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11. 

 

0. 들어가며 

-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감동적이었던 장면 두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성화 점화를 위해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선수 두명(박종아, 정수현)이 성화를 함께 들고 경사도 가파른 120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남북의 평화로운 통일의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저렇게 함께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제 아내와 나누었습니다. 

 

두번째는 2018개의 드론이 만들어낸 오륜기였습니다. 처음엔 제 눈을 의심했지만, 금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드론이다. 확신에 찬 감탄사로 “드론이다. 드론”하고 아내에게 외쳤습니다. 정말 Fantastic한 장면이었습니다. 어느 블로그를 봤는데, ‘2018명의 어떻게 일사 분란하게 드론을 운전할 수 있는가?’라며 놀라움을 표했더라구요. 저는 알았죠. 그건 2018명의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1명이 컴퓨터로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평화를 통한 하나됨

올림픽의 정신은 ‘평화 친선 도약’입니다. 그중에서도 평화가 으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도시 국가간에 전쟁 중이더라도 올림픽 기간 중에는 휴전을 했다고 합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포츠로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남과 북에 평화가 정착되고 더 나아가 통일이 되는 그 날을 위해 평창 올림픽이 그 출발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남과 북이 평화롭게 하나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소원이라면, 예수님의 소원은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통해 예수님의 기도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 

2주전에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악한 세력은 사단, 예루살렘 성전종교 지도자들, 회당 중심 바리새인들, 그리고 거대제국 로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세력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해주시길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지키다도 중요하지만, 왜 지키는가?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Keep from 도 중요하지만 Keep for도 중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영어공부 한번 하면 좋겠는데요. 목적을 나타내는 so that may  구문을 찾아봅시다. 

 

1. 하나됨 (11절)

이건 우리가 지난 2주간 계속 다루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로 연합해 계시듯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한자들, 즉 사단을 비롯한 그의 하위 권세자들은 위협과 유혹으로 제자들의 하나됨을 훼손할 겁니다. 제자들의 내면의 욕망을 극대화하여 하나됨을 훼손할 겁니다. 

 

- 철저히 유린된 교회의 하나됨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자들의 유혹에 철저히 유린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분열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조적 분열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네트웍크를 유지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박해와 이단의 발흥으로 분열합니다. 로마교회는 교리 문제와 교황권 싸움으로 동로마교회와 서로마교회로 분열됩니다. 유럽대륙의 카톨릭교회는 구교와 개신교로 나뉩니다. 

 

- 예수님의 기도는 능력이 없다? 

교인들은 하나됨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예수님의 기도의 한계와 허약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기도하신 걸까요? 그의 기도는 능력이 있는 기도일까요? 이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그분이 기도하셨다는 것은, 그리고 그 기도가 AD80년 중후반 요한의 글에서, 요한의 공동체에서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함께 드려졌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됨은 현실에서 완전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는 하나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적으로 기도하신 겁니다. 그분의 기도는 지금도 하늘과 땅에서 울려퍼집니다. 하나됨을 해치려는 수많은 세력들과 욕망들 앞에서 온몸으로 막고 계십니다. 우주적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내기 위한 그분의 기도와 수고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 진실한 공동체 

저는 진실한 공동체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됨의 가장 큰 적은 가식, 부정직, 외식, 겉과 속이 다름입니다. 마피아게임은 공동체를 하나되게 만들지 못합니다. 서로간의 불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재미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하게 하다보면 인격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낳습니다. 건전한 게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중에 하나가 딕싯입니다. 서로의 생각과 관점과 느낌을 알도록 기획된 보드게임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게임에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나눔과 정직한 반응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수적입니다. 세상은 속이고 반전으로 놀래키고 배반으로 돈을 벌지만, 즉 일종의 투자와 사기사이의 애매한 길을 가지만,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는 진실함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 하나됨을 위해_삼위일체 신학, 용서, 그리고 경청과 공감

이렇게 진실되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됨을 위한 신학 내지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요, 그게 바로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서로 안에 있음을 이해한 삼위일체 신학과 묵상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많은 부분이 이런 기도로 채워져야 합니다. 묵상의 많은 부분이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 원리가 기독인의 영성의 근본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응시가 매일 있으면 있을 수록 우리는 하나됨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무엇을 감행해야 하는지 결단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우리는 가장 큰 장애물을 건너야 하는데, 그게 바로 용서입니다.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구함이 옳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용서를 실행할 용기를 내면 참 좋습니다. 과거 학생 수련회 때마다 용서의 밤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용서에 대한 설교를 듣고 지난 학기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먼저 다가가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약간 인위적이긴 했지만, 그 나름 대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실제로 용서를 구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용서를 서로 구하고 서로 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경청과 공감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드는 일입니다. 게다가 공감하며 경청하기는 꾸준한 노력과 훈련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기 PR의 사회입니다. 경청과 공감은 콘서트에서나 있는 아주 희귀한 일이 되었습니다. 김제동의 톡투유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경청과 공감듣기가 작동합니다. 기독 공동체에서 일어나야 할일이 교회 밖에서 기획되어 대중화됩니다. 

