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5 11 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1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도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2 때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는 군지휘관이 사람 있었는데,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었다. 그들은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로서, 베냐민 사람이다. (브에롯 사람도 베냐민 족속으로 여김을 받았는데,

3 일찍이 브에롯 주민이 깃다임으로 도망가서, 오늘날까지 거기에 머물러 살고 있기 때문이다.)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는 다리를 저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이 이스르엘에 전해졌을 때에, 그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유모가 그를 업고 도망할 때에, 서둘러 도망하다가, 그가 떨어져서 발을 절게 되었다. 그의 이름이 므비보셋이다.

 

5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있는 왕궁으로 갔다. 그들은 한창 더운 대낮에 곳에 도착하였는데, 때마침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6 그들은 밀을 가지러 사람처럼 꾸미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찔러서 죽였다. 그런 다음에 레갑과 그의 동생 바아나는 도망하였는데,

7 그들이 대궐로 들어갔을 때에, 왕은 침실에서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잘라 수가 있었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가지고 나와, 밤새도록 아라바 길을 걸어서,

8 헤브론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로 들고 가서 말하였다. "임금님의 생명을 노리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를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 주님께서 높으신 임금님을 도우시려고, 오늘에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벌을 내려서 원수를 갚아 주셨습니다."

 

9 그러나 다윗은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동생 바아나에게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온갖 죽을 고비에서 나의 생명을 건져 주신 확실히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10 전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에게 전하여 주고, 자기는 좋은 소식을 전한 것으로 여긴 자가 있었다. 나는 그를 붙잡아서, 시글락에서 죽였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보상이었다.

11 하물며, 흉악한 자들이, 자기 침상에서 잠자는 어진 사람을 죽였으니, 내가 어찌 너희의 살인죄를 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희를 땅에서 없애 버리겠다."

12 다윗이 젊은이들에게 명령하니, 젊은이들이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손과 발을 모조리 잘라 다음에, 그들의 주검을 헤브론의 연못가에 달아 매었다. 그러나 이스보셋의 머리는 가져다가, 헤브론에 있는 아브넬의 무덤에 묻었다.

 

주석
9-12: '레갑' '바아나' 다윗이 라이벌 왕을 죽인 대해 그들에게 보상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시 , 그가 살해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는 소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다. 그는 살해자들을 처형하고 이스보셋을 좋게 말함으로써 소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IVP 성경주석).

 

의지하고 있던 대상이 사라졌습니다. 이스보셋을 비롯한 백성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1). 바아나와 레갑은 살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살필 여유도 없이, 그들은 단순한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깁니다(2-7). 이스보셋의 머리를 들고 다윗을 찾아갔지만, 결국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8-12).

 

두려움과 불안은 사람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제대로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가만히 있을 없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 찾아오는 두려움과 불안, 취해야 마땅한 태도,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바에 대해 묵상합시다.

 

——

 

자기 꾀에 넘어지다. 

바아나와 레갑은 군대 장군이었다. 아브넬이 총사령관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총사령관이 자기 군대를 배신하고 적군과 내통하다가 살해당했다. 

이제는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라인을 타야 한다. 대세가 어떻게 기울었는지 확인했다. 

방법은 다윗에게 이스보셋을 갖다 바치는 뿐이었다. 

원수의 수장을 갖다 바치면 다윗이 기쁘게 자신들을 맞이하여 벼슬을 알았다. 

사울 때부터 다윗을 쫓아 다녔다. 바아나와 레갑도 비슷한 임무를 여러 수행했을 것이다. 

다윗과 사울의 적대관계를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목을 가지고 가면 다윗이 그들을 용서하고 중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전장터에서 죽는 것보다 이렇게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봤다. 

 

그러나 이는 다윗에 대한 사전조사가 미흡했으며, 다윗을 오해했고, 다윗이 처한 정치적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내린 오판이었다. 

