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03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17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주신 분수 그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내가 모든 교회에서 명하는 지시입니다.

18 할례를 받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굳이 그 할례 받은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례를 받지 아니한 처지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굳이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19 할례를 받은 것이나 안 받은 것이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십시오.

21 노예일 때에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그런 것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이용하십시오.

22 주님 안에서 노예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23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24 형제자매 여러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 때의 처지에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주석

21절: 황실 집안의 노예들을 제외하고, 보통 집안의 노예들은 7년이 지난 다음에는 풀려날 자격이 있었다. 그리스도인 노예들은 자신의 신분 때문에 고민하지 말아야 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 노예가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도 부름 받은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IVP 성경주석).


교회의 갈등과 분열이 가속화되는 원인 중 하나는 신분 변화에 대한 열망이었던 것 같다. 

외형의 변화, 신분의 변화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결과로 비춰질 수 있었다. 

노예는 자유민으로 자유민은 노예를 거느리는 주인으로 신분 상승이 된다면 그것 자체로 복된 삶이라 여길 만 했다. 

할례도 비슷했다. 무할례자가 할례를 받게 되면 유대인 그룹에서는 상당히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일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주장하던 내용이기도 했다. 

이런 인간의 기본적 욕망 때문에 긴장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바울이 생각하는 교회의 하나됨에 해를 끼치게 되었다. 

개개인의 신분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바울은 강조했다. 

교회의 하나됨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 

이를 위해 과도한 신분 상승 욕구를 잠재우고, 인정 욕구를 잦아들게 하는 것이 좋았다 .

 

바울은 강조한다. 

19 할례를 받은 것이나 안 받은 것이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보기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교회의 분열은 내팽겨쳐놓고 다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죄악을 방치하고서 교회를 통한 신분 상승을 꿈꿔서는 안된다. 

교회는 개개인의 영적 열망, 관계적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공간이 맞다. 

하지만, 모든 개인의 열망을 만족시켜주는 공간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과도한 열망과 이기심과 죄된 본성이 폭로되고 다스려지고 성화되어지는 공간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래서 중요하다.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 

몸이 처지고 마음에 힘이 많지는 않다. 

그럼에도 다시 주님께 나아간다.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마음의 힘과 몸의 에너지를 넣어주시길 기도한다. 

그래야 주님의 명령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의지만으로는 따를 수 없다. 힘과 에너지가 함께 따라야 한다.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2021년 11월 26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14 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같이 훈계하려는 것입니다.

15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16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17 이 일 때문에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얻은 나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

18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교만해진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19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20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21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채찍을 들고 여러분에게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MESSAGE

“여러분 가운데 자만해서, 내 말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내가 직접 찾아가 얼굴을 마주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여러분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허세가 가득하다는 것을 확인해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능력 입은 삶이기 때문입니다.”(18-20절)

 

고린도 교회 가운데에는 바울이 어차피 자신들을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그의 훈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18, 19절). 이들은 여전히 회개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세속적 교사의 모습과 같이 권위를 세워 엄히 다가가도록 할지, 아니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온유하게 다가가도록 할지 선택하라고 말합니다(21절).

 

허영과 교만은 영적 아버지의 훈계를 거부하게 만들고 서로 간에 험담과 비난의 소리만을 키웁니다. 성도의 건강한 교제는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향해 권면과 훈계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피상적이고 분열된 친교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의 말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바울은 교회내 파당을 없애고 오직 뿌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두자고 했다. 

그런데 4장 마지막에 이르자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하며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고 있다. 

 

15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편안한 말은 아니다. 

영적 아버지라는 태도조차도 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자기가 영적 아비라는 말을 쓰는 것을 막아야 할 듯 싶다. 

만약에 베드로나 아볼로도 자신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한다면, 그 또한 분열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오직 우리의 영적 아버지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시다. 

이것만 계속 강조해도 될 일이다. 

굳이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말하면서 훈계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같은 성도로서, 교회의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훈계하면 될 일이다. 

그정도도 충분히 권위가 있으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바울은 일반적인 상황을 넘어서서 반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듯 싶다. 

 

18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교만해진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19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20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 중 몇몇은 마음과 생각이 교만해졌다.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개척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보인다. 

바울이 사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하다. 

게다가 바울은 말 뿐만 아니라 여러 능력과 기적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음을 놓치고 있는 듯 싶다. 

바울을 공격한다. 다른 사도나 스승의 이름으로 바울을 깎아 내리고 있다.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서 대면하여 일종의 대결을 하겠다고 편지에 쓰고 있다. 

영적 대결이다. 지식과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가 누구에게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말이 아니라, 사역과 성품의 열매로 드러난다. 

엘리야 때는 능력 대결로 등장했다. 

예수님 때는 소명 대결로 등장했다. 

바울의 때는 열매 대결로 등장하는 것 같다. 

