깝고, 요한복음은 철학적 신학 책에 근접해 있습니다. 마다 이런 특징이 있으니, 특징들을 고려하면서 복음서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2. 마태의 중심 포인트 

그럼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에 조금 깊이 들어가 볼까요? 과연 마태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가지 힌트들을 살펴보면서 정리해볼까 합니다.

 

1) 계보

우선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가장 먼저 내세웁니다. 여러분 누가도 예수님의 족보를 사용하는데요, 마태처럼 처음부터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나서 예수님의 족보를 넣었지만(누가복음 3:23-38), 그것도 마태랑 달리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었는데요, 어디까지 올라가는 아시나요? 아담에게까지 올라갑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모든 민족,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마태의 우선 순위는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부터 내려오는 족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서부터 다윗까지 14대로 짜르고, 다시 다윗부터 예수님까지 14대로 짜릅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는 보다 많은 왕들이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아주 정확한 숫자는 아니라고 있겠죠. 하지만, 14 편성하면서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가 정통 유대인의 족보며, 왕의 족보며, 성경의 에언자들의 예언을 성취하는 족보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같습니다. 

 

족보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려집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집트 포로기 시절,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정착 시절, 왕정 수립과 전성기, 그리고 쇠퇴기를 지나 바벨론 포로기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으며, 예수님 시절까지 아직도 이스라엘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성전은 농락당했으며, 당시의 성전은 일부 기득권들의 소유물로 전락했습니다. 정말 자신들의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용서하시고 성전을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지 항상 궁금해왔습니다. 

 

마태는 족보를 통해 이런 궁금함을 더욱 증폭시켜나갑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오랫동안 내려오던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될지 더욱 관심 갖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마태가 족보로 그의 책을 시작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2) 구원자(The Savior)

족보 끝에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마태는 유독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유대인의 죄를 해결하시는 구원자임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1: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죄를 사하고,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시는 , 그래서 다시 원래의 믿음의 민족, 언약의 민족, 같은 제사장 민족 되게 하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 민족의 오랜 염원을 풀어주시는 분이신 것이죠. 

 

3) 임마누엘(Immanuel)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서 마태는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것이다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 유대민족과 함께 계신다. 그동안 우리 민족을 떠나신 같았지만, 이제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많은 학자들이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났고 그래서 여전히 바벨로 포로기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정서는 사실 절망적이었고 오랜 기다림에 지쳐있었던 거였죠.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는지 불안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임마누엘로 예언이 성취된 겁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신 겁니다. 

 

마태가 어떻게 예수님을 보고 있는지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그림이 그려지시나요? 

 

3. 나에게 예수님이란? 

1) 계속 물어봐야 질문

저는 지점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그리고 계시나요? 다르게 물어보겠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이란? 쉽게 답하기 어려우시죠. 신학적으로야 정리된 답변이 있을 있겠습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유대인 , 지고지순한 윤리 강령들을 주창하시고 가르치신 윤리학 교수, 귀신을 내쫓는 구마사, 병든 사람을 고치는 의사,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장, 이적과 기적을 일으키는 마술사, 탁월한 성경 해설가,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사람, 기독교의 창시자정말 다양한 답변이 가능할 겁니다. 과연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2) 인생의 여정 속에서 다르게 보이는 예수님 

우리의 인생 여정 속에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모습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고백할 밖에 없습니다. 그건 예수님이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성격, 나의 삶의 정황, 나의 경험과 지식 등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들은 예수님을 더욱 다채롭게 이해하게 만듭니다. 과거에는 예수님을 개인의 죄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3 때나 군대에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길을 인도하시고 도와주시는 말이죠. 대학 신입생 , 예수님은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나의 개인적인 죄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정도의 작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세상과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지만 96-7년도의 예수님은 마음에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시는 분이셨습니다. 2000년대의 예수님은 저에게 가난한 세계인의 고통에 공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2010년대의 예수님은 불의한 사회와 구조적인 악에 분노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저에게 다양하게 등장하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어떤 그림 장으로 이해할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계속 변화무쌍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며,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4. 나가며 

- 성육신 묵상하기

그러기에 우리는 성육신을 묵상합니다. 각자의 속에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인생 여정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가까이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그분을 흑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총천연색으로 봅니다. 그분에 대해 줌인하는 영역이 조금씩 바뀝니다. 때로는 그분의 행동을 때로는 그분의 말을 떠올립니다. 때로는 그분의 성품에 때로는 그분의 감정에 집중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평생 묵상하고 떠올리고 생각하고 바라봐도 충분한 분입니다. 

