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8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지휘자를 따라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다윗의 시]

 

1하나님,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내 기도 소리를 귀담아 들어 주십시오.

2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3주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는 견고한 망대이십니다.

4내가 영원토록 주님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겠습니다. (셀라)

5주님은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내 서원을 들어주시고,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유업을 내게 주셨습니다.

6 왕의 날을 더하여 주시고, 왕의 해를 더하여 주셔서, 오래오래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7주님 앞에서 우리 왕이 오래도록 왕위에 앉아 있게 하시고,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리로 우리 왕을 지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8그 때에 나는 주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노래하며, 내가 서원한 바를 날마다 이루겠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시이기도 하고 다윗을 위한 시이기도 하다. 

다윗 개인의 시이기도 하고 예배드리는 회중의 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시다. 

동시에 한 개인의 부르짖음도 들으시는 분이시다. 

고통받는 공동체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어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시고,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로부터 구해주시고. 페르시아에서 탈출시켜주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시켜주셨다. 

그러나 자칫 이런 큰 공동체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만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시인은 그 사실을 믿고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있다. 

다윗의 개인사에서 “부르짖음”은 큰 역할을 했다. 

사울에게 쫓길 때,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여서 죄로 인해 고통 받을 때,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부르짖는 사람이었다.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영성 중 하나가 부르짖음이다. 

상실과 외로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새 다른 것들이 그 부르짖음을 대체하였다. 

부르짖음 대신 숨어버린다. 감정을 무시한다. 예능으로 도배한다. 잠으로 도피한다. 

그분께 부르짖는 것을 천박한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순복음 전통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정말 고통스런 사람은 부르짖을 수 밖에 없다. 

악 소리 뒤에 찾아오는 간절한 “하나님”이라는 부르짖음이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하면 우리의 영은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상적이다. 

평온한 순간에 하나님이 떠오른다면 이는 참 멋진 신앙이겠으나,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이는 신앙의 기본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외부로 발산하는 물리적 소리의 여부가 핵심은 아니다. 

마음 속에서 크게 부르짖을 수 있다. 

있는 힘을 다해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심장의 소리다. 

가슴을 울리는 심장의 소리가 핵심이다. 

 

시인은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도 주님을 찾고 부르짖겠다고 고백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 문제를 풀겠다는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의 보호를 의지하고, 그분을 자신의 피난처요 은신처로 삼겠다는 의미이다. 

문제가 많고 스트레스가 많은 순간에 주님을 쉼터로 삼을 수 있는가? 

그분이 나의 진정한 쉼터로 여기고 있는가? 

오늘도 수많은 결정들 앞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겠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서 그 선한 영향력을 끝까지 미쳐야 한다. 

오늘 시편으로 노래 부르는 회중들은 다윗 왕이 선한 대리 통치자, 좋은 대리 통치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왕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선한 대리 통치자들을 귀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대행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죄에 빠지지 않도록,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제적인 시험에 들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며 살아가는 샤람들이 그 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기도와 응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주님,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부릅니다. 

나의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나님의 뜻을 잘 대행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세요. 

강인한 체력과 온유한 마음과 지혜로운 머리를 주셔서 상당히 복잡한 상황과 환경에서

주님의 뜻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11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다윗이 교훈을 하려고 지은 믹담, 지휘자를 따라 수산 에둣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울 때에 요압이 돌아와서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군 만 이천 명을 죽였다. 그 때에 다윗이 지은 시]

 

1하나님, 주님께서 우리를 내버리시고, 흩으시고, 우리에게 노하셨으나, 이제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2주님께서 땅을 흔드시고 갈라지게 하셨으니, 이제는 그 갈라지고 깨어진 틈을 메워 주시어서, 땅이 요동치 않게 해주십시오.

3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에게 곤란을 겪게 하시고, 포도주를 먹여 비틀거리게 하셨습니다.

4활을 쏘는 자들에게서 피하여 도망치도록, 깃발을 세워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시오. (셀라)

5주님의 오른손을 내미셔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6하나님께서 성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크게 기뻐하면서 뛰어놀겠다. 내가 세겜을 나누고,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겠다.

7길르앗도 나의 것이요, 므낫세도 나의 것이다. 에브라임은 내 머리에 쓰는 투구요, 유다는 나의 통치 지팡이이다.

8그러나 모압은 나의 세숫대야로 삼고, 에돔에는 나의 신을 벗어 던져 그것이 나의 소유임을 밝히겠다. 내가 블레셋을 격파하고, 승전가를 부르겠다."

9누가 나를 견고한 성으로 데리고 가며, 누가 나를 에돔까지 인도합니까?

10하나님, 우리를 정말로 내버리신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시렵니까?

