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01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1 이스라엘은 열매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제단도 많이 만들고, 토지의 수확이 많아질수록 돌기둥도 많이 깎아 세운다.2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제는 그들이 죄값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들의 제단들을 파괴하시고, 돌기둥들을 부수실 것이다.3 “우리가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다가, 임금도 못 모시게 되었지만, 이제 임금이 있은들 무엇에다가 쓰랴?” 하며 한탄할 날이 올 것이다.

4 그들은 빈 약속이나 일삼고, 거짓 맹세나 하며, 쓸모 없는 언약이나 맺는다. 그러므로 밭이랑에 돋아난 독초처럼 불의가 퍼진다.5 사마리아 주민은 벳아웬의 금송아지를 잃고 두려워하고, 그 우상을 잃고 슬퍼할 것이다. 그것을 즐겨서 섬긴 이교의 제사장들은, 우상의 영화가 자기들에게서 떠난 것 때문에 탄식할 것이다.6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앗시리아로 가지고 가서 대왕에게 선물로 바칠 것이다. 그러나 에브라임이 대가로 받아 오는 것은 수치뿐일 것이다. 끝내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긴 일로 수치를 당하고야 말 것이다.7 사마리아는 멸망하게 되었다. 왕은 물 위로 떠내려가는 나무토막과 같다.8 이제 이스라엘의 죄악인 아웬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 올라서 그 제단들을 뒤덮을 것이다. 그 때에 백성들은 산들을 보고 “우리를 숨겨 다오!” 또 언덕들을 보고 “우리를 덮어 다오!” 하고 호소할 것이다.

 

 

NIV

They make many promises, take false oaths and make agreements; therefore lawsuits spring up like poisonous weeds in a plowed field(4절).

 

 

[오늘의 묵상]

북이스라엘은 부유했다. 

농작물이 잘 자랐다. 

포도도 잘 자라고, 추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풍요가 가지고 온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지가 아니라 우상 숭배였다. 

이교 제단을 곳곳에 세운다. 

둘기둥 우상을 허구한 날 만들어 세운다. 

돌기둥은 단순히 예술적 표현이 아니다. 

돌을 깎는 것은 대단히 고된 작업이다. 

종교적 심성으로 만들게 된다. 

복을 내려줄 신을 상상하면서 돌기둥을 만든다. 

당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과는 대조된다.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더라면, 우상들과 경쟁력이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모양이라도 자신의 대표하는 조각을 만들지 말라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인간이다. 

다른 어떤 형상도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전략은 인간과의 언약 관계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 가시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시는 것이다. 

조각품으로 당신을 표현하지 않으시고, 관계와 역사와 서사로 표현하신다. 

그 속에 드러난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며 따르며 사랑하며 살아갈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눈의 동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쉽게 따라가지 못한다. 

귀보다는 눈이 훨씬 욕망적이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확실히 욕망을 자극한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는 순식간에 뇌에 찍힌다. 

소리는 오래 걸리며 뇌는 소리를 해석하느라 쉽게 피곤해진다. 

사람들은 한 눈에 들어오는 금송아지를 세운다. 

그게 하나님이라고 속인다. 

농경 사회에서 송아지만큼 귀한 것이 없다. 

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나르는 일에 소가 기여한다. 

그런 소의 형상을 한 반짝이는 우상은 모든 사람들이 염원하는 풍요를 욕망하게 한다. 

곳곳에 돌기둥을 세워 자신들의 부를 위해 기도한다. 

곳곳에 금송아지를 세워 부의 근원인 가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서 한다. 

그 옛날 모세 때의 금송아지 사건을 모를 리 없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았는지 그새 잊었다. 

경제적으로 풍요해지니, 정신이 허약해졌다. 

돈이 사람들을 망가뜨린다. 

 

욕망이 제어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거짓이 난무하다. 

빈 약속, 거짓 맹세, 쓸모 없는 언약(4절)이 퍼진다. 

결국 정보가 부족한 사람, 착한 사람, 타인을 믿어 보려는 사람들이 곤경에 빠지고 죽음에 이른다. 

사기가 판을 치니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불의한 사회는 제어되지 않는 욕망 덩어리, 즉 우상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세 사기, 보이스 피싱, 금융 상품의 불완전 판매… 

죄다 사기다. 