말씀이 얼마나 열매를 맺고 있는가, 교회와 사람들의 변화를 얼마나 일으키고 있는가. 

전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는 바울의 선교와 교회 개척에 대해 바울의 반대자들은 대답할 말과 보여줄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대단히 큰 결심을 했다. 

여차하면 큰 분노를 가지고 고린도에 방문할 계획이다. 

교회의 분열이 가라앉고 교만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바울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채찍을 들고 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리해보면, 바울이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내세우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교만한 반대자들, 특히 말은 많지만 능력과 열매는 없는 자들을 다시 되돌리려는 데에 있다. 

그들을 채찍질해서라도 원상복귀시키고 싶어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아버지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분열은 더욱 심해지고, 바울의 반대자들을 결국 놓칠 것 같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엄중하게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를 가져와서 대처하려는 것이다. 

다행히 이 편지에 반응해서 상황이 호전되었고, 몇몇은 회개하였던 걸로 보인다. 

바울의 아버지로서의 호통이 영향을 준 것이다. 

반대자들에게는 무섭게 다가갔고, 옹호자들에게는 교회 일치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두 그룹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모종의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고린도후서(2:1-11)에 등장한다. 

교회내 치리(처벌)과 회개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바울은 자신이 영적 아버지임을 밝힌다. 

그런면에서 오늘 바울을 이해할 수는 있겠다.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영적 아버지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동체에는 조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현실이다. 

방치하는 것은 또 하나의 죄악일 것이다. 

사랑으로 끝까지 품으려고 해야 하지만, 분열과 싸움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에 대한 분별과 적절한 조치는 필수적이다. 

죄로 인해 공동체는 무너질 수 있다. 죄 자체도 무섭지만, 죄를 다루고 조치를 취하는 공동체에 모습에서 성패가 갈린다. 

권위에 대한 근원적인 반감이 많은 세대. 

이들과 함께 공동체를 세워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바울의 말이 남는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결국 성령님의 능력이 더욱 강하게 역사하는 것. 

그렇지 않고서는 젊은 세대가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가득한 기독 공동체가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길 소망한다. 


하나님, 

바울의 말이 이해가 되면서도, 영적 아버지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 뿐이십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인식하기보다 공동체를 돌보는 청지기요 관리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에는 죄의 문제가 있고, 죄를 다루어야 합니다. 

정당하고 공정한 조치들이 있어야 합니다. 

한 두 사람에 의해 판결되는 일이 아닌 공정한 공동체적 분별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과 조치에 순종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주님, 공정함과 순종이 가득한 공동체를 만들게 해주세요. 

성령님께서 그 두 가지가 함께 가득한 공동체가 되도록 도와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1월 25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니,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입니다.

 

6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나와 아볼로에게 적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격언의 뜻을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배워서, 어느 한 편을 편들어 다른 편을 얕보면서 뽐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7 누가 그대를 별다르게 보아줍니까?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받아서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노릇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11 우리는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12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13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전반부는 계속 같은 주제의 연속이다. 

교회 파벌의 원인을 지적하고 해결을 위한 방책을 제시한다. 

교회는 어떤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그 기초는 그리스도다. 

분열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서로 편을 나눠 자기 편에 대해서는 무한한 칭찬과 격려를 다른 편에 대해서는 날까로운 비판과 비난을 쏟아낸다.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싸움이 겉으로 보일진대 속에서는, 안보이는 곳에서는 얼마나 심할까!

바울로서는 답답할 노릇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찢어진 그분의 몸이다. 

하나님 사랑은 결국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그렇게 외쳤건만, 돌아오는 것은 이웃 사랑은 커녕 같은 식구, 형제 자매도 사랑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회의가 들 수도 있겠다. 

과연 성령님의 역사는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을 수도 있겠다.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바울, 아볼로, 게바와 같은 사도들도 덩달아 구경거리가 되었다.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이름 뒤에 숨어서 싸운다. 

사도들 사이에도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때로 갈등이 불거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봉합되고 서로 이해하면서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 사이의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사도들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서로 라인을 형성하고 서로를 공격한다. 

그러다보니 사도들의 이름만 부끄럽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이름도 부끄럽게 된다. 

 

교회를 섬기면서 리더십의 역할을 감당하느라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다. 

외부적 어려움과 고통은 참을만 했다. 심각한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은 내부의 분열이며 자기 분열적 내부 총질이다. 

사도 바울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원인은 교회 내부의 비난과 저주다. 

책잡히지 않기 위해 손으로 일하면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사역해 왔다.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해진 거처 없이 여기저기 다니며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해산을 고통을 겪으면서 나았던 공동체와 성도들이 서로 분열되어 사도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사형수, 쓰레기, 만물의 찌꺼기 등으로 느껴지곤 한다. 

