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28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8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9 "바로가 너희에게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라고 하여라. 그러면 지팡이가 뱀이 될 것이다."

10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갔다. 그들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였다.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 자기의 지팡이를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다.

11 이에 바로도 현인들과 요술가들을 불렀는데,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자기들의 술법으로 그와 똑같이 하였다.

12 그들이 각자 자기의 지팡이를 던지니, 그것들이 모두 뱀이 되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켰다.

13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가 고집을 부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석

이집트의 마술사(11절) 바로의 술객들은 징조와 꿈에 대한 문헌에 정통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문을 외우는 데도 전문가였을 것이다. 그들은 감응 마술을 행했을 것이며,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사용하여 신들과 영들에게 명령을 했을 것이다(IVP 배경주석).

 

주님의 말씀대로 모세는 아론을 통해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을 행합니다(8-9절).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같은 이적을 행했지만,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립니다(11-12절).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바로는 고집을 부리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13절).

 

드디어 주님이 ‘주님’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적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집트 마술사들의 능력을 압도했습니다(12절).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관념적이거나 교훈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 능력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으로 ‘주님’되심이 증명되어야 할 삶의 영역이 있습니까? 이를 위해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83세의 아론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모세가 찾아와서는 갑자기 파라오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꿈도 꾸지 못했었다. 단지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가해지는 고통스런 노동 강도를 바라보며 자신도 빨리 죽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느니 눈을 감고 말지. 

그런데 동생 모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세의 가족들은 미디안 사람들이었고, 모세의 히브리어 혹은 이집트어 수준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왕궁에서 살았던 모세가 양을 치는 목자의 복장으로 다가왔다. 

오랜 이야기를 끝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부르심에 대해 이해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 파라오에게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지난 몇 주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론 자신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파라오를 만났다. 

순전히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은 하나님께서 직접 아론에게도 말씀하신다. 

활은 시위를 떠났다. 

하나님은 아론의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신다. 

이상하다. 왜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고 아론의 지팡이일까? 

모세나 아론이나 나이가 들어 지팡이가 필요하다. 

그냥은 오래 돌아다니지 못한다. 울퉁불퉁한 산길, 오솔길, 오르막길, 내리막길에 지팡이는 유용하다. 

아니 유용함을 넘어 어느 순간에는 필수품이 된다. 

이제 모세뿐 아니라 마음 속에 의심이 있을 수 있는 아론에게도 확신이 필요했다. 

모세의 지팡이도 위대한 일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아론의 지팡이도 이적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적의 통로가 되는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면 그것 만큼 큰 믿음의 상징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아론의 지팡이는 항상 하나님의 이적을 상기시킬 것이다. 

항상 들고 다니는 지팡이가 하나님을 떠올리게 한다. 

그분의 부르심과 일하심을 기억하게 한다. 

아론도 이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가 된 것이다. 

 

현실에서 이것이 필요하다. 

답답한 상황에서 이것이 필요하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일하심을 상기시킬 나만의 지팡이 말이다. 

옷이 될 수도, 책이 될 수도, 차가 될 수도 있다. 

음식이 될 수도, 시간이 될 수도,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매일 사용하고 애용하는 그 무언가가 하나님을 떠올리고 그분의 역사와 능력과 부르심을 상기시킨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좋다. 

그분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다시 그분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만족한다. 

 

주말 아침, 뭔가 분주하다.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느낌. 

여전히 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느낌. 

여전히 뒤에 빠져서 관전자가 된 느낌. 

찝찝하다. 

그 지팡이가 내 손에 들렸으면 좋겠다. 

주님께 지팡이 하나 만들어 달라고 요청드린다. 

 

 

[오늘의 기도]

능력의 하나님, 

당신의 능력이 제 일상으로 밀고 들어오길 기도합니다. 

저를 향한 당신의 부르심을 매일 확인할 수 있게 도와 주소서. 

그 부르심에 따라 용기 있게 말하고 행동하게 하소서. 

 

주말이지만 부담스럽습니다. 

해야할 일들도 많고, 정서적 부담도 여전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안식의 순간을 허락하소서. 

몸과 마음이 쉼을 누리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6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4 모세와 아론의 조상은 이러하다.

이스라엘의 맏아들 르우벤의 아들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인데, 이들이 르우벤 가문이다.

