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가다가, 들에서 오는 시몬이라는 한 구레네 사람을 붙들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27 백성들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서 예수를 따라 가고 있었는데, 여자들은 예수를 생각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28 예수께서 여자들을 돌아다보시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

29 보아라, ‘아이를 배지 못하는 여자와,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태와, 젖을 먹여 보지 못한 가슴이 복되다’ 하고 사람들이 말할 날이 올 것이다.

30 그 때에, 사람들이 산에다 대고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라’ 하며, 언덕에다 대고 ‘우리를 덮어 버려라’ 하고 말할 것이다.

31 나무가 푸른 계절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하거든, 하물며 나무가 마른 계절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주석]

26절. 로마 군인들은 어떤 사람이든 뽑아서 자신들을 위해 물건 나르는 일을 시킬 수 있었다(IVP 성경배경주석).

31절. 만일 이런 것이 로마인들이 무고한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이라면, 죄가 있는 예루살렘의 운명은 얼마나 더 비참하겠는가(IVP 성경주석).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은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게 함락된 동안 일부 지도자가 자행한 끔찍한 일을 예견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시몬은 그 아침에 들에서 오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들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을까? 

무슨 이유건 지나가다가 로마 병사들을 만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들고 골고다 언덕을 끝까지 올라가실 상황이 아니다. 

몸은 만신창이다. 

너무 맞아서 피가 온 몸에 흐른다. 

목수 출신인 그분의 근육은 뼈조각이 박혀 있는 채찍으로 갈기갈기 찢겨졌다. 

힘을 쓸 수가 없다.

몇 번이고 쓰러지신다. 

주변에는 흐느끼는, 통곡하는 여인들의 울음 소리로 가득하다.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건장해 보이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는다.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한다. 

 

구레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와 있다. 

북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이라고 하는데, 예루살렘과는 상당히 먼 거리다. 

유월절을 맞아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까지 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얼떨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다. 

오랫동안 여행 혹은 순례를 하면서 지쳤을 법한데, 그는 타의든 자의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뒤따른다.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왜 저 사람은 십자가 형을 받았을까? 

그런데 왜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이렇게 울고 있는가? 

살인자, 범법자의 사형 집행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울일은 아니지 않는가? 

만약 십자가가 정치범들에게 내리는 형벌이라면 더욱 이해가 안된다. 

정치범을 위해 울면 그것 또한 반역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함부로 울 수 없는 상황에서 통곡의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이상한 상황에 어리둥절하다. 

의문만 깊어간다. 

 

예수님은 알듯모를듯한 말씀을 하신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신다. 

미래에 일어날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만, 당시의 어떤 사람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파괴와 고통이 너무 심해서 산과 언덕 보고 외치게 된단다. 

“우리에게로 넘어져서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소서…”

극심한 고통에 생명을 끊어버리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게다가 그 파괴가 봄 여름이 아니라 건조하고 추운 날에 일어난다면 그 고통은 더 심해질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시는 예수님의 예언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우는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울음을 그치라고 말씀하셨다 생각했을 것이다. 

힘없는 상황에서도 뒤를 돌아보며 말씀하신다. 

꽤 긴 호흡으로 말씀하신다. 

쉽지 않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예루살렘의 백성들의 고통을 슬퍼하시는 것 같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는 것을 내다보며 슬퍼했던 것과 비슷하다. 

AD 70년에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함락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예루살렘의 영광은 사그라들고, 예수님의 교회가 전 세계로 퍼진다. 

 

구레네 시몬은 이 모든 말씀과 행동을 주의깊게 살핀다. 

시몬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린다.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단는 소식이 들린다. 

시몬은 이 모든 일에 증인이다. 

그는 예수님이 흘리는 피를 보았고, 그 피를 밝고, 그 피를 뒤집어 쓰고(십자가에 묻은) 예수님을 따랐다. 

