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14 수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13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17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시련을 견디는 자들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12).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져 어려움을 당할 하나님께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도, 죄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죄를 낳고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13-15).

 

사탄은 죄의 유혹으로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가는 반면, 좋은 것을 주시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16-18).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는 달콤함 이면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는 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분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의 길을 있길 기도합시다.

 

——

욕심에서 소망으로

 

1. 입증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의 강력한 권면은 바로 시험을 견디어 내라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내부적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박해가 있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정통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바울의 변심 혹은 회심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를 기대했다. 

그러기에 영적 해방의 기치를 내건 그리스도인들의 이분법적 주장에 대해 경계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중심 가치와 정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지 로마의 황제는 아니었다. 

로마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해서 로마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이런 점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겉으로는 로마의 법을 따르는 같았지만, 속마음은 로마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외톨이가 되어 갔다. 

안팎에서 고통과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 

 

야고보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고된 삶인지, 얼마나 핍절한 삶인지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면 더욱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시험을 인내하라. 시험을 견디어내라. 

그것이 그의 신앙의 참됨을 입증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있는 방법은 시험에 인내하는 것이다. 

 

시험은 자신들의 욕심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14)

시험은 집착이 만들어낸 구렁텅이가 아니다. 

시험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내외부의 고통이다. 

시험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따라서 12절의 시험과 14절의 시험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요사이는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는 방법을 잃어버리는 같다. 

점점 확신이 옅어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확신에 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항상 회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회의는 나은 신앙으로 가는 길이다. 

무턱대고 믿는 신앙은 맹신을 낳아 모두를 괴롭힌다. 하나님조차도 괴롭다. 

그러나 항상 회의한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년 내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한다면, 달리 말하면 때로 이것은 나태함의 다른 이름이다. 

나태함은 회의를 방치한다. 참된 회의자는 진리 추구의 길에 근면하다. 

하지만 나태한 사람들은 회의라는 방패로 근면을 방해한다. 

 

신앙에 대한 시험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당하는 시대다. 

내부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비난과 비판 때문에 점점 신앙의 시험에 노출된다. 

시험은 벼락치기가 불가능하다. 시험의 통과 여부는 인내다. 오래참음이다. 견디어 내는 것이다. 

당장 혼자 잘한다고 해서 교회가 욕을 안듣는 것은 아니다. 

욕을 그냥 받고 있어야 때가 있다. 욕받이가 됨을 거부하지 말자. 

 

 

2. 욕심, 참혹한 결과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런데 조직의 욕심은 참혹하다. 

개인의 욕심은 개인의 생이 끝나는 순간 멈춰진다. 

그러나 조직의 욕심은 대를 이어 비참한 결과를 만든다. 

 

미얀마 군부의 욕심은 군사, 정치, 경제를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 쓰겠다고 안달이다. 

국민들의 죽음에는 무관심이다. 

욕심이 무덤을 만든다. 무덤에 결국 자신들이 들어가게 것이다. 

 

민주화는 어쩔 없이 피를 부른다. 

기득권의 철옹성을 넘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피다. 

 

야고보는 욕심에 빠져서 참된 시험에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결국 내외부의 고통과 핍박을 이겨내기 못했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욕심은 인내를 갉아 먹는다. 

현실적합성의 욕심은 때때로 인내하며 소망해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조급함을 노출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인간의 욕심으로 당길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완성시킬 나라다. 

우리가 일은 어쩌면 인내다.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노력은 때로 욕심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나의 욕심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나를 이끌어야 한다. 

그럼 욕심과 소망의 차이는 무엇인가? 

욕심은 자생적이나 소망은 투사적이다. 다시 말해, 욕심은 자기 자신의 내부적 메커니즘에 의해 발생하고 유지되지만, 소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며 자기 삶과 동기와 생각과 감정을 비춘다. 욕심을 방치하면, 공회전하는 엔진처럼 과열된다. 뇌와 심장에 걸쳐있는 컨베이벨트의 속도가 빨라져서 다른 생각들이 들어서질 못하는 지경에 도달한다. 소망은 뇌와 심장에 걸쳐놓은 내생적 컨베이벨트를 끊고 나와 주변과 외부를 보게 한다. 

소망이 들어온 문을 쳐다본다. 나에게 없는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에 놀라움과 충격을 안고 바라본다. 

응시한다. 소망 때문에 나의 삶의 지향이 새롭게 설정된다. 

이게 욕심과 소망의 차이다. 

얼핏보면 비슷하다. 욕심도 욕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소망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연히 차이가 난다. 

차이를 분별하고,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욕심이라는 말을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자생(스스로 만든)시킨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히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 나라만큼 불편하고 어색한 것이 없다. 