15 시므온의 아들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가나안 여자가 낳은 아들 사울인데, 이들이 시므온 가문이다.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태어난 순서대로,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인데, 레위는 백삼십칠 년을 살았다.

17 게르손의 아들들은 가문별로는 립니와 시므이이다.

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인데, 고핫은 백삼십삼 년을 살았다.

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이다.

이들이 세대별로 본 레위 가문이다.

20 아므람은 자기의 고모 요게벳을 아내로 맞아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 아므람은 백삼십칠 년을 살았다.

21 이스할의 아들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이다.

22 웃시엘의 아들들은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이다.

23 아론은, 암미나답의 딸이요 나손의 누이인 엘리세바와 결혼하여,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다.

24 고라의 아들들은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인데, 이들은 고라 가문이다.

25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한 딸과 결혼하여, 비느하스를 낳았다. 이들이 다 가문별로 본 레위 일가의 조상이다.

26 이스라엘 자손을 부대별로 편성하여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은 이들이, 바로 이들 아론과 모세이고,

27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 달라고 말한 이들도, 바로 이들 모세와 아론이다.

 

모세와 아론의 족보는 아버지 아므람에서 그 위로 고핫, 레위, 이스라엘에 이릅니다(14-20절). 창세기 저자는 이스라엘 자손을 부대별로 편성하여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은 이들이, 바로 아론과 모세라는 것을 강조합니다(26절).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갈등이 고조되는 흐름에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끼어듭니다. 이로 인해 이야기의 흐름이 잠시 중단됩니다. 갈등을 겪거나 사람들로부터 지지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잠시 멈추어서, 내가 누구인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묵상]

최근에 족보를 찾아본 적이 있다. 

인터넷에 올라온 족보에 아직 내 이름이 제대로 등재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아버지께서 이미 올렸다고 하셨지만, 아주 오래전 종이로 족보를 정리하던 때의 일이다. 

누락되었는지, 아님 돈을 주고 인터넷에 등록해야 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이름이 내가 알고 있었던 가문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상한 감정을 가져다 주었다. 

서운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뭔가 빠진 느낌이 든다. 

과거 구한말, 족보를 사고 파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집도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왠지 정확한 뿌리를 알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누구로부터 왔는가? 내 조상들은 어떤 분들이었나? 

 

모세와 파라오의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여러모로 실망스런 상황 앞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경 저자는 이 상황에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꺼내든다. 

뜬금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먼저, 모세와 아론에게 필요한 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이다. 

흔들릴 만도 하다. 동족에게 의심받고 미움받고 있다. 

파라오는 꿈쩍도 안한다. 

모세입장에서 자신이 왜 80년만에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올만하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데,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그 이유 중 하나가, 자신들의 정체성 자체가 이스라엘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분명하게 레위-고핫-아므람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있는 집안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찾을 수 없는 집안 사람이 아니다. 

분명한 계통이 있고, 혈통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민족을 위해 섬겨야 할 필요가 생긴다. 

 

 

둘째, 모세와 아론의 부르심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한다. 

본문을 통해 창세기 저자는 모세와 아론의 부르심을 여러 번 강조한다.

특히 26-27절이 그렇다. 

 

26 이스라엘 자손을 부대별로 편성하여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은 이들이, 바로 이들 아론과 모세이고,
27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 달라고 말한 이들도, 바로 이들 모세와 아론이다.

 

주님의 분부를 받는 이들, 파라오에게 대담하게도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 달라고 말한 이들, 바로 모세와 아론이다. 

이 사실을 만방에 알리고 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 역할을 맡기신 사람, 소명을 준 사람이 바로 모세와 아론이다. 

이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다. 

여타의 다른 사람들의 공로로 대체할 수 없다. 

자신들의 쿠데타 시도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언론 플레이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왕궁에 있는 몇몇 유력한 히브리 정치인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구출의 최고의 기여자는 하나님이요, 그 다음이 모세다. 

그러니 역사를 왜곡하지 못하도록 아주 분명하게 적시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인류 구원도 그렇지 않던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인간의 계획과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셋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군대 형태의 체계를 세워서 광야로 나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부대별로 질서있게 광야로 나오기를 기대하셨다. 

효율적인 부대 편성은 지파별로, 가문별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쨌든 지파별 가문별 정리가 필요했다. 

족보 정리가 등장하는 이유다. 