 

요사이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에 집중하나요? 저에게도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저는 화해와 조정자, 중재자 되시는 예수님에게 꽂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사회, 피해받고 가해하는 사회, 그래서 너도 나도 억울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는 한국 사회에서 화해, 평화, 중재를 촉진시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분은 가장 간격을 메우신 분이시고, 인류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죄를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의 차별을 없애시고 남녀, 노소, 계층 간의 갈등을 축소시켜버린 새로운 현실 공동체를 실현시키신 분이십니다. 이런 그분을 떠올립니다. 묵상합니다. 오랫동안 바라봅니다. 응시합니다. 그렇게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머리에 오래 머물게 합니다. 

 

여러분도 이번 , 여러분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응시해봅시다. 컴퓨터 PPT Keynote화해의 예수님 써놓고 응시해보는 겁니다. “화해의 예수님대신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글이나 그림으로 띄워놓고 응시해보는 겁니다. 만일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오늘 마태가 집중한 예수님을 띄워봅시다. 유대인의 , 구원자, 예언의 성취자, 임마누엘이란 단어를 띄워놓고 집중해 보는 겁니다. 단어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과정과 느낌과 생각의 흐름을 10-20 후에 적어봅시다. 그렇게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봅시다. 

 

우리 주님의 모습을 새롭게 느끼는 귀한 주가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한해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나요? 어떤 예수님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예수님에게 머물러 봅시다. 

 

2. 예언의 성취자이자,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떠올려 봅시다. 이스라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원자로서 오신 예수님을 떠올려 봅시다. 이런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 기도를 드립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예수님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셨나요? 그분의 어떤 모습을 주목하게 되었나요?       

 

2. 우리 청년부에게, 혹은 한국 교회에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어하실까요?  

 

 

2021. 11. 28. 김혁수

 

[본문_디모데후서 4:1-8_새번역]

1나는 하나님 앞과,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2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3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6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0. 들어가며 

- 마지막 스퍼트  

운동을 지속하면 근육이 요구하는 만큼의 산소를 공급하지 못해 근육에 피로물질이 쌓인다. 그러다 결국 운동을 멈추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허친슨은 놀라운 현상을 찾아냈다. 세계신기록을 세운 선수 대부분은 마지막 바퀴에 가속을 붙여 기록 수립에 성공한다. 허친슨이 인용한 논문에 따르면 ‘1920 이후 육상 5000m 1m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한 선수들 가운데 66명이 마지막 바퀴에서 가장 빠르거나 번째로 빠른 속도를 기록했다’(105) 한다. 마지막에 속도를 높이는 현상을막판 스퍼트라고 부른다. 결승선을 통과한 뒤에 힘이 남는다면 역시페이스 조절 실패. 마지막에 남은 힘을 쏟아내는 것이 기록도 세우고 페이스 조절에도 성공하는 길이다.”

 

중앙일보 장혜수 기자의 글입니다. 마지막 스퍼트라는 것이 있죠. 장혜수 기자는 허친슨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세계신기록 보유자들이 마지막 스퍼트를 어떻게 하는지 적고 있습니다. 결국 막판 스퍼트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기록을 세우느냐 마느냐로 갈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운동할 , 마지막 힘을 짜내서 힘을 쓰는 경우가 있죠? 윗몸 일으키기, 팔굽혀펴기, 턱걸이 등의 운동을 때도 마지막에 근육이 터질 같은 순간이 있잖아요. 달리기에도 그런 마지막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죠. 바울의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바울의 마지막 달리기

