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0. 김혁수

 

[본문_창세기 11:27-12:5_새번역]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다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하란은 롯을 낳았다. 28그러나 하란은 그가 태어난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29아브람과 나홀이 아내를 맞아들였다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이고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이다하란은 밀가와 이스가의 아버지이다. 30사래는 임신을 하지 못하여서, 자식이 없었다.

31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하란에게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32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 1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으로 가거라. 2내가 너로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것이다. 3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5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0. 들어가며 

- 통치하시는 하나님?

일반적으로 국가 통치의 근간은 군사력과 경찰력입니다. 힘이 없는데 통치를 수는 없습니다. 최근 한국의 군사력이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4.5세대 전투기를 만들지 않나, SLBM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성공하지 않나, 현무 미사일의 중량과 사거리를 늘려서 정확하게 표적을 맞추는 시험에 성공하지 않나등등 한국의 군사력이 증강하고 있습니다. 군사력이 강해지면 주변국들이 함부로 침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안정되고 현재 권력에 대한 지지가 계속될 있는 겁니다. 경찰력도 마찬가지죠. 외국인들이 우리 한국에 오면 깜짝 놀라는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카페에 노트북과 핸드폰을 놔두고 화장실에 갔다오는 것이 그렇게 놀랍다고 해요. 늦게까지 공원에서 혼자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치안이 전세계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CCTV 영향도 있지만 강한 경찰력이 바탕이 되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의 범인 검거율도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생각할 , 하나님의 군사력과 경찰력을 먼저 떠올리지는 않습니다. 그럴까요? 힘과 무력으로 통치하는 방식은 그분의 통치에서 후순위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힘이 없어서, 군사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시기 때문이죠. 다른 방법이 우선순위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 통치의 방향_회복시키기

지난 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은 회복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분은 에덴의 모습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어색한 단어지만 회복주의자이십니다. 에덴에서의 샬롬, 평화를 다시 회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대리통치자인 사람을 통해 만물과의 평화를 도모하십니다.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회복이 그분의 통치의 방향입니다. 

 

오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 , 그분이 주로 사용하시는 통치의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을 읽어볼까요? 

 

1. 데라를 부르심 

1) 바빌로니아 우르(갈대아 우르)

본문에서 하나님은 데라를 부르십니다. 그럼 데라는 누구인가요? 노아의 아들 기억나시죠? , , 야벳. 첫째 아들 셈의 자손 중에 자녀가 많고 세력을 얻은 사람이 누구죠? 맞습니다. 에벨입니다. 에벨은 아들이 있다고 했죠. 명은 벨렉이고 다른 명은 욕단이라고 했습니다.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바벨론 사건과 벨렉을 연결하기도 합니다. 저는 니므롯과 벨렉이 바빌로니아에서 성과 탑을 만들다가 하나님의 개입을 받아 언어가 혼란스러워져서 세계로 흩어졌다고 조금 상상을 보태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살았던 벨렉의 후손이 바로 데라였습니다. 

 

데라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거대한 줄기 하류에 평야에서 당시 최고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우르는 지금으로 치면 서울의 강남 같은 곳입니다. 미국의 뉴욕 같은 곳입니다. 거대 도시에 최고의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장소죠. 데라는 그곳에서 바빌로니아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24:2). 그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였죠.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따르는 것이 세상 사는 지혜라고 있습니다. 

 

2) 가나안을 향하여 

그러나 하나님은 데라와 그의 맏아들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바빌로니아 우르 땅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부르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꿈에서 나타나셨는지, 아님 어떤 음성이 그의 귀에 들렸는지, 아님 어떤 글씨가 그의 벽에 쓰였는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오랫동안 살아왔던 바빌로니아 우르 땅을 벗어나 상류를 향해 떠납니다. 가나안 땅으로 직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가족과 가축들을 먹여 살리면서 이동하려면 강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그나마 안전했습니다. 

 

3) 데라의 결심과 한계  

데라의 결심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살던 땅을 떠나 이사를 결심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이곳 홍제동에 오랫동안 살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다음 달에 이곳을 떠나 강원도 정선, 태백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제게는 군대가 그런 느낌을 주는 번째 장소였습니다. 논산 훈련소로 가던 때가 아득합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기 위해 열차를 타고 용산, 석계, 의정부, 춘천으로 이동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역마다 정차했는데, 때마다 명의 훈련병들이 하차를 했습니다. 은근히 용산에서, 석계에서, 의정부 역에서 내리기를 그렇게 바랬습니다. 그런데 춘천 보충대에 잠시 입소를 했는데, 거기서 잠시 대기하더니만, 결국 저를 군대 트럭에 태워 강원도 인제 원통의 부대에 내려주더라구요. 거기서도 며칠 있다가 민통선에 아주 가까운 부대에 배치 되는가 싶더니, 이내 민통선 부대로 결국 데려가더라구요.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보였습니다. 군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민통선 안에는 민간인이 못사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다보니 언제든 죽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막막함, 두려움, 후회, 의기소침, 긴장아직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입니다. 

 

평생을 대도시에 살던 데라 가족이 강을 따라 1500km 이동했습니다. 전혀 모르는 땅과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계절의 바뀜이 바빌로니아와 다르다고 느낄 때마다, 사람들의 생김새와 말과 억양이 다르다고 느낄 때마다,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과 긴장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두려움과 막막함 때문에 데라는 하란에 멈췄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의 한계였습니다. 우르를 떠나는 것은 엄청난 용기였지만, 가나안 땅까지 가지 못한 것은 그의 한계였습니다. 

