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6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32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33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36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37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쓴 죄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42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주석]

35-39절. 세 번의 조롱 모두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라는 데 초점을 둔다. 조롱하는 자들은 구원자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전제하지만 누가와 독자들은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신다고 믿는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지도자들이 비웃으니 병정들도 조롱한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예수님의 머리 위, 십자가 상단에 붙여 놓았다. 

지도자들은 비웃고 병정들은 조롱했지만, 그 죄패는 예수님의 진짜 명패였다. 

그분은 유대인의 왕일 뿐 아니라, 이제는 온 인류의 왕이 되신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가는 왕의 대관식이다. 

십자가로 사탄의 전략은 파괴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정죄하고 기소하고 구형하려는 검사와 같은 역할은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휘장이 찢어졌다. 

인간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공로다. 

그분이 왕이 되시니 세상이 바뀌었다. 

죽음으로써 왕이 되신다.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아슬란처럼 죽으니 진정한 왕이 되신다. 

 

병사들만 조롱하는 것이 아니었다. 

옆에 달린 죄수 중 한 명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독한다. 

메시아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는 현실을 비꼰다. 

그 죄수도 참 할일이 없나보다.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가운데도 조롱과 모독의 말을 한다. 

자신의 죄를 알텐데, 참 경박하다. 

 

예수님이 불쌍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특히 죄수에 의해 모독을 받는 장면은 참혹하다. 

그분이 그럴 분이 아니다. 

이런 모독을 이기기 위해 땀에서 피가 나오도록 기도하셨나보다.

수치스런 순간을 견뎌내신다. 

 

과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도 수치를 견딜 수 있을까? 

 

[오늘의 기도]

숱한 고통과 수치를 이겨내신 예수님, 

당신의 수치를 통해 제가 자유를 누립니다. 

사단의 결박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귀신의 장난과 거짓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주님, 당신의 나라를 위해 수치를 당하게 될 때, 끝까지 견딜 힘을 주소서. 

주님을 바라보며,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소서. 

주님의 보혈을 경험하며 조롱과 수치를 이겨내게 하소서. 

 

몸과 마음을 항상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도와 주세요. 

주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건강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2월 20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1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신 일을 누가 다 알릴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누가 다 찬양할 수 있으랴?

3 공의를 지키는 이들과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

4 주님, 주님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들을 구원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5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번영을 보게 해주시며, 주님 나라에 넘치는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해주시며, 주님의 기업을 자랑하게 해주십시오.

6 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었으며,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7 우리의 조상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그 많은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바다 곧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

8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의 명성을 위하여, 주님의 권능을 알리시려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9 주님께서 홍해를 꾸짖어 바다를 말리시고 그들로 깊은 바다를 광야처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10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고, 원수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11 물이 대적을 덮으므로, 그 가운데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습니다.

12 그제서야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주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주석

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음(6절)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였다’ 이것은 그들과 동일한 죄가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죄성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사실까지 의미한다(IVP 성경주석).

 

시인은 주님의 이름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1-2절). 그 찬양은 은혜와 구원을 바라고 번영과 기쁨을 구하는 간구로 바뀝니다(4-5절). 시인의 세대 역시 조상처럼 죄를 짓고,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6절). 조상의 불신앙과 거역에도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셨고(7-11절), 그들은 다시 믿음과 찬양을 회복하였습니다(12절).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믿지 못하고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조상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신실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고 주님의 사랑을 거절한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시고 건지시는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의 시인의 역사 해석이 눈에 들어온다. 

7절이다. 

7 우리의 조상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그 많은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바다 곧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

시인이 보기에 이스라엘은 10가지 재앙의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주님이 그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홍해 앞에서 주님을 거역하게 되었다. 

원망하게 된 것이다.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했다. 

모세와 아론에게 절망의 목소리를 내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 그들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10개의 재앙으로도 이스라엘의 마음을 충분히 되돌리지 못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오늘 시인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인간의 죄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의 해석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기적으로도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사람들을 기적을 원한다. 

신비로운 것들을 원한다.

영적인 것들을 보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10가지의 위대한 이적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그 10가지 기적으로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몇 가지 기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여정을 통해 천천히 배워나간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린 속도로 배운다.

빠르게 배우는 것은 휘발성이 강하다. 

기적과 이적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충격 요법 같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근육을 키워야 한다. 신경세포만 키워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다. 

근육을 키워서 실제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하며,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어야 한다. 

기적을 넘어 일상을 버티고 유지하는 믿음으로 자라가야 한다. 

화려한 기적 만으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란 이래서 어렵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예수님은 줄곧 기적과 이적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언가를 더 요구한다. 

기존의 기적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기적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신비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일 이적은 요나의 이적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수님도 알았다. 

사람들의 요구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지 말이다. 

 

내가 내세울 기적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놀라운 기적을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도 더 큰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미신적이고 주술적이다. 

그저 다시 한 번 성육신을 떠올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한다. 

그 사건들 속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불순종이 아니라 불평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의 삶을 추구한다. 

그분 뜻에 따르고자하는 열망이 나에게 필요하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의 맏음을 더욱 자라게 해 주세요. 

눈 앞에 이적이 아니라 온 주에 영향을 주었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그려 내는 것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오늘도 여러 회의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1월 18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니,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입니다.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20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21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22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26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 본문도 그렇지만, 교회 분열에 대한 바울의 해법은 분명하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수많은 지혜가 있고, 아름다운 말들이 있으며, 매혹적인 디자인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일을 찾는다. 

그런 추구의 결과는 피할 수 없는 분열이다. 