- 30년의 달리기 인생 

바울은 지난 30년간 줄기차게 달려왔습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만난 예수님 때문에 인생이 180 바뀌었습니다. 유대교 원리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벗고 예수님 중심의 복음주의자가 것이죠. 성경을 예수님 중심으로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비밀을 풀고 퍼즐을 맞추어 방탈출 하듯이 성경이라는 비밀의 방을 예수님이라는 힌트를 가지고 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랬더니 율법의 의미가, 성전의 의미가, 언약의 의미가, 예언의 의미가 분명히 밝혀지기 시작 겁니다. 바울은 이걸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라고 이해했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이라는 비밀의 방에 갇혀서 여전히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충동과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달리기 시작한 겁니다. 지역에 머무는 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시작한 세계 선교 여행은 그의 달리기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도시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지중해 지역을 돌고 스페인까지 가서 비밀의 방의 탈출 힌트 혹은 패스워드 알려주고 싶어했습니다. 3 선교 여행 , 에베소 지역 머물면서 2 선교 여행에서 개척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9 

24경기장에서 여러 선수들이 함께 달리지만 우승자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우승자가 되도록 힘껏 달리십시오.

25우승자가 되려고 경쟁하는 선수마다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26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는 권투 선수처럼 싸우지 않습니다.

 

-바울의 마음 

바울은 이런 마음으로 달리기를 하듯, 그렇게 지난 30년을 달려왔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스퍼트를 내야 하는 시기임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그의 말년에 쓰여진 편지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치 유언과도 같은 글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기약이 없습니다. 만나면 다행이지만, 만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데요, 읽어볼까요? 

 

디모데후서 4 

9그대는 속히 나에게로 오십시오. 10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11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대가 때에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 12나는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13그대가 때에, 내가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에 두고 외투를 가져오고, 책들은 특히 양피지에 것들을 가져오십시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번째 투옥은 가택연금과 비슷한 것이지만, 번째 투옥은 엄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외투를 찾고 있습니다. 디모데의 면회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가 로마로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바울이 돌아가시기 전에 디모데를 만났기를 바래봅니다. 

 

- 사람 세우기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마지막 스퍼트는, 마지막 달리기는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1나는 하나님 앞과,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2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5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달리기는 사람 세우기였습니다. 리더십 전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신이 뛰었던 달리기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고난과 아픔이 있었던 달리기를 디모데에게도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붇돋아 주고 있는 겁니다. 이게 그의 마지막 스퍼트였습니다. 

 

2. 달리기와 인생

달리기와 인생은 여러 모로 닮았습니다. 달리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종종 합니다. “달리기는 인생이다.” 어떤 부분이 닮았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닮은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페이스 조절 

번째는 페이스 조절입니다. 단거리 달리기 말고 마라톤을 비롯한 중장거리 달리기에는 페이스 조절이 관건입니다. 자신의 신체 상태를 빨리 파악하고 자신의 맞는 페이스로 달려야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빨리 뛰게 되면 오버 페이스라고 해서 결국 자신이 목표한 거리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목표한 시간에 한참이나 미쳐서 들어오게 됩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평소에 훈련하면서 자신의 상태, 평균적인 페이스가 어떻게 되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페이스에 맞춰 뛰는 거지요. 

 

이건 우리 인생도 혹은 신앙 생활도 비슷합니다. 너무 빨리 달리면 탈이 납니다.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간다면 더욱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MBTI 애니어그램을 통해 자신의 성향을 알고 일을 추진하고 관계를 맺으면 좋습니다. 요사이 MBTI 유행이더라구요. 검사하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구요. 자신이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무엇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지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에너지 수준을 계속 관찰하세요. 육체의 에너지, 정서적 에너지, 정신적 에너지를 살펴야 합니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달리다가는 병이 납니다. 중간에 포기하게 됩니다. 저는 예전에 종종 밤을 새곤 했습니다. 일이 많으면 새벽 늦게까지 일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몸과 마음이 따라주질 않는 겁니다. 늦게까지 일하는 날들을 줄여가고 있습니다. 그래야 계속 일할 있습니다. 