 

그런데 이런 족보 정리가 자칫 파라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높다. 

안그래도 대규모의 민족 이동이 가져다줄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파급력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파라오는 이런 족보 정리로 인해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아 이들이 결국 군대를 편성하려고 하는구나.’

‘안그래도 자손들이 번성하던데, 이들을 방치하면 큰 골칫거리가 되겠구나.’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뜬금없어 보이는 족보 이야기의 의미를 찾아봤다. 

뜬금없어 보이는 이야기에도 의미가 있다. 

뜬금없어 보이는 사건에도 의미가 있다. 

숨겨진 의미를 찾아 보는 것도 신앙 생활의 재미다. 

하나님은 종종 뜬금 없이 행동하신다. 

그건 나의 생각의 프레임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넓은 시야를 가지신 분의 행동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템포 쉬었다 가라고 하시기도 하신다. 

멈춰두었던 계획을 새로이 펼치라고 하신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으로 길을 여신다. 

 

오늘도 뜬금없는 분을 기대한다. 

어떤 만남, 어떤 사건, 어떤 이야기들이 오늘 하루에 숨어져 있을까? 

혹시 내 족보 실종 사건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려나? 

 

 

[오늘의 기도]

참 뜬금없으신 주님, 

주님의 계획을 잘 알지 못하기에 주님의 인도하심이 뜬금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 뜬금없으심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아직도 이 부르심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또한 재밌습니다. 

주님을 따를 삶은 일종의 모험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작은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시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주님을 경험하게 하소서. 

주께서 숨겨 놓으신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 의미들을 발견하게 하시고, 

오늘 하루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큰 계획의 모자이크 한 조각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3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7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8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9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10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12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주석

젖과 꿀이 흐르는 땅(8절)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그 땅이 풍성한 목가적 생활 방식을 누렸음을 말하지만, 반드시 농업적인 면에서만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젖은 가축의 산물인 반면, 꿀은 자연 자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것은 아마도 꿀벌의 꿀보다는 대추야자 당밀을 의미할 것이다(IVP 배경주석).

 

하나님은 모세에게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십니다(7-9절). 그리고 이를 위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10절). 모세는 자격 미달을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11-12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나를 보내십니다. 내가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헌신할 영역은 무엇인지 기도하며 찾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을 똑똑히 보셨다. 

그들의 부를짖는 소리를 명료하게 듣고 계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잘 알고 계신다. 

오랫동안 진행된 가중된 고통, 그 한계를 넘어섰다. 

400년 중에 지난 100년이 가장 힘겨웠을 것이다. 

모세의 탄생 시점에 바로가 선보인 정책은 그야말로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는 정책이 입안된다는 사실이 도대체 믿기지 않는다. 

노예가 많이 태어나면, 그것도 남자가 많이 태어나면 노동력이 증가하고 군사력이 강화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정책을 편 것이 아니다. 

강대해진 번성한 히브리 종족이 무서웠기 때문에 그런 말도 안되는 정책을 편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00년은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리더로 왕궁에 있는 모세를 은근히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미스런 사건 때문에 히브리 세력은 이집트 왕궁에서 축출되었다. 

 

탄압 정책은 더욱 거세어 졌다.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였을 것이다. 

남자 아기들이 죽는 것도 그렇지만, 노동자들도 쉬지 않는 노동에 지쳐 금새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밤마다 죽어나가는 마을 사람들, 친척들, 특히 젊은이들을 보며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부르짖음의 소리가 매일 울려퍼진다. 

히브리 민족의 한계가 온 것이다. 

더이상 이집트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전에는 이집트에서 번성하면서 나름 인정받으면서 살 수 있을 것이란 꿈이 있었다. 

당당하게 이집트 왕국의 한 민족으로서 대접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란 비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야말로 씨가 마를 지경이다. 

몇 십년만 더 지나면 히브리 민족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이들을 구출하시기로 결정하신다. 

그리고 그분이 하실 일은 “내가 내려가서”(8절)이다. 

그분이 내려오신단다. 그분이 직접 이집트 땅으로 오셔서 히브리 백성에게 다가오신단다. 

또한 그분이 하실 일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12절)이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있음으로 이집트 땅에 내려오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신다. 

원래 아담과 하와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실패한 일을 모세에게 다시 시키신다.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 내려가셔서 고통 받는 히브리 노예들을 구출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신다. 