다윗은 사울, 요나단, 아브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조가를 부를 정도로 진심으로 슬퍼했었다. 

비록 정치적 선택이었다하더라도 다윗의 마음에는 진심의 아쉬움이 남아 있었으며 사실은 점점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다윗은 사울 집안을 존중하고 있으며 민족의 화해와 용서 그리고 통일을 바라고 있는 사람임이 널리 널리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아나와 레갑이 과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그들도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해석이 달랐던 것이다. 다윗의 진심에 대해 오해했다. 

다윗의 애가는 오로지 정치적인 제스처이며, 마음으로는 사울 왕가의 모든 자손들이 죽길 원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시던 이스보셋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다. 

다윗은 나중에 므비보셋을 자신의 식탁에 데리고 와서 함께 밥을 먹을 정도로 진심으로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원했다. 하지만 바아나와 레갑은 진심을 믿지 못했다. 

 

결국 자기 꾀에 넘어졌다. 

거사를 치르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다윗에게 가져갔을 때만해도 의기양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알게 되었다. 

다윗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들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들은 다윗의 진짜 의도와 진심을 모르기도 했고, 왜곡했다. 이렇게 사울 왕가는 자중지란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방역수칙을 열심히 지켜온 우리는 수적 감소를 격하게 경험하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생존 있을지도 모를 지경이다. 코로나 전에 비해 절반이 아니라 1/3 수준으로 급감했다. 아니 그보다 심각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C단체는 타격이 없고, 오히려 인원이 늘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마음이 심란하다. 

 

한국교회를 비판해왔다. 정부의 방역 지침에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다.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쳤다. 그런데 언제까지 오프라인 모임을 최소화할 있을까? 선제적으로 수칙을 정하고 국가의 정책을 따라 왔다고 본다. 그러나 신입생을 붙잡지 못하고, 모임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서 결국 내년이나 내후년에 전국 멤버십이 500 이하로 떨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역사적 해석을 내리겠는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어느새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동안의 모든 생각과 선택과 결정이 과연 옳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두려움과 무거운 책임감이 든다고 해서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된다. 더욱 면밀히 살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결정들을 했는지, 그리고 때와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 보자. 이웃을 위해 우리를 희생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도를 벗어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이순간 나의 문제는 생각이 너무 단편적이라는 것이다. 

깊은 생각과 명석한 판단이 들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심과 예수님의 본심을 쉽게 오해할 있는 존재들이다. 

그분의 뜻과 생각을 없다고 믿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그분의 뜻을 깨달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본심을 이해하고 있는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게 달라고 요청드린다. 

 

함부로 결정하고 싶지 않다. 

주님의 인도를 구한다.  

꾀에 내가 넘어가지 말기를 기도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

예수님, 

저는 갑작스럽게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공동체가 결정했던 여러 가지 정책들이 설혹 우리 공동체를 사지로 몰아 넣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노예가 되지 않게 주세요. 

오직 주님의 주시는 평안 속에서 주닝의 인도를 받게 주세요. 

주께서 우리가 희생하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 것입니다. 

어떤 단체, 공동체건 하나님 나라에 잠시나마 기여하면 그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공동체가 되게 해주세요. 

 

저의 두려움을 제하시고, 오직 주님의 밝은 빛을 비춰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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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성경과 역사 속에 나타난 기독교적 자아의 원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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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빛은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개가 된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만들어 낸 42개의 아름다운 무지개가 실려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 시작해서 교부 시대, 중세, 초기 근대를 지나 계몽주의 시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는 크리스티아노스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간직한 인물들에 대한 42가지의 해석이기도 하다. 놀라지 마시라! 그 안에는 심지어 구약의 인물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폭넓고 다양한 탐구를 통해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가, 또 누가 되어야 하는가를 일관되게 보여 준다. 곁에 두고 거듭 읽고 싶은 책이다.
김용규 인문학자, 『신』 『데칼로그』 저자

김용규님은 그리스도를 빛으로 비유했다. 그 빛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신비로운 무지개로 휘황찬란해진다. 