 

=> 도전! 진실한 하나된 공동체

평생에 걸쳐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일이 있다면,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 진실하며 하나된 교회 공동체를 한번 만들어보는 겁니다. 규모에 상관없습니다. 크고 작든 그런 공동체의 이상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 보는 게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우리 크리스찬들의 자세일 겁니다. 

 

2. 기쁨(13절)

무엇을 위해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는가? 두번째는 기쁨입니다. 13절에도 so that may 구문이 등장하죠? 그런데 사실 저는 이 구절이 왜 여기에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후 문맥을 아무리 살펴도 이 문장은 매우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세상에 머물게 될 제자들을 지켜보호해 달라는 내용의 기도를 드립니다. 14절부터 19절까지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 공동체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13절이 정말 뜬금 없습니다. 갑자기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한번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답을 드리려는 게 아니라 고민을 나누는 겁니다. 

 

-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기도의 목적은 제자들의 기쁨(13절)

13장에서 17장까지가 고별설교및 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가르치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 바로 제자들의 기쁨입니다. 세상에 남게 되는 제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수많은 유혹과 핍박이 찾아옵니다. 이 유혹과 핍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내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홀로 단절되었을 때 커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천국을 보화와 같이 간직하며 동시에 이 세상에 누룩을 가져오는 신앙,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 우리를 대적하는 자보다 더 크다고 확신하는 신앙, 우리를 세상 한복판에서도 악으로부터 구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신앙이 더 큰 신앙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교회의 분열에 맞서: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 대하여]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하시는 두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는 설교입니다. 다른 하나는 중보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제자들의 마음 속 기쁨입니다. 단순히 억지로 웃는 웃음이 아닙니다. 가식적인 스마일이 아닙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입니다. 

 

- 제자들의 정서적 만족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은 쥐어짜내어 헌신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의지의 남은 하나까지 쥐어짜내어 인상을 찌푸리며 종교행위에 몰두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최근에 너무 추워서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 배수관이 얼어서 세탁기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손 빨래를 했는데, 청바지를 빨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손빨래를 했는데요. 있는 힘을 다해 청바지를 비틀었습니다. 청바지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안쓰던 근육도 울부짖었습니다. 

 

이렇게 쥐어짜내는 것은 올림픽 경기장에 나온 분들로 족합니다. 모든 근육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건 그들이 할 일입니다. 

 

기독교는 희락의 종교입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기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추억할 때, 우리는 내면의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근심이 가득해도, 핍박이 있어도, 박해가 있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기쁨이 있습니다. 

 

- 기쁨의 근원

이 기쁨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 사랑의 연합이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 연합안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이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위의 말씀에서도 기쁨이라는 단어가 독보적으로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성한 기쁨 안에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십니다. 부담이 아니라 억지가 아니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요 자발적이요 자원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되자 

유명한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한분 계십니다.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그분을 만족해할 때, 그분이 우리를 통해 영광으신다고 역설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문장에 적극 동의합니다. 그분의 존재가 기쁘십니까? 그분의 존재로 만족합니까? 그분이 하신 일로 기쁨이 있습니까? 그분이 하신 일에 만족하십니까? 감정고양으로 흥분되는 상태말고요. 주변 교인들의 칭찬으로 으쓱해지는 거 말고요. 교회 봉사나 구제로 인해 스스로 흡족해 하는 거 말고요. 정말 삼위 하나님이 기쁘십니까? 삼위 하나님이 만족스러우신가요? 

 

우리가 스스로에게 계속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행을 떠난 나그네입니다. 신앙의 여행은 수많은 질문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이 여행의 특징입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의 욕망이 세상의 욕망이 우리의 눈을 가리우고 흐릿하게 합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분이 기쁩니까? 그분으로 만족합니까? 

 

3. 진리로 거룩(17-19절)  

이제 마지막입니다. 무엇을 위해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십니까? 하나됨과 기쁨을 위해서도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거룩입니다. 사단을 필두로 하는 세상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거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상태가 어쩌면 거룩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존재의 규정만으로 거룩을 다 담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거룩의 실제가 무엇이며, 그 실제로 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 거룩의 실재_보냄받는 일상(18절)

거룩의 실제는 분명합니다. 거룩은 세상과 분리되어 고상한 삶의 방식을 누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산과 시내를 벗삼아 조용히 기도의 집중하는 삶이 거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거룩의 실제 모습은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아이를 돌보는 아빠와 엄마, 설겆이를 하는 순간, 화장실 청소 하는 순간, 밀린 빨래를 하는 순간, 출근해서 그날 해야 할 업무 리스트를 점검하는 순간, 회사 직원 회식을 위해 식당을 예약하는 순간,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기획회의를 하는 순간, 올림픽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기사를 읽고 댓글을 다는 순간.... 모든 일상의 순간이 거룩의 실제를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모든 일상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 속에 있듯이 지내면 그것이 거룩입니다. 모든 일상이 타성에 젖은 습관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경험하는 의미의 공간이 될 때, 그것이 거룩의 실재입니다. 