남을 속여 자신의 잇속을 차린다. 

SNS 속에 포장된 거짓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필라델피아 켄싱턴의 마약 거리는 미국 제약 회사의 사기인 펜타닐의 결과다. 

돈을 잃고 신의를 잃고 모든 것을 잃는다. 

불의가 땅에 가득하다. 

 

우상이 판을 치면 사회는 불의하게 된다. 

하나님이 참을 수 없는 사회가 된다. 

물과 불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남는 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길이다. 

서로 싸우다 지옥을 만난다. 

지옥같은 사회를 위해 누가 지키며 누가 헌신하겠는가!
헌신하지 않는 공동체, 사회는 결국 외세의 먹이가 된다. 

침략이 잇따르고, 전쟁의 참화는 지옥의 지옥을 낳는다. 

 

현재 한국 사회도 우상이 판을 친다. 

지도자들이 우상 숭배자가 많다. 

점집이 여전히 방방곡곳에 있다. 

지도자들이 무당을 찾아간다. 

무당과 법사의 말을 듣고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맡긴다.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다. 

경제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으나, 우상과 미신은 전근대적이다. 

그나마 아직은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남아 있다. 

그루터기들이 끝까지 남아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한다. 

 

성령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의 죄악을 불로 태워주시길 기도한다. 

우상을 좋아하는 우리의 본성에 불로 태우시고 물로 씻어주시길 기도한다. 

지금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오늘의 기도]

우상을 싫어하시는 하나님, 

불의한 세상을 혐오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겪고 계시는 딜레마를 생각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시어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당신을 오늘도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내면, 속사람을 바꾸길 원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인지합니다. 

주님! 

저의 속사람을 바꾸소서. 

더욱 사랑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더욱 경건한 존재가 되게 하소서. 

나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게 하소서. 

속이는 사람들을 재빠르게 알아차리게 하소서. 

우상을 배척하고, 불의를 멀리하게 하소서.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8월 19일 토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종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시오.

 

22 예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25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27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2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29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30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The Message

Put your mind on your life with God. The way to life—to God!—is vigorous and requires your total attention(24절).

 

주석

26-27절. 닫힌 문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고, 또 그분이 자기들을 가르치셨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행악하는 자”라고 부르신다. 이로써 이 비유는 갑자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기독교 전도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이는 전체 단락의 청중을 암시한다(IVP 성경비평주석).

 

29-30절. 여기서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바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사도행전의 문맥에서 보면, 요점은 훨씬 더 충격적인 것이다. 곧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메시아의 잔치에 기대어 있는 자들이 되며, 거기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던 많은 사람은 배제되리라는 것이다. 동서남북이라는 말은 ‘모든 곳’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전문맥에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빗대어 말씀하셨다. 

작은 겨자씨가 나무가 되어 새들의 안식처가 된다. 

적은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게 한다. 

얼핏보면 하나님 나라는 어마어마하게 커지는 듯 싶다.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에 대해, 그 나라에 실제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얼마나 큰 나라일까? 

그 나라의 인구는 대체 몇 명이나 될까? 

그 나라에는 누가 들어갔는가? 

등의 질문이 맴돌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여러 성읍들을 두루두루 다니신다. 

어느 마을에 가니, 한 사람이 묻는다. 

“구원 받은 사람이 적습니까?” 

예수님은 예/아니오로 대답하시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갑자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하신다. 

구원 받은 사람이 적은지 많은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도리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수가 많다고 말씀하신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구원 개념의 전제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입성”이다. 

구원은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구성원이 되느냐의 문제다.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영육을 가진 존재 자체의 구원이며, 새롭게 조성되는 피조세계의 구원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한 번 문이 닫히면 아무리 두드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넓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문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의 선택에 의해 찾아진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기 원하는 현실의 넓은 문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찾지 못하게 방해하는 함정이다. 

 

좁은 문은 불의와 거리가 먼 문이다. 

좁은 문을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뒤늦게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이다. 

예수님 앞에서 먹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길거리에서 들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 가르침을 받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런 말을 할 사람이 등장한다. 

문이 닫힌 뒤에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서 선처를 바라지만, 기회는 이미 충분히 주어졌었다. 