역사 속에서 신비롭게 빛나는 무지개를 보는 경험. 

지금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빛깔의 무지개를 보여주어야 하는가? 

 


자기가 누군지를 알고(알아 가고) 누구라고 표현하는 일은 인간 실존의 기본 활동이며 당면 과제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의 경우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체는 그리스도와 온전히 동일시됨으로써 형성되지만, 그 실제 구현 모습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과 사회와 문화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를 한껏 드러내고 도전적으로 예시한 역사상의 인물들을 성경 시대로부터 금세기까지 추적하는 것은 무척이나 방대하고도 까다로운 임무임에 틀림없다. 이 책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는 그 탐구의 훌륭한 결과물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고, 과거 꿈조차 꾸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를 엿보기도 했으며, 경건과 신비와 지성이 함께 춤추는 향연 속으로 이끌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귀착점은 오직 그리스도, 고난과 희생의 주님이었다. 나 또한 이 시대의 상황 속에서 그 주님과 하나 된 것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을 이 찬란한 영적 여정의 숲으로 초대한다.
송인규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 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자아가 자아를 엿보다』 저자

송인규님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하시니, 더욱 궁금해진다. 

냉철한 그리스도인의 지성을 대표하시는 송인규님이라 더욱 그렇다.

그분이 미지의 세계를 엿보는 경험을 했다는 것도 놀라운 고백이다.

그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을 꼭 집어내셨다는 것도 마음에 쏙 든다.

예수님과의 하나됨을 드러내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지켜 나갔을까? 이 책은 그들이 맞닥뜨린 구체적 현실 속에서의 삶의 여정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이를 보여 준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힘들고 어려운 삶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지를 이론적 교리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필요한 책이자, 누구보다도 내게 가장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의 출간이 너무도 반갑다.
윤철호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명예교수, 『인간』 저자

구체적 현실 속에서의 삶의 여정... 

유진 피터슨이 그토록 강조하는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 이 책에서도 흐른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결코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윤철호님께도 필요한 책이라면, 많이 배우든 배우지 않든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심은 단순한 감정적 격동이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회심의 모습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촉구하기까지 한다.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분노하는 부흥사적 목소리는 전혀 없지만, 성경과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한 어떤 존재였는지를 말해 주는 수많은 학자들의 초상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방대하고 탁월한 저술을 보며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나아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까지 볼 수 있다. 역사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야말로 자신이 따르고 섬기며 닮아야 할 모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며 혼란을 겪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책을 진지하게 상대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미심쩍다면, 줄리 캔리스가 25장에서 묘사한 장 칼뱅의 세 번의 회심 이야기라도 읽어 보라! 책 전체를 읽고 싶게 될 것이다.
이정규 시광교회 담임목사, 『야근하는 당신에게』 『새가족반』 저자

"회심은 단순한 감정적 격동이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다." 맞는 말씀이다.

안 그래도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하게 되는 요즘에 그 정체성에 대한 역사적 진술을 들을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과연 나는, 우리는 어떻게 변화되는가?

칼뱅이 세 번이나 회심했다는 이야기는 깜짝 놀라게 한다. 

 


이 기념비적 작품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연구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참고해야 할 책이다.
스캇 맥나이트 노던 신학교 신약학 교수

스캇님! 짧고 굵다. 

 

아직 책을 구입도 못했다. 읽지도 못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읽는 것보다 읽고 싶어서 읽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추천하신 분들의 추천사를 음미해 본다. 

그리스도인, 오랫동안 나의 정체성을 일컫는 이름이다. 

2021 04 19 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12악인이 의인을 모해하며, 그를 보고 이를 갈지라도,

13주님은 오히려 악인을 비웃으실 것이니, 악인의 끝날이 다가옴을 이미 아시기 때문이다.