 

- 진리로 거룩하게(17절)

그럼 어떻게 일상에서 거룩하게 됩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진리로 거룩해지는 겁니다. 위엄있는 척 하는 모습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해 보이는 옷과 신발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식사 기도를 오랫동안 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낮추고 성경의 용어를 사용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해지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바로 진리입니다. 

 

-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다(17절)  

예수님이 설명하십니다. 진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먼저는 구약 성경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시고 외우시고 연구하신 성경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한 구약 성경 전체일 겁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가르치신 말씀들입니다.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허락없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진리다

이 사실을 한번 더 확장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진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스러워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시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

 

맞습니다.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격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가르침에 잠잠히 거하는 것, 순전히 따르는 것. 이것이 거룩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은 진리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겁니다. 30살 때까지 목수의 아들로 잔뼈와 잔근육이 발달했던 그분을 따라 사는 겁니다. 종교권력과 맞서 예루살렘 이방인의 뜰에 펼쳐져 있던 장사 테이블을 뒤엎었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환대하시고 힘있고 신학적으로 갑질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욕설을 베푸셨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던 것처럼 사회적 계급을 무시하고 의전을 무시하고 약자를 섬기는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이게 거룩입니다. 손을 올려 주님을 외치면서 집회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거룩의 기역자도 쓸 수 없습니다. 

 

- 말씀이 읽혀지고, 선포되고, 이해되고, 나눠질 때, 거룩함에 이른다. 

 

“너희가 성경은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요 5:39절) 

 

그러니, 우리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Transformed by the Holy Scripture. 이게 되어야 합니다. 과연 말씀으로 변화되고 말씀때문에 내 삶에 새로운 질문들이 던져지고 있습니까? 신앙의 여정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나요? 말씀 때문에 던져진 인생의 질문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울리고 있나요? 어떤 질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 말씀은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선포되고, 이해되고, 해석되고, 나눠져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말씀이신 예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진리로 거룩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겁니다. 

 

4. 나가며 

몇 주간의 걸친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묵상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과 연합 안에 있다는 개념에 집중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 기도 시리즈 설교의 마지막으로 그분이 무엇을 목적으로 기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 하나됨(one), 기쁨(joy), 거룩(holy)

맞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을 그토록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 중의 핵심일 겁니다. 하나됨을 위해 우리는 삼위일체 신학과 영성에 깊이 천착해야합니다. 서로 용서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경청과 공감이 일어나야 합니다. 두번째 목적은 제자들 속에 기쁨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제자가 되기를 그토록 바라셨습니다. 세번째는 그들의 일상속 세상속에서 진리로 거룩해지길 목적으로 삼습니다.  

 

-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그분의 기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드려진 기도였습니다. AD30년에 드려졌던 그 기도는 초대 교회에 면면이 흘러 지속적으로 드려지다가 AD85년 어간 요한의 공동체가 함께 드리고 있는 기도였습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도 좋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것도 좋습니다. 옆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기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따라 적용하여 기도하는 겁니다. 

2018. 1. 13. 

 

0. 들어가며_마지막 설교와 기도

1) 가룻유다의 배반 이후 남은 11제자(13장)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날이 이제 바로 내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명절인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월절 식사를 나눕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룻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지만, 가룻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버리고 예수님을 반역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식사 자리를 떠납니다. 이제 11명의 제자들만 남습니다. 

 

2) 마지막 설교(13-16장)

13장에서 16장에 걸쳐 예수님은 마지막 설교를 하십니다. 이 내용들은 정말 중요한데요.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 필적할 만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대해 가르치셨다면, 요한복음의 마지막 설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추동하는 힘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원리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실행방법 혹은 실행할 수 있는 에너지아닙니까? 머리로 아는 원리만으로는 구체적인 실행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그에 도달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실천동력. 내적파워. 추진력이 바로 요한복음의 설교에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꼼꼼히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3) 마지막 기도 

오늘은 마지막 설교 이후에 예수님이 자신의 설교에 도취되셔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기도회를 혹시 인도해보신 적이 있나요? 

대부분의 기도회는 설교의 메시지를 기도제목으로 삼아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기도회를 인도하는 첫번째 본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은 먼저 13-16장에서 좀 길다 싶이 설교를 한 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게 17장의 내용입니다. 

 

저는 17장을 정말 사랑합니다. 오늘 송죽교회 청년들을 생각하면서 어떤 본문으로 말씀을 나눌까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본문으로 설교하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가장 사랑합니다.

 

신약 성경에 예수님의 기도가 여러번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주기도문(마6)을 가르쳐주셨죠. 그런데 이건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문이고요. 직접하신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도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기적을 많이 행하셨는데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을 보면서 화를 내시면서 저주하시다가 드리신 기도입니다. 

게세마네 기도는 유명하죠. ‘이 잔을 옮겨주세요. 하지만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해주세요.’ 

