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0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제 십팔년에, 아비야가 유다 왕이 되었다.

2그는 삼 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이다.

3아비야는 그의 아버지가 지은 죄를 모두 그대로 따라 갔으며,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는 달라서, 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였다.

4그러나 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생각하셔서, 예루살렘에다가 한 등불을 주시고, 그의 뒤를 이을 아들을 세우셔서, 예루살렘을 굳게 세워 주셨다.

5다윗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았고, 헷 사람 우리야의 사건 말고는, 그 생애 동안에 주님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었다.

6여로보암과 르호보암 사이에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늘 전쟁이 있었고,

7아비야와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었다. 아비야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8아비야가 죽어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잠드니, '다윗 성'에 장사지냈고, 그의 아들 아사가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다윗과 같은 삶을 살지 못했다. 

다윗은 비록 우리야 사건으로 큰 죄를 지었지만, 그는 정직하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켰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여러 가지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정직했다. 

그 점을 하나님께서는 높게 사셨다. 

그리고 열왕기의 저자도 다윗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나는 다윗이 시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는 점이 상당히 긍정적이라 본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낸다. 

그리고 때로는 승리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때로는 고통에 대한 눈물과 애통으로 노래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다윗은 자신의 감정에 정직했으며, 솔직하게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인생 전체를 놓고 평가할 때,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보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솔로몬도 그렇고 르호보암, 아비야도 영 신통치가 않다. 

하나님이 지극히 싫어하시는 우상을 숭배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모욕해서는 안된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도와주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윗 왕가를 일으켜 주신 하나님의 송두리째 부정하는 행위다.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부흥이 무조건 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부흥을 이루기 위해 행했던 무수한 잘못들이 되돌아와 절대적인 악에 노출된다. 

절대적인 악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다. 

아비야는 결국 이 절대적인 악을 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셨다. 

아담과 하와 때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심판을 받았으나, 

어느 순간 하나님은 더 많은 자비와 인내로 사람을 대하고 계신다. 

아비야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여전히 등불을 주신다. 

빛을 밝히신다. 희망을 주신다. 새로운 세대를 일으키신다. 

하나님의 자비를 오용하지 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왜곡하지 마라.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오래 참고 계신다. 

이를 오용하게 되면 그의 영은 깊은 어둠에 빠져든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부족한 것 투성이다. 

감당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다. 

주님께서 내 안에 등불을 밝혀 주시길 빈다. 

어둠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자비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고, 정직하게 주님의 빛 앞에 나를 비추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길 원한다. 


하나님, 

제 안에 어둠울 몰아 내 주소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풍성한 자비를 오용하지 않게 해 주세요. 

감사로, 찬양으로 하나님께 집중하길 원합니다. 

혹 제가 지적받을 만한 잘 못이 있다면 겸손히 인정하고 고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14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32여로보암은 유다에서 행하는 절기와 비슷하게 하여, 여덟째 달 보름날을 절기로 정하고, 베델에다 세운 제단에서, 그가 만든 송아지들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만든 베델의 산당에서 제사를 집행할 제사장들도 임명하였다.

33왕은 자기 마음대로 정한 여덟째 달 보름날에, 베델에 세운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절기를 이렇게 제정하고, 자기도 그 제단에 분향을 하려고 올라갔다.

1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막 분향을 하려고 하는데,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유다로부터 베델로 왔다.

2그리고 그는 그 제단 쪽을 보고서, 주님께 받은 말씀을 외쳤다."제단아, 제단아, 나 주가 말한다. 다윗의 가문에서 한 아들이 태어난다. 그 이름은 요시야다. 그가 너의 위에 분향하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너의 위에서 죽여서 제물로 바칠 것이며, 또 그가 너의 위에서 그 제사장들의 뼈를 태울 것이다."

3바로 그 때에 그는 한 가지 징표를 제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나 주가 말한 징표다. 이 제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질 것이다."

4여로보암 왕은, 하나님의 사람이 베델에 있는 제단 쪽에 대고 외치는 말을 듣고, 제단 위로 손을 내밀면서 "저 자를 잡아라"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 내어 뻗은 여로보암의 손이 마비되어서, 다시 오므릴 수 없었다.

5그리고 곧 이어서, 하나님의 사람이 주님의 말씀으로 제시한 징표대로, 그 제단은 갈라지고, 그 제단으로부터는 재가 쏟아져 내렸다.

6그러자 왕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제발 그대의 주 하나님께 은총을 빌어서, 내 손이 회복되도록 기도하여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이 주님께 은총을 비니, 왕의 손이 회복되어서, 예전과 같이 되었다.