서로 공통점이 없는 가운데 자신들의 열망을 분출하면 서로 분열될 수 밖에 없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다. 

십자가 중심성을 잃어버리고, 닻을 그곳에 내리지 않고,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에 집중했다. 

누가 더 설교를 잘 하는지, 누가 더 성경을 잘 풀어내는지, 누가 더 탁월한지, 누가 더 리더십이 있는지를 서로 비교하며 순위를 매긴다. 

그리고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의 장점과 강점을 강조한다.  

십자가라는 자기 부인의 용광로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깊이 느낄 때 흐르는 뜨거운 용암과도 같은 눈물의 세례를 거부하거나 잊어버렸다. 

그러니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로는 이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멋진 수사로 꾸며진 연설이 아니라 투박하고 괴팍한 듯 보이지만 하나님의 십자가에서의 처형이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지혜가 진정한 지혜이며 강력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지금 분열, 분쟁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 대부분이 세상의 지혜하고도 원래 멀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사람을 자랑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능력을 자랑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성취한 성과를 자랑할 일이 아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이 여전히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주목해야 한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이 말하는 바, 바울은 끝까지 주님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싶어한다. 

물론 다른 서신에서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한 것(빌립보서 3:17)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빌립보서에서도 바울은 바울 자신의 능력이나 탁월함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빌립보서의 핵심 주제인 "자기 부인"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려는 자신을 본 받으라는 것이다. 

즉 겸손하게 주님을 따라 살려는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도 비판/비난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끝까지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 내세우면 될 일이다’라고 말한다면 일면 동의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도한 완벽주의자의 비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이며 그분의 십자가이다. 

이걸 잊고 다른 몇가지 특징과 장점을 내세우려고 한다면 본질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순간적인 유행을 따를 수는 있다. 

사람들을 끌수 있는 계기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공동체가 가진 장점과 능력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 성령. 이런 요소가 본질로 다가가야 한다. 

그게 복음이다. 

 

복음이 더 잘 전달되기 위한 노력이야 끊어지지 말아야 하겠다. 

동시에 그 복음의 본질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잘 지켜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감당하는 것이 현장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의 몫이다. 

 

묵상하다보니 오늘도 조금 마음이 무거워진다. 

너무 어려운 일들을 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간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본질, 십자가의 본질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의 표현의 양식과 스타일과 플랫폼은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선도해야겠지만, 

복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복음을 중고생과 대학생에게 전하기 위해 그 외형에 변형을 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도록 도와주세요.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왜냐하면 그 두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질과 형식의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요? 

성령님 지혜를 주세요. 

성령님께서 역사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1월 17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10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

1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4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일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5 그러므로,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16 내가 스데바나 가족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마는, 그 밖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석

11절: 여기에 나오는 정보 제공자들은 고린도 아니면 에베소의 부유한 여인이었던 글로에에게 속한 대리자로서 두 도시 사이를 오가며 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비교적 신분이 높은 노예이거나 자유민으로서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이었던 그들은 바울에게 소식을 전했다. 소식이나 서신은 다른 사업을 위해 여행하는 사람들을 통해 가장 빈번하게 전달되었다(IVP 배경주석).


어느 곳에나 분쟁이 있다. 

싸움이 있고, 분열이 있고,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 

고린도교회에도 분쟁이 있었다. 

분쟁의 발단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몇 가지 유추해 볼 요소가 있다. 

먼저, 그들은 아볼로 편, 게바 편, 그리스도 편이라는 단어를 써가면 편가름, 줄서기를 하고 있다. 

둘째, 이는 세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바울은 자신이 매우 적은 소수에게 세례를 베푼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있다(14절)

이 두 가지 근거를 놓고 볼 때, 문제의 발단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문제의 전개 양상은 결국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에게 줄서기를 하고 편을 가르는 행위를 통해 교회 전체가 분열의 양상을 띄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자신을 그리스도 편이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그래도 중심을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중립을 지키면서 당시의 어떤 인물에게 줄을 서지 않고 예수님을 붙잡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평화의 중재자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들도 다른 분파처럼 자신들의 사람들을 모으고 의견을 주장하되 다른 사람들을 비판함으로 분쟁을 가중시켰던 점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로 편이 갈려 서로 의견이 충돌한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세례를 주러 고린도에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다고 한 발 물러선다. 

사실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명령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이 이 시점에서 자신은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본다. 

첫째, 바울은 현재의 분열과 분쟁이 세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세례를 받아 자신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둘째, 바울은 세례를 주는 것보다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그 복음의 핵심에는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셋째, 분열을 막고 새롭게 화합하기 위해서는 세례를 누가 주었는지 따지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보았다. 

 

확실히 이번 편지는 분열과 분쟁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많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이 유지되도록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사역자들의 책임이다. 

분열은 결국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분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분열은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이를 이어주신 예수님의 자기 희생적 중보를 무색하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헐게 한다. 

그리고 그 담을 허무는 일을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우리는 계속해서 담을 쌓는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과 다른 도덕과 윤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그래야 작은 운동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교회는 연합이 아니라 섹터와 된다. 

 

불의와 손잡을 수는 없다. 

거대 악을 묵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를 빼고, 나와 소수의 사람들을 빼고, 주변에 있는 모두가 거대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하다. 

그 순간, 사랑와 화해와 연합은 사라진다.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가?

오늘도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한다. 


예수님, 

주변에 분열과 고통이 참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마다 교회마다 분열이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볼 때마다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 명의 의견과 생각에 모두가 따라야 하는 전체주의나 독재 사회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서로 깊이 용납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계속되길 바랄 뿐입니다. 

주님, 우리 공동체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아픔과 슬픔이 가라앉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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