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4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1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2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3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MESSAGE

“여러분은 우리 지도자들을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지, 그분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장엄한 비밀들로 여러분을 인도하는 안내인이지, 그 비밀들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경비원이 아닙니다. 좋은 안내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믿음직스러움과 정확한 지식입니다.”(1-2절)


바울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거부한다. 

교회의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의 역할은 공동체를 잘 돌보고 관리하는 일이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역할을 대체해서는 안된다. 

그저 신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복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공동체가 그 복음을 잘 간직하도록 돕는 일. 그 일이면 족하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를 만들지 말라. 

그렇게 판단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심판하지 마라. 

분파를 만든다는 말은 자신의 분파의 수장을 높이고, 상대방 수장을 비판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식의 심판/판단은 인간들의 성향과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5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분파를 나눠 교회를 분열시키면서, 서로서로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심판하는 일을 그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뿌리를 오직 예수님에게만 두되, 라인을 형성하고 서로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일을 그쳐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신앙 형성에 도움을 준 사람을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앙인들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상의 급진성, 생각의 급진성은 언제나 반갑고 신선하다. 

생각할 재료를 공급해주고, 생각의 바운더리를 확장시켜준다. 

그러나 비판과 비난의 급진성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싶다. 

아쉽고 서운할 수 있다. 불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치판에서 그렇게 하듯 비난과 욕설과 비아냥으로 공격하는 것이 쉽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복음을 위해 함께 달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욱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 칭찬하거나 긍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는 순간 순간이 있다. 

급진적인 비판과 비난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비난의 시대를 살고 있다. 

나를 찾으려면 내가 아닌 것을 판단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만 부주의해도 분별이 비난으로 흐른다. 

내가 아닌 것을 부정하다 보면 타자는 부정의 대상이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어야 하는데, 이건 인간 본성에 반한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자기 공동체 밖에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자기 외에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1인 미디어가 이런 흐름을 더욱 강화한다. 

비난하면서 자신을 찾는다. 

과연 이런 방식의 “자기 찾기”가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너무 다양하며, 기독교 신앙의 표현도 어쩔 수 없이 다양하다. 

비난과 심판에 앞서 겸손히 말씀 앞에 십자가 앞에 서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심판이라는 단어의 쓰임을 더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이 심판이라는 단어를 어떤 늬앙스로 썼는지 전후 문맥과 당시의 이 헬라어의 쓰임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문맥만 놓고 보면, 바울은 자신을 심판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일부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행동을 멈춰달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것이 맞는지 아닌지 좀더 본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도 기록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알고 싶다.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하나님, 

사랑으로 연합해계시는 삼위 하나님, 

주님의 사랑이 공동체에 흐르게 해 주세요. 

비판과 비난보다 사랑의 말과 격려의 말이 앞서게 해주세요. 

물론 분별하고 분석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향한 여정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판에서 사용되는 정치적 공격, 비난, 비판, 욕설, 비아냥 등은 점점 사라지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시간이 확보되게 해주세요. 

좀더 깊이 있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1월 02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니, 주님의 규례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빗소리가 크게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42 아합이 올라가서, 음식을 먹었다.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을 바라보며 몸을 굽히고,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

43 그리고는 그의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쪽을 살펴 보라고 하였다. 시종은 올라가서 보고 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다시 그의 시종에게, 일곱 번을 그렇게 더 다녀오라고 하였다.

44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그 시종은 마침내, 사람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바다에서부터 떠올라 오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는 아합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어서 병거를 갖추고 내려가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였다.

45 그러는 동안에 이미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캄캄해지고, 바람이 일더니, 곧 큰 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아합은 곧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내려갔다.

46 주님의 능력이 엘리야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엘리야는 허리를 동여 매고, 아합을 앞질러서, 이스르엘 어귀에까지 달려갔다.

 

주석

46절: 이 구절은 더 빨리 달렸다는 말이 아니라 이스르엘에 도착할 때까지 아합의 병거 앞에서 달려갔다는 말이다. 왕이나 왕자의 병거 앞에서 달려가는 사람들은 그의 측근자들이다. 엘리야는 야웨의 권세하에, 선지자적 포고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IVP 배경주석).


왕의 병거다. 

가장 좋은 말과 가장 좋은 장비다. 