7이에 왕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피곤을 풀도록 합시다. 그대에게 선물도 주고 싶소."

8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비록 임금님께서 저에게 왕실 재산의 절반을 주신다고 하여도, 나는 임금님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이 곳에서는 밥도 먹지 않겠으며, 물도 마시지 않겠습니다.

9주님께서 나에게 명하시기를, 밥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온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10그런 다음에, 그는 베델에 올 때에 온 길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


1. 자기 마음대로 

 

여로보암 왕은 자기 마음대로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 

혼합종교다. 금송아지 형상을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세우지 말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순간 그 형상을 만든 사람, 혹은 만들게 한 사람이 신이 된다. 

형상으로 제한된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다. 

형상이 놓인 공간과 시간에 제약 받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 형상이 여호와라고 가리키는 사람이 범인이다. 

그가 스스로 신이 되고자 벌인 계략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여로보암은 자기 마음대로 새로운 종교 시스템을 만들어 간다. 

절기를 정하고, 분향도 스스로 한다. 

분향을 왕이 직접 하는 것이 본래 율법에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유다의 르호보암과 차별점, 대척점을 만들어 새로운 정권 홍보에 들어간다. 

예루살렘에는 멋진 성전이 있지만, 베델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예루살렘과 대척점에 베델을 두고 전통적인 초막절을 대체하는 새로운 절기를 만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자기 마음대로였다. 

자기가 내키는대로 진행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일들을 벌인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현재의 권력을 자기 맘대로 사용한다. 

바위섬이라는 노래가 있다. 

최근에 기타를 치며 딸에게 불러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래의 가사를 이해하려고 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위섬은 도대체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사자 배창희의 설명을 찾아봤다. 

그는 소록도를 보면서 광주를 떠올렸고, 그 광주를 바위섬으로 비유하여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권력자의 횡포 앞에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그 고통을 노래에 담았다. 

자유와 저항의 상징, 5월의 광주를 바위섬에 빗대어 끝까지 사랑하겠노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권력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죽이기도 한다.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을 쉽게 바꾼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쉽게 어긴다. 

자기가 기준이 되려고 한다. 

선악의 기준을 자기가 정하려고 한다. 

선악과를 지금도 여전히 가만히 두지 못한다. 

 

2. 기회를 주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회개의 기회를 준다. 

아직 통치 초반이다. 

회개할 여지가 있다.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재편할 수 있었다. 

주님의 예언자가 유다에서 베델로 왔다. 

마뜩치 않았을 것이다. 

유다에서 온 예언자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여로보암이 아무리 이집트에서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이스라엘로 돌아온 이상 여호와의 뜻에 적극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새로운 왕은 신이 되고 싶었다. 

베델의 재단에서 외치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저자를 잡아라”

 

손을 뻗으며 그 예언자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명령했다. 

사람들은 왕의 호령에 깜짝 놀라며 왕을 쳐다본다. 그리고 왕이 가리키는 손을 따라 예언자를 본다. 

그런데 왕의 팔이 오그라들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왕은 어리둥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팔을 따라 재단을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은 그 예언자의 말대로 재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것을 다같이 본다. 

왕의 신하들, 새롭게 뽑힌 정통성 없는 제사장들, 그리고 백성들, 모두 놀라고 기가 빠진다. 

 

이렇게 싸인을 주시는데도 여로보암과 그 주변의 신하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분별력을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 

오히려 예언자를 회유하려고 한다. 예언자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 자기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손을 고쳐주었으면, 이제 여로보암이 할 일은 그동안 자신이 행한 일을 돌이키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성전이 없었을 때,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방식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다. 

여전히 레위인들과 원래의 제사장들이 살아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원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방식을 가르치라고 하면 될 일이다. 

자기 맘대로 했던 일을 돌이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싸인을 주실 때가 있다. 

수많은 사건 속에서 그분의 뜻을 분별해 본다. 

조용히 앉아서 그분의 얼굴을 바라본다. 

일과 사건에 함몰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뜻에 집중한다. 

심호흡을 하며 성령님의 운행하심과 일하심을 기대하고 바라본다. 

나에게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집중한다. 

오늘 그렇게 살고 싶다. 


영이신 하나님,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자기가 신이 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표현의 이면에 자기 맘대로의 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우상입니다. 

제가 우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 맘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13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21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온 유다의 가문과 베냐민 지파에 동원령을 내려, 정병 십팔만 명을 선발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문과 싸워서, 왕국을 다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고 하였다.

22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말씀하셨다.