당신이 직접 일하시기도 하시지만, 결국 자신의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임무를 맡기시고, 그를 통해 사람들을 구출하고 구원하신다. 

예수님을 보내셨고, 사도들을 보내셨고, 바울과 바나바를 보내셨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한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악한 구조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 악한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이들을 구출하시러 하나님은 사람을 혹은 사람들을 보내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요, 구원의 역사다. 

신비로운 상상 속 세계가 아니다. 황홀경의 세계가 아니다.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지극히 현실에 뿌리박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요 그들을 위한 구출 역사다. 

 

어제 오늘 두 분의 장례식에 문상다녀왔다. 

82세, 84세. 

죽음을 맞으신 분들 앞에서 나오는 대화들은 또 다른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아픈 사람들, 암과 섬망과 침해 증세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 고통받는 사람들 옆을 지키고 돌보느라 또 고통받는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이런 고통에서 인류를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죽음으로 인한 절망이라는 고통에서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인간사에 내려 오셨다. 

죽음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악과 죄로부터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분이 오신 것이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러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오신 것이다. 성령님과 함께 오신 것이다. 

 

우리에게 모세는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이 또한 누군가를 부르신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하라고 부르신다. 

그 누군가가 나라면…

 

[오늘의 기도]

주님,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분들을 며칠 사이에 많이 보았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죽음으로 이끄는 사단의 세력도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구출하기 원하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제가 좀더 적극적으로 돕게 해주세요. 

주님의 구출작전에 참여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10. 10. 김혁수

 

[본문_창세기 11:27-12:5_새번역]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다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하란은 롯을 낳았다. 28그러나 하란은 그가 태어난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29아브람과 나홀이 아내를 맞아들였다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이고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이다하란은 밀가와 이스가의 아버지이다. 30사래는 임신을 하지 못하여서, 자식이 없었다.

31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하란에게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32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 1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으로 가거라. 2내가 너로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것이다. 3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5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0. 들어가며 

- 통치하시는 하나님?

일반적으로 국가 통치의 근간은 군사력과 경찰력입니다. 힘이 없는데 통치를 수는 없습니다. 최근 한국의 군사력이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4.5세대 전투기를 만들지 않나, SLBM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성공하지 않나, 현무 미사일의 중량과 사거리를 늘려서 정확하게 표적을 맞추는 시험에 성공하지 않나등등 한국의 군사력이 증강하고 있습니다. 군사력이 강해지면 주변국들이 함부로 침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안정되고 현재 권력에 대한 지지가 계속될 있는 겁니다. 경찰력도 마찬가지죠. 외국인들이 우리 한국에 오면 깜짝 놀라는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카페에 노트북과 핸드폰을 놔두고 화장실에 갔다오는 것이 그렇게 놀랍다고 해요. 늦게까지 공원에서 혼자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치안이 전세계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CCTV 영향도 있지만 강한 경찰력이 바탕이 되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의 범인 검거율도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생각할 , 하나님의 군사력과 경찰력을 먼저 떠올리지는 않습니다. 그럴까요? 힘과 무력으로 통치하는 방식은 그분의 통치에서 후순위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힘이 없어서, 군사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시기 때문이죠. 다른 방법이 우선순위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 통치의 방향_회복시키기

지난 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은 회복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분은 에덴의 모습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어색한 단어지만 회복주의자이십니다. 에덴에서의 샬롬, 평화를 다시 회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대리통치자인 사람을 통해 만물과의 평화를 도모하십니다.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회복이 그분의 통치의 방향입니다. 

 

오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 , 그분이 주로 사용하시는 통치의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을 읽어볼까요? 

 

1. 데라를 부르심 

1) 바빌로니아 우르(갈대아 우르)

본문에서 하나님은 데라를 부르십니다. 그럼 데라는 누구인가요? 노아의 아들 기억나시죠? , , 야벳. 첫째 아들 셈의 자손 중에 자녀가 많고 세력을 얻은 사람이 누구죠? 맞습니다. 에벨입니다. 에벨은 아들이 있다고 했죠. 명은 벨렉이고 다른 명은 욕단이라고 했습니다.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바벨론 사건과 벨렉을 연결하기도 합니다. 저는 니므롯과 벨렉이 바빌로니아에서 성과 탑을 만들다가 하나님의 개입을 받아 언어가 혼란스러워져서 세계로 흩어졌다고 조금 상상을 보태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살았던 벨렉의 후손이 바로 데라였습니다. 