십자가 위에서 드린 기도도 유명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대체로 짧은 기도문들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7장은 그 길이 부터가 남다릅니다. 26절에 걸쳐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기도문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애절한 감정이 철철 흘러 넘칩니다. 

17장을 함께 읽던 한 자매가 그러더군요. 기도가 슬퍼요~~ 맞습니다. 슬픈 감정도 녹아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과 사별 이후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저는 이 기도문을 너무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개가 더 있지만, 그건 나중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한가지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확장성입니다. 기도의 대상이 확장됩니다. 삼위하나님의 하나됨이 확장됩니다. 복음이 확장됩니다. 이 세 가지 확장성에 대해서 오늘 나누고 싶습니다. 

 

1. 기도의 확장성(20절) 

1) 11제자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로(20절)

첫째, 기도의 확장성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2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 제가 상황을 설명해드렸습니다. 11명의 제자들과 식사를 마치시고 3장에 걸쳐 설교를 하신 뒤에 제자들 앞에서 대표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제자들을 어리둥절 했을 겁니다.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주로 11명의 제자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9절을 읽어볼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17절에는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맞습니다. 이 기도는 11명의 제자 공동체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20절에 오면,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히 11명의 제자들에게 제한되지 않습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이 11명의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수많은 2세대 제자, 3세대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사도들 뿐 아니라 사도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도 포함됩니다. 베드로의 설교 이후에 3천명 5천명이 회심하던 예루살렘 교회도 포함됩니다. 1세기 가장 뜨거웠던 선교적 공동체였던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도 포합됩니다.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로마교회.... 그리고 지금 우리까지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신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기도의 스케일입니다. 

 

2) 나에게서 우리로, 우리에서 너희로, 그리고 세상으로

우리의 기도는 주로 나에게 국한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의 평안, 내일 있을 시험, 자격증 시험, 고시, 직장 면접,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 친구랑 잘되게 해주세요. 아이폰 8을 사게 돈 좀 주세요. 등등... 대체로 이런 기도일 겁니다. 이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나를 넘어서야 합니다.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회개하고 용서받고 자유함을 얻는 것도 너무 중요합니다. 기본중의 기본일 겁니다. 

 

그러나 나를 너머 이제 우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11명의 제자만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이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나를 너머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예수를 알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당연한 행동입니다. 

 

우리를 너머 이제는 너희까지 나아갸 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제의 너희였습니다.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겠다는 말은 더이상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우리가 될 수 있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세상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범위가, 기도의 대상이 그렇게 확장됩니다. 세상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소리질러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중보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중보기도가 가장 순수한 기도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기도, 이것이 가장 기도다운 기도인 겁니다. 

 

2. 하나됨의 확장성(21-23절)

둘째, 하나됨의 확장성이 도드라집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17장 전체 기도의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1) 삼위일체의 신비 

21절에 보니 삼위일체의 신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이건 쉽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trinity의 신비는 이렇게 성경에 녹아져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서로 깊이 사랑함으로, 서로에게 온전히 순종함으로, 서로의 말을 동일하게 사용함으로써 서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서로 포함시키기

그런데 이 하나됨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의 사랑의 연합 가운데 있게 헤 달라는 충격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들으면 온갖 형용사, 감탄사를 써 가며 입을 턱하고 벌릴 겁니다. 

헐, 헉, 오마이 갓, 대박, 미쳤어, 깜놀.... 우리 라면 이런 단어를 썼겠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개념은 구약에 흔하게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쉽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건 하나님과 연합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삼위 하나님의 연합 가운데로 들어올 것을 기대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분의 소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가장 진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 소원을 안다면 우리는 이 하나됨을 지켜나가기 위해 놀랍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도대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어떤 상태가 안에 있다는 말인가요?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는 그런 말인가요? 뫼비우스 띠처럼, 내가 너안에 있고 너가 내안에 있고 막 엮여 있다는 말인가요? 서로 안에 있으려면 형식 논리적으로는 동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하나님과 예수님의 육체가 동일하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이건 저와 여러분이 함께 고민해야 할 숙제 입니다. 

 

다음 주까지 고민해서 서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하나됨과 삼위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인지, 어떻게 실현가능하지는 기도하면서 차차 알게 될 일입니다. 지레 겁먹고 회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그분의 소원입니다. 

 

3. 복음의 확장성(21절, 23절)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의 확장성이 분출되어 있습니다. 기도 대상의 확장, 하나됨의 확장은 결국 복음의 확장을 낳습니다. 

 

1) 아버지께서 예수를 세상에 파송하심을 믿도록(21절) 

하나되어 하나님과 연합된 제자 공동체는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이 믿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 놀라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예 맞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파송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들 사이에 사신 겁니다.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신인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신 겁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사단도 깜짝 놀랄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야가 올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이 직접 올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겁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실을 믿는 것은 오직 한가지를 통해 가능합니다. 이 기쁜 소식, 믿기 힘든 복음을 믿게 만드는 것은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입니다. 단순히 서로 하나되는 동호회나 해병전우회 같은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되어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이걸통해 복음이 확장됩니다. 