 

2) 인내와 절제 

달리기와 인생의 닮은 , 번째는 인내와 절제입니다. 달리기를 하다보면 힘든 순간이 찾아옵니다. 숨도 가빠지고, 근육도 뻐근해집니다. 쉬고 싶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분명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았음에도 2-3km 지점에서 위기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걸 넘어서면 다시 달릴 힘이 나옵니다. 세컨 윈드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그렇게 힘든 순간 순간이 종종 찾아옵니다. 그러다가 소위 말하는 러너스 하이, 러닝 하이가 찾아옵니다. 30 이상 달리다보면 죽겠다 싶은 순간, 사점(dead point) 통과하는데요, 때부터는 몸속에 엔돌핀이 품어져나오면서 고통을 잊게 하고 심리적인 기쁨을 주는 거지요. 인내의 달콤한 선물이라고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뛰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부상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상은 올바르지 않은 자세, 한쪽 근육에 힘을 집중하는 자세 등에 의해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 오래 달리다 보면 100이면 100 부상을 당하게 되어 있죠. 그래서 달리기에는 인내 아니라 절제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고통을 참는 인내가, 때로는 아는 절제가 필요한 거죠. 

 

인생, 그리고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인내가 없이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도 없고, 일정 시간의 인내가 가져다 주는 달콤한 선물도 맛볼 없죠. 그렇다고 쉬지 않고 몰아서 달리면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건강을 잃거나 관계가 틀어지거나 정서적인 번아웃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절제가 필요합니다. 

 

신앙 생활도 비슷합니다. 성경 읽기나 기도 하기는 인내가 필요한 활동입니다. 성경의 , 기도의 맛이 느껴질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맛을 알아야 계속 있습니다. 그러다가 절제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왜냐하면 성경 읽기도 자기만의 스타일로 굳어질 있고, 기도 생활도 매너리즘에 빠질 있기 때문입니다. 때는 절제해야 합니다. 성경 읽기의 다양성을 위해 공부하고, 기도의 생생함을 회복하기 위해 다른 영성 훈련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아니 어느 순간에는 기존의 활동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잠을 자면서 휴식을 취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3) 유종의  

달리기와 인생의 유사점 번째는, 유종의 입니다. 달리기도 마지막 스퍼트가 좋아야 좋은 기록에 도달할 있습니다. 순간을 평소에 연습해야 체력이 올라갑니다. 힘이 빠져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같을 , 숨을 몰아쉬며, 팔을 힘차게 흔들고, 무릎을 들어 마지막 지점을 향해 최선을 다해 뛰는 겁니다. 그럴 , 몸의 한계를 넘습니다. 체력의 한계를 넘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기록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여러 번의 마지막이 다가옵니다. 시작한 일을 마무리 하는 때가 오는 거지요.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책임감 있게, 필요한 일들을 감당하는 겁니다. 페이스 조절을 선수는 마지막 스퍼트를 힘이 남아 있습니다. 

모든 행사에도 마무리가 있습니다. 정리 정돈하고 돈을 회계 장부에 정리하고 평가서를 작성하고 다음 행사를 위해 보고서도 만듭니다. 화려한 폐막식이 끝나고도 원래대로 원상복귀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사가 끝난 겁니다. 그것까지 감당할 힘을 남겨놔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시작점에 있습니까? 반환점에 있습니까? 아님 결승점에 있습니까? 시작점에 있다면 자기 페이스를 빨리 파악하세요. 반환점에 있다면 인내와 절제를 번갈아 가며 지혜롭게 사용하세요. 결승점이 가깝다면 마지막 스퍼트를 준비를 보세요. 

 

3. 우리의 마지막 달리기 

- 코로나가 바꾼 예배 

2021년도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음 주면 12월입니다. 해를 돌아보며 우리가 어떻게 달려왔는지 확인해 보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줌에서 드리던 온라인 예배를 유툽 예배로 전환하고 비대면에서 대면으로 바꿔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름 수련회도 어쩔 없이 줌으로 진행했습니다. 많은 행사 계획들이 취소되고 최소한의 모임만 유지되었습니다. 비대면의 일상이 익숙해질만 하니까 대면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면 모임이 자리를 잡아가려고 하니까 다시 확진자가 폭증하고, 아프리카에서는 델타 변이보다 강력한 오미크론 변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매주 매주 다가오는 파도가 높고 거칩니다. 

