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07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1 하나님, 나를 변호하여 주십시오. 비정한 무리를 고발하는 송사를 변호하여 주십시오. 거짓을 일삼는 악한 사람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2 나의 요새이신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는 원수에게 짓눌려 슬픔 잠겨 있어야만 합니까?

3 주님의 빛과 주님의 진리를 나에게 보내 주시어, 나의 길잡이가 되게 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 주님이 계시는 장막으로, 나를 데려가게 해주십시오.

4 하나님, 때에, 나는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렵니다. 나를 크게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렵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내가 기뻐하면서, 수금가락에 맞추어 주님께 감사하렵니다.

5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시인은 악한 사람들로 인해 비통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원수에게 짓눌린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오셔서 자신을 구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1-2절).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그 거룩한 산에서 주님께 기쁨의 제사를 드리려 합니다(3-4절).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겠다고 영혼의 다짐을 합니다(5절).

 

시인은 비정한 무리와 악한 자들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을 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자신의 요새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빛과 진리가 여전히 나의 길잡이가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슬픔이 변하여 기쁨 되게 하실 그 예배를 사모합니다. 오늘 내가 서 있게 될 세상의 한복판에서 주님을 고백하며, 기쁨의 찬양과 예배를 드립시다.

 

——

예배 인도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예배 인도자는 사람의 상황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예배 인도자는 하나님과 사람의 가교역할을 한다. 

 

시인은 고통과 슬픔 속에 있다. 

주변의 사람들과 어쩔 없이 고소, 고발 사건이 발생했다. 

거짓으로 시인을 옥죄고 있다. 

소위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비정하고 무정한 가짜 뉴스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음해 공작이 거듭되면, 당사자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 

조국 가족에 대한 대한민국 언론의 무자비한 공격이 비근한 예다. 

설혹 그의 가족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과 검찰이 무리하게 수사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가짜 뉴스가 많은 시대에 자신 아니라 자신의 가족 모두에게 비난과 음해와 거짓으로 공격을 받으면 정말 가슴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일 것이다. 

이것이 인간사에 계속 일어나는 일이다. 

언제든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비난과 공격을 받을 있다. 

억울하게 옥살이 경우도 적지 않다.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매어 죽음으로 몰아간 경우가 어디 번인가? 

연좌제로 묶어서 가족들까지 숨어 지내는 경우가 없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다. 

화병이 생기지 않을 없다. 

시인의 상황은 인류 보편의 상황이며, 그러기에 사람들은 시인으로 통해 하나님께 자신들의 감정을 이야기할 있다. 기도의 언어를 발견한다. 기도할 있는 용기를 얻는다. 

 

최근에 성경을 읽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예수님도 성경을 읽으셨을 것이며, 성경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성경을 읽으신 방식, 해석하신 방법, 판단하신 내용, 적용하신 결과물들을 철저히 연구하면서, 예수님의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 1차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관점을 통해 다시 구약과 신약의 사도행전, 서신서 계시록을 살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적, 그리고 그분에 대한 묘사들을 종합적으로 살펴서 그분의 홀로그램을 완성한다. 

그리고 홀로그램의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 성격들을 읽으시는지 관찰한다. 

그렇게 예수님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연습을 하는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구약 다윗의 이야기를 읽을 , 예수님이 다윗과 주변 인물들을 어떻게 평가하셨을지 상상하면서 성경을 읽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읽어가면, 다윗의 죄와, 아들 암논, 압살롬의 죄에 대해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 있고, 나름의 기준이 생기는 것을 경험한다. 

예수님은 예수님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전통적인 읽기에 갇히지 않으셨다. 그분의 해석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해석학이 그분의 실천을 낳았다. 전통적인 읽기와 해석을 뛰어넘어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셨다. 기준으로 구약의 여러 사건들을 분석하는 , 이것이 예수 홀로그램 성경 읽기법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예수님의 말씀, 행적, 가르침과 실제 적용, 주변 인물들의 예수님에 대한 묘사와 평가를 다방면으로 모아서 조각들이 그분의 홀로그램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예수님이라면 오늘의 구약 본문을 어떻게 읽으셨을까를 계속 되물어 보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이를 통해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읽기도 가능해진다. 