2) 아버지께서 예수를 사랑하심 같이 세상을 사랑하셨음을 알도록(23절) 

23절에 보면 더욱 놀라운 복음의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하나님이 제자들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의 연합이 확장되어 제자 공동체까지 이어진 이 사실을 결국 세상이 알게 될 겁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거부하거나 아님 그 공동체로 들어오고자 안달이 날 겁니다. 

 

한국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탐욕에 의한 교회 분열입니다. 

캠퍼스에서 18년간 캠퍼스 선교사로 사역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대학 캠퍼스에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과 무관심이 팽배해 있습니다. 기성교회들이 보여온 탐욕과 무절제와 비상식과 분열이 청년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고 전도의 문을 막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여주고 알려줘야 할 교회와 기독공동체들이 오히려 복음의 문을 막고 있는 겁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가 그래서 더욱 슬픕니다. 

그분의 소원이 이 곳 한국 땅에서는 이상하리 만치 잘 이뤄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 고통스럽습니다. 

 

4. 나가며_나를 넘어서자(확장성)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확장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를 넘어서 우리와 너희와 세상으로 이어지는 기도 대상의 확장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이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으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파송하셨으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복음이 온 세상으로 확장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를 드릴 차례입니다. 

나를 넘어 우리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하나되어 하나님께 연합될 때, 세상이 놀라게 될 겁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기도에서 예수님의 기도로 바뀌어야 하니다. 

그분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8. 1. 28. 

 

0. 들어가며 

- 혜율이를 잃어버리다.

집 근처에는 제법 큰 공원이 있습니다. 중산마을에 있다해서 중산공원인데요. 트랙도 있고 인조 잔디 축구장도 있어서 많은 주민들이 이용합니다. 특히 아침저녁으로 무료 에어로빅 강좌가 열리는데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에어로빅 강사를 따라 춤을 춥니다. 

하루는 7살 짜리 큰 딸, 혜율이와 저희 부부가 어둑어둑한 저녁에 산책하러 갔습니다. 한살 짜리 혜강이를 유모차에 태우려고 이것저것 하던 사이에 음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혜율이가 에어로빅 하는데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보이지가 않는 거예요. 몇번 불러봤지만,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그 주변을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있는게 좋은가. 뛰어 다니는 게 좋은가?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정말 1분이 1시간 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0분정도 흘렀을까요? 아내 전화벨이 울립니다. 모르는 전화번호였어요. 한 여성분이 전화를 걸어 울고 있던 혜율이를 바꿔주었습니다. 다행히 혜율이가 엄마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던 겁니다. 십년감수 이럴 때 쓰는 말이죠. 

 

혜율이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서 배워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안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혼을 냅니다. 엄하게 꾸짖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때로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 소방관, 군인_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과 생명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주는 분들에 대한 삶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소방관들의 보호장비를 개인이 사서 착용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건 국가가 나서서 최고의 제품을 공급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생명을 지키고 안전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좀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예수님의 기도_제자들을 지켜주소서. 

요한복음 17장의 전체 내용을 압축하면 하나의 동사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바로 KEEP 입니다. 지켜달라는 그분의 기도가 11절과 15절에 분명히 등장합니다. 혜율이가 없어지고 몇분이 지나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달렸습니다. 주님 혜율이를 지켜주세요.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지켜주세요. 

 

1. Keep 동사의 전제_세상(11절, 15절)

- 지켜달다는 말이 전제로 놓고 있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입니다. 

11절에 보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켜달라’, ‘보호해달라’라는 기도가 작동하게 된 근원적인 상황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 남겨져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 부활하셔서 승천하게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상에 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고 세상에 남아서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속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 데려감을 당하는자 vs 남겨둠을 당하는 자_참고도서

마태복음 24:40-41, 이 본문은 마지막 날 있을 일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온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두 사람이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누가 구원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일반적으로는 데려가는 것이 구원받는 사람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 노아의 홍수와 유사성을 밝히면서 이 구절을 설명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은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다. 

나) 버려둔다의 단어는 단순히 남는다의 leave 동사로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서 아피에미(φίημι)는 ‘떠난다. 용서한다. 풀어준다. 허용한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부정적 의미보다 긍정적 의미로 볼 여지가 크다. 

다) 데려간다의 의미는 “재판에 회부된다”라는 뜻, 성경배경주석에 잘 설명되어 있다.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라) 병행구절 눅17:37, “주검이 있는 곳에는 또한 독수리들이 모여들 것이다”라고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심. 이는 독수리들이 모이는 곳에 죽어버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 즉 데려감을 당하는 자들의 장소는 독수리를 관찰하면 된다는 뜻.

 

여러가지로 볼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종말에 구원받는 사람은 세상에 남는자입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저주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 해석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건전한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 새롭게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미래 버전이 탄생할 겁니다. 

 

-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개념_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 

여러분!! 이 세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새로워질 뿐입니다. 사라지는 게 아니고 변형되는 겁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영혼들이 떠다니며 노래하는 세상이 아니라, 육체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일도 하며 춤도 추는 세상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주기도문에 잘 드러납니다. 그 나라는 이 땅에 임합니다. 