 

- 수고했어 올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동안 달려 왔다고 생각합니다. 무리하지 않고, 페이스 조절하면서, 인내하면서, 절제하면서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올해의 마지막 스퍼트가 남았습니다. 서로를 격려하면서 말씀과 기도의 맛을 느껴보자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에 힘을 쏟자고 이야기를 건네면 좋겠습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내년을 기약하면서 힘을 내보자고 격려했으면 좋겠습니다. 

 

4. 나가며

- 사람세우기

동시에 바울처럼 저도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예수님이라는 힌트를 알리는 일에 여러분이 함께 달려주십시오. 해만 하고 그칠 일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작은 디모데가 되어 바울의 마지막 부탁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3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사람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의 이야기보다 오징어게임과 지옥에 환호할 겁니다. 숱한 드라마와 영화와 웹툰과 웹소설에 열광할 겁니다. BTS 블랙핑크에 빠져 지낼 겁니다. 좋습니다. 그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성경의 비밀을 푸는 열쇠, 우주의 신비를 푸는 열쇠인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직무입니다. 이걸 잊지 맙시다. 

 

일을 위해 섬기십시오. 중고등부, 아동부, 유치부 교사로 섬겨주세요. 찬양팀으로 섬겨주세요. 청년부 운영위원으로 섬겨주세요. 페이스 조절하면서, 그렇지만 인내하면서, 절제하면서, 마지막 스퍼트를 준비하면서그렇게 섬겨주세요. 장거리 달리기라고 생각하시고 섬겨주세요. 일년 이년 섬기는 걸로 끝내지 맙시다. 

 

저와 여러분이 작은 디모데가 됩시다. 이번 기도하시면서 내가 무엇으로 섬길 있을지 고민하시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말씀해주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바울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이 사랑하던 영적 아들 디모데가 자신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오래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소원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소원을 깊이 우리 마음 속에 새겨달라는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해를 돌아볼 ,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순간은 인내해야 순간이었습니까? 절제하며 쉬어야 하는 순간이었습니까? 어떻게 분별할 있을까요?       

 

2.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섬겨야 영역은 무엇인가요? 우리 송청 공동체에는 어떤 필요가 있을까요?  

 

2021. 11. 14. 김혁수

 

[본문_누가복음 15:11-24_새번역]

1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12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것을 챙겨서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하였다. 14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그래서 그는 지방의 주민 가운데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 아버지의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19나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0. 들어가며 

- 달리기 시리즈

지난 우연찮게 QT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지난 야외 활동을 해야 해서 설교를 15 내외로 준비하다보니 QT 본문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준비하다보니 엘리야의 달리기가 너무 인상에 남아 그걸로 주제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설교 이후에 달리기에 관한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달리기의 모습을 살펴보는 시리즈죠. 이번 주는 상상 속의 달리기 이야기 입니다. 도대체 어떤 달리기가 등장하는지 본문을 읽어볼까요? 

 

- 돌아온 탕자 이야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정말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자신이 받은 유산을 미리 정산해서 달라고 요청했던 겁니다. 아주 버릇없는 행동이요 아버지를 욕보이는 행동입니다. 유산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리고 많은 재산을 탕진하게 됩니다. 탕진한 상태에서 흉년이 찾아 오자 둘째 아들은 더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 했지만,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1. 가지 

내용은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야기의 중심 포인트를 가지로 풀어내곤 합니다. 

 

- 둘째 아들

먼저는 둘째 아들의 관점에서 보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입니다. 배은망덕한 인물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허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 다시 하나님을 떠올리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삶의 고난과 고통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다면 둘째 아들처럼 행동하라고 촉구하는 메시지로 읽을 있죠. 

 

- 첫째 아들

다음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첫째 아들의 관점에서 보는 겁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동생이 다시 돌아와 귀빈 대접을 받는 모습에 분노하게 됩니다. 동생도 싫었지만,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첫째 아들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죠. 그래서 지금도 사랑이 없이 원칙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종교인들을 비판할 이야기를 사용하곤 합니다. 