 

예수님은 시편 43편을 어떻게 읽으셨을까?

당연히 자신을 음해하는 기득권들에 대항하여 시를 음미하셨을 것이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으며, 

때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지로 헤쳐나오셨다. 

하지만, 그분의 정서는 오늘 시인의 정서와 유사했을 것이다. 

거짓으로 음해하니, 고통이 계속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고통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예수님도 고통을 느끼시고 때로는 눈물도 흘리신 분이시다. 

고통을 표현하실 있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분은 시편 43편을 통해 자신이 당한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드리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시인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다. 

 

4 하나님, 그 때에, 나는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렵니다. 나를 크게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렵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내가 기뻐하면서, 수금가락에 맞추어 주님께 감사하렵니다.
5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이것이 예수님의 멘탈이었다. 

슬프고 괴롭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신뢰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예배인도자는 이런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개인적 상황이 막막할 있다. 

사회적 상황이 너무 슬플 있다. 

그런 개인과 사회적 상황을 노래로 기도로 주님께 아뢸 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 

그렇게 사람의 상황을 아뢰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예배 인도자의 역할이다. 

다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면서 노래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그분의 역사에 대한 희망을 노래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예배인도자의 숙명이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찬양은 슬퍼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현재 세계 곳곳에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 우리는 평생 슬픈 찬양만 해야 하는 것인가? 

인류의 고통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 슬픔이 현존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할 있는가? 

예배 인도자는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사람의 상황과 하나님의 성품을 동시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찬양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의 도움을 구한다. 

 

——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자기 연민에만 빠져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머물지 않게 해주세요. 

결국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쁨을 주시는 주님께 찬양으로 반응하게 하소서. 

예수님이 읽으셨던 성경, 예수님처럼 해석하는 방법을 많이 발견하게 하소서. 

예수님이라는 안경을 착용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홀로그램이 앞에 드러나게 하소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했을지 항상 생각하게 하소서. 

그렇게 예수님이 더욱 풍성하게 제게 드러나도록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5 31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마스길, 고라 자손의 노래]

1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2 영혼이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내가 언제 하나님께로 나아가 얼굴을 뵈올 있을까?

3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

4 기쁜 감사의 노래 소리와 축제의 함성과 함께 내가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면서 장막으로 들어가곤 했던 일들을 지금 내가 기억하고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5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6 영혼이 너무 낙심하였지만,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님만을 그래도 생각할 뿐입니다.

7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폭포 소리를 따라 깊음은 깊음을 부르며,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파도의 물결은 모두가 덩이 되어 몸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8 낮에는 주님께서 사랑을 베푸시고, 밤에는 찬송으로 나를 채우시니, 나는 다만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9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호소한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몸이 원수에게 짓눌려 슬픈 나날을 보내야만 합니까?"

10 원수들이 날마다 나를 보고 "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빈정대니, 조롱 소리 나의 뼈를 부수는구나.

11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아 헤매듯, 시인은 주님을 목말라 합니다. 물이 없어 고통 받는 사슴처럼 시인은 주님이 없어 울부짖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에 눈물은 더 깊어집니다. 과거 좋았던 시절,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장소로 들어가던 기억을 소환하니 가슴이 더 미어집니다(1-4절). 요단강 북부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길 사모하며 주님을 생각합니다(6-10절).

 

시인은 자신의 영혼에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낙심과 괴로움에 빠져있지 말고 다시 주님을 찬양하자고 다짐합니다(5, 11절). 날로 커지는 세상의 조롱과 우리를 낙심하게 만드는 상황들, 우리도 내 영혼을 향해 외칩시다. 하나님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내 영혼아 하나님을 더 갈망하고 더 간절히 주님을 기다려라! 나는 오늘도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련다!

 

 

——

 

어릴적 노래 

 

시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로 정말 많이 불렀던 시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영혼이 주를 갈망합니다이렇게 시작하는 하는 찬양은 유년 시절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달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했던 노래였다. 

