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1. 김혁수

 

[본문_예레미야 12:1-6_현대인의 성경]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논쟁한다고 해도 주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께 가지 물어 보고 싶습니다. 악한 자가 잘되고 정직하지 못한 자가 성공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뿌리를 박고 자라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입술로만 주를 가까이할 마음으로는 주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3여호와여, 주는 나를 아시고 나를 보고 계시며 주를 향하는 마음 자세를 살피고 계십니다. 양을 잡으려고 끌어내듯 악한 자들을 끌어내어 죽일 날을 위해 준비하소서.

4언제까지 땅이 슬퍼하며 들의 모든 초목이 말라야 하겠습니까? 땅에 사는 사람들이 악하므로 짐승과 새들도 전멸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우리가 하는 일을 그는 보지 못한다하고 말합니다.

5여호와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걸어다니는 사람과 함께 달려도 피곤하다면 어떻게 말과 경주를 하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서 비틀거린다면 요단의 숲에서는 어떻게 하겠느냐?

6 형제들과 가족까지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소리를 지른다. 그들이 너에게 좋은 말을 하여도 너는 그들을 믿지 말아라.”

 

0. 들어가며 

- 결승점, 반환점 

만약에 여러분이 마라톤을 뛰는 선수라고 가정해 봅시다. 시계도 안보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죽을 만큼 힘든 시간들을 버티고 끝에 결승점이 보입니다. 팔을 벌리며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결승점이 아니라 반환점이었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심정일까요? 저는 최근에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해를 열심히 달려왔는데, 여전히 끝나지 않는 문제와 사건들의 후폭풍이 계속되었습니다. 결승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반환점이었던 겁니다. 이런 순간에도 우리는 계속 달릴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볼까요? 

 

1. 예레미야와 아나돗 

1) 예레미야의 메세지 

- 예레미야 

분은 남유다 왕국 마지막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BC 627년에 예언 활동을 시작하여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BC 587 어간까지 40년간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시기는 유다의 마지막 정치, 종교 개혁이 있었지만 줄곧 쇠퇴의 길을 걷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조국이 멸망해 가는 과정을 오롯이 경험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그는 조국에 대한 사랑 때문에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별명이 그러하다고 눈물만 흘리는 감성적인 선지자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판입니다. 그는 40년간 줄곧 자신을 반대하고 위협을 가하는 동족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메세지가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으며, 다른 선지자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그의 메시지는 어땠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9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이 나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 10그들도 자기들의 조상이 저지른 죄악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조상이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면서 섬기더니,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도, 내가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다.

11그러므로 주가 말한다. 보아라, 그들이 벗어날 없는 재앙을, 내가 그들에게 내리겠다. 그들이 나에게 도움을 간청해도,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 12 때에 유다의 여러 성읍에 사는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은, 분향하며 섬기던 신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간청하겠지만, 재앙의 날에 신들은 절대로 그들을 구하여 주지 못할 것이다. 전혀 도와줄 없을 것이다. 13유다 사람들아, 너희가 섬기는 신들은 너희가 사는 성읍 수만큼이나 많고, 너희가 바알에게 분향하려고 세운 부끄러운 제단은 예루살렘의 골목길 수만큼이나 많구나!

14 예레미야야, 너는 이런 백성을 보살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너는, 그들을 도와 달라고 나에게 호소하거나 간구하지 말아라. 그들이 재앙을 당할 때에, 네가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예레미야 11:9-14)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줄곧 어려운 일을 시키고 계십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유다의 재앙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지금 진퇴양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속국으로 계속 살기도 싫었습니다. 독립을 하자니 군사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의 도움으로 바벨론에 맞서 싸우자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포기하고 이집트로의 망명을 시도합니다. 사람들은 동요합니다. 그런 상황에도 이들은 하나님을 찾기보다 우상을 따릅니다. 그런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9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이 나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 10그들도 자기들의 조상이 저지른 죄악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조상이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면서 섬기더니,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도, 내가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다.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휴지통에 버렸습니다. 13절에 보면 우상이 성읍마다 하나씩 있습니다. 바알에게 분향하기 위해 세운 제단은 예루사람의 꼬불꼬불한 골목길 숫자보다 많다고 한탄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유다가 부르짖어도,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메시지를 길거리에서 전하니 사람들이 싫어할 밖에 없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것을 그만둘 마음도 없거니와, 여호와라는 자신들의 조상 신은 응답하지도 않겠다고 하니, 짜증이 났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희망적인 메시지가 나와도 성에 차지 않는데, 부정적인 메세지를 매일 길거리에서 쏟아내는 예레미야를 보니 울화통이 치밀어 오릅니다. 

 

2) 듣기 싫어하는 동향인

그런데 예레미야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사실은 단순히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를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예레미야를 알고 그와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던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모의한다는 소문과 위협을 들었을 ,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21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나돗 사람들을 두고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의 목숨을 노려서 이르기를너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아라.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계속하다가는 우리 손에 죽을 알아라한다.”(예레미야 11:21)

 

자신의 메세지가 사람들의 마음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조금 이해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냉혹했습니다. 고향 친구들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에게 협박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 예언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합니다. 더이상 듣기 싫은 소리를 그만 두라고 합니다. 

 

2. 예레미야의 질문 

1) 인생의 딜레마 

- 어떻게 악인은 번성하고 의인은 고통받는가? 