그것은 나의 나라(욕심) 거스르고, 때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죄에 노예가 되고 어쩔 없이 죽음에 이른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다시 조명받지 않으면, 영상이 뇌와 심장에 투사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점점 미쳐버린다. 광인 

 

 

——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 

욕심을 꺾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시험에 당하여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의 힘은 나의 욕심이 아니라 당신과 나라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게 하소서. 

나의 뇌와 심장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소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03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38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39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근쯤 가지고 왔다.

40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

41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 하나 있었다.

42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유대 사람이 두려워 남몰래 조용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기를 내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내려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38).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값비싼 몰향에 침향을 섞은 향료를 가지고 유대의 풍속을 따라 요셉과 함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십니다(39-42).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 것을 나타내길 두려워했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을 꺼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례를 위해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고 자신들의 소중한 것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섬깁니다. 우리에게도 혹시 이런 모습이 있습니까? 용기를 내어 주님을 섬겨야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지 살펴봅시다.

 

——

 

죽음의 폭로

 

1. 오늘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신 날을 기념한다. 동시에 제주 4.3 민중항쟁을 추념한다. 우주적인 죽음이 가져다 슬픔과 국가폭력의 희생이 가져다온 슬픔이 겹치는 날이다. 수많은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 인간사에 넘친다. 지도자의 욕망은 선량한 보통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것도 대량 학살로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보편적인 죄를 폭로했다. 4.3 억울한 죽음들은 국가로 응집된 인간들의 죄를 폭로했다. 죽음은 진실을 폭로한다. 

 

 

2.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다. 

 

명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 사람들이 두려웠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서 살아갈 용기는 없었다. 예수님을 바로 곁에서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12제자들의 삶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흠모했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깊이 탄복했다. 자신의 부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때문이었을까? 가족 때문이었을까? 명예였을까? 무엇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다른 명은 요한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던 니고데모였다. 바리새인 유대인의 지도였던( 3:1) 니고데모는 영적인 궁금함으로 늦게 예수님을 찾아왔던 인물이었다.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다는 말에엄마의 자궁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되느냐 상상력 넘치는 발언을 장본인이기도 하다. 번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섬기고 있었다. 십자가 죽음을 막지 못했음에 좌절을 느끼고 있었지도 모른다. 유대 지도자로서 전체 흐름을 바꾸고 싶었지만, 주류 기득권의 주장과 과격함을 이길 없었다. 어쩔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볼 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음의 진실을 드러내기에는 니고데모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몰약과 침향 ? 분명 아무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니고데모는 부가 있었다. 그는 명예/지위가 있었다. 예수님에게도 밤에 몰래 찾아오지 않았었나! 그의 지위는 그렇게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도자였지만, 대제사장은 아니었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 그의 지위와 명예가 순식간에 날아갈 수도 있었고, 그게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높다. 

 

3. 죽음의

 

아무리 두려움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들 마음에 뜨거운 뭔가를 남겼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이 결국 무고한 죽음으로 귀결되었다는 죄책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당당함과 자신들의 비겁함이 대비되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순간 보인 하늘의 싸인이 그들의 마음속 동굴에 빛을 비추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빛이 되어 그들을 비춘다. 누구도 벗어날 없다. 빛이 들어왔다. 

 

 

4. 죽음의 폭로

 

빛은 인간의 심연을 폭로한다. 두려움, 비겁함, 합리화, 이중성 등등. 죽음의 빛이 빠르게 인간 존재를 드러낸다. 이상 숨길 수가 없다. 뜨거운 눈물이 심장을 적신다. 십자가의 잔상은 깊은 애도를 남기고 애도가 피를 끓게 한다. 숨겨 놨던 용기의 주위에 애도의 피가 둘린다. 결국 문이 열린다. 

 

빌라도를 찾아간다.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의 무덤을 그것도 무덤을 제공한다. 

비싼 향유를 드린다. 제자들에게 향유를 전달한다. 그리고 장례에 참여한다.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더이상 숨어지낼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온 급격한 변화였다. 

 

 

5. 자기 폭로의 시간

 

때로 강렬한 폭로의 시간이 찾아온다. 오랫동안 숨겨놨던 마음의 이중성, 충돌 되는 욕망, 손해 같은 두려움, 누리지 못할 즐거움,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예수님의 죽음 앞에 다시 돌아본다. 

 

4.3 사건의 무고한 희생도, 세월호 사건 꽃들의 죽음도 우리 인간들의 한계없는 욕망을 폭로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매년 되새기는 것은 나의 욕망이 폭주하지 않도록 미리 폭로하는 과정이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대의 흑암을 미리 정기적으로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나는 어떤 심연을 주님께 드러낼 것인가?