23"너는 유다 왕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의 모든 가문과, 그 밖에 나머지 모든 백성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24'나 주가 말한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시킨 것이다. 너희는 올라가지 말아라. 너희의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두 귀향하였다.

25여로보암이 에브라임의 산지에 있는 세겜 성을 도성으로 삼고, 얼마 동안 거기에서 살다가, 브누엘 성을 세우고, 그리로 도성을 옮겼다.

26그런데 여로보암의 마음에, 잘못하면 왕국이 다시 다윗 가문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7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전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올라갔다가,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옛 주인인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날이면, 그들이 자기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8왕은 궁리를 한 끝에, 금송아지 상 두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은, 너희에게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이 여기에 계신다."

29그리고 그는 금송아지 상 두 개를, 하나는 베델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

30그런데 이 일은 이스라엘 안에서 죄가 되었다. 백성들은 저 멀리 단까지 가서 거기에 있는 그 한 송아지를 섬겼다.

31여로보암은 또 여러 높은 곳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을 임명하여 세웠다.


하나님이 여로보암을 세우신 것은 잘 하신 것인가? 

솔로몬의 죄에 대한 심판의 성격으로 이스라엘을 두 왕국으로 분할하시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여로보암에게 북왕국 10개 지파의 통치권을 넘기신 것은 과연 결과적으로 옳은 결정인가? 

북왕국의 멸망의 씨앗은 초대왕 여로보암에게 있다. 

그는 두려움에 휩싸여 하지 말아야 할 큰 죄 둘을 지었다. 

하나는 금송아지를 베델과 단에 세운 것이다. 이집트에서 구출해주신 신이 마치 금송아지라고 선전/호도하면서 말이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반짝 반짝 빛나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하나님은 그 행위가 너무 싫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역사에 분명히 기록된 이 사건을, 절기 때마다 되뇌였던 이 사건을, 이집트 유학파 여로보암은 완전히 뒤집어 적용했다.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를 이스라엘 남단과 북단에 설치하고 마치 이스라엘의 수호신이라도 되는 듯이 금송아지를 섬기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죄는 레위 자손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을 임명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대적하는 행위다. 

제사장은 오직 레위 자손들에서만 나오는 것이 율법이었다. 

레위 사람들은 다른 지파와는 달리 각 지파에 배속되어 그들을 섬겼다. 

다른 지파들의 생산물의 일부를 제공받아 살아갔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데 전심을 다하도록 배려를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이런 종교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켜 버렸다. 

어떤이는 이 조치가 16세기 종교개혁과 닮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만인 제사장직의 시초로 보는 것은 과도한 의미부여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정권,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로 기존의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멋대로 뒤바꾸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강고하며 부패한 성직주의를 개혁하려고 했던 운동에 빗대는 것은 아전인수격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초기 기대는 신정일치 왕국이었다. 

왕은 있지만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시키는 대리 통치자들이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고 싶으셨다. 

그러나 결국 그 신정일치의 하나님의 꿈은 솔로몬 때문에, 그리고 여기 여로보암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 

다시 새로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솔로몬 초기의 그 찬란했던 일시적 하나님 나라의 전형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은 다른 조치를 취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솔직히 이 시점에서 여로보암을 선택한 것이 잘 된 것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겠다. 

좀더 나은 왕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인류의 역사가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아담과 하와도 아쉽다. 

아브람과 모세도 아쉽다. 

기드온과 삼손도 아쉽다. 

다윗과 솔로몬도 아쉽다. 

잘 한 것도 있지만, 못한 것도 많고, 어떤 것은 최악도 있다. 

역사를 결과적으로만 보면 처음 선택은 언제나 아쉽다. 

그래서 쉽게 결정하지 못할 때도 많다. 

어떤 결정이건 아쉬움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사람을 선택하는 것도 그렇다. 

친구를 선택하는 것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도… 섣불리 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생에 후회가 없을 수는 없다. 

후회가 남더라도 인생은 결정을 통해 성장한다. 

결정하지 않으면 결정하지 않는 결정으로 인해 후퇴하고 역성장한다. 

 

하나님의 선택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여로보암이 최선은 아니었겠지만,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도 기대를 걸었을 것 같다. 

그에게 10지파의 통치권을 넘길 때는 그래도 단순히 다윗 왕가를 심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심판 이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실 때, 그래도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 에덴 비전의 회복을 위해 뭔가 의미심장한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왕국이 만들어지길 기대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 전쟁하지는 말고 각자 흩어져서 조용히 잘 생각해보라고 하셨던 것 같다 .

 

24'나 주가 말한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시킨 것이다. 너희는 올라가지 말아라. 너희의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두 귀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런 계획은 여로보암의 죄로 인해 다시 큰 차질이 빚어진다. 

