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7월 19일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51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53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54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55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56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NRSV

When the days drew near for him to be taken up, he set his face to go to Jerusalem(51절).

 

주석

문학적 전환부는 공동체의 포용성에 관한 질문,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공동체의 전달자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거절에 대해 하나님은 즉각 종말론적 심판으로 대응하지는 않으실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야고보와 요한 

야고보와 요한은 역시 예상대로 제자들 중에 핵심 리더십이었다. 

그들은 과거 소돔과 고모라를 찾아갔던 천사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 사람들에게 불이 내려 태워버리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자신들이 뭔가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예수님은 전도 여행 시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에서는 나오면서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신 적이 있다. 

 

누가복음 9:5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려서, 그들을 거스르는 증거물로 삼아라.”

 

그저 그렇게 소명을 이루며 나아가되, 그 사이에 영접하지 않는 것을 저주와 심판으로 대응하라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증거를 삼으라는 것이다. 

영적 책임을 다했다는 표시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한참 더 나갔다. 

한 마을을 불로 태워버리라고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예수님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다. 

물론 영접하지 않는 마을들에 대해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더 견디기 쉬울 만큼 그 고을들의 사람들이 당할 고통의 크기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 11:20그 때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기 시작하셨다. 21“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마을들에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쓰고서, 회개하였을 것이다. 22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화가 있다.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것은 나중 심판날을 예상하면서, 구약의 선지자 전통을 따라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지금 즉각적 심판을 명령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마치 그들이 심판자인 것처럼, 예수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아마도 화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예수님이 영광받으시러 가는 길이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에 대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생각이 달랐다. 

예수님은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이지만, 제자들 생각엔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공식화하러 가시는 줄 알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왕위 대관식을 하러 가시는 분의 앞길을 방해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분했다. 

원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했지만, 이렇게까지 분노를 폭발할 일은 아니다. 

예수님은 심판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러 가는 것이다. 

죽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간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가신다. 

제자들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린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마고의 귀를 떨어뜨렸던 베드로에게 그 칼을 집어 넣으라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폭력의 길이 아니라 순종의 길을 가신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왜 없으신가! 

예수님도 욕도 하시고 화도 내셨다. 

그러나 즉각적 심판을 미루시고 최후 심판까지 견디신다. 

가라지 비유가 그걸 말해준다. 

가라지가 보인다고 즉각 뽑지 않는다.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사마리아 지역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영접지 않았다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심판한다는 것은 과하다.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결국 제자들을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핵심 제자 3명은 예수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받는다. 

베드로도 “사탄아”라며 꾸짖으신 적이 있다. 

야고보와 요한도 지금 이 현장에서 꾸짖으신다. 

아마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사탄의 음성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즉각적 심판은 예수님의 옵션이 아니었다. 

그건 사탄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아끼고 곁에 두시는 제자들은 영적 교만의 위험에 항상 놓여 있다. 

교회에 지도자들은 항상 영적 교만의 위험에 놓여 있다. 

쉽게 분노하고 판단하고 정죄한다. 

거기로부터 나는 자유한가! 

 

[오늘의 기도]

오래참으시는 주님, 

저는 기분따라 말하고 기분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영적 교만에 젖어 사탄의 음성과 생각에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항상 주님께 묻고 주님의 뜻에 깊이 천착하도록 도와주세요. 

제 감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세요. 

한 템포 줄여서 감정을 다스리고 사탄의 음성에 노출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6월 13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섰다.

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10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11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ESV

And Jesus said to them, “I ask you, is it lawful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harm, to save life or to destroy it?(9절) 

 

주석

예수를 고발할 구실(7절) 안식일을 벌한 죄에 대한 처벌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누가는 이때부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음을 전하고 있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엿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살피고 엿보고 있다. 

직접 제자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멀리서 관찰하다가 이제는 좀더 가까이 와서 엿보기 시작한다. 

엿보는 것은 인류의 오랜 습관이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엿보고, 정탐하고, 스파이를 보낸다. 

가까이서 봐야 원수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제 예수님을 적대자로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비판을 주의깊게 들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알았다. 

예수님은 자신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은 자신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며 대적해야 할 대상이며 심지어는 사단에 속한 자로 인식했다. 

이제는 배척하고 살해하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엿보기 시작한다. 

과연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예수님은 그들을 멀리하지 않으신다. 

엿보든 말든, 그저 당신의 일을 하신다. 

도리어 당당하게, 대놓고, 고발할테면 고발해봐라 식으로 행동하신다.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치신다. 

사실 손마른 사람은 죽을 병이 아니다. 

다음 날 고쳐도 될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 

안식일 규정에 자유로우시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규정집으로부터 따로 걸어다니신다. 

 

언제나 사건은 안식일에 벌어진다. 