슬픈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빛나고 영광스런 자신을 느꼈던 순간이 왜 없었을까! 

그러나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순간엔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이고 초라해 보인다. 

최소한 성도들이라도 자신의 상황을 인정해주고, 축복해주고, 격려해주길 바랬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비판이 쏟아지고 비난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사도는 인내한다. 

쉽게 분노하거나 욕하지 않는다. 

비방과 비난에 대해 축복의 말로, 좋은 말로 대답하고자 노력한다. 

외부에 대해서도 그랬다면, 내부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통을 주는 말들이 많이 떠돌아다닌다. 

깍아내리는 말들이 많다. 

뒷담화와 험담은 사람들의 안주거리요 소일거리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섬겼던 사람들도 비난 듣기 일쑤다. 

현실이 그렇다. 

 

이상적인 바램일 수 있겠지만,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신뢰하는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파벌과 라인과 편당이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뿌리내린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어떻게 민들어 갈 수 있을까? 

세대차이, 지역차이, 성별차이에 의해 발생한 그룹핑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갈 수 있을까? 

계속되는 질문이며 과제다. 

무턱대고 신뢰하라고 요청한다고 서로 신뢰가 되겠는가!

강력한 뭔가가 우리 내면과 공동체에 흐르지 않는 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다. 

어쩔 수 없이 주님께 부탁할 수 밖에 없다. 


사랑으로 연합해 계신 하나님, 

아무리 노력해도 이상적 공동체를 만들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세요. 

강력한 역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시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게 하시고, 이해하고 격려하면서 기독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드러내게 도와주세요. 

각자의 유익과 자기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해주세요.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합니다. 

좋은 교회되게 해주세요. 

사랑의 말이 더욱 번지게 해주세요. 

성령님께서 더욱 강하게 역사하셔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온전히 고백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일하심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년 11월 24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1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2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3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MESSAGE

“여러분은 우리 지도자들을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지, 그분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장엄한 비밀들로 여러분을 인도하는 안내인이지, 그 비밀들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경비원이 아닙니다. 좋은 안내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믿음직스러움과 정확한 지식입니다.”(1-2절)


바울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거부한다. 

교회의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의 역할은 공동체를 잘 돌보고 관리하는 일이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역할을 대체해서는 안된다. 

그저 신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복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공동체가 그 복음을 잘 간직하도록 돕는 일. 그 일이면 족하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를 만들지 말라. 

그렇게 판단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심판하지 마라. 

분파를 만든다는 말은 자신의 분파의 수장을 높이고, 상대방 수장을 비판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식의 심판/판단은 인간들의 성향과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5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분파를 나눠 교회를 분열시키면서, 서로서로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심판하는 일을 그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뿌리를 오직 예수님에게만 두되, 라인을 형성하고 서로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일을 그쳐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신앙 형성에 도움을 준 사람을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앙인들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상의 급진성, 생각의 급진성은 언제나 반갑고 신선하다. 

생각할 재료를 공급해주고, 생각의 바운더리를 확장시켜준다. 

그러나 비판과 비난의 급진성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싶다. 

아쉽고 서운할 수 있다. 불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치판에서 그렇게 하듯 비난과 욕설과 비아냥으로 공격하는 것이 쉽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복음을 위해 함께 달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욱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 칭찬하거나 긍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는 순간 순간이 있다. 

급진적인 비판과 비난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비난의 시대를 살고 있다. 

나를 찾으려면 내가 아닌 것을 판단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만 부주의해도 분별이 비난으로 흐른다. 

내가 아닌 것을 부정하다 보면 타자는 부정의 대상이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어야 하는데, 이건 인간 본성에 반한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자기 공동체 밖에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자기 외에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1인 미디어가 이런 흐름을 더욱 강화한다. 

비난하면서 자신을 찾는다. 

과연 이런 방식의 “자기 찾기”가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너무 다양하며, 기독교 신앙의 표현도 어쩔 수 없이 다양하다. 

비난과 심판에 앞서 겸손히 말씀 앞에 십자가 앞에 서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심판이라는 단어의 쓰임을 더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이 심판이라는 단어를 어떤 늬앙스로 썼는지 전후 문맥과 당시의 이 헬라어의 쓰임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문맥만 놓고 보면, 바울은 자신을 심판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일부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행동을 멈춰달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것이 맞는지 아닌지 좀더 본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도 기록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알고 싶다.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하나님, 

사랑으로 연합해계시는 삼위 하나님, 

주님의 사랑이 공동체에 흐르게 해 주세요. 

비판과 비난보다 사랑의 말과 격려의 말이 앞서게 해주세요. 

물론 분별하고 분석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향한 여정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판에서 사용되는 정치적 공격, 비난, 비판, 욕설, 비아냥 등은 점점 사라지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시간이 확보되게 해주세요. 

좀더 깊이 있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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