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0일 월요일

크리스토퍼 맥두걸, <본투런>

 

오늘의 문단

타라우마라 족의 땅에는 범죄도 전쟁도 도둑도 없다고 한다. 부패, 비만, 약물 중독, 탐욕, 가정 폭력, 아동 학대, 심장병, 고혈압, 매연도 없다. 이들은 당뇨병이나 우울증에 걸리지 않으며 심지어 늙지도 않는다. 오십 대도 십 대보다 빨리 뛸 수 있고 여든 살 노인이 산중턱에서 마라톤 거리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암 발생 사례는 거의 찾을 수 없다. (…) 타라우마라 족은 지구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행복한 종족일 뿐만 아니라 가장 강인한 종족이다. p. 24-5  

 

 

 

달리기의 기쁨을 그간 모르지 않았다. 

초원만 보면 달리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었다. 

푸른 잔디, 그것이 천연이든 인조이든, 넓고 푸른 곳은 달리라고 조성된 곳이다. 

내 심장은 달리기의 기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 초 42.195 풀코스를 뛰고 나니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질주본능은 속도에 대한 집착이라면, 지금의 달리기는 영성 훈련의 장이다. 

 

지인의 책장에 꽃혀 있던 본투런은 항상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표지도 예쁘지만, 제목이 가슴을 뛰게 한다. 

뛰는 존재로 태어난 인간. 

뛰기 위해 태어난 인간. 

달리는 것은 인간의 본질의 영역에 속한다고 강변한다. 

점점 그 말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부상당하지 않고 점점 더 멀리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뛸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는 기쁨이 있다. 

달리면서 몸의 여러 기능들을 살피며 집중한다. 

호흡, 몸의 각도, 다리의 각도, 착지 순간의 발의 모습, 케이던스, 심박… 

리듬을 유지하며 몸의 각 부위의 연결성을 살핀다. 

그렇게 뛰는 존재로 거듭난다. 

예전엔 기도하면 뛰었는데, 지금은 달리기 자체가 기도가 된다. 

몸을 단련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 끊임없는 나와의 싸움, 목표를 향한 지속적인 추구,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는 순간들… 

달리기가 기도가 되어 다시 내게 돌아온다. 

 

오늘도 10km 존2 달리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속도가 제어가 되지 않았다. 

천천히 달리기로 맘을 먹었지만, 어느 순간 스피드를 제어하지 못했다. 

실패. 

그래도 괜찮다. 

내일이 있다. 

2024년 6월 6일 목요일

켄트 아일러스, <슬기로운 신학독서>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놀라운 반전을 발견한다. 여느 연구 분야와 달리 신학의 객체가 신학을 연구하는 주체와 자리를 바꾸고 역할을 바꾸어 연구자 자신이 연구되고 드러나고 미완으로 있고 새로워진다. 하나님이 신학의 객체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거리에서 신학을 연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가 없다. p. 55

 

 

켄트 아일러스는 신학공부에 새로운 도전을 준다. 

정박되어 있었던 ‘진리에 대한 추구’라는 배를 다시 항해하게 한다. 

철학 공부하면서 ‘진리추구호’는 곳곳을 여행했다. 

어디선가 표류하기도 했다. 

정박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삶이 고단해서 항구에 닻을 내리고 그 지역을 탐사했다. 

탐사 자체는 제법 성공적이어서 삶의 근간을 세우고 신앙의 뼈대를 찾았다. 

 

허나 하나님이 어찌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에 갇히신단 말인가! 

그분은 가깝지만 여전히 멀리 계신 분이며, 알 듯 하지만 또 모르는 분이시다. 

그분을 알아가는 것에는 끝이 없고, 그분을 배우고 연구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미완의 대작과 같다. 

그러니 진리추구호를 다시 띄운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 그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역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신학은 진리추구호의 연료요 엔진이요 방향타다. 

내가 연구하지만, 결국 내가 연구 당한다. 

하나님은 신학의 대상이지만 또한 신학의 주체다. 

내가 그분을 연구하면서 그분이 나를 드러내심을 발견하고 내가 변화됨을 경험한다. 

신학은 지식이 아니라 그래서 기도다. 

켄트 아일러스는 기도로서의 신학을 책 곳곳에 심어 놨다. 

신학책을 읽으면서 각 장의 기도문을 꼼꼼하게 읽은 적이 별로 없는데, 이 책은 그냥 넘어가지 않게 그 페이지에 머물도록 독자를 붙잡는다. 