 

2. 아브람을 부르심 

1)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번째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데라와 아브람이 하란에서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지는 하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가나안이었습니다. 바빌로이나 우르에서 데라와 아브람은 그분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란에 멈췄습니다. 여정이 힘들었겠죠. 계속되는 이동과 이주가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데라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이제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2) 부르심의 목적_()복의 근원 

그런데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추측해 보면, 원래 데라와 아브람을 바빌로이나 우르에서 부르실 때도 목적을 갖고 부르셨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도 없이 그냥 고향을 떠나라고 말했을 같지가 않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내가 너로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것이다. 3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목적은 분명합니다. 아브람이 복의 근원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새로운 땅을 주고 민족을 이루게 해서 세계에 복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여러분, 계획은 무엇과 닮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에덴의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닮았습니다. 에덴이라는 땅을 주십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을 돌보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유사한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의 근원 방향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과 동일합니다. 바로회복의 시작점이라는 겁니다. 복의 근원은 회복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다시 원래의 에덴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일의 근원인 것이죠. 그게 복입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명예가 아닙니다. 즐거움이 아닙니다. 에덴의 비전의 회복 이것이 입니다. 

 

-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이 아닌 예루살렘 산지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성과 지구라트라는 거대한 신전이 회복의 근원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물이 귀한 가나안 산지, 예루살렘 산지가 새로운 회복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 주류에서 비주류로 

이것은 당시 주류에서 비주류로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도시와 성이 아니라 산지와 돌산이 새로운 회복의 근원이 됩니다. 거대한 강들 사이에 펼쳐진 비옥한 초승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아니라 산들 사이의 여러 군락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들의 소박한 문화에서 회복의 근원이 다시 싹트는 겁니다. 마치 거대한 로마 제국의 심장이나 사람들이 매년 모여 예배드리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작은 시골 마을 나사렛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 변방의 새로운 발견 

우리는 변방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작은 움직임에 주목하게 됩니다. 거대한 바빌로니아 우르의 사람들은 가나안으로 떠나는 데라 가족에게 어떤 관심도 없었습니다. 강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던 하란의 사람들도 아브람과 롯이 가나안으로 떠나는 것에 어떤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저 경쟁자 명이 사라진 것에 기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당 판교의 개발 사업에 뛰어들 경쟁자 명이 사라지면 자신들의 이익이 커질 것을 즐거워하는 투자자, 개발자들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고향을 등지는 데라와 아브람을 눈여겨 보십니다. 거대한 도시 문화를 버리고 험난한 생활로 들어가는 그들을 주목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에덴같은 풍족한 땅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회복의 근원으로 새로운 변방을 보셨던 것입니다. 

 

3) 옮겨다니는 회복의 근원 

역사적으로 회복의 근원은 지역을 계속 옮겨다녔습니다. 최초의 지성소였던 에덴, 노아의 방주가 멈췄던 아라랏 , 아브라함이 거처를 정한 헤브론과 예루살렘, 요셉이 총리로 일했던 이집트, 다니엘의 페르시아, 예수님이 나고 자란 나사렛, 바울과 바나바의 수리아의 안디옥, 수많은 감독을 낳은 로마와 비잔틴 제국. 솔직히 하나님은 작은 변방의 나라와 민족을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거대한 제국을 활용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변방만 사용하고 제국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가두는 행위입니다. 반대도 말이 안되죠. 제국만 사용하시고 변방의 민족은 업신여기신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회복의 근원은 가나안의 산지 헤브론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3. 부르심

1) 통치 방법

그러니 우리는 가지 결론에 도달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향은 회복이며 회복의 통치를 실천하기 위해 행하시는 번째는 바로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대리인을 부르시는 겁니다. 제사장 역할을 하는, 회복의 근원으로서 기능하는 사람을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심으로 통치를 시작하십니다. 

 

2) 직접 통치 vs. 대리 통치 

저는 언제나 지점에서 고민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 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부르시냔 말입니다. 당신의 말을 무조건 듣는 천군 천사를 활용하셔서 직접 개입하시고 직접 명령하시고 직접 판단하시고 심판하시지, 명령을 들을 수도 있고 듣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을 부르시냔 말입니다. 직접 통치하지 않으시고 대리 통치를 고집하시는 이유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가끔 짜증이 나려고 하기도 합니다. 시점에서 제가 말할 있는 것은 대리 통치 방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의 등장이 좋은 그림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말이죠. 

 

3) 은혜, 권한 부여, 그리고 약속 

부르심은 은혜로 시작하는 행동입니다. 노아건, 데라건, 아브람이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렇게 부름받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권한을 부여하시죠. 세상을 돌보고 다스릴 있는 권한입니다. 회복의 근원으로서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속을 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회복의 근원으로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시고 동시에 그렇게 하지 못하면 어떤 불행이 찾아오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상호 약속을 하십니다. “우리 해보자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렇게 그분의 부르심의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4. 나가며 

-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설교를 듣고 계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분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그분의 원대한 세계 통치의 동역자가 되게 하십니다. 힘과 무력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과 인격적 감화력으로 세상을 돌보고 다스리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과 희생과 인격적 감화력의 최선봉은 바로 예수님이시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면서 우리도 그런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군사력과 경찰력이 아닌 사랑과 희생과 인격적 감화력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하나님의 통치 방식과 세상의 통치 방식의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은 힘과 무력으로 통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심으로 통치를 시작하십니다. 회복의 근원이 되도록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겠다는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때로 내가 편하게 생각하던 곳과 환경을 떠나 새로운 , 익숙하지 않은 , 변방으로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어디로 부르고 계신다고 느껴지시나요?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하나님이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데라와 아브람을 부르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바빌로니아 우르에서는 목적을 이룰 없다고 판단하신 걸까요?      

 

2. 하나님은 나를 어디로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곳은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 곳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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