11사람의 도움이 헛되니, 어서 우리를 도우셔서, 원수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12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가 우리의 원수들을 짓밟을 것이다.


표제에 나와 있는 상황과 시인의 노래의 내용이 잘 맞지 않는다. 

표제에는 분명 요압이 돌아와서 에돔 군 만 이천 명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우리를 정말로 내버리신 것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전쟁을 도와주시고 계신 것이 아닌가? 

다윗은 감사를 드려야지 지금 원망섞인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합당한가? 

뭔가 이상하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찬양의 순간에 처절한 간구의 기도가 드려지고 있다. 

1절도 그렇다. 

 

1하나님, 주님께서 우리를 내버리시고, 흩으시고, 우리에게 노하셨으나, 이제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언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단 말인가? 

언제 흩어셨단 말인가?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는 있겠다. 

전쟁 자체가 고통이다. 

이방인들과 계속되는 싸움과 전쟁은 왕으로서 참 곤욕스런 일이다. 

외교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신하와 백성이 있을 수 있다. 

전쟁을 매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 왕의 일이 아닌가? 

아무리 작은 전쟁이라도 결국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은 사실이다. 

전쟁이 일어난 것 자체가 하나님의 분노다. 

진정한 승리는 전쟁을 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자발적인 순종으로 이끄는 것이 최고의 승리다. 

그런면에서 하나님이 온 세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고부동해지면 더욱 좋겠다. 

그래야 이스라엘 주변국도 더이상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8그러나 모압은 나의 세숫대야로 삼고, 에돔에는 나의 신을 벗어 던져 그것이 나의 소유임을 밝히겠다. 내가 블레셋을 격파하고, 승전가를 부르겠다.

 

실제로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은 모압과 에돔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유다는 하나님의 통치지팡이이다. 

유다를 통해 하나님은 전 세계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로 하셨다. 

그러니 그 유다의 말을 따르는 것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것. 

그분의 다스림에 기쁨으로 따르는 것. 

그리스도인의 마땅히 해야 할 바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어서 그런 삶으로 들어오도록 인도하면 제일 좋은 일이다. 

 

한 주의 시작이다. 

그분의 다스림에 순복하고 싶다. 

그분의 이끄심에 기쁨으로 따르고 싶다. 


 

주님, 

한 주를 시작하는 시작이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주님께 저의 부담을 내려놓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세요.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진행되도록 주님께서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04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지휘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다윗의 믹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어서 그의 집을 감시하고 있을 때에 다윗이 지은 시]

 

1나의 하나님, 내 원수들에게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십시오.

2악을 지어내는 자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시고, 피 흘리기 좋아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3그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매복해 있습니다. 강한 자들이 나를 치려고 모여듭니다. 그러나 주님, 나에게 허물이 있는 것도 아니요, 나에게 큰 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4나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싸울 준비를 합니다. 깨어나 살피시고, 나를 도와주십시오.

5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깨어나셔서 모든 나라를 차별 없이 심판하시고, 사악한 꾀를 꾸미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셀라)

6그들은 저녁만 되면 돌아와서, 개처럼 짖어 대면서, 성 안을 이리저리 쏘다닙니다.

7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입술에는 칼을 물고서 "흥, 누가 들으랴!" 하고 말합니다.

8그러나 주님,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비웃으시며, 뭇 민족을 조롱하실 것입니다.

9나의 힘이신 주님, 주님은, 내가 피할 요새이시니, 내가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10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영접하려고 오실 것이니, 하나님께서 내 원수가 망하는 꼴을 나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11내 백성이 그들을 잊을까 두려우니, 그들을 아주 말살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우리의 방패이신 주님, 주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흔드시고, 그들을 낮추어 주십시오.

12죄가 그들의 입에 있고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죄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의 오만이 그들을 사로잡는 덫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들이 저주와 거짓말만 늘어놓고 있으니,

13주님의 진노로 그들을 멸하여 주십시오. 하나도 남김없이 멸하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스리고 계심을 땅 끝까지 알려 주십시오. (셀라)

14그들은 저녁만 되면 돌아와서, 개처럼 짖어 대면서, 성 안을 이리저리 쏘다닙니다.

15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배를 채우지 못하면, 밤새도록 으르렁거립니다.

16그러나 나는 나의 힘 되신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내가 재난을 당할 때에,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에, 아침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노래하렵니다.

17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할 요새,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분."

 

 


1. 깨어나소서

 

하나님께 깨어나달라는 요청은 정당한가? 

하나님께서 주무시는 분도 아니고, 밤낮에 의해 일하고 쉬고를 반복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표현은 시적 허용에 가깝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마치 하나님께서 주무시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기에 주무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은 육체에 한계에 매이지 않으신다. 

그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사람들의 행동과 마음을 살피신다. 