비록 비가 내린다고 해도 왕의 병거 앞에서 뒤쳐지지 않고 그 긴 거리(26km)를 달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주님의 능력이 엘리야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사람이다. 

그릿 시내에서 사르밧까지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입었다. 

갈멜산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는 신적 대리자였다. 

그리고 지금 비가 오는 것을 예언하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깊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의 연장이라는 것을 온 백성에게 알리게 된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 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가뭄을 해결한 분은 왕과 바알/아세라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임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은 이 기이한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 가뭄 끝에 큰 비가 내렸다. 그것 자체가 복된 소식이다. 

그런데 그 복된 소식을 가지고 오는 존재는 오랫동안 사라졌던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엘리야를 다시 보게 되었다. 

도망친 줄 알았던 엘리야, 벌써 죽은 줄만 알았던 엘리야가 다시 등장했다. 

갈멜산에서의 대결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도 전에, 엘리야의 모습이 등장했다. 

지치지 않고 빗속을 뚫고 달려나가는 엘리야의 모습은 한 마리의 호랑이, 사자와 같다. 

세상을 호령하는 듯한 그의 달리기에 사람들이 놀란다. 

왕과 왕비 이세벨이 틀렸다. 바알과 아세라는 진짜 신이 아니다. 

오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시다. 

 

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엘리야의 종의 순종이다. 

7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했다. 

세 번 쯤 하면 원래 하기 싫어진다. 

변화가 없는 상황인데, 계속 올라가서 바다 쪽을 보고 오라고 한다. 

얼마나 올라가야 바다가 보이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짧은 거리라 하더라도 계속 반복시키게 되면 짜증이 몰려 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종은 엘리야의 말을 잘 들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갈멜산 대결과 기손 시내에서의 처형사건이 그로 하여금 엘리야의 권위를 인정하게 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7번은 조금 과했다. 

세 번 정도가 적당한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갈멜산 전투에서는 단 한 번의 기도로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물에 푹 젖은 제물들을 불살라 버렸다. 

그런데 일곱 번이라니…

때로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시간은 더디기도 하다. 

하나님의 방식은 항상 똑같지는 않다. 

원리는 같다. 그분에 대한 신뢰다. 

그러나 방식은 종종 다르다. 한 번일 때도 있고, 세 번일 때도 있고, 일곱 번일 때도 있다. 

그게 신뢰를 연습하는 데 더할나위 없이 좋은 방식이다. 

항상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예측 불허의 방식으로 움직이신다. 

그분은 모든 방식에 열려 있다. 

그분의 백성은 다만 그분을 신뢰할 뿐이다. 

 

코로나 속에서 많은 것들이 변화되었다.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움직임이 이제 시작되었다. 

앞으로도 많은 변화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변화들 속에서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그분을 신뢰하면서

그분께 순종하면서

그분을 사랑하면서… 

 

신간훈이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새로운 간사들이 오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웃음으로 견뎌낼 수 있는 간사들이다.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빗속의 준마들과 달려도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길 축복한다. 


하나님, 

마치 패배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때에

엘리야의 사역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을 떠나 사르밧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주님, 저와 우리 간사님들이 주님을 신뢰하며 달려나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고난 속에서도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도록 도우소서. 

고난 속에서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레미야에 대한 책이지만, 엘리야에게도 어울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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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가장 인간적인 예언자로 평가받는 예레미야. 그의 삶을 통해 듣는 온전함과 탁월함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 성경과 현대를 넘나들며 예레미야서를 깊이 묵상하도록 집피된 이 책은 우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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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나를 위해 펼쳐 놓으신 길로 달려가겠습니다.”(시편 119:32)

2021년 10월 26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8유다의 아사 왕 제 이십육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디르사에서 두 해 동안 다스렸다.

9그러나 엘라의 신하이며 병거부대의 절반을 지휘하는 시므리 장군이, 엘라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때에 엘라는, 디르사에 있는 아르사 궁내대신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는데,

10시므리가 들어가서, 엘라를 쳐죽였다. 유다의 아사 왕 제 이십칠년에, 시므리가 엘라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11시므리는 왕위에 올라서, 바아사 가문에 딸린 사람은 모두 죽였는데, 바아사 가문의 남자는, 일가 친척이든지 친구이든지,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다.

12시므리는, 주님께서 예후 예언자를 시키셔서 바아사에게 말씀하신 대로, 바아사 가문의 모든 사람을 멸망시켰다.