 

 

——

예수님, 

 

당신의 죽음에 잠잠해 집니다. 

나도 모르게 폭주하던 온갖 부정적 감정들을 죽음이라는 영광의 앞에 노출시킵니다. 

열망/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저를 십자가 앞에 펼칩니다. 

주님의 피로 용기의 문을 열어 주소서. 

두려움을 이기고 더욱 정직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01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7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18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박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19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명패에는유대인의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20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21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22빌라도는나는 것을 썼다하고 대답하였다.

23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몫으로 나누어서, 사람이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것이므로

24그들은 서로 말하기를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하였다. 이는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25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있었다.

26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곁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어머니,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시고,

27 다음에 제자에게는, 이분이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때부터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의미의골고다라는 곳에서 , 우편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십니다(17-18). 그의 죄를 알리는 명패에는유대인의 이라는 내용이 아람어와 그리스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19-22). 이것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왔던 흩어진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모두가 알아볼 있는 언어로 표시된 것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음으로 인해, 시편에 기록된 메시야 수난에 대한 예언( 22:18 참조) 성취됩니다(23-2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시는 , 모친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십니다(25-27).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십자가에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세상을 위한 사랑의 왕이십니다.

 

——

진짜 유대인의  

십자가를 끌고 가시는 장면은패션오브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 실감나게 그렸다. 

구절 하나로도 오랫동안 머물고 묵상할 있을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사형틀을 직접 끌고 가신다. 

몸에 상처 투성이요. 머리엔 가시 면류관 자국이 선명하고, 옷은 피로 얼룩져 있다. 겉옷과 속옷 것없이 예수님의 피로 물들었다. 나중에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그의 속옷을 제비 뽑아 가져갔다고 하는데,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 왕의 피를 빨아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명패를 자세히 묘사한다(19-22). 아마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보인다. 

무슨 메시지일까? 

십자가에는 죄명이 달리는 것이 상식적이다. 

The irony in John continues as the reason for the death of Jesus received its official entitlement or “notice” (titlon). Frequently persons condemned to death had their offense written on a placard and either hung on their bodies or carried before them as they were paraded to the execution site.
_Gerald L. Borchert, John 12–21, vol. 25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2), 264.

사람이 여기에 이런 처벌을 받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행위다.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도 형벌의 정당성을 확보해준다. 

사람들은 공개 처형의 끔찍함을 그의 죄를 보고 상쇄시킨다. 

 

그런데 요한이 보기에 예수님의 명패(죄명)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죄명과 너무 다르다. 

유대인의 나사렛 사람 예수”, 이것은 죄명이라고 하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있었을까? 유대인의 삶을 애정했던 예수님, 유대인들의 병을 고치고, 먹을 것을 나눠주셨던 예수님,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했던 예수님. 그래서 많은 민중들은 예수님을 왕처럼 대하지 않았나!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께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누가복음 19:38) 이라고 노래를 불렀다. 과연 죄패로 이런 민중들을 설득할 있었을까? 의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을 자극하고, 민중들을 격동케 하는 행동 아닌가? 사실 비정치적인 행위로 비춰진다. 

 

게다가 죄패가 맘에 안들었는지, 대제사장들은 수정을 요구했다. ‘자칭이라는 말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유대 민중들이 그를 임금으로 왕으로 추앙하고 있지 않다고 애써 부인하는 자세다. 만약 빌라도가 INRI(라틴어: IESVS·NAZARENVS·REX·IVDÆORVM) 한국어로 번역하면 "유다인들의 임금나사렛 사람 예수이란 뜻을 가진 천주교의 두문자어이다.) 쓰려고 한다면, 그것도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 출신 유대인 그리고 심지어 로마병정들까지도 죄패를 읽게 하려고 한다면(20), 결코 유대인의 왕으로 써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같다. 대제사장이 원했던 죄패는 아마도 반역자, 신성 모독자, 사기꾼, 반역시위 주동자, 민심 소란죄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이 스스로 말했던 ,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던 말을 죄패에 썼다. 제사장들의 요청도 거부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제사장 손에 맡긴 것은 사실이지만, 사형을 집행함에 있어서 그는 제사장들의 요구를 들어 마음이 없었다. 뭐에 홀렸는지, 빌라도는 유대 민중들이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는 , 그것을 그대로 죄패에 적었다. 그리고 죄패는 예수님의 영광의 명패 되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의 유대인의 왕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날은 죄인의 처형식이 아니라 왕의 대관식이었다고 말이다. 맞는 같다.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고 벌거벗겨진 채로, 왕의 대관식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왕의 대관식이 이토록 처참하고 부끄러울 있는가. 과연 대관식을 영광의 순간이라고 부를 있는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요한은 십자가를 예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왕이 부끄럽게 죽어가고 있는데, 그게 우주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의 대관식이었다. 