우주적 사건이 일어난 그날 시몬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수제자 시몬 베드로는 멀찍어 떨어져 있었지만, 처음 보는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과 죽음의 길을 걸었다. 

이 경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명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구레네 시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알렉산더와 루포였다. 

그들은 나중에 로마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구레네 시몬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내까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했다. 

어떻게 죽으셨는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 

때로 주님의 피로 몸과 마음을 덮고 싶다. 

더욱 정결하고 순결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저의 이름을 불러주셨던 하나님, 

그 부르심이 생생히 들리는 듯 합니다. 

제가 주님을 부르듯, 주님도 저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감동합니다. 

그저 불러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새힘을 달라고 간청했더니, 

정결하라 하시고, 

예수님을 사랑하라 하시더니, 

이제는 제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정결이 새로운 힘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함이 새로운 힘입니다. 

주님이 불러주시는 그 음성이 새로운 힘입니다. 

그 힘을 얻어 다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로 나아갑니다. 

 

매일 매일 힘차게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저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9월 15일 금요일

여는 기도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18 어떤 지도자가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1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20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21 그가 말하였다. “나는 이런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3 이 말씀을 듣고서, 그는 몹시 근심하였다.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이었다.

24 예수께서는 그가 [근심에 사로잡힌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26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2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28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버리고서, 선생님을 따라 왔습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30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주석]

18절.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태도에 대한 동일한 주제가 계속된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24절) 혹은 구원받는 것(26절)과 동일하다(IVP 성경주석). 

 

22절. 예수님은 마지막 두 동사가 아니라 처음 두 동사(“팔라”, “나누어 주라”)에 약속을 덧붙이신다(“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토라를 해석한 것이거나 토라를 넘어선 것인 이 요구로 인해 관리는 근심에 빠진다.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몇몇 바리새인들 그리고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관심이 있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당대의 이슈를 몰고다니는 인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많은 기적을 베풀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한 이 인물에 대해 이 지도자는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는 못했다. 

선생님, 교사, 본받을 자, 위인일 수는 있지만 주인은 아니다. 

 

이 지도자의 관심은 영생을 얻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다. 

부모님 말씀, 랍비들의 말씀, 종교 지도자들의 말씀을 잘 지켜왔다. 

선생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공부도 잘 했고, 성실했다. 

지식 뿐만 아니라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었다. 

게다가 집안에 돈도 많았다. 

부족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왠지 모르는 불안함이 있었다. 

과연 이렇게 지내는 것이 영생을 얻는 방법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 불안함의 원인을 찾고 싶었다. 

예수님의 질문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분석이 끝났다. 

핵심은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이 젊은 지도자이자 부자는 이 제안을 따를 수가 없었다. 

많은 돈을 가진 사람에게 돈이 없는 삶을 상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돈이 없이 자신이 가진 권한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없었다. 

 

때로 예수님은 급진적인 제자도를 요구하신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역사 속에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보장된 성공을 포기하고 선교에 뛰어 들었던 영국의 젊은이들이 그랬다. 

의대를 졸업하고 미지의 땅으로 선교하러 갔던 젊은이들이 그랬다. 

그래서 이곳 한국에도 하나님이 알려지고 예수님의 복음이 심겨진 것이다. 

 

캠퍼스 선교사로 헌신 할 때는 그런 급진적인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새 20년 넘게 있으면서, 이제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 

젊은 날 제자로 살겠다고 결심한 것은 부르심에 합당한 결정이었다. 

좋은 기독인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30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받을 것이란 말의 의미일 것이다. 

착하고 헌신적인 주님의 백성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과 대체로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것은 참 좋은 일이다.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또 다른 헌신으로 부를 수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이 들어 또 다른 길로 부르신다면, 그건 그대로 의미있는 것이니 주님의 부르심대로 살아가야 할 일이다. 

도리어 젊을 때보다 더 힘든 포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진 것이 많아졌기에 포기하기도 어렵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분을 좇아 사는 삶. 