생각해보면, 오랫동안 나의 가지 갈망과 열망은 주님을 깊이 알아가고 깊이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충분히 종교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다른 것들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채우려고 , 안에서는 나도 모르게 죄책감과 거부감이 든다. 무엇하나 깊이 빠지고 싶지가 않았다. 오직 나의 마음의 중심은 오직 주님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붙들고 있다. 연애인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여타의 다른 것들을 좋아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마음을 순결한 신부처럼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미래의 목회자를 꿈꾸는 어린 소년이 가져야 당연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농구를 좋아했고, 친구들과 교회에서 찬양하는 것을 좋아했다.

소위 말하는 세상의 즐거움은 가능하면 멀리하고 거룩함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들만 산발적으로 좋아하려고 했다. 

너무 마음을 많이 빼앗기는 것을 약간 죄악시하면서 말이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덕후의 시대가 되었다. 덕질이 유행이었다.

무엇 가지 집중해서 놀라우리만큼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멋지게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 

덕질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시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마음의 기본 셋팅 안에 어느 정도 이상을 좋아하거나 깊이 매몰될 없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같다. 

신앙심이 깊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몰입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태도 때문이라고 해야하나 

모르겠다. 

 

공감

 

시인의 심성을 조금 닮았다고 느낀다.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갈망한다. 

그분의 임재와 강력하게 일하심을 갈망한다. 

게다가 최근에 교회가 조롱거리가 되어 여파로 하나님의 이름까지 먹칠 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마음이 찢어진다. 

정말 괴롭다. 

시인이 썼던 단어들이 있다. 

비웃다. 빈정댄다. 조롱한다. 

단언들은 지금 시대, 인터넷 상에 얼마나 그야말로창궐하고 있는가.

시인이 느끼는 낙심, 실망, 괴로움, 고통, 눈물, 뼈를 때리는 고통 

나도 그렇다. 

내가 가장 아끼는 , 내가 가장 사랑하는 , 내가 평생에 걸쳐 찬양하고 높여왔던  

그분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다름 아니라 바로 교인들의 죄와 실수와 욕심과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말이다. 

어렸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학교에서 교회다니는 때문에, 주일 시험보는 외고 입시 시험을 포기한 적이 있다. 

시험보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시험이 하필 주일이었다.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시험을 보러가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의 표정이나 말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왠지 내가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이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이 난다. 

하지만, 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때는 나름대로 정한_물론 교회 목사님의 영향이 지대했지만_신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이상하다는 세상의 평가를 견뎌야 했던 것이었던 반면, 지금은 교회와 기독인들의 잘못 때문에 주어지는 조롱과 질타를 견뎌야 하는 것이다. 

때의 나의 원칙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만드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교회가 보여주었던 행동과 선택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이었다. 

그게 다른 점이다. 

하지만, 결국 욕을 얻게 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을 표현했던 그분이 욕을 먹는다. 

괴롭다. 슬프다. 

묵상을 위해 틀어 놓은 배경음악의 찬양 소리도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신앙을 지키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점점 떨어져 나간다. 부끄러운 기독교는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규모가 커서, 돈이 많아서, 이러저러한 사업들을 잘해서 자랑스러운 교회를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 

진실하기에, 사랑하기에, 이타적이기에, 조금 손해보더라도 사람들을 위해 살아하기에 자랑스러운 교회를 만들고 싶었다. 

목사로서, 오랫동안 찬양을 드려온 사람으로서 이런 꿈이 있었다. 

점점 꿈이 멀어져 가는 같아 슬프다.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지금의 교회 현실이 아프다. 

 

 

그래도

시인은 낙심한 가운데도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있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마치 후렴을 반복하며 부르듯, 자신의 영혼을 진단하며, 그럼에도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기를 스스로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다시 찬양하겠다고 다짐한다.      

태도 때문에 내가 여전히 목사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멈추지 않고 찬양을 부르고 싶다.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는 힘차게 그분을 찬양하고 싶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있는 최선으로 그분을 찬양하고 싶다. 

마음을 오늘도 깊이 인식하고 싶다. 그렇게 마음을 증폭시키고 싶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찬양하며 그분을 높이고 싶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나의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뿐이시다. 

사람은 찬양을 받을 대상이 아니다. 사람은 격려와 칭찬과 사랑을 받을 대상이다. 

그러나 나의 찬양은 오직 그분께만 향한다. 