솔로몬의 죄악을 따랐다. 솔로몬이 왕국의 안정과 평화 번영을 위해 외국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벌어진 참사는 여로보암 죄악의 동기와 맞닿아 있다. 여로보암도 자신의 왕국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기존의 종교 시스템을 바꿔버렸다.  

결국 마음 속 두려움과 동기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오늘도 여러 결정들을 내려야 한다. 

작든 크든 그 결정들이 영향을 준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되, 나의 두려움과 동기를 잘 파악하고 두려움에 의한 결정, 왜곡된 동기에 의한 결정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주님, 

두려움이 사고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사랑으로 두려움을 넘어서도록 

내면의 동기를 잘 관찰하고 고장한 부분을 잘 고치도록 

그래서 어떤 결정이든 주님의 뜻에 가장 부합한 결정을 내리도록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12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41솔로몬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과 그의 지혜는 모두 '솔로몬 왕의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42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43솔로몬은 죽어서,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에 묻혔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1온 이스라엘이 르호보암을 왕으로 세우려고 세겜에 모였으므로, 르호보암도 세겜으로 갔다.

2느밧의 아들 여로보암도 이 소문을 들었다. (그 때에 그는 솔로몬 왕을 피하여 이집트로 가서 있었다.) 이집트에서

3사람들이 여로보암을 불러내니, 그가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과 함께 르호보암에게로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4"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습니다. 이제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워 주신 중노동과 그가 우리에게 메워 주신 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

5르호보암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돌아갔다가, 사흘 뒤에 나에게로 다시 오도록 하시오." 이 말을 듣고서, 백성들은 돌아갔다.

6르호보암 왕은 부왕 솔로몬이 살아 있을 때에, 부왕을 섬긴 원로들과 상의하였다. "이 백성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경들의 충고를 듣고 싶소."

7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 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8원로들이 이렇게 충고하였지만, 그는 원로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기와 함께 자란, 자기를 받드는 젊은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9그들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나에게, 부왕께서 메워 주신 멍에를 가볍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소. 이 백성에게 내가 어떤 말로 대답하여야 할지, 그대들의 충고를 듣고 싶소."

10왕과 함께 자란 젊은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은,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메우신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임금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내 새끼 손가락 하나가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

11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러나 나는 이제 너희에게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겠다. 내 아버지는 너희를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너희를 쇠 채찍으로 치겠다' 하고 말씀하십시오."

12왕이 백성에게 사흘 뒤에 다시 오라고 하였으므로, 여로보암과 온 백성은 사흘째 되는 날에 르호보암 앞에 나아왔다.

13왕은 원로들의 충고는 무시하고, 백성에게 가혹한 말로 대답하였다.

14그는 젊은이들의 충고대로 백성에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소.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당신들에게 메우겠소. 내 아버지는 당신들을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당신들을 쇠 채찍으로 치겠소."

15왕이 이렇게 백성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일을 그렇게 뒤틀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실로 사람 아히야를 시켜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16온 이스라엘은, 왕이 자기들의 요구를 전혀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왕에게 외쳤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받을 몫이 무엇인가? 이새의 아들에게서는 받을 유산이 없다. 이스라엘아, 저마다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아, 이제 너는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그런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저마다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갔다.

17그러나 유다의 여러 성읍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은, 르호보암의 통치 아래에 남아 있었다.

18르호보암 왕이 강제노동 감독관 아도니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니, 온 이스라엘이 모여서, 그를 돌로 쳐죽였다. 그러자 르호보암 왕은 급히 수레에 올라서서,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다.

19이렇게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에 반역하여서, 오늘에 이르렀다.

20이 무렵에 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로보암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람을 보내어 그를 총회로 불러 왔으며, 그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유다 지파만 제외하고는, 어느 지파도 다윗 가문을 따르지 않았다.


1. 분열의 역사 

 

분열의 역사의 시작이다. 

솔로몬의 죄악은 우상숭배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는 아스다롯과 그모스와 밀곰에게 절을 했으며, 하나님의 법도와 명령을 어겼다. 

그의 통치 기간을 약 40년으로 잡곤 하는데, 그중 절반 이상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아주 직접적으로 그의 죄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후회와 죄책감이 아니다. 

회개는 “돌아서서 가기”이다. 자기가 가던 방향을 틀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회개다.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인격적인 반응이며 구체적인 행동의 문제다. 

솔로몬은 그 회개를 할 수 없었다. 

이방 여인, 외국 여인들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찢어놓으시기로 결정하셨다. 