안식일 규정이 가장 눈에 띄는 규정이기 때문이다. 

안식일 규정은 한 번 어기면 쉽게 눈에 띈다. 

사람들이 재빨리 알아차린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을 적극적으로 노린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죽이려는 일을 한다. 

예수님은 비록 죽을 병은 아니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서로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말하는 바,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 

허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새롭게 해석해서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누가 옳은가? 

 

2. 분노

예수님이 촉발한 측면도 있지만, 바리새인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도 그렇지만, 당당히 율법을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예수님이 미치도록 싫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그 사실도 분노의 지점이다. 

왜 예수를 따르는가!! 

대중들은 그렇게 율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가!! 

그동안 율법학자로서 바리새인으로서 성경을 가르쳐 왔던 그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들의 활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유대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페르시아 시대에 예루살렘 성이 회복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이유를 알았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점일획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세 오경(토라)에 등장하는 명령문을 총 613가지로 정리했 놓았다. 

하라 식의 긍정 명령 248개, 하지 말라 식의 부정 명령 365개. 

대단한 노력이다.  

꼭 지켜야 하는 것들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민족을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율법을 어기는 듯한 예수님의 행동과 그분의 해석, 그리고 그런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바리새인들을 격노케했다. 

 

결국 그 분노는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모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분노는 살인을 낳는다. 

분노는 심리적 살인 뿐 아니라 결국에는 물리적 살인을 낳게 된다. 

가인과 아벨을 보라. 

아벨에게 분노하고, 아벨을 받아들여준 하나님께 분노한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분노도 무섭지만, 속으로 삭이는 분노도 못지 않게 무섭다. 

다윗의 충복 요압은 분노가 많았고, 결국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죽였다.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바리새인들처럼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무턱대로 분노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내 기준에 맞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안식일의 주인일 뿐 아니라 모든 날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나의 뜻에 그분을 맞추는 것은 에러다. 

그러나 나에게 맞추지 않는다고 그분께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 

그 분노와 짜증은 하나님에게만 향하지 않고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향한다. 

사랑이 원망과 분노로 바뀌는 현장이 바로 가정이다. 

가족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때로 마음이 닫힐 때가 있다. 

분노가 일 때가 있다. 

조심해야 하는 순간이다. 

나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 기독교가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매우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오늘의 기도]

인간의 높아진 기준을 무너뜨리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대로 성공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성공이 잣대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을 그 기준 안으로 포섭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의 성이 만들어지고, 그는 하나님이 되어 갑니다. 

개인도 조직도 그 길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인간의 기준이 앞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더욱 딱딱한 개인과 조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따뜻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게 도와주소서. 

주님과 더욱 따뜻한 대화를 많이 나누도록 도와주세요. 

저의 기준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기준으로 살아 가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2월 11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바로에게와 이집트 땅 위에 한 가지 재앙을 더 내리겠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에서 내보낼 것이다.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에서 너희를 마구 쫓아낼 것이니,

2 이제 너는 백성에게 일러서, 남자는 이웃에 사는 남자에게, 여자는 이웃에 사는 여자에게 은붙이와 금붙이를 요구하게 하여라."

3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감을 가지게 하시고, 또 이집트 땅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이 이 사람 모세를 아주 위대한 인물로 여기게 하셨다.

4 그래서 모세가 바로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밤중에 이집트 사람 가운데로 지나갈 것이니,

5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이 모두 죽을 것이다. 임금 자리에 앉은 바로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맷돌질하는 몸종의 맏아들과 모든 짐승의 맏배가 다 죽을 것이다.

6 이집트 온 땅에서,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큰 곡성이 들릴 것이다.

7 그러나 이집트의 개마저 이스라엘 자손을 보고서는 짖지 않을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을 보고서도 짖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나 주가 이집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였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8 이렇게 되면, 임금님의 모든 신하가 나에게 와서, 내 앞에 엎드려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백성은 모두 나가 주시오' 하고 사정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야, 내가 여기서 떠나겠습니다." 모세는 매우 화를 내면서, 바로 앞에서 나왔다.

9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아직도 더 많은 이적을 이집트 땅에서 나타내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10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서 이 모든 이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으셨으므로, 바로가 그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않았다.

 

NIV

The Lord had said to Moses, “Pharaoh will refuse to listen to you—so that my wonders may be multiplied in Egypt.”(9절).

 

 

주석

금과 은을 구함(2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 사람으로부터 금은 패물과 옷(다른 본문들에 언급됨)을 구하라고 지시하신 것은 십중팔구 그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을 위해 잔치를 벌일 것이라는 개념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그런 행사 때는 장신구를 걸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며, 이스라엘 종들이 그러한 사치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 이집트 사람들은 재앙 때문에 절망에 빠져 있었을 것이며, 잔치를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매우 협조를 잘 했을 것이다(IVP 배경주석).