 

일상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우주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세워질 겁니다. 지구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수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일상과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게 중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에 대한 태도인 겁니다. 

 

- 중간기의 세상은 위험하다. 

그런데 이 남은 자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뤄지기 전까지의 남은 자들에게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중간기의 세상은 위험합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왕의 대관식이 성대하게 전세계적으로 전우주적으로 일어나기 전까지의 세상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사우론과 사루만, 우르크하이와 오크들이 반지원정대를 공격하고 세상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2. 무엇으로부터 지키는가?_악한 자에게서(15절) 

예수님은 악한 자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럼 악한자는 누구를 의미하는 걸까요? 

1) 사단 

첫번째는 사단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예민하게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 하신 이후에 예수님을 시험한 사단은 아주 달콤한 존재였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제안들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했죠.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해봐라. 무릎을 꿇고 절을 해봐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봐라. 돈, 권력, 명예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죠.지금은 고인이 되신 헨리 나우웬은 영성에 대한 책을 많이 내셨는데요. 그중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예수님이 이겨내신 사단의 시험을 상황부합의 시험, 권력확보의 시험, 이목집중의 시험이라고 정의내렸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적합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 힘을 키워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욕망,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이런 욕망은 세상의 길이라고, 무한히 상향성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귀신들이 종종 나타나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사단의 전략에 맞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영광받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숨기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종종 등장합니다. 

 

사단은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시험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들이 가진 내밀한 욕구들을 끄집어 내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유혹합니다. 제자들의 능력을 드러내어 자신들의 목표에 빨리 도달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자극할 겁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빨리 상황을 호전시키는 데만 혈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단은 교묘하게 우리의 은밀한 욕망을 자극합니다.

 

이 사단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주기도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악에서 구원하소서~~ 

 

2) 대제사장을 비롯한 성전 중심 유대교인들

둘째는 성전 중심의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사단이 조정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사단의 졸개들이라고도 하죠. 대표적인 것이 성전중심으로 사리사욕을 취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2번이나 성전을 뒤엎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역 1년차일때 뒤엎은 사건이 나오고요(요2:13-22). 나머지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는 사역 3년차때 뒤엎은 사건이 나옵니다. 전세계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옵니다. 일생에 한번 와서 제사드리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습니다. 참된 용서는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로만 이뤄진다고 믿었죠. 그러니 성전은 최고의 종교, 관광 상품이었습니다. 기득권이 어마어마했죠. 자릿세도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모든 돈이 성전의 최고 권력자들에게 들어갔죠. 성전 제사장들과 사두개인이 그들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서 멸망한 AD 70년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최고의 종교적 상징이자, 최고의 돈벌이 수단이었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지속적으로 예수믿는 사람들을 압박한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여전히 종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교회세습의 본질은 돈과 권력의 종교적 카르텔의 보호입니다. 유력한 목사 중심으로 돈과 권력이 집중됩니다. 단지 그 목사 한 개인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장로 권사 집사들이 일종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 됩니다. 그러니 가장 안전한 사람을 후임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세습을 버젓이 하는 것은 자신들이 종교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3) 바리새인을 비롯한 회당 중심 유대교인들 

그런데 성전 수호자들만 악한 게 아니었습니다. 세번째가 있는데요.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히며 신학논쟁을 펼쳤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존경받는 유대 지도자들입니다. 율법 준수에 탁월했습니다. 유대교 경전인 토라, 즉 모세 오경을 다 외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을 쫓아다니며 바울의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세계 곳곳에 회당이 있었는데, 곳곳마다 가서 그리스도인들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대교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도 악한 자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를 하라 하지 말라의 종교로 격하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 교육을 받아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도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켜서 종교적 행위에 가둬두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은 의무라기 보다는 즐거움이요 특혜죠. 주일예배도 특권입니다. 기도도 특권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모든 종교적 행위를 의무로 느끼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의미가 빠진 형식은 의무감만 남깁니다. 특권이 특권되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을 강요하기 이전에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대화하는 시간, 충분히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형식파괴자는 아닙니다. 다만 형식을 강요하기 전에 그 의미에 대해 오랜 시간 배우고 깨닫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4) 로마 

마지막으로 누가 악한 자입니까? 당시 절대권력 절대반지를 가지고 있었던 절대 제국 로마가 악한 자입니다. 황제숭배를 강요합니다. 여러 신들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만, 황제숭배는 필수였습니다. 네로 황제부터 시작한 로마의 박해는 도미티안 황제 시대가 되면 극에 달합니다. 요한복음이 AD80년대 중후반에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33년에서 85년까지 약 50년간 요한은 로마의 다양한 박해를 경험했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고,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끓는 기름에 튀겨졌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싫어하는 권력과 국가가 있습니다. 지금도 순교의 현장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합니다.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과격한 행동이 그리스도인들을 타겟으로 이뤄집니다. 교회가 불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탄압과 박해는 대체로 종교 그 자체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이유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극단성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건 기독교 극단주의자들도 유사하게 행동합니다. 정상적이고 온건한 종교인들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현대의 로마는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누구는 공산주의라고 부릅니다. 누구는 이슬람국가라고 합니다. 누구는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누구는 국가제도 그 자체라고 합니다. 