13이것은 바아사와 그의 아들 엘라가 지은 모든 죄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분노를 샀다.

14엘라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다 기록되어 있다.

15유다의 아사 왕 제 이십칠년에, 시므리는 디르사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나, 그의 통치는 칠 일 만에 끝났다. 시므리가 엘라를 살해하고서 왕위를 차지할 그 무렵에,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에 속한 깁브돈을 치려고 포진하고 있었다.

16그러나 진을 치고 있던 군대는, 시므리가 반역하여 왕을 살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바로 그 진에서 그 날로 군사령관인 오므리 장군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

17오므리는 온 이스라엘을 이끌고 깁브돈으로부터 올라와서, 디르사를 포위하였다.

18이 때에 시므리는, 그 성읍이 함락될 것을 알고는, 왕궁의 요새로 들어가서, 그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도 불에 타 죽었다.

19이것은 시므리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행을 하고,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가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한 그 죄 때문에 생긴 일이다.

20시므리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꾀한 모반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

21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둘로 나뉘어,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라 가서 그를 왕으로 삼았고, 그 나머지는 오므리를 따랐다.

22그러나 오므리를 따르는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르는 백성보다 강하여서, 디브니는 살해되고, 오므리는 왕이 되었다.

23유다의 아사 왕 제 삼십일년에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열두 해 동안 다스렸는데, 여섯 해 동안은 디르사에서 다스렸다.

24그는 세멜에게서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사마리아 산지를 사들였다. 그리고 그 산에다가 도성을 건설하였는데, 그 산의 소유자인 세멜의 이름을 따라서 그 도성의 이름을 사마리아라고 하였다.

25오므리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는데, 그 일의 악한 정도는 그의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였다.

26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걸은 모든 길을 그대로 따랐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고, 또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

27오므리가 한 나머지 행적과 그가 부린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28오므리는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서 사마리아에 묻히고, 그의 아들 아합이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반역이 반역을 낳고 그 반역이 또 반역을 낳는다. 

반역이 일상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반역을 꿈꾼다. 

왜냐하면 자기가 왕이 되고 싶어하니까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자신이 왕이 되어 맘대로 하고 싶어한다. 

인간 본성이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왕을 달라는 12지파들에게 분명하게 경고하셨다. 

그 왕으로 인해 백성들은 고통을 당할 수 있다. 

 

북이스라엘은 그야말로 개판이다. 

몇 년 사이에 반란이 몇 번씩 일어난다. 

그 와중에 외부와의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전쟁 중에 나가있던 오므리는 반역의 소식을 듣고서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다. 

시므리에게 왕권을 넘기느니 자기가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말씀을 읽다보니 이해가 안되는 구석이 있다. 

하나님은 바아사와 엘라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시므리를 사용하셨다. 

시므리는 7일간 통치를 했는데, 바아사와 엘라의 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 시므리를 오므리를 통해 심판하셨다. 

그런데 오므리에 대한 평가는 그전 왕들보다 더 심각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러움이다. 

선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심판하지 않으시고 

악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도 그렇지 않은가!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도 그렇지 않는가!

과연 도덕적 우위를 논할 수 있는 나라들인가? 

그저 힘만 강한 나라들 아닌가.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은 어떤 나라, 어떤 개인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선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일하시고,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특히 하나님의 통치에서 중요한 다섯 가지 요소가 있는데, 

통치의 방향인 에덴 비전의 회복, 그리고 통치의 방식인 부르심, 은혜, 약속, 심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운데 부르심과 은혜, 약속은 믿음의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통치 방식이라면, 

심판은 둘 다를 가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통치에 반기를 든 사람들과 조직들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든,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든 심판하신다. 그것이 성경의 역사다. 특히 구약은 이런 하나님의 통치를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북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했다. 

그들은 여로보암의 죄, 즉 자신보다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죄짓게 했기 때문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현실적인 심판, 즉각적인 심판의 결정도 내리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특히 하나님의 분노가 종종 느껴진다. 

좋은 왕도 오래가지 못하고, 못된 왕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긴다. 

하나님은 회복을 위해 선택된 민족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모습을 보며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하시다. 

그 고통과 슬픔이 예언자들을 통해 드러난다. 