나이가 들었다고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분의 부르심을 더 깊이 들어야 하는 이유다. 

 

 

[오늘의 기도]

주님, 

주님을 따르는 삶을 계속 추구하게 하소서. 

나이가 들었다고, 거만해지거나 나태해지지 않게 하소서. 

겸손히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게 하소서. 

진정한 즐거움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소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가장 즐겁습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는 삶이 가장 보람됩니다. 

주님으로 인해 변화되고 회복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저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그 소망으로 인해 오늘도 살아가게 하소서. 

작은 즐거움도 중요하지만, 더 큰 즐거움을 대망하게 하소서. 

주님을 위해 오늘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7월 20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57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5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59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6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61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62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The Message

Jesus was curt: “Are you ready to rough it? We’re not staying in the best inns, you know.”(58절)

 

주석

59-60절. 예수님은 또 다른 제자를 부르시고, 예수님에 대한 헌신은 가정에 대한 헌신을 넘어선다고 급진적으로 묘사하신다. 이 말씀은 사실상 모든 고대의 가치 체계에 위배되는 것으로 풀이된다. 고대의 가치 체계는 친족의 장례를 요구했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스스로 따르겠다고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명령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12제자들 외에도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수많은 부르심이 있었지만, 누가는 대표적인 세 가지 예시를 든다. 

 

1. 따르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거처를 책임져 줄 수 없는 사람임을 밝힌다. 

여우도 새도 거주할 장소가 있는데, 예수님은 허구한 날 여행이다.

정처가 없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한다. 

그래도 따라오겠는가? 

때로 밥도 제대로 못먹고 때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여러 위험에 놓여 있음에도 따라 오겠는가?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한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알았다.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브리스가와 아굴라, 디모데, 바나바…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이런 정처 없는 삶을 살았다. 

주께서 부르시면 가는 것이다. 

주의 부르심대로 살아 가는 것이다. 

 

따르겠다고 하면 "얼씨구나 잘 왔다" 이렇게만 말할 것 같지만, 예수님은 현실을 말해주셨다. 

그리고 이것은 때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열정을 품는 사람들이 항상 점검해야 할 부분이다. 

예수님은 예수 따르미의 삶이 순탄치 않음을 보여주신다. 

 

2. 나를 따르라. 

두 번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먼저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순서요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건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패륜적 명령이다. 

누가도 이 명령이 얼마나 자극적이었으면, 이렇게 기록에 남겼을까? 

예수님이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리가 없다. 

예수님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제안하신다. 

누구에게는 현실을 살펴보라고 한다. 

누구에게는 빨리 따라오라고 하신다. 

누구에게는 마을 사람들에게 가보라고 하신다. 

누구에게는 알리지 말라 하신다. 

누구에게는 온 동네에 소문 내도록 허락하신다. 

천편일률적이지 안다. 

케바케다. 

장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지금 “너”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때로 이런 급진적인 명령을 내리시는 경우가 있다. 

 

때로 예수님은 선교사로 나가라고 하신다. 

때로 예수님은 목회를 그만두하고 하신다. 

때로 예수님은 이 교회를 그만두고 저 교회로 이직하라고 하신다. 

이게 예수님의 방식이다. 

 

3. 나를 따르라. 

세 번째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따라 오라고 명령하신다. 

그는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따라오겠다고 한다. 

이 정도도 못 기다려주시는가? 

그저 "좋다, 그렇게 하렴"이라고 말씀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은 가혹하다. 

이 사람이 언제 안 따르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인사만 하고 오겠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12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따르라는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했었다.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아버지를 놔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물론 최종적으로 예수님과의 여행에 합류했던 것은 조금 후에 일이긴 하지만, 최소한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할 때는 매우 즉각적으로 따라 나섰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과 명령을 생각할 때, 그분의 요청에 대해 조금이라도 주저함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 속 번민이 많이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혹은 예수님은 지금 이 사람의 속 마음을 간파했을 수도 있다. 