 

데라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거대한 줄기 하류에 평야에서 당시 최고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우르는 지금으로 치면 서울의 강남 같은 곳입니다. 미국의 뉴욕 같은 곳입니다. 거대 도시에 최고의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장소죠. 데라는 그곳에서 바빌로니아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24:2). 그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였죠.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따르는 것이 세상 사는 지혜라고 있습니다. 

 

2) 가나안을 향하여 

그러나 하나님은 데라와 그의 맏아들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바빌로니아 우르 땅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부르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꿈에서 나타나셨는지, 아님 어떤 음성이 그의 귀에 들렸는지, 아님 어떤 글씨가 그의 벽에 쓰였는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오랫동안 살아왔던 바빌로니아 우르 땅을 벗어나 상류를 향해 떠납니다. 가나안 땅으로 직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가족과 가축들을 먹여 살리면서 이동하려면 강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그나마 안전했습니다. 

 

3) 데라의 결심과 한계  

데라의 결심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살던 땅을 떠나 이사를 결심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이곳 홍제동에 오랫동안 살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다음 달에 이곳을 떠나 강원도 정선, 태백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제게는 군대가 그런 느낌을 주는 번째 장소였습니다. 논산 훈련소로 가던 때가 아득합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기 위해 열차를 타고 용산, 석계, 의정부, 춘천으로 이동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역마다 정차했는데, 때마다 명의 훈련병들이 하차를 했습니다. 은근히 용산에서, 석계에서, 의정부 역에서 내리기를 그렇게 바랬습니다. 그런데 춘천 보충대에 잠시 입소를 했는데, 거기서 잠시 대기하더니만, 결국 저를 군대 트럭에 태워 강원도 인제 원통의 부대에 내려주더라구요. 거기서도 며칠 있다가 민통선에 아주 가까운 부대에 배치 되는가 싶더니, 이내 민통선 부대로 결국 데려가더라구요.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보였습니다. 군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민통선 안에는 민간인이 못사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다보니 언제든 죽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막막함, 두려움, 후회, 의기소침, 긴장아직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입니다. 

 

평생을 대도시에 살던 데라 가족이 강을 따라 1500km 이동했습니다. 전혀 모르는 땅과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계절의 바뀜이 바빌로니아와 다르다고 느낄 때마다, 사람들의 생김새와 말과 억양이 다르다고 느낄 때마다,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과 긴장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두려움과 막막함 때문에 데라는 하란에 멈췄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의 한계였습니다. 우르를 떠나는 것은 엄청난 용기였지만, 가나안 땅까지 가지 못한 것은 그의 한계였습니다. 

 

2. 아브람을 부르심 

1)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번째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데라와 아브람이 하란에서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지는 하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가나안이었습니다. 바빌로이나 우르에서 데라와 아브람은 그분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란에 멈췄습니다. 여정이 힘들었겠죠. 계속되는 이동과 이주가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데라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이제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2) 부르심의 목적_()복의 근원 

그런데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추측해 보면, 원래 데라와 아브람을 바빌로이나 우르에서 부르실 때도 목적을 갖고 부르셨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도 없이 그냥 고향을 떠나라고 말했을 같지가 않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내가 너로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것이다. 3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목적은 분명합니다. 아브람이 복의 근원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새로운 땅을 주고 민족을 이루게 해서 세계에 복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여러분, 계획은 무엇과 닮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에덴의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닮았습니다. 에덴이라는 땅을 주십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을 돌보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유사한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의 근원 방향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과 동일합니다. 바로회복의 시작점이라는 겁니다. 복의 근원은 회복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다시 원래의 에덴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일의 근원인 것이죠. 그게 복입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명예가 아닙니다. 즐거움이 아닙니다. 에덴의 비전의 회복 이것이 입니다. 