그들은 불의를 행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갔었다. 

불의를 거부하는 좁은 문은 피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구원받은 사람의 수는 정말 적은가? 많은가? 

예수님은 그 수에 많고 적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이 순간의 참석자들 중에도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계, 주의다. 

불의로 점철된 넓은 문을 피하고, 정의로운 좁은 문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좁은 문을 선택했던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었다. 

그들의 모든 선택이 좁은 문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좁은 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입성했다. 

 

우리도 모든 선택이 좁은 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들, 그리고 대부분의 문은 좁은 문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다다르는 방법이다. 

그 좁은 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결국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과 성령님의 인도일 것이다. 

그것이 의로운 선택을 하도록 도우실 것이다. 

사람들이 다 선택하는 그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가야 한다. 

 

나는 좁은 문을 선택하고 있나? 

 

 

[오늘의 기도]

의로우신 예수님, 

주님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불의, 불법, 편법, 속임으로 가득한 넓은 문이 아니라, 

정의, 희생, 공평, 정직으로 속이 꽉찬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모든 선택을 바르게 할 수는 없겠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2월 28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부르짖느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라.

16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17 내가 이집트 사람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겠다.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병거와 기병들을 전멸시켜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물리치고서 나의 영광을 드러낼 때에, 이집트 사람은 비로소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9 이스라엘 진 앞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천사가 진 뒤로 옮겨가자, 진 앞에 있던 구름기둥도 진 뒤로 옮겨가서,

20 이집트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 구름이 이집트 사람들이 있는 쪽은 어둡게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쪽은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밤새도록 양 쪽이 서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21 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내밀었다. 주님께서 밤새도록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내시니, 바다가 말라서 바닥이 드러났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22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다.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

23 뒤이어 이집트 사람들이 쫓아왔다. 바로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쫓아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24 새벽녘이 되어,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에서 이집트 진을 내려다 보시고, 이집트 진을 혼란 속에 빠뜨리셨다.

25 주님께서 병거의 바퀴를 벗기셔서 전진하기 어렵게 만드시니,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쫓지 말고 되돌아가자. 그들의 주가 그들 편이 되어 우리 이집트 사람과 싸운다!' 하고 외쳤다.

 

26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라. 그러면 바닷물이 이집트 사람과 그 병거와 기병 쪽으로 다시 흐를 것이다."

27 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내미니, 새벽녘에 바닷물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이집트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물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바다 한가운데 빠뜨리셨다.

28 이렇게 물이 다시 돌아와서 병거와 기병을 뒤덮어 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따라 바다로 들어간 바로의 모든 군대는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29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는데, 바닷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30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널려 있는 이집트 사람들의 주검을 보게 되었다.

31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주님의 종 모세를 믿었다.

 

주님은 모세에게 바다를 갈라지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지나가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15-16절). 구름기둥이 이집트와 이스라엘 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사이, 모세가 팔을 내밀자 바닷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이 드러납니다(19-22절). 이스라엘 자손은 갈라진 바다 물벽 사이로 지나갔지만, 따라 들어온 이집트 군대는 물이 덮여 전멸하였습니다(22-28절). 이스라엘은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였고, 모세를 믿었습니다(31절).

 

‘그 주가 누구인데(5:2)’라는 바로의 모욕적인 질문에,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킴으로써, 계속 말씀하셨던 ‘내가 주님’이라는 답을 완성시키십니다. 바로의 병거를 보고 두려워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홍해를 건넌 뒤에 주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집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모든 이적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이 ‘주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세상의 주님이십니다. 그것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필요하다면 내 앞에 놓인 어떤 ‘홍해’라도 가르실 것입니다. 내 삶과 가정과 공동체에 주되심이 드러나길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 그 빼앗긴 것을 되찾으신다.

이집트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신으로 숭배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우상 숭배가 심해지면 하나님의 영광은 흐려진다. 

온 우주의 창조주가 피조물보다 못한 여김을 받는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열받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 하나님과의 약속을 맺은 사람들이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엄청난 고난을 받는다. 

세상은 하나님이 과연 영광이 있는지 묻는다. 

그 신이 과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묻는다. 

