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요일

모리야 도모타카, <일을 잘 맡기는 기술>, 센시오

 

오늘의 문단

일을 맡길 때 빈번히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을 그대로 떠넘기는 것이다. 일을 맡기는 것과 그대로 떠넘기는 것은 전혀 다르다. 조직에 정말 필요한 일을 맡겼는지 리더가 아무렇게나 목적 없이 그대로 떠넘긴 것인지 팀원들은 이미 눈치채고 있다. 평소에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 임원이나 본사에서 보내 오는 이메일을 기계적으로 곧바 로 특정 팀원에게 전송한다.
•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메일을 전송하는 경우가 있다.

p. 179  

 

한참 교만이 하늘을 찌를 때는 ‘나는 괜찮은 리더’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교만의 기름이라는 것은 오래지 않아 증명되었다. 

나혼자 일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성과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이 또한 나의 착각이었다. 

팀을 구성하고, 팀원들이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실무에 발바닥이 뜨겁도록 뛰어다녔던 사람들은 막상 리더의 일을 하라고 하면 서툴기 그지 없다. 

“일을 잘 맡기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아내의 검색이 시작되었고, 이 책을 선물로 사 주었다. 

모리야 도모타카, 무의식적 편견 연구소의 대표이사란다. 

일을 맡길 때 자기도 모르게 팀원에 대한 무의식적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책 표지 아래에 문장이 뇌리에 박힌다. 

“실무를 꼭 쥐고 있는 플레이어형 리더가 조직에서는 가장 쓸모없다.”

만약 정말로 이 말이 진짜라면, 나는 그렇게 좋은 리더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개발 서적, 경영 서적이 대체로 그렇지만, 글자가 크고 여백이 많고 글이 간결하다. 

철학자의 책과는 다르다. 

많은 것을 설명하기보다 요점만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래도 실례가 많은 편이라 읽는 내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팀원들의 성장을 돕는, 일을 잘 맡기는 리더가 되고 싶다. 

2024년 5월 28일 화요일

김근주, <생각을 깨우는 히브리어 365>

 

오늘의 문단

 

히슈타하바

그러나 나는 주님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님의 집으로 나아갑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성전 바라보며, 주님께 꿇어 엎드립니다._ 시 5:7

히슈타하바는 '엎드리다' 혹은 '엎드려 절하다'를 의미한다. 왕이나 윗 사람, 혹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표현할 때 그 사람 앞에서 엎드리면서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높인다(예를 들어 삼상 24:9).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났을 때 그의 형들은 그에게 엎드려 절했다(창 42:6, 43:28).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 에게 몸을 굽히게 될 것이고, 그를 멸시하던 자들이 모두 그 발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다(사 60:14). 하나님께서 행하실 때 이와 같은 전세의 역전이 벌어져, 다른 이를 업신여기며 짓밟던 강자들이 도리어 땅에 엎드려 그들이 무시하던 이들에게 절하게 될 것이다. 히슈타하바가 쓰인 많은 용례는 '하나님'과 연관된 것들이다. 엎드리는 대상이 주 하나님 일 때, 이 동사는 '엎드려 절하다'에서 '경배하다' 혹은 '예배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창 24:26, 출 34:8, 대하 7:3, 느 8:6, 시 29:2). 원래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절했겠지만(예를 들어 시 95:6), 아예 '경배/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엎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비하하고 천시 여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나 자랑,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할 수 있고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아올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경배'는 하나님 한 분이 우리의 능력이요, 권세이심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P. 140

 

 

이 책에서 이 단어를 고른 이유는 내 이름과 유사해서다. 

히슈타하바, 이 단어 외에는 내 이름과 비슷한 다른 단어가 없었다. 

혁수 타봐!! 이렇게 읽히는 단어. 

그런데 알고 보니, 꿇어 엎드린다는 뜻이란다. 

성경에 용례를 살피니, 때로는 강자가 약자에게 꿇어 엎드리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한다. 

가장 많은 용례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온전해 진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하나님을 높일 때 인간성의 회복이 시작된다. 

욕망과 자아 확장을 선으로 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주의 절대자 앞에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분께 나 자신을 낮추고 그분을 높이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주기적으로 하는 행위, 이것이 히슈타하바이다. 

이런 참된 인간의 회복과 사회 회복의 기차에 타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다. 

혁수야 타봐!! 

2024년 5월 27일 월요일

딘 플레밍, <요한계시록, 오늘을 위한 미래>

http://www.ivp.co.kr/books/book_detail.html?book=s01&idx=1718

 

요한계시록, 오늘을 위한 미래

창조 세계를 완성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절정

www.ivp.co.kr

 

오늘의 문단

 

“이 책에서 보여 주려는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대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죽임당한 어린양의 선교 (mission, 사명)를 통해 사람을 포함한 전체 창조 세계를 구속하고 회복한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계시한다. 동시에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빚어내고 준비시켜 그들의 입술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다가올 새 창조 세계를 지금 미리 맛보게 하는 존재로 살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참여하게 하고자 한다” p.22

 

 

서론에서 책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은 언제나 도움이 된다. 

딘 플레밍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큰 그림 혹은 렌즈를 통해 요한계시록을 읽는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시나리오나 그림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란다. 

대신 죽임당한 어린양의 선교를 통해 사람과 창조 세계 전체를 구속하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한다. 

저자는 예수님이라는 단어보다 죽임당한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예수님을 표현하는 그림언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묵묵히 죽임당한 분으로 그려진다. 

승리자 그리스도 이전에 죽임당한 어린양이 우선적으로 나타난다.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고 죽임당한 그분의 피가, 그분의 순종이, 그분의 신실하심이 결국 인류과 창조 세계를 구원하고 회복한다. 

십자가 없이 회복은 없다. 

자기 희생이 회복을 낳는다. 

회복의 시작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였지만, 그 화룡점정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으며, 그 뒤로 온 우주의 새로운 빛이 찾아 들었다. 

하나님의 계획이 드디어 성취되었다. 

요한은 십자가를 직접 보았으며 예수님의 피흘림을 가장 가까이 본 사람 중에 하나다. 

그의 환상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과 오버랩된다. 

승리는 십자가에서 이뤄진 것이다. 

플레밍은 신학적 역사적 사건이 요한 계시록의 중심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히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적용되길 바라는 책이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요한의 환상과 계시와 그림을 통해 빚어지고 준비된다. 

현실 공동체가 계시에 의해 구성되고 훈련되고 구비된다. 

입술과 삶, 증언과 실천을 통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고 즐기고 맛본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경험된다. 

설교만이 아니라 구제와 선교를 통해 체험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이 땅에서 실현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이 현실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어린양의 선교의 동참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삼위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더욱 활기차게 추진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박쥐보다 관료들을 더 싫어한다. 나는 경영의 시대이자 ‘행정’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제 가장 큰 악은 디킨즈가 즐겨 그렸듯이 지저분한 “범죄의 소굴”에서 행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제수용소나 노동수용소에서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장소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악의 최종적인 결과이다. 가장 큰 악은 카펫이 깔려 있으며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따뜻하고 깔끔한 사무실에서, 흰 셔츠를 차려 입고 손톱과 수염을 말쑥하게 깎은,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는 점잖은 사람들이 고안하고 명령(제안하고 제청받고 통과시키고 의사록에 기록)하는 것이다. - C. 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부록 ‘1961년판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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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리미티드 에디션)

경험 많고 노회한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자신의 조카이자 풋내기 악마인 웜우드에게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에 대해 충고하는 서른한 통의 편지이다.

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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