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3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니, 주님의 규례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

 

10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와 같이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 위에다가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각각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12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13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14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15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

16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20 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 것이나, 장래 것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MESSAGE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훌륭한 건축가의 재능을 사용해 설계도를 작성했고, 아볼로는 벽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일을 맡은 목수가 그 기초 위에다 각자 신중하게 집을 짓게 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이미 놓인 기초는 하나뿐입니다. 그 기초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0-11절)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분열의 공동체를 향해 아름다운 진술들이 쏟아진다. 

성도 한 개인 개인이 그리고 그 개인들이 모인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의미의 내용은 그 전에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확한 말과 진술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의 분열과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진리에 대한 아름다운 진술이 등장하는 것이다. 

말과 글이 사람과 공동체를 치유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이 진술은 참으로 위대하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 공동체에 거한다. 

특정 장소나 시간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회막이나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과 그들의 모임 속에 성령님이 거하신다. 

그렇게 거룩한 사람들이 탄생한다. 

 

불로 검증된 각 사람의 업적은 단순히 자신들의 은사의 발현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업적은 예수님을 기초로 하여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야 불의 검증에서 살아남는다. 

바울은 일반적인 예술가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즉 바울, 베드로, 아볼로에 의해 세워진 공동체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기초로 그 위에 성령님의 역사로 세워진 공동체여야만, 그리고 그런 공동체가 세운 업적이어야만 불의 검증에서 환하게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지혜, 베드로의 지혜, 아볼로의 지혜로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력한 인물의 말들과 관점과 지혜를 가지고 그 인물의 분파를 만들고 그 분파의 지혜를 자신의 지혜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상의 지혜로 사는 사람이다. 

세상의 정치가 그러하다.

똑똑하고 유력한 사람들의 뒤를 따른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마치 참 지혜인 양 추종한다. 

그렇게 정치 세력화하고 분파를 확립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람들의 표를 얻기 위해 설득하고, 정적을 없애기 위해 각종 술수와 술책을 쓴다. 

실제 패싸움 혹은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로마나 예루살렘이나 이런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런 걸 지혜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돈을 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지혜는 불의 검증을 견딜 수 없다고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어,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참 지혜의 산물이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 것이나, 장래 것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바울, 아볼로, 게바, 세상, 삶, 죽음, 현재, 장래… 이 모든 것은 성전인 성도들의 공동체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공동체(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자랑할 일이 없다. 

분파를 만들 일이 없다. 

그저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성령님의 역사에 순복할 뿐이다. 

끝까지 이런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를 돌아보면, 이런 생각 때문에 소위 유명하다는 저자, 목사의 이름을 인용하는 것을 주저했던 경험이 있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자꾸 인용함으로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자신을 누구의 영향 받은 사람으로 포장하는 경향도 있다. 

이걸 피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아예 그렇게 추종하는 학자나 목사를 두지 않는 것이다. 그저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많은 학자, 저자, 목사, 예술가의 이름을 두루두루 거명하면서 한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기원을 두는 방법이다. 한 두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수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사용함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예전에는 첫 번째 방법을 썼다면, 지금은 두 번째 방법을 쓰고 있다. 

유명하지 않아도 된다. 학자가 아니어도 된다. 그리스도께 기초를 두고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말과 글이 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야 분파가 생기지 않는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께 기초를 둔다. 

 

—-

나의 기초되신 예수님, 

당신을 다시 떠올립니다. 

당신께 기초를 둡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에 다시 마음을 엽니다. 

마음에 힘을 공급하시어 당신의 길을 찾게 하소서. 

 

주님, 생각의 집중력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다시 집중력을 주시고 좋은 아이디어도 주시고 지혜도 주세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1월 18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니,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입니다.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20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21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22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26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 본문도 그렇지만, 교회 분열에 대한 바울의 해법은 분명하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수많은 지혜가 있고, 아름다운 말들이 있으며, 매혹적인 디자인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일을 찾는다. 

그런 추구의 결과는 피할 수 없는 분열이다. 

서로 공통점이 없는 가운데 자신들의 열망을 분출하면 서로 분열될 수 밖에 없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다. 

십자가 중심성을 잃어버리고, 닻을 그곳에 내리지 않고,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에 집중했다. 

누가 더 설교를 잘 하는지, 누가 더 성경을 잘 풀어내는지, 누가 더 탁월한지, 누가 더 리더십이 있는지를 서로 비교하며 순위를 매긴다. 

그리고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의 장점과 강점을 강조한다.  

십자가라는 자기 부인의 용광로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깊이 느낄 때 흐르는 뜨거운 용암과도 같은 눈물의 세례를 거부하거나 잊어버렸다. 