신학 독서는 하나님과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활동이다. 

2024년 5월 29일 수요일

모리야 도모타카, <일을 잘 맡기는 기술>, 센시오

 

오늘의 문단

일을 맡길 때 빈번히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을 그대로 떠넘기는 것이다. 일을 맡기는 것과 그대로 떠넘기는 것은 전혀 다르다. 조직에 정말 필요한 일을 맡겼는지 리더가 아무렇게나 목적 없이 그대로 떠넘긴 것인지 팀원들은 이미 눈치채고 있다. 평소에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 임원이나 본사에서 보내 오는 이메일을 기계적으로 곧바 로 특정 팀원에게 전송한다.
•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메일을 전송하는 경우가 있다.

p. 179  

 

한참 교만이 하늘을 찌를 때는 ‘나는 괜찮은 리더’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교만의 기름이라는 것은 오래지 않아 증명되었다. 

나혼자 일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성과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이 또한 나의 착각이었다. 

팀을 구성하고, 팀원들이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실무에 발바닥이 뜨겁도록 뛰어다녔던 사람들은 막상 리더의 일을 하라고 하면 서툴기 그지 없다. 

“일을 잘 맡기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아내의 검색이 시작되었고, 이 책을 선물로 사 주었다. 

모리야 도모타카, 무의식적 편견 연구소의 대표이사란다. 

일을 맡길 때 자기도 모르게 팀원에 대한 무의식적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책 표지 아래에 문장이 뇌리에 박힌다. 

“실무를 꼭 쥐고 있는 플레이어형 리더가 조직에서는 가장 쓸모없다.”

만약 정말로 이 말이 진짜라면, 나는 그렇게 좋은 리더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개발 서적, 경영 서적이 대체로 그렇지만, 글자가 크고 여백이 많고 글이 간결하다. 

철학자의 책과는 다르다. 

많은 것을 설명하기보다 요점만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래도 실례가 많은 편이라 읽는 내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팀원들의 성장을 돕는, 일을 잘 맡기는 리더가 되고 싶다. 

2024년 5월 28일 화요일

김근주, <생각을 깨우는 히브리어 365>

 

오늘의 문단

 

히슈타하바

그러나 나는 주님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님의 집으로 나아갑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성전 바라보며, 주님께 꿇어 엎드립니다._ 시 5:7

히슈타하바는 '엎드리다' 혹은 '엎드려 절하다'를 의미한다. 왕이나 윗 사람, 혹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표현할 때 그 사람 앞에서 엎드리면서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높인다(예를 들어 삼상 24:9).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났을 때 그의 형들은 그에게 엎드려 절했다(창 42:6, 43:28).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 에게 몸을 굽히게 될 것이고, 그를 멸시하던 자들이 모두 그 발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다(사 60:14). 하나님께서 행하실 때 이와 같은 전세의 역전이 벌어져, 다른 이를 업신여기며 짓밟던 강자들이 도리어 땅에 엎드려 그들이 무시하던 이들에게 절하게 될 것이다. 히슈타하바가 쓰인 많은 용례는 '하나님'과 연관된 것들이다. 엎드리는 대상이 주 하나님 일 때, 이 동사는 '엎드려 절하다'에서 '경배하다' 혹은 '예배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창 24:26, 출 34:8, 대하 7:3, 느 8:6, 시 29:2). 원래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절했겠지만(예를 들어 시 95:6), 아예 '경배/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엎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비하하고 천시 여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나 자랑,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할 수 있고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아올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경배'는 하나님 한 분이 우리의 능력이요, 권세이심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P. 140

 

 

이 책에서 이 단어를 고른 이유는 내 이름과 유사해서다. 

히슈타하바, 이 단어 외에는 내 이름과 비슷한 다른 단어가 없었다. 

혁수 타봐!! 이렇게 읽히는 단어. 

그런데 알고 보니, 꿇어 엎드린다는 뜻이란다. 

성경에 용례를 살피니, 때로는 강자가 약자에게 꿇어 엎드리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한다. 

가장 많은 용례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온전해 진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하나님을 높일 때 인간성의 회복이 시작된다. 

욕망과 자아 확장을 선으로 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주의 절대자 앞에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분께 나 자신을 낮추고 그분을 높이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주기적으로 하는 행위, 이것이 히슈타하바이다. 

이런 참된 인간의 회복과 사회 회복의 기차에 타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다. 

혁수야 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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