 

-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이 아닌 예루살렘 산지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성과 지구라트라는 거대한 신전이 회복의 근원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물이 귀한 가나안 산지, 예루살렘 산지가 새로운 회복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 주류에서 비주류로 

이것은 당시 주류에서 비주류로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도시와 성이 아니라 산지와 돌산이 새로운 회복의 근원이 됩니다. 거대한 강들 사이에 펼쳐진 비옥한 초승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아니라 산들 사이의 여러 군락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들의 소박한 문화에서 회복의 근원이 다시 싹트는 겁니다. 마치 거대한 로마 제국의 심장이나 사람들이 매년 모여 예배드리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작은 시골 마을 나사렛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 변방의 새로운 발견 

우리는 변방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작은 움직임에 주목하게 됩니다. 거대한 바빌로니아 우르의 사람들은 가나안으로 떠나는 데라 가족에게 어떤 관심도 없었습니다. 강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던 하란의 사람들도 아브람과 롯이 가나안으로 떠나는 것에 어떤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저 경쟁자 명이 사라진 것에 기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당 판교의 개발 사업에 뛰어들 경쟁자 명이 사라지면 자신들의 이익이 커질 것을 즐거워하는 투자자, 개발자들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고향을 등지는 데라와 아브람을 눈여겨 보십니다. 거대한 도시 문화를 버리고 험난한 생활로 들어가는 그들을 주목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에덴같은 풍족한 땅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회복의 근원으로 새로운 변방을 보셨던 것입니다. 

 

3) 옮겨다니는 회복의 근원 

역사적으로 회복의 근원은 지역을 계속 옮겨다녔습니다. 최초의 지성소였던 에덴, 노아의 방주가 멈췄던 아라랏 , 아브라함이 거처를 정한 헤브론과 예루살렘, 요셉이 총리로 일했던 이집트, 다니엘의 페르시아, 예수님이 나고 자란 나사렛, 바울과 바나바의 수리아의 안디옥, 수많은 감독을 낳은 로마와 비잔틴 제국. 솔직히 하나님은 작은 변방의 나라와 민족을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거대한 제국을 활용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변방만 사용하고 제국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가두는 행위입니다. 반대도 말이 안되죠. 제국만 사용하시고 변방의 민족은 업신여기신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회복의 근원은 가나안의 산지 헤브론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3. 부르심

1) 통치 방법

그러니 우리는 가지 결론에 도달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향은 회복이며 회복의 통치를 실천하기 위해 행하시는 번째는 바로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대리인을 부르시는 겁니다. 제사장 역할을 하는, 회복의 근원으로서 기능하는 사람을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심으로 통치를 시작하십니다. 

 

2) 직접 통치 vs. 대리 통치 

저는 언제나 지점에서 고민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 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부르시냔 말입니다. 당신의 말을 무조건 듣는 천군 천사를 활용하셔서 직접 개입하시고 직접 명령하시고 직접 판단하시고 심판하시지, 명령을 들을 수도 있고 듣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을 부르시냔 말입니다. 직접 통치하지 않으시고 대리 통치를 고집하시는 이유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가끔 짜증이 나려고 하기도 합니다. 시점에서 제가 말할 있는 것은 대리 통치 방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의 등장이 좋은 그림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말이죠. 

 

3) 은혜, 권한 부여, 그리고 약속 

부르심은 은혜로 시작하는 행동입니다. 노아건, 데라건, 아브람이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렇게 부름받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권한을 부여하시죠. 세상을 돌보고 다스릴 있는 권한입니다. 회복의 근원으로서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속을 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회복의 근원으로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시고 동시에 그렇게 하지 못하면 어떤 불행이 찾아오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상호 약속을 하십니다. “우리 해보자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렇게 그분의 부르심의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4. 나가며 

-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설교를 듣고 계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분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그분의 원대한 세계 통치의 동역자가 되게 하십니다. 힘과 무력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과 인격적 감화력으로 세상을 돌보고 다스리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과 희생과 인격적 감화력의 최선봉은 바로 예수님이시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면서 우리도 그런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군사력과 경찰력이 아닌 사랑과 희생과 인격적 감화력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하나님의 통치 방식과 세상의 통치 방식의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은 힘과 무력으로 통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심으로 통치를 시작하십니다. 회복의 근원이 되도록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겠다는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때로 내가 편하게 생각하던 곳과 환경을 떠나 새로운 , 익숙하지 않은 , 변방으로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어디로 부르고 계신다고 느껴지시나요?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하나님이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데라와 아브람을 부르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바빌로니아 우르에서는 목적을 이룰 없다고 판단하신 걸까요?      

 

2. 하나님은 나를 어디로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곳은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 곳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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