 

- 아버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관점으로 보는 겁니다. 집에 함께 거하는 첫째 아들도 귀하지만, 멀리 떠나 죽음에 이른 둘째 아들도 아버지에겐 귀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었으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 우리는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있습니다. 

 

가지 관점 우리가 눈여겨 보고 귀담아 들어야 포인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비유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직접적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면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있습니다. 

 

1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2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_누가복음 15:1-2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 투덜대며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못마땅합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고 식사하는 것이 당시의 율법에서는 금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비유의 이야기를 꺼내신 겁니다. 그렇다면, 첫째 아들의 관점에서 메시지를 찾는 것이 우선 되어야 겁니다. 바리새인들의 말과 행동에 대한 가르침인 것이죠. 

 

그렇다고 둘째 아들의 관점이나 아버지의 관점이 사라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예수님 주변에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동안 세리와 죄인들을 대상으로 얼마나 많은 비난과 정죄의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너희는 저주 받을 거야. 죽어 마땅해. 하나님은 너희를 버렸어. 너희는 하나님의 저주 속에 있어…’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시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다른 그림을 죄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그려주십니다.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바꾸시는 겁니다.  

 

2. 역동적인 장면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에서 유독 인상적인 장면 하나에 꽂혔습니다. 바로 20절입니다. 

 

20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가 달리고 있습니다. 거리가 멀었습니다. 달려가서 둘째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춥니다. 장면을 상상해 봤습니다. 

 

- 아버지의 연세? 

여러분, 아버지의 연세는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지금 비유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말씀해주시는 것이지만, 그래서 실화는 아니지만, 그러기에 맘대로 상상해 있을 있기도 하죠. 일단 장선한 아들이 있었으며, 둘째가 자기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을 , 못해도 40-50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둘째가 재신을 탕진했던 기간까지 합치면, 그것보다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50 넘은 나이가 것입니다. 지금이야 50이어도 젊다 소리 들을 수도 있지만, 예전에50 중년의 마지막 시기라고 말할 있겠습니다.  

 

- 거리? 

예수님은 거리가 멀다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멀리 둘째 아들이 보였던 겁니다. 얼마나 멀었을까요? 100미터 정도를 멀다고 표현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시야에 들어오는 정도라면 4-500미터 정도를 떨어져야 조금 멀리 있다고 말할 있을 겁니다. 만약 1km 정도 떨어져 있다면 거리가 멀다고 말할 있을 같네요. 그러나 이것도 사람의 시력에 따라 다를 겁니다. 몽골 유목민들의 시력은 3.0 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태국의 모겐족 사람들은 시력이 8.0이나 된답니다. 시력이 3 내지 4 경우에는 가시거리가 7km까지 간다고 하니, 거리가 멀다고 때의 거리가 얼마쯤일지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냥 우리 기준으로 해도 직선거리 1-2km라고 있을 같습니다. 거리를 달려 겁니다. 아들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나이에 열심히 달려옵니다. 조금 빠른 속도로 100미터만 달려도 숨이 찹니다. 

 

- 아버지의 숨소리? 

여러분 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리시나요? 거의 1km 이상을 굴곡이 있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산길을 열심히 아들을 부르면서 달리고 있습니다. 

혁수야, 아들아~~”

아들을 끌어 안을 ,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시나요?

헉헉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나이가 아버지가 자신이 있는 최선의 달리기를 하셨습니다. 심장 박동이 올라가고 몸에는 땀이 주르르 흐릅니다. 

