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1979
웃음이면 좋았다.
웃음이 그나마 현실의 고통을 이기게 만드는 범부의 진통제다.
그러나 웃음뒤에 감춰진 현실은 언제나 고달프다.
슬픔을 직면하고 슬픔에 눈물 흘리리라.
이기주의에 놀아나지 않고 아픈 곳에 눈길을 둔다.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보고 또 본다.
시큰 거리는 눈 때문에 눈을 감는다면,
눈꺼플 안쪽을 스크린 삼아 슬픔을 띄어본다.
함박눈을 따뜻한 햇살과 바꾼다.
봄이 오는 길을 막는 봄눈을 싸리비로 쓸어버린다.
아무리 쓸어도 곧 수북히 쌓인다.
그 슬픔에 다시 눈을 감고 한숨을 짓다.
웃음 뒤에는 그렇게 숱한 이야기가 있다.
생각하는 눈빛을 고뇌하는 미간을 그래서 경멸하지 마라.
'이달의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제이 굽타/ 신약 단어 수업 (2) | 2024.10.29 |
---|---|
정여립의 대동사상 (2) | 2024.10.18 |
실비아 키이즈마트, 브라이언 왈쉬, <로마서를 무장해제하다>, 새물결플러스 (1) | 2024.06.13 |
크리스토퍼 맥두걸, <본투런> (1) | 2024.06.11 |
켄트 아일러스, <슬기로운 신학독서>, IVP (1) | 2024.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