예레미야가 애가를 지은 이유가 있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슬퍼하며 재에 않아 울어버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최근의 하나님은 슬퍼하시는 분으로 느껴진다. 

그분은 수많은 딜레마 속에 결국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시는 분이셨다. 

슬픔의 끝은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오랜 연민은 결국 우주적 결정을 이끈다. 

슬퍼하시는 하나님… 

슬픔의 하나님… 

숱한 인간사를 보면서 그분의 심장은 울고 있다.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들이 헤메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아… 하나님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들일 수 있는가? 

 

오늘은 그분의 슬픔에 나도 젖는다. 


슬퍼하시는 하나님, 

주님의 슬픔에 동참합니다. 

당신 백성을 향한 기대가 차츰 고통으로 바뀝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눈물로 가득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당신의 슬픔을 대변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깊은 연민에 잠깁니다. 

역사의 단편만 봐도 이렇게 슬픈데, 모든 역사를 아시는 당신의 눈에는 얼마나 슬플까요. 

주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 슬픔에 저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다만,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까지 몰아가고 싶진 않습니다. 

당신도 저의 한계를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 옆에 머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18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지휘자를 따라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다윗의 시]

 

1하나님,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내 기도 소리를 귀담아 들어 주십시오.

2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3주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는 견고한 망대이십니다.

4내가 영원토록 주님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겠습니다. (셀라)

5주님은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내 서원을 들어주시고,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유업을 내게 주셨습니다.

6 왕의 날을 더하여 주시고, 왕의 해를 더하여 주셔서, 오래오래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7주님 앞에서 우리 왕이 오래도록 왕위에 앉아 있게 하시고,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리로 우리 왕을 지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8그 때에 나는 주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노래하며, 내가 서원한 바를 날마다 이루겠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시이기도 하고 다윗을 위한 시이기도 하다. 

다윗 개인의 시이기도 하고 예배드리는 회중의 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시다. 

동시에 한 개인의 부르짖음도 들으시는 분이시다. 

고통받는 공동체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어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시고,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로부터 구해주시고. 페르시아에서 탈출시켜주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시켜주셨다. 

그러나 자칫 이런 큰 공동체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만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시인은 그 사실을 믿고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있다. 

다윗의 개인사에서 “부르짖음”은 큰 역할을 했다. 

사울에게 쫓길 때,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여서 죄로 인해 고통 받을 때,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부르짖는 사람이었다.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영성 중 하나가 부르짖음이다. 

상실과 외로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새 다른 것들이 그 부르짖음을 대체하였다. 

부르짖음 대신 숨어버린다. 감정을 무시한다. 예능으로 도배한다. 잠으로 도피한다. 

그분께 부르짖는 것을 천박한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순복음 전통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정말 고통스런 사람은 부르짖을 수 밖에 없다. 

악 소리 뒤에 찾아오는 간절한 “하나님”이라는 부르짖음이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하면 우리의 영은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상적이다. 

평온한 순간에 하나님이 떠오른다면 이는 참 멋진 신앙이겠으나,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이는 신앙의 기본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외부로 발산하는 물리적 소리의 여부가 핵심은 아니다. 

마음 속에서 크게 부르짖을 수 있다. 

있는 힘을 다해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심장의 소리다. 

가슴을 울리는 심장의 소리가 핵심이다. 

 

시인은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도 주님을 찾고 부르짖겠다고 고백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 문제를 풀겠다는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의 보호를 의지하고, 그분을 자신의 피난처요 은신처로 삼겠다는 의미이다. 

문제가 많고 스트레스가 많은 순간에 주님을 쉼터로 삼을 수 있는가? 

그분이 나의 진정한 쉼터로 여기고 있는가? 

오늘도 수많은 결정들 앞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겠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서 그 선한 영향력을 끝까지 미쳐야 한다. 

오늘 시편으로 노래 부르는 회중들은 다윗 왕이 선한 대리 통치자, 좋은 대리 통치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왕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선한 대리 통치자들을 귀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대행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죄에 빠지지 않도록,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제적인 시험에 들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며 살아가는 샤람들이 그 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기도와 응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주님,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부릅니다. 

나의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나님의 뜻을 잘 대행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세요. 

강인한 체력과 온유한 마음과 지혜로운 머리를 주셔서 상당히 복잡한 상황과 환경에서

주님의 뜻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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