 

하나님의 뜻, 즉 회복된 세상으로의 추동을 이뤄내기 위해 수많은 그분의 백성들의 삶을 살피신다. 

오늘 다윗의 삶도 그분의 눈 안에 있다. 

다윗은 그분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무엇보다 모든 나라를 차별 없이 심판하실 것을 요청드린다. 

그렇게 사악하고 교만하여 악을 뿌리고 다니는 포악한 자들을 처리해 달라고 요청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 세계에 하나님의 인애와 그분의 공의를 선포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명을 가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많은 나라들은 그들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선택하고 남을 공격하고 살해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다윗은 공정한 심판을 요청한다. 

사악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기를 바란다. 

 

그의 개인적인 기도는 전체 공동체가 공동으로 받아 함께 기도의 형태로 주님께 드린다. 

깨어나달라는 개인의 기도는 이제 공동체의 외침이 된다. 

노예의 삶, 불의한 대우, 죽음의 공포 속에서 외쳤던 이집트 속의 이스라엘을 떠올려 본다. 

그 때는 정말 백성 모두가 외치고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여야 했다. 

노동은 끝이 없었다. 

그 때에 비하면 다윗의 시대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그럼에도 다윗의 시를 가지고 노래하며 기도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함께 외치게 된다. 

사악한 자들을 심판해달라고, 공정하게 심판해 달라고 말이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외치는 부르짖음도 의미가 있으나, 

윤리의 위기, 공의의 위기 앞에서도 누군가는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일어나길 바라는 부르짖음 말이다. 

 

하나님, 깨어나소서. 

 

2. 아주 말살하지는 마소서. 

 

11내 백성이 그들을 잊을까 두려우니, 그들을 아주 말살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우리의 방패이신 주님, 주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흔드시고, 그들을 낮추어 주십시오.

 

이 구절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다윗은 사악한 자들이 아주 말살되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다. 

이유는 백성들이 그들을 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뭔가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악인이 심판받기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멸절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사람에 대한 인류 보편적 사랑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유를 잘 살펴보면, 단순히 악인의 생명을 빼앗기 싫어서라기보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이다. 

악인은 기억되어야 하는가? 

 

13주님의 진노로 그들을 멸하여 주십시오. 하나도 남김없이 멸하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스리고 계심을 땅 끝까지 알려 주십시오. 

 

그렇다면 13절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여기서는 하나도 남김없이 멸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다윗은 정신분열을 일으키고 있는가? 

같은 시에서 상충되는 요청을 하고 있다. 

 

내 머리도 혼미해지는 느낌이다. 

묵상의 길을 잃는다. 

시인이 생각하는 원수는 사울인가? 아님 악한 행동을 하는 일반적인 악인인가? 

이 혼란한 기도에 그저 남기를 선택하려고 한다. 

명확한 상황과 답을 알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좋겠지만, 

이렇게 한 시에 모순되는 요청이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못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원래 사람의 감정은 오락가락하지 않는가? 

다윗의 마음이 요동치고 있다. 

기본적으로 원수들에 대한 분노가 있지만, 그들에 대한 연민도 있다. 

그들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전력적인 계획도 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종잡을 수 없다. 

노래는 사람의 감정의 표현이다. 

 

3. 사랑받는 자

 

16그러나 나는 나의 힘 되신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내가 재난을 당할 때에,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에, 아침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노래하렵니다.
17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할 요새,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분."

 

비록 원수들이 다윗을 압박해도 다윗의 자아상은 확고하다. 

그의 피난처, 요새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다. 

아침마다 찬양이 흘러 나온다. 

밤새 지켜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침부터 느낀다. 

그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 

그의 이런 막강한 자아상을 본받고 싶다. 

이건 다윗과 예수님이 가진 자아상이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자아상을 갖고 있어야 우리를 승리할 수 있다. 

수많은 원수들의 부정적인 피드백과 댓글들 속에서도 마음과 영혼이 상처입지 않으려면,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끝까지 믿고 신뢰하는 수 밖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신다. 

그분의 은헤를 오늘도 찬양한다. 

 

 


주님, 

저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좋은 선물을 주신 것도 감사한데, 

예수님의 희생이라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을 주신 것도 감사한데, 

여전히 저를 사랑하신다니 감격입니다. 

그 사랑을 오늘도 경험하며 살길 원합니다. 

막강한 자아상을 갖고 살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09월 27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지휘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다윗의 믹담]

 

1너희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말 정의를 말하느냐? 너희가 공정하게 사람을 재판하느냐?

2그렇지 않구나. 너희가 마음으로는 불의를 꾸미고, 손으로는 이 땅에서 폭력을 일삼고 있구나.

3악한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곁길로 나아갔으며, 거짓말을 하는 자는 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빗나갔구나.