저는 자신의 신념을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것을 로마라고 부르겠습니다. 

극단주의자들, 그것이 종교든, 물질이든, 사상이든, 국가든 극단주의자들 그들이 로마요, 악한 자들입니다. 

그런자들이 폭력을 부르고 살인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런 악한 자들로부터 육체와 정신과 정서와 마음을 지켜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3. 나가며

- 세상에 남겨두신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살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기도는 악한 자에게서 제자들을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단의 유혹, 돈, 권력, 명예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종교 기득권자의 기독교 장악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종교적 행위에 가둬두려는 신학적 이단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로마로 상징되는 극단주의자의 박해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교회 즉 성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2018년 1월 21일 일요일 

 

0. 들어가며

- 김희중 집사의 고백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안따깝기고 하고, 분노하게 되기도 한 사건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전전직 대통령의 최최최측근 집사인 김희중씨가 자신이 모셨던 MB의 국정원 특별활동비 상납 의혹과 관련한 사실들에 대해 검찰에 자세히 이야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검찰 조사의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더 이상 그 집사는 그 대통령안에 있지 않은 것 처럼 보입니다. 정치 논평할 생각은 없구요. 다만, “~안에 있다”라는 의미를 생각하며 살다보니까, ‘김희중 집사는 더이상 MB 안에 있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말입니다. 

 

- “~안에 있다” 

고통스런 한 주를 보냈습니다. “~안에 있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요한복음 전체에서 힌트가 될 만한 구절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핵심중에 하나인, 삼위 하나님의 확장에 대해 말씀을 나눠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이 확장되고,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이 확장되어, 결국 복음이 확장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나눴습니다. 그리고 제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도대체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자고 숙제를 내드렸습니다. 서로 짝을 지어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

 

묵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다시 연구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나눠볼까 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봤습니다. 

 

1. 말씀의 공명 

제일 먼저, ‘~안에 있다’라는 말은 말씀이 공명한다라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위에 존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의도, 뜻이 예수님 존재의 본질로 요한은 본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번 생각해봐도, 요한의 첫 서술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고 예수님에 대한 책을 낸다고 했을 때, 어떤 문장을 제일 먼저 쓸까요? 

 

‘85년전 12월 예수님이 태어났다.’

‘수십년 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살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처음이야기를 기록에 남기고 싶다.’ 등등 

 

마치 역사를 쓰듯, 혹은 교과서의 첫문장을 쓰듯 시작했을 겁니다. 

그러나 요한은 전혀 다른 서술방식을 가져다가 씁니다. 지극히 철학적이요, 창세기적이요, 시적인 방식으로 첫문장을 터뜨립니다. 

예수님의 본질을 폭로해버립니다. 첫문단에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기승전결 뭐 이런 거가 없습니다. 처음 시작하자마자 하이라이트, 고음을 찍는 겁니다. 핵심을 질러버립니다. 뭐라고요? 

“예수는 하나님 곧 말씀이다” 

 

2) 따라장이 예수님 

요한복음 전체에서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말)을 그대로 따라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주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요. 대표적인 구절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3:34_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7:16-18_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8:26_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대로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8:28_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2:49-50_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 

14:10_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14:26_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16:13_그러나 그 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속된말로 하나님 따라장이였던 겁니다. 

그분의 말씀, 가르침, 교훈, 설교 이 모든 것은 자기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그에게 넣어주신 말과 뜻과 의도와 목적이었습니다. 

 

3) 말씀의 공명으로서의 ‘안에 있음’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첫번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존재에 뿌려지고 공명하고 새겨지고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이 우리의 뇌에 자각됩니다. 단순히 뇌의 문장으로만 남지 않고 분석되고 해석되어 그 의미가 이해됩니다. 이해된 말씀이 묵상과 상상을 통해 온 몸과 맘으로 공명합니다. 그렇게 우리 존재에 새겨집니다. 그러면 그 말씀에 자연스럽게 머물러 있게 됩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어서, 현재 우리의 삶이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하나님 나라 역사에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되고, 그 기독교 세계관적 노랫소리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뇌와 마음에 울려퍼진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말이 바뀝니다. 말의 내용이 바뀝니다. 말투가 바뀌는 게 아니다. 어휘와 내용이 변화됩니다. 새로운 구조와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그분의 말이 들어와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창조, 언약, 통치, 성육신, 십자가, 부활, 내주, 중보, 은사.... 등의 단어와 그 의미가 존재에서 공명합니다. 이 말들과 그 의미가 지속해서 우리 존재로부터 노래되어 나옵니다. 

이것이 첫번째 입니다. 