 

최후의 재앙은, 재물을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고 싶을 정도로 바로와 이집트 사람들을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릴 것입니다(1-2절). 이집트 땅에 처음 난 것이 모두 죽을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받을 것입니다(5-7절). 그 후에야 바로의 신하들이 ‘나가달라’고 모세에게 사정할 것입니다(8절). 끔찍한 재앙의 예고를 듣고도, 바로는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더 많은 이적을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9-10절).

 

마지막 재앙은 모세와 아론의 중개나 아론의 지팡이를 거치지 않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께 끝까지 거역하는 인간 앞에 놓인 최후의 재앙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4절). 열 번째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모세를 부르셨을 때 하신 말씀(3:20-22)과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6:6)을 그대로 행하십니다. 주권자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과 뜻을 알리시고, 그대로 행하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내게 주신 구원과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실 것을 신뢰합니까?

 

[오늘의 묵상]

모세가 화를 낸다. 

하나님께 들은 재앙의 정도가 너무 심각하다. 

맏아들이 싸그리 죽게 된다. 

모든 가정이 제사를 치르게 된다. 

몇 명이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왕의 첫째 아들부터 시작해서 가축의 첫째도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런 재앙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재앙이다. 

한 마음, 한 지역이 지진, 쓰나미, 화산폭발 등으로 통으로 사라지거나 멸망하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별개의 가족들의 첫째 아들만 죽는다는 것은 자연현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며, 그야말로 신적 재앙이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재앙에 직면하도록 고집을 피운 파라오에 대한 분노가 모세에게 있다. 

모세는 화를 낸다. 

 

모세의 화는 생명이 죽어나갈 때까지 고집을 피우는 파라오에 대한 분노다. 

생명을 죽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우려도 섞여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대결구도 왔지만, 모세가 통로가 되어 그렇게 많은 생명이 죽어나가는 것에 대한 아픔과 고통이 함께 섞여 있겠다. 

모세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누구를 죽이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저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키고 약속의 땅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실지 꿈도 꾸지 못했다. 

파라오가 원망스럽고, 하나님도 원망스럽다. 

이런 학살에 가까운 죽음에 자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왜 양쪽 다 고집을 꺾지 않는가? 

하나님도 너무 하신 것 아닌가? 

모세는 화를 낸다. 그것도 극심한 화를 낸다. 

 

그동안 파라오와 이집트의 집권세력들이 펼쳤던 정책은 그야말로 살인과 학살과 다름없었다. 

히브리 부부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면 죽여버렸다. 

이것은 민족 말살정책이며, 살인이며, 학살이었다. 

이제 그 잘못에 대한 벌을 받는다.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사람들을 광야로 보내지 않으면, 그 끔찍한 죄에 대한 끔찍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고집을 피운다는 사실이었다. 

9개의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았고, 그 와중에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했지만, 여전히 파라오는 고집을 피운다. 

모세의 경고에도 꿈쩍이지 않는다. 

모세를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 의아하긴 하다. 

죽이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는가!

나 같으면 이판사판,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뛰어들어 모세와 아론을 죽였을 것 같은데, 그건 하지 못한다.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재앙을 고스란히 당하고만다. 

어리석은 것인가? 아님 어떤 자신감이 생긴 것인가? 

 

계속된 재앙에 대한 묵상이 내 맘과 몸을 무겁게 만든다. 

고집피우는 인간의 죄악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10가지 재앙이 가지는 효과와 의미를 알고는 있지만,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정말 없었을까 하는 의문도 올라온다. 

인간이 처한 상황이 이토록 고통스럽다니… 참 괴롭다. 

악한 권력구조가 가져다주는 이런 비참함에 참담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평범한 인간들의 딜레마가 괴롭다. 

재앙을 내리는 선두에 선 모세의 상황도 안쓰럽다. 

왜 그 자리에 서고 싶지 않았는지 이해가 된다.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니, 슬픔이 더욱 깊어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매일 매일 치고 올라온다. 

몸과 마음이 아파 일상이 버겁다. 

나도 화가 난다. 

모세의 화가 전이된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이 상황… 화가 난다. 

인류의 참담한 상황에 화가 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은 이상하게 화가 납니다. 

마음 속에 알지 못하는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무력한 인간인 제 모습이 안따깝고 화가 납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인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을 구해주시고, 이재민들을 살려주소서. 

위기에 빠진 인류와 지구를 살려주세요. 

당신의 계획을 실행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5. 16.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1:19-27] 

19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말하기는 더디 하고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20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25그러나 완전한 율법  자유를 주는 율법을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26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5
주부터 우리는 야고보의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참고 인내하라는 야고보의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적실한 메시지였음을 확인했습니다. 기독교 문화, 내부의 부패와 리더십의 부재, 코로나로 인한 공동체의 약화 등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그리스도인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시련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일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존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어진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분노를 더디하라

첫째, 분노에 조심하세요. 