예레미야는 이제 예루살렘의 길바닥에 털썩 주저 앉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온갖 생각들이 몰려 옵니다. 이제 수많은 의문들을 가지고 기도 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들어볼까요?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악인은 번성하고 의인은 고통받는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오랫동안 던져왔던 질문입니다. 정의로운 형벌이 주어지지 않는가? 공평한 처벌이 벌어지지 않는가?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형통하고 반역하고 배신한 사람들이 평안해 보이는지 예레미야는 미치도록 궁금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자신은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들 멋대로 지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민족적 재앙 앞에서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있습니다. 

 

2) 악인에 대한 처분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악인들로 인해 의인들이 죽어나갑니다. 악인들로 인해 민족의 산과 들이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악인들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고 가축이 죽어나가고 농작물이 말라갑니다. 이제 악인을 처단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마음이 때가 얼마나 많습니다. 악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낮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어기는 사람들 때문에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되어 결국 일반 대중이 죽어나갑니다. 강간범, 살해범에 대한 법의 처벌이 솜방망이 같이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형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댓글로 도배합니다. 

 

어제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한국 드라마지옥 이런 소재로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은 죄인들에게 벌주고 지옥으로 데려가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신으로 모시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죄인들을 공개처형하는 지옥의 사자들에 대해 종교적 열정을 갖다 바칩니다. 그렇게 심플하게 해소되길 바랬습니다. 사람들은 명확한 것을 원합니다.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 명확한 선이 있기를 바랍니다. 애매한 , 모호한 것을 싫어합니다. 초월적인 누군가가 등장해서 선악을 분명히 가르고 선에 대해서는 상을, 악에 대해서는 벌을 주기를 바랍니다. 역설과 

딜레마를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3. 말과 함께 달리기 

1) 역설 인내 

이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다시 읽어 볼까요? 

 

5여호와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걸어다니는 사람과 함께 달려도 피곤하다면 어떻게 말과 경주를 하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서 비틀거린다면 요단의 숲에서는 어떻게 하겠느냐?

6 형제들과 가족까지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소리를 지른다. 그들이 너에게 좋은 말을 하여도 너는 그들을 믿지 말아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지금 상황은 걸어다니는 사람과 함께 달리는 것으로 보고 계십니다. 현재 예레미야가 겪고 있는 딜레마와 역설은 물론 힘든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일상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들이 번성하면서 의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오랫동안 벌어져 왔던 인류 역사의 보편적인 상황이라고 하시는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했던 순간부터 이런 역설과 모순이 보편적이 되어 왔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겪어내야 역설과 딜레마는 마치 말과 함께 달리는 수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역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십니다. 말과 경주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하십니다. 천천히 시속 4KM 걷거나 달리는 것이 아니라, 시속 20KM이상으로 달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겁니다. 때에는 더욱 혼란스러울 겁니다. 더욱 고통스러울 겁니다. 

 

실제 그런 순간이 나중에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그건 최종적 심판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벨론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예레미야는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을 했기로서니 더욱 포악한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분별이 어려웠습니다. 

 

육체적 달리기가 아니라 정신적, 지성적 달리기입니다. 숨을 헐떡이며 10km, 20km, 40km 뛴다고 , 중간중간에 나오는 장애물과 언덕을 넘어설 , 끝난 같은데 아직도 많이 남았을 , 달리는 것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지적으로도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가진 상식과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을 , 역설, 모순, 딜레마에 빠져 출구가 없어 보일 , 문제가 꼬이고 꼬여 실타래처럼 뭉쳐 있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 한숨은 깊어지고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을 , 때가 정신적 달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말과 함께 경주하는 순간이지요. 

 

2) 소명의  

하나님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소명의 삶을 살라고 요청하시고 있습니다. 100%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선명한 경계를 긋지 못하더라도, 모순과 역설과 딜레마가 극에 달한다 하더라도, 예레이먀에게 주신 소명을 삶을 끝까지 살아내라고 요청하시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고향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고, 동료 예언자들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뺨을 때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메시지가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들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예레미야나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이런 삶을 살았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찌질하고 괴팍한 삶을 살았습니다. 소명을 끝까지 감당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말과 경주할 정도로 힘에 지나도록 달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삶이었습니다.  

 

4. 나가며 

- 온전함을 향하여

무엇이 온전함입니까? 역설과 모순과 딜레마를 해결하고 깔끔하고 선을 긋고 사는 삶이 온전함입니까?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같습니다. 오히려 역설, 모순, 딜레마를 하나님의 신비와 섭리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삶을 끝까지 인내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온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느리게 한가로이 걷기, 평소에 걷는 속도로 걷기, 빠르게 걷기, 천천히 달리기, 장거리 달리기, 400미터 달리기, 100미터 달리기여러 가지 속도의 걷기와 달리기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너무 강렬한 역설과 모순과 딜레마 앞에서도 하나님의 소명의 길을 뛰어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말과 함께 경주하는 순간일 겁니다. 

 

K드라마 지옥은 신과 인간의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상당히 불편하고 스트레스로 가득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깨닫게 되었습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번 주도 숱한 질문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길을 걸어가는 때로는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많아질 있습니다. 때로는 불만이 올라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할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질문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의문이나 불만이 있나요? 솔직하게 아뢰는 기도를 드립시다. 

 

2.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정신적인 극한 상황에서도 달려나갈 것을 요청하기도 하십니다. 평소에 걷고 달리던 속도가 아니라 때로는 말과 함께 달려야 하는 상황도 있는 겁니다. 혹시 지금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끝까지 달릴 있도록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나의 인생의 여정에서 말과 경주할 정도로 전속력으로 달려 적이 있나요? 무슨 , 어떤 목표 때문에 렇게 달렸나요?     

 

2. 하나님에게 가지는 나의 인생 최대의 질문은 무엇인가요? 질문은 언제부터 가지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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