 

2. 행동의 공명 

그런데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1) 행동의 공명 

’~안에 있다’의 두번째 의미는 바로 행동의 공명입니다. 

이것도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5:17_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5:19_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5:30_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한다

6:38_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8:29_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8:55_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10:38_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14:11_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그분이 시키시는 일,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이 공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극단적으로 보면, 너무나 의존적인 자녀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독립적으로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0살이 넘어 본격적인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한 뒤에도 오직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말만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도 따라하고 계십니다. 

 

말과 행동이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의 이분법은 하나님에게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이 그분의 의지이며 그분의 행동입니다. 그분의 말은 창조의 힘을 지닌 말입니다.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요새처럼 말과 행동이 분리된 때도 드물겁니다. 수많은 말들이 SNS상에 발표되고 떠돌아다니고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번복되고, 했던 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포장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과 행동이 공명되고 있었던 예수님은 그분의 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거짓이 아닌 참으로 드러나도록 그대로 행동하고 계시는 장면을 성경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특히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애쓰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계명 지키기(14:20-21) 

행동의 공명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0-21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요 14:20-21). 

 

예수님은 ‘~안에 있음’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계명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계명을 받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고, 예수님의 사랑도 받습니다. 계명을 받아 지키는 것, 즉 예수님과의 행동의 공명이  예수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의미는 단순히 그분의 말만 반복한다고 되는 것이 압니다. 예수님의 단어와 문장과 논리만 사용하여 말로 가르치는 것을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말합니다. ‘계명을 지켜라.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거다. 내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들과 계명들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너희도 내가 준 계명을 받아서 그대로 지켜라.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3) 사랑의 공명(13:34-35)

그럼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요?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요 13:34-35). 

 

지난 주에 말씀드렸죠? 예수님이 자신의 설교에 도취되어 기도하신 것 같아고 말입니다. 

13장-16장까지 마지막 다락방 설교에서 그분은 엄청난 일을 하신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들으면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바로 새계명을 주겠다는 그분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계명 외에 다른 새계명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새계명을 주시더니만, 나와 아버지가 서로 안에 있다고 하시더니, 제자들에게도 그 연합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장에서 그런 기도를 드리신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 같이,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입니다. 즉 정리하면, 행동의 공명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도 그걸 하신 것이고요. 제자들도 그걸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예 맞습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이건 감정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라라는 행동을 공명하도록 요청하는 겁니다. 

이끌림, 매혹, 애착, 애정 등의 개념만으로도 포착되지 않습니다. 매우 구체적인 행동으로 요청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해야 할 말이 많은데 그건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책 한권을 추천드립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사랑과 정의” 라는 책입니다.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를 이분이 정리하고 계시더라구요. 혹시 저랑 같이 읽고 책 나눔 하고 싶으시면 말씀해주세요. 

 

3. 상징의 공명_성만찬(6:55-57)

‘안에 있다’의 마지막 의미는 상징의 공명입니다. 

6:55-57_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 말도 정말 충격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특히 ‘~안에 있다’라는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 읽다가 이 구절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매번 형식적으로 하던 그 성만찬에 이런 의미가 있는 줄 새삼 깨닫게 된 겁니다. 

왜 예수님이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계속 지키도록 하셨는지, 왜 초대교회가 성만찬 예식을 매번 모일 때마다 진행했었는지, 왜 이제까지의 교회 역사 속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그토록 많은 시간 토론하고 논쟁하고 대화를 나눴는지 이해가 가더라구요. 

 

그렇습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상징적 예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공명하는 사람, 그분의 행동에 공명하는 사람은 바로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식이 필요없지 않습니다. 상징의 공명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몸과 피를 먹는 상징의 공명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상징, 이미지, 로고는 인간의 존재와 기억과 사고 활동에 필수적입니다. 

모든 언어는 상징으로 구성됩니다. 

수많은 상징들이 쌓여 우리 인간의 의식을 구성합니다. 

상징으로 단순화, 이미지화, 추상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사물과 우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상징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즉 그분의 살과 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장로교는 성만찬을 특별한 절기에 주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일년에 3-4번에 걸쳐 성만찬예식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미국의 한 교회는 매주 성만찬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카톨릭 교회들도 매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주 그분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자주 먹는 게 좋습니다. 문제는 그 예식 자체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죠. 

말씀과 행동이 공명되지 않은 상징은 그 자체가 형식이요 우상이 됩니다. 

그렇다고 성만찬을 등한히하거나 무시하거나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됩니다. 

상징도 계속 우리 속에서 공명해야 합니다. 

 

4. 나가며

오늘은 여러 말씀들을 찾아봤습니다. 아마 너무 복잡하다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사용한 그 단어의 의미를 요한복음을 통해 찾으려고 했던 시도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안에 있다’는 말씀의 공명, 행동의 공명, 그리고 상징의 공명입니다. 

그분의 언어와 문장과 뜻과 의도가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계명의 실천이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상징적 행위가 우리 안에서 공명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서로 하나되어 연합되신 그 하나됨에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안에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말씀과 행동과 상징이 공명을 이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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