 

——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주님을 높이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간다고 해도 

주님을 찬양하는 일을 쉬지 않겠습니다. 

마음을 들여 주님을 높이겠습니다. 

마음을 모아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오늘 하루의 고백이 계속 이어지게 하소서. 

 

월요일의 피곤이 주님 안에서 풀어지게 하소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육체와 영혼이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5 24 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의 ]

 

1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재난이 닥칠 때에 주님께서 그를 구해 주신다.

2 주님께서 그를 지키시며 살게 하신다. 그는 세상에서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원수의 뜻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3 주님께서는,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돌보시며 어떤 병이든 떨치고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4 내가 드릴 말씀은 이것입니다. "주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를 고쳐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5 나의 원수들은 나쁜 말을 지어서 " 자가 언제 죽어서, 후손이 끊어질까?" 하고 나에게 말합니다.

6 나를 만나러 와서는 말이나 늘어놓고, 음해할 말을 모아 두었다가, 거리로 나가면 떠들어댑니다.

7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모두 나를 두고 험담을 꾸미고, 나를 해칠 궁리를 하면서

8 "몹쓸 병마가 그를 사로잡았구나. 그가 병들어 누웠으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하고 수군댑니다.

9 내가 믿는 나의 소꿉동무, 나와 상에서 밥을 먹던 친구조차도, 내게 발길질을 하려고 뒤꿈치를 들었습니다.

10 그러나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도 그들에게 되갚을 있도록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십시오.

11 원수들이 앞에서 환호를 외치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로써,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나는 알게 것입니다.

12 주님께서 나를 온전하게 지켜주시고 나를 주님 앞에 길이 세워 주십시오.

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주님, 찬양을 받으십시오.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을 받으십시오. 아멘, 아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가 재난을 당하면 주님이 구해 주시고, 아프면 주님이 낫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의 신앙고백입니다(1-3). 그러나 믿음과 현실 사이는 괴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도 돌아오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시인과 우리가 모두 겪는 현실입니다(4-9).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돌보며 것인가, 아무 소용없어 보이는 현실에 분노하며 나만을 위해 것인가의 기로에 섭니다.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10-13). 이웃을 돌보는 삶의 지속성은 사람이 아닌 주님을 바라볼 유지됩니다.

 

——

 

요즘 시편이 좋다. 

다른 성경을 읽으면 왠지 내가 무엇인가 고쳐야 같고, 새롭게 바꾸어야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런데 시편을 읽으면그래도 주님은 내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든지 말을 있고, 언제든지 감정을 토로할 있는 분으로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마음 속에 그리게 된다. 그래서 힘이 되고 감사가 생긴다. 

 

1-3절은 일반적인 진술이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에게 복을 내려주신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며, 원수로부터 구출해 주신다. 

오랜 경험과 성경의 기록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지식이 여기에 묻어난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며, 약자들의 하나님이시다. 

약자를 돌보는 자를 지키시며, 그런 리더들을 세우신다. 

다윗은 이런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그동안 살아왔다.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는 이런 지식과 믿음의 실천이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다가 독특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다윗은 거기에서 떠나, 아둘람 굴 속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자 형들과 온 집안이 그 소식을 듣고, 그 곳으로 내려가, 그에게 이르렀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모두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사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삼상 22:1-2)

 

자신도 피해다니는 위치였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다윗의 믿음이 드러난 실천이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일반적 진술이 있고 나자마자 다윗은 자신의 상황을 아뢰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호소였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는 자신 스스로가 죄인임을 밝혔다(4).

그런데 지점이 이해가 안된다. 

4 이후로는 자신을 음해하고 모함하는 원수들을 물리쳐달라는 간구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에 대한 간단한 고백 이후에는 주로 자신의 원수들에 대한 기도가 이어진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죄의 리스트를 아뢰고, 충분히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뒤에,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상식일 같은데, 다윗은 상식적인 기도의 틀을 깨고 있다. 

자신의 잘못보다 원수들, 특히 자신과 아주 친한데, 뒤돌아서는 모함하고 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담겨 있다. 