따르겠다고 앞에서는 말하지만, 가족들을 만난다는 핑계로 일단 지금 이 자리를 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려고 하지만, 이 사람은 주저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앞으로 뻗어나가야 하지만, 이 사람은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달려나가는 삶, 그 가운데 자신의 삶과 사역을 돌아보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이 분명한데, 자꾸 주저하는 태도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는 않다. 

 

각 사람마다 각 특징대로 부르신다.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나를 부르신 방식과 다른 사람을 부르신 방식이 다르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사역에 있어 중요하다. 

그 사람의 독특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이 분명한데, 그분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시는데, 여전히 한 곳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다. 

참 복이 있다면 부르심의 현장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의 현장에서 기쁘고 즐겁게 사역하는 것이다. 

서로를 비난할 필요가 없다. 

서로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 

참 복은 그분의 부르심에 자리에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욕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으로 살아간다. 

때로는 슬픈 일도 있고, 고통스런 순간도 있지만 불러주신 분을 위해 살아간다. 

 

나는 어디로 부르시고 계신가? 

 

[오늘의 기도]

저를 부르신 주님, 

그 부르심에 맞게 오랫동안 한 방향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다시 부르심의 방향을 확인해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어디로 부르시는지 그 방향을 알게 해 주세요. 

저 혼자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을 제대로 알게 해주세요. 

객관적인 부르심의 요소를 발견하게 하소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의 부르심의 요소도 발견하게 하소서. 

 

저는 참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나의 욕심과 욕망으로 살아가던 때와 비교해서 

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더 제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고통스러워도 사랑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 계속 예수 따르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6월 08일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27 그 뒤에 예수께서 나가셔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28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많은 세리와 그 밖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서, 그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먹고 있었다.

30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31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ESV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to repentance.”(32절)

 

주석

세리(27절) ‘세리’는 로마인을 위해서 일했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그들을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했으며, 그들이 동족 유대인을 착취해서 자기들 주머니를 채웠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었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레위 

마태라고도 하는 세리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이상하다. 

예수님이 따라오라는 단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간 인물이다. 

세관에 앉아 있다는 말은 업무 중이라는 말이다. 

로마에 복역했지만, 그만큼 직업 안정성이 뛰어나고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자리다. 

똑똑해야 하며, 처신을 잘 해야 한다. 

비록 동족들에게는 미움을 샀지만, 그렇다고 그 선을 너무 넘으면 척결 대상 1호가 되니, 선을 잘 지켜서 처신해야 했다. 

로마 관원들에게도 밑보이지 않아야 한다. 

동족들에게도 적당히 봐주기도 하면서 나름의 관계맺는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직장에서 일하다말고 예수님이 부르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예수님만 초대한 것이 아니다. 

다른 세리들, 그리고 다른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초대했다. 

거대한 잔치가 마련되었다.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고, 누군가에게 빼앗은 경우에 4배나 갚겠다고 했던 것은 아마도 레위에 영향이었을 것이다. 

레위는 예수님이 좋았다.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드시는 것과 쉬시는 것이 맘에 들었다. 

다른 세리들도 즐거워했다. 

소위 메시아라는 분이 자신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레위 근처에는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같이 했다. 

어부들은 세금을 바치는 사람들이었고, 레위는 세금징수자였다. 

어색하지만 그들은 이제 함께 있다. 

큰 무리가 모여서, 집 안팎에 자리를 잡고 서로 웃고 떠들면서 잔치를 벌인다. 

잔치에는 포도주가 빠지지 않는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만 포도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잔치를 벌일 때마다 포도주가 가득했다. 

특히 레위는 세관원으로서 부자이기도 했고, 때로 포도주로 세금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고급 포도주가 나올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환호가 쏟아진다. 

잔치 자리에서는 예수님도 흥겹게 즐기셨다. 