어려움이 닥치고 시련이 몰려오면 분노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세계 그리스도인들도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공동체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힘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니까 분노를 하다보면 누군가의 말을 듣기 보다 자기 말을 빨리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분노하면 심장이 나대기 시작합니다.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 톤도 올라갑니다. 생각해서 말하지 않고 말을 하면서 논리가 만들어집니다. 때로는 공격적이고 감정이 섞인 논리적 비약이 있는 말도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감당이 안됩니다. 외부의 시련과 박해도 견디기 어려운데, 공동체 형제 자매의 분노의 폭언을 듣는 것은 더욱 상황을 힘들게 만듭니다. 

 

서점가에 보면, 분노하라는 메시지의 책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장하성 교수님은 그의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노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작가며 인권운동가인 스테판 에셀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제목이분노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의 불의한 문제앞에 분노해야 때가 있겠죠. 구약의 예언자도 분노했습니다. 예수님도 분노했죠. 그러나 그런 분노와 오늘 본문의 분노는 다릅니다. 뭐가 다르죠? 남의 말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가 다릅니다. 예언자의 분노나 예수님의 분노나 혹은 시대 인권 운동가의 분노는 남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생기는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분노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욕심에 이끌려 자기 열망의 좌절 때문에 생기는 화와 짜증을 곳곳에 다니면서 터뜨리는 사람들의 분노입니다. 

 

19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야고보는 듣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 발하는 분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 경청하는 사람들은 공감의 분노를 느끼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분노의 감정도 함께 느끼게 되죠. 때로 같이 화도내고, 전화도 하고, 문제제기도 합니다. 그런 분노는 그래도 정당화될 있는 공분이 있죠. 그러나 자신의 꿈과 목표, 욕구가 좌절되어서 불만이 쌓이고 쌓인 불만이 외부를 향한 분노로 폭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연발 속사포같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붓습니다. 때부터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는 자신이 우주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런 것이 공동체를 깨뜨립니다. 이런 분노는 연쇄적인 분노를 낳습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분노에 조심하라가 오늘 분문의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럼 번째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2. 말씀을 듣고 행하라

둘째, 말씀을 듣고 행하십시오. 

 

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시련과 고난 속에서 분노할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행하는 힘을 쏟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얼핏보면 분노에 대응하는 단어가 온유한 마음으로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맞죠. 그러나 메시지의 무게로 보면 분노에 대응하는 단어는 말씀을 듣고 행하라입니다. 분노하지 말고 구약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구약과 예수님의 말씀을 해설하는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라는 말입니다. 듣지만 말고 행동으로 옮기라고 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일종의 폭력적 행동입니다. 이걸 치유하고 대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라는 겁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고, 얼굴에 밥풀이 묻었다는 것을 거울을 통해 봤으면서도 금방 잊어버려서 밥풀을 떼지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22-24).

 

23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듣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운동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정기적으로 보겠다는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결심은 변화를 낳는데, 변화라는 것이 나의 습관과 관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새로운 습관과 관성이 생길 때까지는 본성적 저항과 거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렵죠. 그럼에도 우리는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지난 재정 강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걸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것입니다. 

 

분노하지 말라가 번째,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럼 번째는 무엇일까요? 

 

3. 경건

셋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십시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보았습니다. 바로 당시의 고아와 과부였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전쟁은 수시로 일어나고 밝혀지지 않은 범죄가 빈번했습니다. 남편,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과 과부들은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지금과 비교할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는 같습니다. 자기를 위해 분노하지 말고,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 죽음으로 몰리는 사람들을 위해 분노의 감정을 승화시켜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분출하십시오. 이것이 경건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좋은 경건입니다이렇게 말입니다. 경건은 말씀을 듣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데, 실천의 방향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어제 송청 운영위원회에서는 지난 겨울 수련회에서 전재윤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 그리고 지난 설성호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재정적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도울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펀드 혹은 기금을 조성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작은 실천이지만, 조금씩 시도해보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함께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4. 나가며 

야고보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전체가 통으로 엮여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뚝뚝 끊어져서 무슨 잠언집 같고 명언집 같은 인상을 주는데요, 야고보 시대의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야고보의 위치를 고려하면서 읽으면 점점 통합된 의미들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곱씹는 맛이 있는 편지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분노하지 마라, 말씀을 듣고 행하라, 그리고 참된 경건으로 나아가라. 이렇게 가지 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로 다가가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제대로 듣지도 않고 분노하고 짜증내는 우리의 성향과 죄성을 주님께 아뢰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우리 주변에 고난 받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도울 있는 우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요사이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요?     

 

2. 참된 경건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와 우리 공동체에게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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