 

6절과 9절을 보니 다윗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6 나를 만나러 와서는 빈 말이나 늘어놓고, 음해할 말을 모아 두었다가, 거리로 나가면 곧 떠들어댑니다.
9 내가 믿는 나의 소꿉동무, 나와 한 상에서 밥을 먹던 친구조차도, 내게 발길질을 하려고 뒤꿈치를 들었습니다.

 

다윗은 심한 정신적 충격에 빠져있다. 

그의 친구들이, 믿었던 어릴 친구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있다. 

겉으로는 알랑방구(?) 뀌지만, 뒤돌아서는 모반을 계획하고 있다. 

외롭고 괴롭다. 

의지할 곳이 없다. 

오직 하나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신이 죄인이지만, 지금은 자신의 죄를 길게 읊을 자신이 없다. 

주님의 도움이 간절하다. 

그동안 자신이 왔던 의로운 행동,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일들을 기억하시고 자신에게 복을 내려주시길 간청하는 것이다. 

비록 죄인이긴 하나, 지금은 주님의 도움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편의 매력이다. 

형식보다는 시인의 감정에 충실하다. 

해야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공간이 시편이다. 

자신의 죄를 아뢰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언젠가는 해야 일이겠으나, 지금 시인은 숨이 막히고 목이 타고 가슴이 답답하다. 

자신을 둘러싼 원수, 배신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누가 자신을 보호할 있을까? 

배신을 당한 사람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의심스럽게 된다. 

믿을 수가 없다. 

다윗은 지금 공황장애의 고통을 겪고 있는 보인다. 

이대로라면 왕국을 통치할 없다. 

배신자들을 처리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을 유배보내거나 죽이거나 하면 왕국은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원수들이 다윗 앞에서 환호성을 지르지 못하도록 막아달라고 호소한다. 

 

시편이 좋다. 

맘껏 그분께 나의 감정을 말해도 되니 그렇다. 

굳이 논리적으로 고백하지 않아도 되니 그렇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주세요. 

아벱, 교회, 가정 모든 것이 사역의 연속입니다. 

어디 편히 곳이 없습니다. 

사건의 연속이며, 신경쓸 것의 연속입니다. 

고민은 깊어가고, 실천은 늦장이니, 마음만 쪼그라듭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느라 항상 마음이 피곤합니다. 

욕들어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언제나 곤고합니다. 

주님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은혜를 더욱 많이 누리게 하옵소서. 

주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명확한 사실을 더욱더 깊이 깨달아 알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5 17 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의 ]

1 내가 간절히 주님을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나를 굽어보시고, 나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셨네.

2 주님께서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진흙탕에서 나를 건져 주셨네.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해주시고 걸음을 안전하게 해주셨네.

3 주님께서 나의 입에 노래를, 우리 하나님께 드릴 찬송을 담아 주셨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네.

4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복되어라.

5 ,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많이 하시며, 우리 위한 계획을 많이도 세우셨으니, 아무도 주님 앞에 이것들을 열거할 없습니다. 내가 널리 알리고 전파하려 해도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6 주님께서는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사나 예물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번제나 속죄제도 원하지 않습니다.

7 때에 나는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에 따라 내가 지금 왔습니다.

8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9 나는 많은 회중 앞에서,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아시듯이, 내가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10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의를 나의 가슴 속에 묻어 두지 않았고, 주님의 성실하심과 구원을 말합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미쁘심을 많은 회중 앞에서 감추지 않을 것입니다.

11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과 미쁘심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십시오.

12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재앙이 나를 에워쌌고, 나의 죄가 나의 덜미를 잡았습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나의 죄가 머리털보다도 많기에, 나는 희망을 잃었습니다.

13 주님, 너그럽게 보시고 나를 건져 주십시오. 주님,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4 나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자들이 모두 부끄러워하게 하시고, 수치를 당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재난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이, 모두 뒤로 물러나서, 수모를 당하게 해주십시오.

15 깔깔대며 나를 조소하는 자들이, 오히려 자기들이 받는 수치 때문에, 놀라게 해주십시오.

16 그러나 주님을 찾는 모든 사람은,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입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은 쉬지 않고 이르기를 "주님은 위대하시다" 것입니다.