14악인들은 칼을 뽑아 치켜들고, 활을 당겨서,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자기 길을 똑바로 걷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만,

15 칼에 오히려 자기 가슴만 뚫릴 것이니, 활도 꺾이고야 것이다.

16의인의 하찮은 소유가 악인의 많은 재산보다 나으니,

17악인의 팔은 부러지지만, 의인은 주님께서 붙들어 주신다.

18 없는 사람의 나날은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니, 유산은 대대로 이어지고,

19재난을 당할 때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기근이 때에도 굶주리지 않는다.

20그러나 악인들은 패망할 것이니, 주님의 원수들은 기름진 풀밭이 시들어 불타듯이, 불타 없어질 것이니,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21악인은 빌리기만 하고 갚지 않으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거저 준다.

22주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받은 사람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주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땅에서 끊어질 것이다.

23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24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

25나는 젊어서나 늙어서나, 의인이 버림받는 것과 그의 자손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26그런 사람은 언제나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면서 살아가니, 그의 자손은 복을 받는다.

27악한 피하고, 선한 힘쓰면, 땅에서 길이길이 것이니,

28주님께서는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원토록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질 것이다.

29의인은 땅을 차지하고, 언제나 거기에서 것이다.

30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의 혀는 공의를 말한다.

31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시인은 악인들이 의인들을 해치려고 공격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피해를 입게 것이며,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미래를 아시기에 그들의 현재 모습을 비웃으신다고 말합니다(12-15). 왜냐하면 주님께서 의인들의 재산과 안전은 지키시지만, 악인들은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16-22). 의인들이 고난 속에 흔들릴지라도 길이 주님이 기뻐하는 길이면 주께서 그들의 걸음을 지켜주십니다(23-24).

 

악한 자들은 그들이 가진 힘과 재산을 뽐내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의로운 자들을 공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편에 서십니다. 주님의 길을 걷는 자들이 흔들릴 발걸음을 지키시며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물리치십니다. 혹시 나에게 주님의 뜻을 따라가며 부딪치는 어려움이 있습니까? 걸음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때론 흔들려도 뚜벅뚜벅 걸어갑시다.

 

——

 

주님, 

악인들로부터 저를 구해주소서. 

악인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사용해서 비천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곧은 길을 가려는 사람들을 멸시하며 능욕을 주며 심지어는 죽이려고 합니다. 

삶에 아직 극단적인 악을 실제로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나 뉴스를 통해 알게 됩니다.

정말 만나기 싫고, 경험하기 싫습니다. 

 

주님, 

악인들로부터 우리 공동체를 지켜 주세요. 

고의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악이 들어오는 길을 제공하는 악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세요. 

뿐만 아니라 주변의 선량한 사람들을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17 토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14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있겠습니까?

15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20,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야고보는 믿음이 있다고 말만 하고 믿음에 따른 행함이 없는 자들에게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묻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주변 이웃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믿음 자체도 가짜일 있습니다(14-17). 믿음은 삶을 통해 나타나며 증명됩니다(18). 진정한 믿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행함과 분리될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에 변화들을 만들어냅니다(19-20). 믿음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인생의 어려움들이 찾아올 그것을 풀어가는 모습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나의 믿음은 삶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

어리석도다

 

1. 어리석은 사람

 

20,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구절은 어디서 많이 같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훈계하면서 했던 말과 유사하다( 3:1).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진리 위에 율법의 행위(절기법, 정결법_특히 할례) 덧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렇게 혼합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고 하고 아무런 실천과 행동이 없는 사람은 그의 믿음도 의심스럽다고 한다.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데에 있다.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모세의 규정에서 다루는 어떤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의롭게 되는 것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것이 온당한가? 

당연히 아니다. 이건 의에 이르느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믿음은 인지적인 것이 아니라, 전존재적이다. 따라서 지식, 동의에 머물지 않고 의지, 의욕, 실행과 관련이 있다. 