4그들은 독사처럼 독기가 서려, 귀를 틀어막은 귀머거리 살무사처럼,

5마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않는구나.

6하나님, 그들의 이빨을 그 입 안에서 부러뜨려 주십시오. 주님, 젊은 사자들의 송곳니를 부수어 주십시오.

7그들을 급류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겨누는 화살이 꺾인 화살이 되게 해주십시오.

8움직일 때 녹아내리는 달팽이같이 되게 해주십시오. 달을 채우지 못한 미숙아가 죽어서 나와 햇빛을 못 보는 것같이 되게 해주십시오.

9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것과 불붙은 것이, 강한 바람에 휩쓸려 가게 해주십시오.

10의로운 사람이 악인이 당하는 보복을 목격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악인의 피로 그 발을 씻게 해주십시오.

11그래서 사람들이 "과연, 의인이 열매를 맺는구나! 과연, 이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 말하게 해주십시오.

 

 


 

지도자건 백성이건 정의, 공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다윗은 여러모로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한 왕국의 왕이다. 

그가 가진 권한과 파워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일반 백성들이 보기에 다윗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며, 그의 말 한 마디에 전쟁이 발발하기도 종식되기도 한다. 

그런 다윗이 보기에도 여전히 세상엔 정의가 흐트러져 있고, 공정이 무너져 있다. 

다윗은 어찌보면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정의와 공정을 말로 추구할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정책으로 혹은 재판으로 구현해 내야 하는 사람이다. 

지도자의 삶, 권력자의 삶이 그래야 한다. 

그런데 본문의 다윗은 마치 자신이 정의과 공정을 요청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의아하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실제 구현해야 할 입장에서, 정의와 공정이 더욱 눈에 들어왔을 수도 있겠다. 

자신의 말과 정책과 재판에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려면, 그에 대한 감각이 예리해져야 한다. 

섬세해져야 한다. 좋은 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혜이며 분별력이다. 

 

불의한 자들, 독기가 가득한 자들, 거짓을 꾸미는 자들… 

이런 사람들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의 의도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무고한 백성이 피해를 받지 않는다. 

공의와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불의한 자들에 대한 분별력이 더욱 높아져야 한다. 

이기적인 사람들, 자신을 위해 이웃을 위해하는 사람들, 폭력과 살인에 관대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빨리 분별하고 자신과 이웃을 보살피고, 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니 다윗의 노래에 이토록 정의와 공의에 대한 추구가 많은 것이다. 

 

31세의 누구는 6년간의 근무후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다고 한다. 

산재 위로금과 상여금이 포함된 금액이라고 한다. 

과연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공의로운 처사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리적 폭력보다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재정을 통한 불의이다. 

정의로운 노동과 공정한 배분이 쉽게 구현되지 않는다. 

돈이 돈을 낳지, 노동으로 돈을 벌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투기로 순진한 사람들의 평생 모은 재산을 앗아간다. 

지도자가 될 수록 더욱 더 정의과 공정에 예민해져야 한다. 

그러나 어느 사회건 지도자들이 그렇게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자신과 이웃을 속이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니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공의와 공정에 예민해져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예민해 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도 어느 순간 스스로를 속이면서 정의과 공정으로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의 시는 단순히 다윗 개인의 노래로 끝나지 않았다. 

시편의 시들은 대중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로 발전한 것이다. 

사사로운 개인의 습작시가 아니다. 

공동의 열망이 노래로 울림을 만든다. 

모두가 다 함께 정의과 공정을 부르짖는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한다. 우리 모두 정의로게 살자고, 의인으로 살자고 말이다. 

이 노래는 공동체의 윤리의식을 강화한다. 

 

그리고 그 정의과 공정의 절대 기준이며 절대적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공동의 결단만으로 될 것 같았으면 이미 거룩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야 불의한 자들의 민낯이 드러날 것이다. 그들의 사악한 행위가 천하에 밝혀질 것이다. 

거짓과 폭력과 불의와 기만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상대하기란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다. 

공동체 전체가 함께 소리치며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세요. 

하나님의 기준, 그 공의로운 기준으로 판단해 주세요. 

주님, 악인이 벌을 받게 하시고 의인의 얼굴에 웃음을 허락하소서. 

이렇게 말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 더 많이 일어나게 해 주세요. 

정의와 공정에 대해 예민하게 깨어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정의로운 하나님을 부르고 정의로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주세요. 

우리에겐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 공동의 기도, 공동의 찬양을 들어 주세요. 

특히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불의한 특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게 해주세요. 

남북에 평화로운 왕래가 일어나게 하시고, 평화체제가 구축되게 하소서. 

모든 국민들의 열망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북한의 주님들에게도 더 깊숙히 전달되도록 도와주세요.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모든 회의와 일정을 주께서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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