과거에는 이집트와 그 주변국들을 기근에서부터 구출해주셨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한낱 노예들의 신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10가지 재앙으로도 이집트 사람들과 권력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의문이 많았다는 점이다. 

과연 우리가 이 광야에 있는 게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다 죽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홍해 앞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리 상태는 그야말로 패닉이다. 

도대체 그 능력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분노에 찬 이집트 사람들을 괴멸시키기로 결정하셨다. 

그렇게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되찾고, 진정한 우주의 주인이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결정하셨다. 

이집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언약외 백성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언약내 백성까지도 설득하고 확신을 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낮에 이스라엘을 보호하던 구름기둥이 뒤로 간다. 

이집트 군사들은 갑작스런 어둠에 깜짝 놀란다. 

그 구름기둥은 더욱 짙은 층운이 되어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 

기둥의 기세가 너무 세어서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밤이 되었다. 어둠은 더욱 짙어졌는데, 이스라엘 쪽은 밝다. 

불기둥 때문이었다. 불기둥이 밤을 밝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내한다. 

밤새 홍해가 갈라지고, 백성들은 홍해를 건넌다. 

새벽이 되자, 구름기둥이 옅어진다. 

바로의 군대는 홍해로 밀고 들어온다. 

아주 당연히 홍해 바닥은 무거운 병거가 들어오기 어려운 지형이다. 

갯벌 같은 곳에 무거운 병거의 바퀴는 빠지고 움직이기 어렵다. 

이집트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거다. 이스라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싸우신다." 

도망가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새벽녘 이스라엘에 구원이 임했다. 

저 멀리 밝은 태양이 오르고 구름 기둥이 점점 짙어진다. 

태양빛에 이집트 병사들의 시신이 보인다. 

 

31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주님의 종 모세를 믿었다.

 

이스라엘은 이제서야 주님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믿는다. 

사람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로 모아지기가 어렵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 두 마음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다. 

결국 인간은 온전한 신뢰를 보낼 수 없는 존재다. 

생존이 걸렸을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끝까지 그분을 신뢰하는 것,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말은 쉽지만 실제는 어렵다. 

살아있는 생생한 관계를 평소에 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허상을 쫓아 자기 최면, 자기 확신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실제를 몸으로 일상에서 경험하는 자만이 가능하다. 

이런 실제를 경험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고위 공무원 자녀의 학폭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학폭은 사라져야 하며, 그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 그 폭력이 묵과되어서는 안된다. 

피해자는 죽음을 생각하는데, 가해자는 뻔뻔히 승승장구 지내고 있으면 안된다. 

정의로운 법집행이 이뤄져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온 우주의 주님, 

당신의 능력을 봅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한 당신의 최선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높아지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도록 하옵소서. 

우상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돌려드립니다. 

일상에서 오직 주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하소서.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길 원합니다. 

약자들을 사랑하시기에 악행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 가운데서도 나타나게 하소서. 

주님, 울어야 할 때 울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고, 용서해야 할 때 용서하게 하소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냇가에 심은 나무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 14:1-14_바로의 병거  (1) 2023.02.25
출 13:17-22_구름기둥과 불기둥  (1) 2023.02.24
출 13:11-16_어린양의 대속  (0) 2023.02.23
출 13:1-10_무교절 예식  (0) 2023.02.22
출 12:43-51_유월절 규례  (0) 2023.02.21

2021년 09월 27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지휘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다윗의 믹담]

 

1너희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말 정의를 말하느냐? 너희가 공정하게 사람을 재판하느냐?

2그렇지 않구나. 너희가 마음으로는 불의를 꾸미고, 손으로는 이 땅에서 폭력을 일삼고 있구나.

3악한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곁길로 나아갔으며, 거짓말을 하는 자는 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빗나갔구나.

4그들은 독사처럼 독기가 서려, 귀를 틀어막은 귀머거리 살무사처럼,

5마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않는구나.

6하나님, 그들의 이빨을 그 입 안에서 부러뜨려 주십시오. 주님, 젊은 사자들의 송곳니를 부수어 주십시오.

7그들을 급류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겨누는 화살이 꺾인 화살이 되게 해주십시오.

8움직일 때 녹아내리는 달팽이같이 되게 해주십시오. 달을 채우지 못한 미숙아가 죽어서 나와 햇빛을 못 보는 것같이 되게 해주십시오.