그러니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로는 이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멋진 수사로 꾸며진 연설이 아니라 투박하고 괴팍한 듯 보이지만 하나님의 십자가에서의 처형이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지혜가 진정한 지혜이며 강력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지금 분열, 분쟁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 대부분이 세상의 지혜하고도 원래 멀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사람을 자랑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능력을 자랑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성취한 성과를 자랑할 일이 아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이 여전히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주목해야 한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이 말하는 바, 바울은 끝까지 주님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싶어한다. 

물론 다른 서신에서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한 것(빌립보서 3:17)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빌립보서에서도 바울은 바울 자신의 능력이나 탁월함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빌립보서의 핵심 주제인 "자기 부인"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려는 자신을 본 받으라는 것이다. 

즉 겸손하게 주님을 따라 살려는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도 비판/비난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끝까지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 내세우면 될 일이다’라고 말한다면 일면 동의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도한 완벽주의자의 비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이며 그분의 십자가이다. 

이걸 잊고 다른 몇가지 특징과 장점을 내세우려고 한다면 본질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순간적인 유행을 따를 수는 있다. 

사람들을 끌수 있는 계기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공동체가 가진 장점과 능력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 성령. 이런 요소가 본질로 다가가야 한다. 

그게 복음이다. 

 

복음이 더 잘 전달되기 위한 노력이야 끊어지지 말아야 하겠다. 

동시에 그 복음의 본질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잘 지켜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감당하는 것이 현장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의 몫이다. 

 

묵상하다보니 오늘도 조금 마음이 무거워진다. 

너무 어려운 일들을 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간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본질, 십자가의 본질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의 표현의 양식과 스타일과 플랫폼은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선도해야겠지만, 

복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복음을 중고생과 대학생에게 전하기 위해 그 외형에 변형을 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도록 도와주세요.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왜냐하면 그 두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질과 형식의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요? 

성령님 지혜를 주세요. 

성령님께서 역사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1월 17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10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

1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4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일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5 그러므로,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16 내가 스데바나 가족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마는, 그 밖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석

11절: 여기에 나오는 정보 제공자들은 고린도 아니면 에베소의 부유한 여인이었던 글로에에게 속한 대리자로서 두 도시 사이를 오가며 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비교적 신분이 높은 노예이거나 자유민으로서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이었던 그들은 바울에게 소식을 전했다. 소식이나 서신은 다른 사업을 위해 여행하는 사람들을 통해 가장 빈번하게 전달되었다(IVP 배경주석).


어느 곳에나 분쟁이 있다. 

싸움이 있고, 분열이 있고,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 

고린도교회에도 분쟁이 있었다. 

분쟁의 발단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몇 가지 유추해 볼 요소가 있다. 

먼저, 그들은 아볼로 편, 게바 편, 그리스도 편이라는 단어를 써가면 편가름, 줄서기를 하고 있다. 

둘째, 이는 세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바울은 자신이 매우 적은 소수에게 세례를 베푼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있다(14절)

이 두 가지 근거를 놓고 볼 때, 문제의 발단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문제의 전개 양상은 결국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에게 줄서기를 하고 편을 가르는 행위를 통해 교회 전체가 분열의 양상을 띄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자신을 그리스도 편이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그래도 중심을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중립을 지키면서 당시의 어떤 인물에게 줄을 서지 않고 예수님을 붙잡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평화의 중재자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들도 다른 분파처럼 자신들의 사람들을 모으고 의견을 주장하되 다른 사람들을 비판함으로 분쟁을 가중시켰던 점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로 편이 갈려 서로 의견이 충돌한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세례를 주러 고린도에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다고 한 발 물러선다. 

사실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명령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이 이 시점에서 자신은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본다. 

첫째, 바울은 현재의 분열과 분쟁이 세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세례를 받아 자신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둘째, 바울은 세례를 주는 것보다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그 복음의 핵심에는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셋째, 분열을 막고 새롭게 화합하기 위해서는 세례를 누가 주었는지 따지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보았다. 

 

확실히 이번 편지는 분열과 분쟁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많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이 유지되도록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사역자들의 책임이다. 

분열은 결국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분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분열은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이를 이어주신 예수님의 자기 희생적 중보를 무색하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헐게 한다. 

그리고 그 담을 허무는 일을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우리는 계속해서 담을 쌓는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과 다른 도덕과 윤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그래야 작은 운동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교회는 연합이 아니라 섹터와 된다. 

 

불의와 손잡을 수는 없다. 

거대 악을 묵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를 빼고, 나와 소수의 사람들을 빼고, 주변에 있는 모두가 거대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하다. 

그 순간, 사랑와 화해와 연합은 사라진다.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가?

오늘도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한다. 


예수님, 

주변에 분열과 고통이 참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마다 교회마다 분열이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볼 때마다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 명의 의견과 생각에 모두가 따라야 하는 전체주의나 독재 사회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서로 깊이 용납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계속되길 바랄 뿐입니다. 

주님, 우리 공동체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아픔과 슬픔이 가라앉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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