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6월 12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9  나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다가, 이 세상에는 권력 쥔 사람 따로 있고, 그들에게 고통 받는 사람 따로 있음을 알았다. 10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11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12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잘 되지만13  악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가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으며,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한창 나이에 죽고 말 것이다.”14  이 세상에서 헛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악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가 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다. 이것을 보고, 나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NIV

Then too, I saw the wicked buried--those who used to come and go from the holy place and receive praise in the city where they did this. This too is meaningless(10절).

 

메시지

이것이 바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힘을 갖고 있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다(9절).

 

[오늘의 묵상]

1. 허탈한 마음 

세상이 돌아가는 형국을 보면,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거나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도자는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다. 

상식과 염원에서 멀어진 세상의 이치. 

인과응과가 세상의 이치라면, 현실의 단면은 그 이치에 반한다. 

선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는 단순한 구도는 사람들의 바람의 투사다.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되는가!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 있다. 

착하게 살았는데 고통스런 일을 겪는 경우도 허다하다. 

악행이 선으로 둔갑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박수를 받는다. 

선행이 오해를 사서 억울함에 목숨을 내던지는 경우도 있다. 

모순 덩어리 세상. 

전도자는 이 세상의 모순을 깊이 자각한 사람이다. 

상식적인 바램이야 왜 없겠냐마는 바램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가 없다. 

세상은 모순과 역설로 가득하여 실망과 허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정직하게 세상을 바라보면 회의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2. 사람들의 말

12-13절에서 전도자는 일반 백성들의 말을 전한다. 

12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잘 되지만13  악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가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으며,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한창 나이에 죽고 말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거라는 요지다. 

그러나 이건 필부필부들의 말일 뿐이다. 

세태를 정확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선악의 결과가 만고불변의 법칙처럼 운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욥을 봐도 그렇다. 

아브라함의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윗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과응보의 원리로만 설명되지 않는 삶의 다양함과 복잡성이 있다. 

그러니 보편원리를 추출하려는 노력은 헛되고 헛되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차라리 낫다. 

헛됨을 말하는 전도자의 맥락을 따라가다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회의주의 시각도 하나의 관점이다. 

현상에 대한 집착도 결국 헛되다. 

차라리 영원한 하나님의 판단에 기대는 것이 현실을 살아갈 힘이다. 

현상의 관찰은 모순 덩어리이지만, 그 현상 너머의 보편적 원리가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 과학을 진보시켰다. 

모순이 새로운 원리를 낳는 원동력이다. 

전도서의 저자의 말에 대부분 동의한다. 

허나 거기에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차라리 바울의 생각으로 넘어가고 싶다. 

이 세상 만물이 죄로 물들었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완벽한 의인은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그 결과는 고통 뿐이다. 

모순도 그 고통의 일부다. 

그 모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모순까지도 만드신 우주의 창조주의 뜻을 따르는 것이리라. 

 

국가 지도자는 우주의 통치자를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은 헛된 것이 아니다. 

자기 중심의 생각과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기 혼자 있을 때에도 우주의 통치자를 떠올려야 한다. 

그것에 실패했다면 필부로 남는 것이 낫다. 

 

 

[오늘의 기도]

모순조차도 허락하신 하나님, 

그 모순이라는 것도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한계에서 비롯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모순도 우주의 구성 원리이며 운영 원칙일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세상의 모순에 무기력하게 대응하기보다 주님의 섭리를 믿고 따르겠습니다. 

악과 선이 교차되어 무간도의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이 세상의 지도자들이 우주의 창조주되신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소아적 자아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자기부인의 덕목을 체득한 자들이 리더로 서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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