사람들을 치료하시는 일은 잠시 쉬었다. 

예수님을 만나러 왔던 사람들 중에는 얼떨결에 잔치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새롭게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에 대해 의아해하면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고 여겼다. 

세리가 회개하여 새로운 메시야 운동에 제자가 된 것이다. 

 

2.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함께 잔치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점점 불편해졌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죄인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세리는 죄인이었다. 

동족들을 팔아 넘기는 죄인. 

이스라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앞잡이. 

세리나 창녀는 로마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경멸했던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라고 불리는 예수가, 그것도 자신의 입으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예수가, 죄인들을 멀리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마뜩치않았다. 

불평했다. 

예수님에게 대놓고 불평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첫 제자 4명에게 불평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약간 들리게 말한 것 같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제자들에게 말했지만, 예수님에게도 들렸다. 

그리고 잔치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죄인”, 이 단어를 듣자마자 시선이 쏠렸다. 

모두 그 단어에 알러지 반응을 보인다. 

사실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히면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숨을 죽이는 사람도 있고, 씩씩거리는 사람도 있다. 

남의 잔치에 와서 흥을 다 깨고 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의 말소리를 듣고, 조금 큰 소리로 대답하신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예수님의 말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바리새인들은 꼬리를 내린다. 

자기가 그런 소명을 가지고 왔다면, 받아들일 일이다. 

바리새인들 기준에서, 그런 소명을 가진 사람은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결론 지으면 그만이다.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다라고 결정하고 원래 하던 일이나 하러 가면 된다. 

남의 잔치 자리에서, 술이 거하게 들어간 자리에서, 괜히 더 싸움만 커지면 자신들에게 손해다. 

바리새인들 고정관념엔, 하나님은 의인을 찾으신다. 

노아나 욥이나 당대에 의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인들을 그저 제거해버리는 분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예수라는 작자가 죄인들, 병든 사람들을 위해 왔다고 하면, 그건 좋은 일이다.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이 회개해서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된다면, 그래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 중심으로 들어오다면 그건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완전 땡큐다. 

그러니 그건 그대로 넘길 일이다. 

다만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만 부정하면 된다. 

 

문제는 예수가 계속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면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그건 용납할 수가 없다. 

이 자리에서는 한 발 물러서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나 볼 일이다. 

메시아는 하나님 앞에 흠없는 존재로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하나님 나라로 세워가야 한다. 

과거 다윗이나 솔로몬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 

오랜세월 주변 강대국에게 먹혀 하나의 나라 구실도 못하게 된 이 시점에, 거룩한 메시아가 등장해서 예언을 성취하고 이스라엘 부귀영화를 가져다 주어야 한다. 

그런데 죄인인 레위 같은 사람과 어울리면서 메시아라고 주장한다고!! 

기가 막힐 일이다. 

 

이 지점에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차이였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사회적 낙인자들을 모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는 것이다. 

죄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의 제자, 통치자로 서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베드로는 아주 멋진 고백을 했다. 

바로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에 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명받아 회개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 

베드로도 그렇고 레위도 그렇고… 죄인들이 회개하여 제자가 된다. 

 

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운동에 지분이 없다. 

베드로, 마태, 바울 모두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죄인이었다. 

원죄의 교리를 굳이 들이대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러니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자신의 욕심대로, 욕구대로, 바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 

마음을 고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로 만드신다. 

마음을 회복시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만드신다. 

의사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을 기억한다. 

의사이신 그분께 내 마음의 수술을 맡긴다. 

내 마음을 고치시고 새롭게 해주셔서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의사로 오신 예수님, 

제 마음을 고쳐주세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존재로 성장하게 해 주세요. 

마음은 언제나 탈이 납니다. 

단순히 여러 감정을 느끼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발하는 마음이 들어옵니다. 

무기력해지고, 무심해집니다. 

주변의 어떤 요구에도 반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 오늘도 저의 마음을 고쳐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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