17 나는 불쌍하고 가난하지만, 주님, 나를 생각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요, 나를 건져 주는 분이시니, 나의 하나님, 지체하지 말아 주십시오.

 

시인은 주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지나온 시간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해주셨고,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1-5절).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예물보다 그분의 뜻을 행하는 우리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 그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려 합니다(6-10절).

 

다윗은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앞으로의 인생길 속에서도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내 앞에 있고, 나의 죄는 여전하기에 우리에겐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시고, 건져 주셔야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간절히 주님을 기다립니다.

 

——

 

월요일 아침은 항상 피곤하다. 

요사이 심해진다. 

주를 시작하기가 점점 힘들다. 

의욕을 느끼기가 어렵다.

단순히 몸이 피곤해서가 아님을 안다. 그렇게 몸이 피곤하게끔 금토일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끊어지지 않는 일정과 생각들이 스트레스 수치를 높이고 해소되지 않은 스트레스가 해야할 일들을 미루게 한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쳐간다. 그리고 다시 월요일이 된다.

안따깝게도나의 죄가 나의 덜미를 잡았습니다”(12) 고백이 나의 고백이다.  

규정하기도 싫고 떠올리기 싫은 나의 마음의 , 하나님보다 마음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생각과 정보들, 그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몸도 관리하고 싶고, 남는 시간도 관리하고 싶고, 재정도, 꿈도, 관계도 잘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몸도 따라주고, 마음도 따라준다.

 

낙오

최근 유행하고 있는 강철부대에 보면 낙오의 순간을 경험하는 SSU, SDT대원들의 모습들이 나온다. 

시청할 때는 나의 군생활의 인내의 순간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마치 현재 나의 모습이 낙오의 순간같이 느껴진다.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헐떡고개의 군인 같은 모습.

포기하지 말자, 중단하지 말자, 마음 속으로 다짐해 본다. 

 

12 나의 죄가 내 머리털보다도 더 많기에,
나는 희망을 잃었습니다.

 

냉철하게 사고하면, 과연 죄가 이렇게까지 많을까 싶다.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과장을 써서라도 시인은 자신의 죄를 부각한다. 

인간의 감정은 냉철한 사고로 쉽게 제어되지 않는다. 

감정은 극댄적인 때가 종종 있다. 

현재 처해진 상황에 따라 감정은 요동친다. 

시편은 시인의 감정이 요동치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허용한다. 

 

시인은 자신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영광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3 주님께서 나의 입에 새 노래를, 우리 하나님께 드릴 찬송을 담아 주셨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네.

 

자신이 시를 짓고, 찬송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따라부르게 한다. 

시인은 예술가이다. 

그의 창작물로 인해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고 신뢰하게 된다. 

귀한 일이다. 재능을 이렇게 있어서 감사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1 내가 간절히 주님을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나를 굽어보시고, 나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셨네. 2 주님께서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진흙탕에서 나를 건져 주셨네.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해주시고 내 걸음을 안전하게 해주셨네

 

구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가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부르도록 하는 것은 그가 경험한 은혜의 순간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그는 경험했다. 그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그는 만났다. 

그러니 싯구가 떠오르고 음율이 생각난 것이다. 

그에게 다가온 구원을 노래하니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온다. 하나님을 경외한다. 

결국 시인의 역할보다 하나님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월요일 아침, 안구에 힘이 들어오고 머리가 맑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이 더욱 높아지기를 기도한다. 

눈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머리는 멍하며, 잠에서 몸들의 모습은 흡사 구원을 갈망하는 패잔병을 닮았다. 

작은 마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 

 

 

16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은 쉬지 않고 이르기를 "주님은 위대하시다" 할 것입니다.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위대하십니다. 

나의 하나님, 삼위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구원하여 주옵소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자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의 구원을 바랍니다. 저는 실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다시 시작하게 주십니다. 

몸에 기운을 불어 넣어 주세요. 

스트레스 상황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해주세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수많은 필요와 요구들 앞에 머뭇거리거나 도망하지 않게 주세요. 

주님의 공생애와 같은 삶을 비슷한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위대하십니다. 

나의 하나님, 삼위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이렇게 시인이 하라는 대로 그분의 일상의 구원을 기다린다. 

나의 일상도 여전히 구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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