믿음은 알고 동의하고 신뢰하여 따라가는 전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믿음은 신뢰라고 하는 거다. 

 

야고보는 교회 지도자였다. 

공동체의 상황에 가장 예민한 사람이었다. 

세계 공동체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형제 자매가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부자/빈자의 대립이 생겼나? 그건 빈자의 죽음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부자의 존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정통 유대인들의 배신자 프레임도, 로마/헬라인들의 일신교 프레임도 공동체 내의 빈자/부자 프레임보다 고통스럽지는 않다. 빈자/부자 프레임이 작동해서 공동체가 분열되면, 그건 하나님 나라의 내적 원리 자체에 공격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렇게 흘러가게 없었다. 

 

2. 행함 없는 믿음

 

점점 야고보의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2장에 접어드니, 야고보와 당시 교회에 닥친 시련과 시험은 외부에 있는 것보다 내부에 있는 것이 더욱 심각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방치하는 것이다. 그것도 믿음의 이름으로 말이다. 

방치를 넘어 차별을 한다( 2:1). 그것도 믿음의 이름으로 말이다. 

만약 이것이 심화된다면, 과연 그리스도 공동체에 예수의 정신이 남아 있다고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있다. 

그분에게 구원받았냐라고 물어 있다면, 그분은 어이가 없어 하겠지만, 그래도 다정하게 우리의 언어로 대답할 수도 있다. 

그래요, 당신의 말대로, 나는 구원받았어요 

그렇다. 그분은 구원의 중심이기에 이미 구원받았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그분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확실히 말할 있다. 그분은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어린이와 여인들을 공정하게 대하셨고, 부자/빈자를 차별하지 않으셨다. 심지어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을 보여주셨다.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러니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행함 없는 믿음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건 믿음이 아니다. 그건 믿는 하는 지적 속임수다. 합리화, 정당화, 논리 함정이다.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죽었다고 말하는 세계 교회 지도자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이걸 갈라디아서의 바울과 대척점에 일이 아니다. 

바울이 믿음에 따르는 행동과 실천을 무시했다고 믿는다면 그건 그의 편지를 끝까지 읽어보지 못한 게으름의 소치다. 

모든 편지에 들어 있는 바울의 권면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개인과 공동체의 윤리를 포괄한다. 

야고보가 십자가와 믿음의 신학적인 측면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그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개인/공동체 윤리를 직접적으로 말했다고 해서, 그를 바울과 대척점에 두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교회 지도자가 것은 철저한 회심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으며,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사도)들을 철저히 인정하고 그들을 섬기기로 했기 때문이리라. 야고보가 당시 유대교와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의 주장에 반기를 들면서 교회의 지도자가 수는 없다. 

예수, 바울, 야고보는 근본적인 신학적 일치가 있었다. 그건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렇다고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율법의 일부가 폐기된 것은 맞지만, 율법의 정신은 여전히 남아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을 견고히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야고보서를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개인적으로 이야기체가 좋다. 

예수님 이야기, 제자들의 이야기, 바울의 이야기가 묵상과 상상에 도움이 된다. 

서신서의 권면과 설득은 상황보다 논리 전개가 중심이다 보니, 상상보다는 사고의 정밀함과 확장이 본문 묵상에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말이 길어진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자칫 팍팍해진다. 

건조하다고 멈출 수는 없다. 

건조함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논리의 건조함을 넘어서서 야고보가 처한 상황에 좀더 집중해서 상상력이 첨가될 있다면 묵상이 풍성해 있을 같다. 

 

——

 

몸소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신 예수님, 

당신의 실천을 배우고 싶습니다. 

믿음은 머리의 작용이 아니라 전존재의 작용입니다. 

주님을 따라 구체적인 실천을 행하도록 도와주세요. 

어떤 실천을 하면 좋을지도 인도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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