한 명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주었더니 그 권력은 그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고 부패하게 만들었다. 

다윗은 죄를 지었으나 회개하였고, 다시 돌아와 겸손하게 주님을 따랐지만, 솔로몬은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셔야만 했다. 

에덴에서의 어긋남, 바빌로니아에서의 어긋남, 사사시대의 수많은 어긋남, 그리고 예루살렘의 솔로몬의 어긋남을 쭉 봐오셨다. 

사람에게 소망을 두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실만 한데, 다시 개입하신다. 

그냥 버려두면 될 일을, 그냥 방치하면 될 일을, 그러면 자연스레 서로 죽이다 멸망할 일을, 굳이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이스라엘 나라를 둘로 나누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10개 지파의 통치권을 여로보암에게 넘기기로 결정하신다. 

 

 

2. 누구 말을 들을 것인가?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 

솔로몬은 건축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함 뒤에는 수많은 노동력을 제공했던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있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마자 처음으로 듣는 백성들의 요청은 그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여로보암의 입에서 이 질문이 던져지자 왕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사실 여로보암이 반역을 일으켜 이집트에 도망갔던 민족배반자임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그가 백성의 대표로 말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 때부터 르호보암은 눈치를 챘어야했다. 

백성들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말이다. 저 멀리 이집트에 있었던 여로보암을 불러내어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대표, 대변인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벌써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왕은 이 반란의 조짐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렇게 지혜롭지 못했다. 

 

일단 그는 자문을 구한다. 

솔로몬 시절부터 정치를 해왔던 장로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그들의 조언은 마치 예수님의 정신을 상기시킨다. 

 

7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 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백성의 종이 되어 섬기면, 백성들도 왕을 섬기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이러셨다. 

그는 섬기러 오셨다. 

우주 최고의 권한과 능력을 지니신 분, 그분이 인간을 섬기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세상 권력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온전한 인격으로 살아가도록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랬더니 온 인류가 그분을 주님으로 섬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섬김의 리더십이다. 

 

장로들은 이 진리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솔로몬 시대를 지나면서 그 공과를 잘 알았던 장로들은 솔로몬 말년의 모습을 거울 삼아 충고를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장로들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의견을 듣는다. 

르호보암의 친구들의 의견은 과격하다. 

추측컨대, 그들은 장로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자기들은 누릴 것 다 누리고, 이제 새롭게 정치를 해 나가야 하는 우리들은 자기들 뒤꽁무니만 쫓아 다니라고…’

훨씬 더 강력한 노역을 시킬 것을 주문했다. 

결국 르호보암은 장로들이 아니라 친구들의 말을 들었다. 

 

누구 말을 들을 것인가? 

현실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에 가까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생각을 닮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순히 성경 말씀을 반복하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상황과 환경에 맞게 적절한 말씀을 생각해 낸다. 

지혜롭게 적용하고 조언한다. 

그런 말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말. 

예수님의 정신이 담긴 말. 

그런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한다.

이것이 지도자라면, 리더라면 꼭 필요한 자질이다. 

분별력 그리고 순종. 

 

 

헨리 나우웬, 분별력, 2016, 포이에마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2735472 

 

분별은 인생의 중대한 시점에 단 한번 내리는 의사결정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오늘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자 평생토록 헌신하는 것. 그것이 분별이다. (p.11)

 

영성 생활은 귀가 멀어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삶에서 듣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참여하는 여러 활동, 시간을 잡아먹는 여러 가지 일, 우리를 둘러싼 많은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뜻을 알려줄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왕상 19:12)를 듣기 어렵게 한다.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과 우리들 가운데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여호와이니”하고 단순하게 자신을 계시하지도 않으시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 인생에 적극 개입하지도 않으신다. 우리 하나님은 돌보시고 치유하시고 인도하시고 가리키시고 요구하시고 맞서게 하시고 바로잡으시는 분이다. 분별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임재에 주목하고, 격려하시고 지시하시고 지도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p.38-39)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바를 이해하고,일상생활에서 감지하기 어려운 미묘한  표징을 읽어내며, 우리 인생에서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꿰뚫어보는 통찰을 '분별'이라 정의하고 이 분별을 훈련하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소명과 사명을 이룰 수 있다.


참 지혜의 근본되신 주님, 

저에게 일상의 여러 현상, 사건, 만남,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수많은 선택 앞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작은 음성에도 귀기울이고, 당신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도록 도와주소서. 

제 심장에도 귀를 만드셔서 심장으로 전해지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세요. 

오늘도 귀를 열고, 세워서 주님의 음성을 듣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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