 

빌라도는 부지불식간에, 어찌저찌하다가 결국 예수님의 왕의 대관식을 준비한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모든 민중들이 함께 인정하는 왕이 것이다. 

십자가에서 사단, ,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를 이루신다. 승리가 왕의 대관식이 것이다. 마치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에서처럼 말이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왕이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그래서 그분이 왕이 되신 것이다. 진짜 말이다. 자칭 왕이 아니라 우주가 인정할 밖에 없는 왕이 되신 것이다. 

 

왕을 찬양한다. 

수치로 영광의 관을 쓰셨다. 

고통으로 왕좌에 오르셨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주인이 되셨다. 

그의 놀라운 너무나 창의적인 지혜를 찬양한다. 

2021 03 30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8사람들이 가야바의 집에서 총독 관저로 예수를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하여 관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29빌라도가 그들에게 나와서당신들은 사람을 무슨 일로 고발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30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님께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31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를 데리고 가서,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유대 사람들이우리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32이렇게 하여,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가를 암시하여 주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33빌라도가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내서 물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34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하는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것이오?”

35빌라도가 말하였다.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36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37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38빌라도가 예수께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말을 하고, 다시 유대 사람들에게로 나아와서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39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 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

40그들은 다시 소리로 사람이 아니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하고 외쳤다. 바라바는 강도였다.

 

유월절을 앞둔 유대인들은 부정함을 피하기 위해서 빌라도의 관저 밖에서 예수님을 고소하며 그를 사형에 처해 달라고 요청합니다(28-32).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들로 더렵혀져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로마 정부에 위협이 만큼 죽일 만한 죄가 있는지를 심문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에서 그럴 만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33-38).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기 위해 바라바라는 강도와 예수님 누구를 놓아줄지 묻지만 사람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합니다(39-40). 사람들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 나라의 왕보다 폭력을 행하는 강도를 선호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초라해진 예수보다 힘을 가진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따릅니다. 나의 마음은 무엇을 따라 움직이는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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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셨다. 

사실 이렇게 명료하게 예수님 스스로 왕이라고 하셨는지 몰랐다. 

그동안 그분이 우리의 , 나의 주라고 그렇게 찬양도 하고 고백도 했지만, 성경 본문에서 명확하게 왕이라고 장면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떡하니 오늘 본문에 등장한다. 예수님은 스스로 왕이라고 부르셨다. 

 

그런데 왕은 세상의 속한 나라의 왕이 아니다. 세상에 속하였다면, 부하들도 있어야 하고, 호위병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보호해줄 병사가 없었다. 대신 싸워줄 사람도 없었다. 하기야 스스로 싸움을 멀리하라 했다. 베드로의 본능적 대응을 막으셨다. 칼을 가지고 다니는 칼로 망한다(26:52) 하셨다. 그분은 싸움을 원치 않으셨다. 대신 묵묵히 제사장의 부하들과 로마의 병사들에 몸을 맡기셨다. 이렇듯 그분은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셨다. 

 

하지만, 그러기에 예수님은 역사와 우주의 왕으로 등극하셨다. 세상에 속한 왕은 영토와 시간의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역사와 모든 공간의 왕이 되셨다. 그분을 따르기로 사람들의 영원한 왕이 되신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대범하게 자신이 왕이라고 천명하신 것이 눈에 선하다.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는 없었다. 예수님은 무장 투쟁을 하신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 권력을 찬탈할 마음도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저 전혀 다른 레벨의 왕이셨고, 그걸 주장하셨던 뿐이었다. 죄를 찾아 낸다면 아마도 당시 종교 권력자들을 비판했다는 ,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치들의 장사를 방해했다는 점일 뿐이다. 과연 이런 것들이 죽일 죄였는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예수님 당신의 천명이 그저 감사하다. 

그분은 나의 왕이시다. 세상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왕이시다. 

세상의 통치 원리와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통치의 왕이시다. 

왕되신 예수님을 다시 왕이라고, 나의 주님이시라고, 세상의 진정한 왕이시라고 고백하고 싶다 

 

고난주간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고난을 당하셨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거짓(위선) 사람들에게 고초를 당하셨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왕은 때로 세상에서 이런 고난과 고초를 당한다. 

그것은 왕을 따르는 백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자문하게 된다. 

나는 왕을 따라 고난과 고초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그저 흘러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안정을 추구하며, 편안함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그분과 함께 여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이 들었다고 안주할 생각인가? 

호수에 돌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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