9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것과 불붙은 것이, 강한 바람에 휩쓸려 가게 해주십시오.

10의로운 사람이 악인이 당하는 보복을 목격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악인의 피로 그 발을 씻게 해주십시오.

11그래서 사람들이 "과연, 의인이 열매를 맺는구나! 과연, 이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 말하게 해주십시오.

 

 


 

지도자건 백성이건 정의, 공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다윗은 여러모로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한 왕국의 왕이다. 

그가 가진 권한과 파워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일반 백성들이 보기에 다윗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며, 그의 말 한 마디에 전쟁이 발발하기도 종식되기도 한다. 

그런 다윗이 보기에도 여전히 세상엔 정의가 흐트러져 있고, 공정이 무너져 있다. 

다윗은 어찌보면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정의와 공정을 말로 추구할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정책으로 혹은 재판으로 구현해 내야 하는 사람이다. 

지도자의 삶, 권력자의 삶이 그래야 한다. 

그런데 본문의 다윗은 마치 자신이 정의과 공정을 요청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의아하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실제 구현해야 할 입장에서, 정의와 공정이 더욱 눈에 들어왔을 수도 있겠다. 

자신의 말과 정책과 재판에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려면, 그에 대한 감각이 예리해져야 한다. 

섬세해져야 한다. 좋은 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혜이며 분별력이다. 

 

불의한 자들, 독기가 가득한 자들, 거짓을 꾸미는 자들… 

이런 사람들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의 의도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무고한 백성이 피해를 받지 않는다. 

공의와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불의한 자들에 대한 분별력이 더욱 높아져야 한다. 

이기적인 사람들, 자신을 위해 이웃을 위해하는 사람들, 폭력과 살인에 관대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빨리 분별하고 자신과 이웃을 보살피고, 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니 다윗의 노래에 이토록 정의와 공의에 대한 추구가 많은 것이다. 

 

31세의 누구는 6년간의 근무후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다고 한다. 

산재 위로금과 상여금이 포함된 금액이라고 한다. 

과연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공의로운 처사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리적 폭력보다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재정을 통한 불의이다. 

정의로운 노동과 공정한 배분이 쉽게 구현되지 않는다. 

돈이 돈을 낳지, 노동으로 돈을 벌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투기로 순진한 사람들의 평생 모은 재산을 앗아간다. 

지도자가 될 수록 더욱 더 정의과 공정에 예민해져야 한다. 

그러나 어느 사회건 지도자들이 그렇게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자신과 이웃을 속이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니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공의와 공정에 예민해져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예민해 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도 어느 순간 스스로를 속이면서 정의과 공정으로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의 시는 단순히 다윗 개인의 노래로 끝나지 않았다. 

시편의 시들은 대중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로 발전한 것이다. 

사사로운 개인의 습작시가 아니다. 

공동의 열망이 노래로 울림을 만든다. 

모두가 다 함께 정의과 공정을 부르짖는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한다. 우리 모두 정의로게 살자고, 의인으로 살자고 말이다. 

이 노래는 공동체의 윤리의식을 강화한다. 

 

그리고 그 정의과 공정의 절대 기준이며 절대적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공동의 결단만으로 될 것 같았으면 이미 거룩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야 불의한 자들의 민낯이 드러날 것이다. 그들의 사악한 행위가 천하에 밝혀질 것이다. 

거짓과 폭력과 불의와 기만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상대하기란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다. 

공동체 전체가 함께 소리치며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세요. 

하나님의 기준, 그 공의로운 기준으로 판단해 주세요. 

주님, 악인이 벌을 받게 하시고 의인의 얼굴에 웃음을 허락하소서. 

이렇게 말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 더 많이 일어나게 해 주세요. 

정의와 공정에 대해 예민하게 깨어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정의로운 하나님을 부르고 정의로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주세요. 

우리에겐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 공동의 기도, 공동의 찬양을 들어 주세요. 

특히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불의한 특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게 해주세요. 

남북에 평화로운 왕래가 일어나게 하시고, 평화체제가 구축되게 하소서. 

모든 국민들의 열망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북한의 주님들에게도 더 깊숙히 전달되도록 도와주세요.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모든 회의와 일정을 주께서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