 

3.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

저는 아버지의 달리기를사람을 살리는 달리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개인적인 달리기와는 다른 차원의 달리기입니다. 사람을 환대하고 용서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달리기입니다. 거리를 걸음에 달려와 와락 끌어 안는 달리기입니다. 놀이터에서 순간 잃어버렸던 아이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멀리서 아이를 발견했을 때의 아빠의 달리기입니다. 저는 그런 달리기를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 혜강이를 찾아 10분을 달리다가 헤강이가 멀리 나타나자 전속력으로 달려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게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입니다. 누군가를 돌보고 사랑하고 환대하려면 우리는 이런 달리기를 연습하고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돌봄을 위한 몸의 훈련 

첫째는 돌봄을 위한 몸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달리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남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심폐 기능이 부족하면 몸을 오래동안 움직이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람을 돌보고 살리는 일은 중노동에 가깝습니다. 체력 소모가 큽니다. 하루 이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의 훈련, 단련이 필요합니다. 최대 산소 섭취량(V02 max) 늘리십시오. 우리 1kg 근육이 1분당 섭취하는 산소의 최대 용량을 표시하는 수치입니다. 이것이 늘어나면 몸의 피로가 줄어듭니다. 

 

2) 돌봄을 위한 마음의 훈련 

둘째, 돌봄을 위한 마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몸만 훈련한다고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를 계속 없습니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는 마음과 정서가 건강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리가 멀지만 둘째 아들을 반기고 환대하는 아버지의 마음 말입니다.

 

우리 나라 3 신이 있다고 하죠. 강아지의 강형욱, 장사의 백종원, 육아의 오은영. 저는 중에서 육아의 오은영 박사님의 프로그램을 요사이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금쪽이들을 다루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들을 다루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요사이에는 어른들도 상담해주고 있더라구요.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라는 프로그램인데요. 어른들이 겪는  정서적 어려움의 원인과 해법을 설명해주시더라구요. 프로그램을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유명한 연예인들이라도 정서적, 관계적 어려움을 갖고 있더라구요. 

 

우리는 마음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마음의 근육과 심장의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를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요구와 필요에 반응할 있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 훈련이 필요하죠. 

 

3) 돌봄을 위한 영의 훈련 

셋째, 돌봄을 위한 영의 훈련도 필요합니다. 돌봄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고 해서 타인과 세상을 돌볼 있는 힘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한한 사랑의 근원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의 달리기를 경험해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경험했던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느껴야 합니다. 나를 향해 멀리서 달려오시는 하나님, 숨을 헐떡이시면서 와락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렇게 그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그렇게 가르쳐주고 싶으신 겁니다. 그동안 왜곡되었던 하나님 이미지를 완전히 고쳐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달리기 하시는 분이십니다. 

 

4. 나가며 

- 몸과 마음과 영의 달리기 연습

몸의 훈련, 마음의 훈련, 영의 훈련어느 것이 먼저일까요? 예전에는 무조건 영의 훈련이 먼저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훈련, 마지막이 몸의 훈련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순서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든 여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십시오. 저는 몸의 훈련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달리기를 시작하십시오. 처음부터 어렵다면 걷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런데이 어플을 깔고 런데이 트레이너의 응원 목소리에 맞춰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십시오. 조금씩 뭉쳤던 근육을 풀어주고, 약해진 인대를 강화시켜나가고, 심장과 허파의 근육들을 단련시켜서 산소 섭취량을 늘려주세요. 달리면서 음악만 듣지 말고, 기도도 하십시오. 삼위 하나님을 떠올리며 주님과 함께 달리겠다는 마음의 결심도 올려드리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달리기를 연습하는 겁니다. 

 

그렇게 훈련하다보면 어느덧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돌볼 있는 , 마음, 영의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이번 다시 시작해 봅시다. 

 

 

[함께 기도하기]

1. 하나님은 멀리서 우리를 보자마자 달려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떠나 여러분 마음대로 여러분 뜻대로 살았다면 이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옵시다. 여러분의 실체를 인정하고 부모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옵시다. 그분은 여러분을 와락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그분께로 돌아가겠다는 기도를 드립시다. 

 

2.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과 영의 훈련이 필수적입니다. 몸을 훈련하기 위해 운동합시다. 마음을 훈련하기 위해 정서의 리플렉션 시간을 가집시다. 영의 훈련을 위해 삼위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를 합시다. 이런 훈련을 지속할 있도록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거리를 달려와 둘째 아들을 와락 끌어안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2. 몸의 훈련, 마음의 훈련, 영의 훈련 중에 지금 나에게 필요한 훈련은 무엇인가요? 그렇게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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